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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엘과 서주
1
여행을 좋아하는 바이엘은 이 세상 곳곳을 다니면서 어린이와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데 특히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음악성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한다. 독일에 살 때는 실내악과 피아노곡을 작곡한 적도 있지만 초보자를 위한 피아노 교본을 지어서 어린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피아노 교육을 했는데 이것은 음악이야말로 원대한 꿈으로 이어주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선지에 그려진 악보 옆에서 토막잠을 자고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 종일 소리 길을 따라 바쁘게 돌아다닌다. 홍길동은 둔갑법으로 조선 팔도에 나타났지만 바이엘은 그 차원이 다르다.
갖가지 악기는 물론이고 그릇과 가구, 집과 거리, 강산과 바다, 끝없는 하늘의 별들과 그 뒤에 펼쳐진 미지의 세계는 소리 길로 이어져 있는데 그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잠겨 있는 문을 음악이라는 열쇠로 열어야 한다. 피아노만 보더라도 두드리지 않을 때에는 그 하얀 건반이 무거운 정적으로 닫혀 있지만, 마치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처럼 건반을 두드려 악곡을 연주하면 이 세상에 가득 숨겨진 선율이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 사람들은 너무나 작은 그 선율 조각에서 샘솟아 흐르는 실개천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모래톱을 오르내리며 속삭이는 하얀 파도가 넓고 깊은 바다와 이어진 것과 같다. 그래서 바이엘은 길을 다니다가 세상의 온갖 소리에 호기심을 가진 아이들을 모아 놓고 친절하게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이엘은 주로 아이들을 많이 만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을 멀리하는 건 아니다. 그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기회를 주지 않을 뿐이다. 어렸을 때 바이엘 교본으로 피아노를 배운 이들에게는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먼저 다가간다. 바이엘의 마음속에는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의 구분이 없고, 단지 음악에 대한 관심만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인생의 단계별로 의미를 두기를 좋아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린이에 비해 월등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풍경화의 한 점 한 점으로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다.
섭섭한 경우도 있다. 어른 중에는-바이엘, 체르니를 거쳐서 점점 어려운 피아노 교본을 배우고 수준 높은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데- 바이엘의 음악성은 유치하다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바이엘은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피아노 소리의 중심에는 바이엘이 씨앗처럼 들어 있다고, 피아니스트가 어려서 피아노를 배울 때 그림책 모양의 어린이 바이엘을 펴 놓고 치던 그 소리가 지금의 소리를 만든 것이니 바로 피아노 소리의 핵심과 골격을 이루는 것은 바이엘이라고.
사실 이름난 연주가들은 피아노를 칠 때마다 바이엘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들은, 남들이 걷지 않는 고행길이 피곤하다고 느낄 때 고이 간직한 바이엘 교본을 꺼내어 이 곡 저 곡을 쳐 보면 바이엘에 실린 곡이 결코 쉬운 곡이 아니라는 것과 꿈이 가득한 한 음 한 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고 어려서 가졌던 신선한 꿈이 되살아나며 다시 몸이 회복된다고 말한다.
소리로 가득한 세상을 바이엘은 생각한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7음과 ‘도와 레’, ‘레와 미’, ‘파와 솔’, ‘솔과 라’, ‘라와 시’의 중간 음 5음, 도합 12음을 이 세상 소리의 대표음으로 정하고 그 소리가 눈에 보이도록 피아노 건반을 배열했는데 7음은 하얀 건반이고 5음은 검은 건반으로 나타내며 다음 옥타브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가장 낮은 12음의 진동수를 1이라고 하면 그 다음 옥타브의 12음의 진동수는 2, 그 다음은 4, 그 다음은 8로 비율이 2배수씩 늘어나며 건반이 배열되어 있으니 보통 가정용 피아노로는 대체로 8옥타브의 음정 폭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의 음계는 피아노 건반에서 끝나지 않고 소리 세상의 '피아노 별자리'-바이엘의 고향-로 이어진다. 건반을 두드리면 별나라에 사는 소리의 요정, 바이엘의 친구들이 음계를 오르내리며 춤을 추기도 하고, 손을 잡고 합창을 하면 여러 소리가 어울려 혼자서는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음을 빚어내곤 한다. 마치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초록이라는 새로운 빛깔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2
바이엘은 자주 만나는 어른이 있다. 그는 한국에 사는 노인-1803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바이엘이 보면 애지만-인데 나이를 잊어 버렸는지 흰 머리를 휘날리며 초등학교 아이들이 주로 가는 ‘시나브로’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의 학원 이름을 좋아한다고 바이엘에게 몇 번 말해서 바이엘도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나브로’란 말을 한번 쓰고 싶어서 한번은 노인에게, ‘자주 보니 시나브로 정이 드네.’라고 말하고는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서주가 그 대신 동문서답을 했지만 그의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이 들어 피아노를 배우니 아이들처럼 진도가 빨리 못 나가. 그래도 끈기 있게 연습하면 실력이 시나브로 늘겠지. ‘시나브로’는 피아노가 내게 하는 말 같지 않아, 바이엘?”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며 바이엘에게 정겨운 미소를 보냈다.
바이엘은 '시나브로'는 참 재미있는 한국말이라고 느끼며 문득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서주'라는 이름은 ‘시나브로’와 달리 한자로 지어진 것 같은데 그 뜻이 무엇일가 궁금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궁금한 게 있어. 한국 사람들은 주로 세 글자 한자로 이름을 짓고 뜻이 있다는데 서주는 무슨 뜻이야? 외자 이름인가, 성이 '서'고 이름이 '주'야?"
"외자 이름도 아네. 한자로 西서녘서 疇밭두둑주, 西疇는 내 호號야. '호'란 본명이나 자 이외에 쓰는 이름.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이름인데 파하 선생님이 지어 주셨지. 존경하는 분인데 그분이 나에게 호를 주시면서 '서주기'라는 글 한 편을 남겨 주셨어. 존경하는 문인이 나만을 위한 글을 친필로 써 주셨으니 이보다 영광스럽고 귀한 선물은 없을 거야."
서주는 읽어 보라며 바이엘에게 A4지 두 장을 주었다. 검정 수성 볼펜으로 내려 쓴 글인데 달필이었다.
서주기西疇記
내가 일이 있어 광주廣州 검단산黔丹山 기슭 동서同婿 池成海 집에 머물새, 하루는 함께 남한고성南漢古城을 둘러보고 오는 車 안에서 池君에게 이르되
“광주 유수廣州留守의 자리 빈 지 오래니 兄이 맡음이 어떠랴. 兄은 다행히도 선원璿源의 一人이라 그 무슨 不可함이 있으랴?”
내 크게 웃어 이르되
“留守가 될거나! 百年의 묵은 먼지를 털고 그 자리에 앉을거나! 옥사屋舍도 먼 옛일이라. 漢水로 씻어낼 恨도 남지 않은 오늘이매, 그대가 짐짓 나에게 이 영작榮爵을 양보함이로다.”
이윽고 내가 正色해 이르되
“내 그대에게 어울리는 가호嘉號를 증정코자 하노니 모르괘라 현제賢弟는 받으랴 안 받으랴.”
“낙諾다. 형이 주심을 어찌 안 받으랴”
“어떠뇨?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면 서주西疇라 하라”
池君이 옷깃을 여미고 묻되
“說이 있으면 원컨대 듣고자 하노라
이에 내가 이르되
“그대는 歸去來辭에
農人이 告余以春及하니 將有事於西疇로다 함을 듣지 못했는가. 세상이 그릇되이 흘러감을 알아 차려 벼슬을 내던지고 田園으로 돌아오니 義요 권귀權貴에는 무릎을 꿇지 않되 이웃 농부들과는 흉허물 없이 왕래往來하니 信이자 禮요, 이웃의 말로 장차 서쪽 밭에 쟁기질하고 씨 뿌리는 작업이 벌어질 것을 짐작하니 智요, 西疇의 추이推移를 따라 마음이 옮아가니 仁이라. 이는 옛 현인賢人의 오상五常이거니와, 그대 또한 이를 본받아 서쪽 밭을 일구어 쟁기질하고 씨 뿌리면 그 아니 좋으랴.”
池君이 흔쾌欣快히 이르되
“나 또한 조를 심고 오이를 키움이 소원이로되 손대지 못함은 敎職에 매임 때문이어니와, 人材를 키움도 농사거니 어찌 밭의 有無에 구애되랴. 오늘로서 기꺼이 西疇의 主人이 되리로다.”
이에 애오라지 서투른 노래를 얹어 그의 뜻을 기리노니 이르되
돌을 줍고 풀 뽑으니 꿩이 날고
곡식 영그니 노을인 양 곱도다.
묻노니 西疇는 그 어디메뇨?
깊고 깊은 마음 속 한 떼기의 땅!
乙亥 六月 五日
李元燮
바이엘은 서주기를 다 읽고 어딘가 그 깊은 뜻이 느껴졌고 서주를 알게 됨으로써 이런 글도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친구를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한자가 많아 다 이해가 안 되지만 참 좋은 호를 지어 주신 것 같아."
"서주西疇-깊고 깊은 내 마음 속 한 떼기의 땅-를 매일 잘 가꾸면서 보내야 할 텐데…… 내게는 귀한 밭이지."
"앞으로 파하 선생도 한번 뵙고 싶군."
"앞으로 기회가 있겠지.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책을 많이 쓰셨으니까… 나중에 몇 권 빌려줄 테니 읽어봐."
"고맙네. 나… 가 볼 데가 있어. 선배 체르니 하고 약속이 있어."
3
바이엘은 길은 가면서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서주가 연습하는 방 이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고. "한국말은 아니지만 불현듯 서주가 연습하는 방 이름이 어딘가 서주와 통하는 외국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섯 방 중에 어떻게 그 방을 쓰게 된 것일까.
“서주가 연습하는 방 이름이 ‘안단테andante-걷는 정도의 속도’인데 서주한테 딱 맞는 것 같아.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느리게 연주’하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꾸준하게 하다 보면 언젠가 모든 박자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배우라는 것 같지 않아?”
“바이엘, 네 말이 맞아. andante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산책'이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부담스럽지가 않고 어딘가 마음이 편해져.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 있지. ‘산책보다 좋은 약은 없다’, 명언이지…. 나도 마음에 들어. 원장님이 다른 방에 비해 좀 넓다고 정해 주셨지. 가끔 내 방에 다른 아이들이 들어가 있으면 빈 방을 찾아가서 연습할 때도 있는데, 선생님이 레슨을 할 때는 방을 바꿔 주시지. 안단테는 내 방이 된 셈이야.”
"그런데…?"
"………."
바이엘은 이 노인이 왜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을까 정말 궁금했다. 그 나이에 피아니스트가 되어 무대에 설 것도 아니고, 잘 친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도 않은 사람이 피아노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서주, 피아노는 왜 쳐? 그리고 어린이들과 같이 배운다는 게 좀…."
"공기가 탁하고 답답할 때 우리가 창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살 것 같잖아. 그와 마찬가지야. 사는 게 답답할 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 문이 활짝 열리면서 새로운 세상을 느끼게 돼.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꾸는 시간을 준다고도 볼 수 있어. 말하자면 현재로 미래를 두드리는 시간이지.
그리고 아이들과 배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다 대선배들이야, 시간 부자들이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어려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귀엽고 부럽기도 하면서 좋아. 그 순간 내 나이는 생각하지도 않게 돼."
“그렇구나…, 그런데 서주는 언제부터 피아노에 관심을 가졌어?”
“국민학교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오르간을 가끔 친 적이 있었지. 모든 아이들이 신기해서 쳐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악보 없이 단음으로 ‘아리랑’을 치는 아이들이 많았지. 나는 교회에 있던 일본제 풍금으로 가끔 피아노 교본인지도 모르고 바이엘 66번을 쳤는데 재미있었어. 하지만 엄마에게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지. 피아노 레슨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러니까 오르간으로 피아노 연습곡을 쳤네. 바이엘 66번은 나도 아주 좋아하는 연습곡이지. 선율이 단순하고 밝으면서도 애수를 띄고 있어.”
“내가 어릴 때는 피아노는 아주 귀한 악기이고 우리나라에서 생산이 안 되었어. 풍금도 많지 않아서 초등학교 때 음악 시간에는 교실마다 옮겨 가며 수업을 했지. ‘아리랑’인가 '도라지'인가 하는 한국산 풍금이 있었는데, 일본제에 비해서 건반이 뻑뻑하고 소리도 아주 좋지 않았어…. 바이엘, 내가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된 것이라 간단하게 말할 수 없어. 내가 쓴 수필을 읽으면 알게 될 거야.”
“수필도 쓰나. 피아노만 치는 줄 알았더니 취미가 다양하군.”
“내 경우는 피아노에 대한 관심을 한 편 글로 쓰면서 그 관심이 ‘피아노 배우기’로 진전된 셈이지. 그리고 글도 많이 읽지 않고 또 쓰지 않던 내가 글쓰기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고… 앞으로 피아노에 관련된 글을 더 쓰고 싶어. 앞으로 피아노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글도 많이 쓰고 좋은 책도 많이 읽게 될 것 같아… . 피아노 두드리기에 대한 수필을 여러 편 쓴 게 있는데 읽어 보겠어, 바이엘?”
“물론이지, 서주.”
“자, 여기 있네.”
바이엘은 서주가 건네는 A4지 몇 장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피아노 두드리기 1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 밖에 세워 두니 참 나의 수치라."
먼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서주(西疇)가 피아노로 연주할 찬송가 325장 (새535장)-주 예수 대문 밖- 1절 가사이다. 죽 읽어 보면 작사자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울먹이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툰 피아노로 쳐 보면, 가사의 내용은 운율을 잃고 무의미한 소리가 되어 허공을 흩어져 버린다. 톱질이나 망치질에 익숙했던 손으로 열 손가락이 춤을 추어야 하는 피아노를 대하니 그 선율을 살릴 길이 없다. 음악의 요정이 춤을 추며 건반을 사뿐사뿐 디디는 소리로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이어가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 내 열 손가락은 힘을 모으는 합동작전에만 능숙했지 손가락 하나하나의 섬세한 동작에는 미숙하기 때문이리라. 독립성과 유연성이 부족한 손가락의 근육이 피아노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다. 그러니 작곡자와 작사자 앞에 서면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연주가 엉망인 것은 당연하다. 아직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음악성을 갖추어 듣는 사람의 귀를 괴롭히지 않을 정도가 되도록 틈틈이 연습하고 있는데 언제 그러한 경지에 이를지는 예측할 수 없다. 바이엘 1번에서 106번까지 쳐 보았지만 레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언제 체르니 100번으로 넘어갈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형님이 워낙 중학생 시절부터 손재주도 많은데다가 음악을 좋아하여 청계천 상가에서 부속을 구입하여 전축을 조립한 후 음반도 많이 수집하고 음악 감상을 즐기는 생활을 하다 보니 같은 방을 쓰던 나도 덩달아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구소련의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 경연대회에서, 외국 국적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반 클라이번 Van Clivurn'이 1등을 하여 형님이 그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기념 음반을 구입해서 나도 자주 듣게 되었고, 그 때부터 피아노곡 듣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또 한 가지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왼손 약손가락 뼈가 부러져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날씨가 차면 손이 곱고 손가락에 힘이 없어져 피아노를 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음악적인 물리치료랍시고 가끔 피아노를 두드렸는데, 그나마 왼손은 오른 손에 비해 박자 감각도 떨어지고 소리도 약하게 나서, 자기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의 비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되었다. 바이엘 연습곡을 여기저기 두드려 보았지만 이 치료도 의지가 부족한 탓으로 꾸준히 계속하지 못하니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래서 목표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찬송가 하나를 골라 연습을 잘 하면 피아노 연주 실력도 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주 예수 대문 밖에'를 정하고 쳐 보니, 그 가사와 곡이 슬펐지만 마음에 와 닿았다. "종교가 뭐요"하고 물으면 기독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50여 년 동안 예수님을 차 한 잔 하시자고 한 번도 맞아들이지도 않고 대문 밖에 서 계시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길, 진리, 생명이 굳게 잠긴 대문으로 인해 우리 집안으로 들어오셔 역사하지 못하시네. 내가 주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길, 진리, 생명에 뿌리두지 않은 말로 다른 사람 가슴에 못 박으며 살아왔네. 이 얼마나 수치인가"
"예수님 한 분만이 온전한 크리스천이다"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은 위안이 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늘 그리워하며 살 뿐,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고 해도 그러한 미래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그것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박대할쏘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아멘."
역시 슬픈 가사이다. 2000년 전에 태어난 분이 어떻게 내게 이런 감정을 갖게 하는지 신비롭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부모님에 의해서 크리스천의 길을 걸어왔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항상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시지만, 언제나 들을 때뿐이고 다 듣고는 내 생각이나 감정만을 방어하려고 해 왔기 때문이다. 내 나이만큼 오랜, 이러한 습성은 금방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이번 피아노 두드리기는 아주 오래 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앞으로 그 두드림의 오랜 과정은 음악 세계에 발을 디뎌 보게 함으로써 즐거움도 주고 내 생각과 감정을 유연하게 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진리와 나 사이의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두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두드리기 2
가끔 피아노를 친다고 하면, “그 사람 팔자도 좋아. 피아노나 두드리고 앉았으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할 이야기가 있다.
피아노에 관심을 갖기 전에는, 많은 초등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걸 보고,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자식의 소질은 안 따지고 맹목적인 교육열로 자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었다. 그래서 학부모들의 잘못된 군중심리가 작용한 탓이라고 비하해서 말하기도 했고, 모두가 음악을 전공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돈을 들일까 하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내가 생각이 짧았다고 느낀다. 학교 수업 내용을 학원에서 선행하거나 반복해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피아노를 포함한 예체능 교육을 꾸준하게 받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피아노 배우기는 단순히 음악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자기의 시간을 알차게 관리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고 현실적으로 노력과 끈기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하는 종합예술의 한 분야임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편협한 감정의 테두리 안에서 갇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기 쉬운 일상에서 벗어나, 음악사를 장식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무미건조한 시간을 물들이고 장식하며 성실하게 보내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피아노는 또한 운동의 일종이다. 반복적인 손가락 운동에 불과한 것 같은 ‘하농’을 치기 시작해서 5분 정도가 지나면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해, 체온 조절을 위해서 옷을 한 겹 걷어내야 한다. 손가락 끝으로 건반을 두드리지만 몸 전체의 근육이 작동해서 한 점에 모이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온몸운동이 되어 몸 전체에서 열이 나 등에서 약간 땀이 날 정도이다.
또 손가락 끝으로 계속해서 건반을 치다 보면 혈(穴)을 자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수지침 효과도 무시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집사람이 하남시 고혈압·당뇨병 등록 관리 센터에서 받은 수지펜-‘행복을 지키는 과학 수지침 30분’의 저자 곽순애 교수 검증-의 도면을 보니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21혈(穴)이 흩어져 있는데, 건반을 두드릴 때 직접 닿는 중지 끝에는 정신집중과 급체(急滯)에 좋은 혈(穴)과 눈의 피로를 푸는 두 혈과 코 막힘, 비염을 완화하는 혈이 모여 있었고 새끼손가락 끝에는 급체와 소화불량(消化不良)에 좋은 혈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건반을 누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 마디와 손바닥을 움직이게 되어, 나머지‘변비, 멀미, 생리통, 금연, 무릎’에 좋은 17혈(穴)에도 자극을 주기 마련이니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건강에 좋은 혈을 마사지하는 부수적 효과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피아노 두드리기는 음악적인 면에서 그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앞에서 말한 부수적인 효과도 보겠지만 꾸준한 연습을 통해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내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눈이 띄지 않는 곳에 핀 작은 꽃 한 송이도 혼자서 그냥 피는 것이 아닌 것처럼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내는 음 하나는 인고의 세월이 흘러야 제 소리를 낼 수 있다. 손과 손가락 하나하나 아니, 온 몸에 힘을 빼고 건반을 두드릴 때 스쳐 치지 말고 깊게 눌러야 제 소리를 낼 수 있다. 나아가 음과 음은 따로 내지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점차 선율의 아름다움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피아노는 배우기 어려운 악기여서, 좋은 선생님 밑에서 오랜 기간의 충실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 잘 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수준에 이른 다음에도 지속적인 연습을 요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그에 맞는 목표를 정해서 도전하면 해볼 만하고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이 많아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보약이 된다고 본다. 다만 진척이 더뎌 음악적인 완성도 면에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성급하게 연습한 곡을 공연하여 여러 사람의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욕심은 자제하고 배움 그 자체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본다.
피아노 두드리기 3
찬송가 '주 예수 대문 밖에'를 쳐 보다가 문득 내가 쓴 수필 ‘피아노 두드리기 1’이 생각나서 찾아 읽어 보았다. 오래 전에 쓴 글이 씨앗 하나로 내 마음에 뿌려지고 한 그루 사과나무로 자라 이제 열매를 하나 둘 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기 때문이다. 서두를 읽고 인용한다.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 두니 참 나의 수치라.
먼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서주(西疇)가 피아노로 연주할 찬송가 325장 (새535장)-주 예수 대문 밖에- 1절 가사이다. 죽 읽어 보면 작사자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울먹이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툰 피아노로 쳐 보면, 가사의 내용은 운율을 잃고 무의미한 소리가 되어 허공을 흩어져 버린다. 톱질이나 망치질에 익숙했던 손으로 열 손가락이 춤을 추어야 하는 피아노를 대하니 그 선율을 살릴 길이 없다.”
535장은 언제나 내 마음을 깊이 울린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늘 부담이 되어 관심이 있다고 표현하던 나를 대변한 그 가사 내용을 피아노로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수련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자라기를 바랐는데, 드디어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다.
여러 찬송가를 배우던 중에 원장님이, 치고 싶은 찬송가를 고르라고 해서 이제는 한번 쳐 보자고 생각하고 정한 것이다. 뒤늦게 피아노에 관심을 가진 지 무려 9년만이니까 그 글을 쓴 이후 10년 만이다. 아직도 내게는 만만한 곡이 아니어서 표현력에는 아직 부족함이 있지만 혼자 쳐 볼 때와는 달리 지적을 받으며 고쳐 나가니까 내가 듣기에도 괜찮은 것 같다. 레슨이 끝날 무렵에는 완성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있다.
“찬송가 칠 때는 가사를 봐야 되요”
처음 배울 때 원장님이 해 준 이야기에 ‘아, 그렇구나!’하고 찬송가 반주의 높은 경지가 어디까지임을 처음 깨달은 기억이 난다. 아직 가사만 보고 칠 수는 없지만 먼저 가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관련 성경구절을 영어성경-GOOD NEWS BIBLE WITH DEUTEROCANONICALS/APOCRYPHA-으로 읽어 보자. 찬송가 제목 밑을 보니 요한계시록 3:20 한 절이지만 22절까지 인용한다.
“Listen!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to their house and eat with them, and they will eat with me. To those who win the victory I will give the right to sit beside me on my throne, just as I have been victorious and now sit by my Father on his throne. If you have ears, then, listen to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영어성경으로 읽어 보니 더 새롭게 다가온다. 생활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라는 Jesus.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일상에서 만나는 예수님, 그것이 바로 신앙이 아닐까. 이것은 종교생활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세상만사 다 그러하다고 본다. 논어에 나오든가 ‘일할 때도 제사처럼 하라 ’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말고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진리의 말씀에 항상 귀 기울이는 자세로 살아야 정체되지 않고 성장할 것이다.
내 경우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일 많다. 내 생각만 고집하면서 나만의 좁은 성문을 닫는 방어 본능이나 개인적인 감정은 잠깐 동안으로 끝내야 한다. 목사님에게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 제쳐 두고 그것을 근본적인 문제로 삼아 성직자를 장애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일단 뛰어넘어 닫힌 문을 열고 ‘새로운 귀’로 진리의 말씀을 받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If you have ears, then, listen to what the Spirit says to the churches!”
정말이지 누구를 만나려고 교회에 가는 것인가, 그분은 교회에만 계신 분인가. 교회 출석에 틈이 생겼을 때 목사님에게 미안해 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적으로는 그렇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일이다. 교우들과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수적인 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교회에 나가서 복음을 듣는다고 해도 새길 자리가 없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렀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 두니 한없는 내 죄라. 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박대할쏘냐. 나 죄를 회개하고 곧 문을 엽니다. 드셔서 좌정하사 떠나지 마소서, 아멘."
종소리 없는 시간표
"일생을 잘 보내는 것보다 1년을 잘 보내는 것이 어렵고, 1년을 잘 보내는 것보다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어렵다."
그렇게 긴 소설을 읽었는데, 제목과 줄거리는 깜깜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장이다. 물론 소설에서 보았던 문장과 똑같지는 않고, 문맥상 중간에 '1년을 잘 보내기보다는 한 달을 잘 보내기가 어렵고'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하긴 인생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비존재의 시간이고 오늘만이 가장 우리와 가깝게 존재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만나처럼 저장할 수가 없고 순간순간은 지나가면 사라져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의식하고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무겁고 어려운 시간을 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여러 소설이 실렸던, 옥색 천으로 만든 장정이라는 것까지 기억나는 그 책을, 독서력이 부족한 나는 몇 십 년 전 그 당시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고 전체적이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지은이는 앙드레 지드인데 서두의 문장이 그 소설의 주제는 아니었겠지만 그 나이의 내게는 가장 영양가 있는 내용이었나 보다. 앙드레 지드는 그렇게 애써 쓴 자기의 소설을 읽고 내가 한 문장만을 기억하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하겠지만.
요즈음도 가끔 그 문장이 불현듯 떠올라 텔레비전의 자막처럼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그 소설을 읽다가 강한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 때문에 전체 내용은 의미를 잃은 모양이지만 무슨 글이든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가 감상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니 지드도 이해하라리라 믿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문장은 가끔 떠올려서는 안 되고 늘 마음에 품고 살았어야 할 경구였다. 매일 아침, 지드의 그 문장을 되새기며 살았다면 내 삶의 내용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리라.
어떻게 사람이 긴장만 하고 살 수 있겠는가 하고 여유를 부리고도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하루 일을 되돌려 보면 내가 보낸 시간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냉정한 현실을 보게 한다. 아무 소용도 없는 불안과 초조와 걱정, 아무 필요도 없는 생각을 하며 지낸 시간이 너무나 많았음을 느낀다. 하루를 보내고 돌이켜보면 뚜렷하게 한 일도 별로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심한 골다공증 증세를 보이는, 부실한 하루하루가 쌓여 일생의 무게를 버티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좀 늦었지만 이제 뭔가 하루를 잘 지낼 수 있는 설계도를 만들어야 한다.
육하 선생은 70에 육영사업을 시작했는데 내 나이 65이니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시작해서 결실의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긴 일주일에 이틀은 딩동댕, 이틀은 핑퐁을 한다. 딩동댕과 핑퐁이 생활에 리듬을 부여한 지 꽤 오래 되었다. 딩동댕은 끈기와 성실성의 가치를 가르치고 핑퐁은 체조와 더불어 건강을 관리해 주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시간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 시간표 하나를 더 추가해야겠다.
2010년 2월부터는, 하루 일과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한 가지를 정해서 실행하고 있는데 지금가지 거의 빠진 날이 없이 꾸준히 하고 있어서 작은 보람을 느낀다. 'Our daily bread'라는 소책자를 읽고 있는데 옆에 번역이 되어 있지만 우선 영어로 읽어 본다. 하긴 잠자는 시간과 세 끼 식사 시간을 제한 모든 시간은 언제나 'Our daily bread'를 먹어야 하는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육체적인 양식은 세 끼 식사로 족하지만 정신 활동은 항상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에서 언어가 서로 엉김이 없이 문장으로 잘 정리되고 원활하고 개방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국어도 그렇지만 특히 영어는 부족한 어휘력이 문제다. 양복 속주머니에 들어가는 좁은 지면, 몇 문장이 되지 않는 글에서 모르는 단어는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사전을 찾아보면 뜻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딸이 사 준 영영한 사전을 단어장이라고 생각하고 수시로 페이지를 넘기지만 지겨울 때도 있다. 영영한이어서 영어로도 읽어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할 만하다. 하지만 찾은 단어가 여러 번 찾아 본 것이어서 눈에는 익은데 뜻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때는 열이 난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졌으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찾아본 횟수에 비해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어서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낯익은 그 단어에게 말한다.
"반갑다 친구야", 또는 "또 만났네. 앞으로 자주자주 만나자고"라고
어렸을 때는 조금만 어렵다고 느껴도 실의에 빠지고 곧잘 포기도 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다 보니 '포기'라는 놈도 예전보다는 힘이 없고 내 끈기에는 손을 든 모양이다. 간혹 며칠 빠져도 그 공백을 확대 해석하지 않고 별 생각 없이 다시 시작하게 되고 영어 공부 시간이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그저 생활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꿈이 꿈틀거린다. 언젠가 영어-말하기, 쓰기, 읽기, 듣기-로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으리라는 꿈이.
일과를 진행하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먼저 영어 공부는 영어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국어 공부가 더 된다는 것이다. 사전을 찾을 때 뜻풀이와 예문을 보면서 다양한 국어 어휘와 문장을 접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국어도 익힐 수 있고, 가끔 한자도 집게손가락으로나마 써 볼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새로 배운다는 마음을 가지고 한국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외국어 한 가지는 꼭 익혀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통해 '나랏말씀이 듕귁에 달아.... 어린 백셩이 니르고자 할 배 이셔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노미 하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속에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한 현대 한국인들에게 주는 세종대왕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본다.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 2010'을 통하여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외국어 실력은 갖추지 못하면 어린 백셩으로 전락할 것이니 오른손에는 국어, 왼손에는 외국어 한 가지 이상' 을 익히라고 하시는 말씀하신다.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가 자기 자신을 만든다고 생각하니 늦게나마 어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잘 한 일이다. 내 머리 속에 결국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언어가 아닌가. '소유와 무소유'라는 책에서 진정한 소유는 물질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사실 무엇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 몸처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가까이 있을 뿐이지 진정한 소유는 아닌 것. 같은 몸에 존재하는, 즉 소유하는 건 오직 마음의 상태인데 그 심리 상태는 표현되지 않은 언어의 형태로 내 머릿속에 존재하니 그 언어가 같은 값이면 폭넓고 품질이 좋은 언어이어야 나 자신을 풍요하게 하지 않겠는가. 언어가 정리되지 않고 혈전처럼 혼돈 상태로 엉겨 있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라기는 내가 쓰는 언어가 진리에 근접하여 여생에 빅뱅을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조합하여 좋은 문장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 '나'를 형성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국어+영어를 통해 언어의 영역을 넓히며 새로운 미래를 기대한다. 인생은 결국 평생 언어를 관리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도 국어에 관심을 가지고-외국어도 한 가지 하면 더 좋겠지만-감각을 유지하면서 편중된 어휘에 갇히지 않고 그 폭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문학의 경지까지 이르면 좋겠지만 뜻을 펴기 위해 그 길을 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
시조
흙과 생일
이 생명 이어주신 어버이 좋은 얼굴
이제는 돌아가셔 기름진 흙 됐으니
이 몸은 저 하늘 아래 땅의 아들 되었네
털실 조끼
뜨개질 손길 따라 코마다 어린 정성
어머니 남기신 정 고운 빛 물들이니
이제야 들리는 말씀 구구절절 귀하오
바위 1
주말 아침 , 선사시대 유적지가 있는 동산
구석기인들이 걷던 길을 따라 약수터에 가자면
길가엔 해면처럼, 오랜 세월을 검게 머금은
큰 바위들 덩그러니 조각처럼 앉아 있는데
넘실대는 파도 무늬에 여기저기 갈라졌지만
아득한 시간이 배어든 푸른 이끼는 싱그럽다네.
바위 2- 바위를 보며
오전 10시, 청려장 가볍게 짚고 동산에 오르니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가지 흔들어 열린 숲이
매미 소리를 가득 채워서 오솔길에 쏟아 붓는다
시선은 다시, 무심코 지나치던 산길 주변에서
옛이야기 하는 바위들을 향한다, '이것 봐라!'
다음부턴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크고 작은, 깊고 검은 바위들은
오랜 세월이 다듬은 추상주의, '무제無題'
아파트 옆 동산은 조각 전시회가 한창이다.
전설을 지닌 '말 바위' 하나는 있지만
다른 것도 이름을 지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아파트 옆 동산은 우리의 정원, 조각 공원
바위 3
약수터 가는 길은 독서 시간,
한 권 바위를 펼쳐 읽어 본다
넘겨도 끝나지를 않는 쪽수
읽을거리가 한이 없다네
약수터 가는 길은 미술 시간,
좀 어려운 추상화 작품을
요리조리 꼼꼼 살펴보니
세월은 붓을 놓지 않았네
바위 4
추상 조각 작품 하나
동산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 채
무심한 산책객들을 부른다오
춤추는 숲을 뒤에 업고
이끼로 덧칠을 하고
낙엽도 얹어 보며
바위 7- 가족
숲 속에 자리 잡은 대 이은 명당자리
바위들 모여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네
끝 없는 이야기 거리 헤어질 날 언젠가
바위 8-추상화
빛 내는 귀한 이끼 구하기 힘들어도
바위는 쉬지 않고 추상화 그린다네
화가로 살아갈 먼 길, 붓 거둘 날 언젠가
바위 9-마실
천 년을 하루같이 어디를 가고 있소
새 소식 듣고 싶어 이웃집 찾아 가니
고목들 간 데가 없고 후손들만 보이오
바위 10
비바람 오랜 세월 모두가 잊었지만
언제나 귀를 열고 들은 것 생각하니
얼굴은 주름투성이 단단한 몸 어디에
바위 11 - 돌이끼
그려도 생명 없다 아끼던 붓 거두고
살아서 번져 드는 새 물감 찾아 만 년
어디서 돌옷 구했나 멋들어진 입음새
바위 12-얼굴 바위
태어나 정든 동산 나무는 이웃사촌
언제나 함께 하며 하늘을 바라보니
희망은 얼굴 바위로 굳은 믿음 되었네
바위 13- 단짝 친구
나무를 닮았는가 땅 속에 뿌리 내려
발돋움 몸을 세워 하늘을 바라보며
단둘이 지내온 세월 지루한 줄 모르네
바위 14
아무리 생각해도 구겨진 바위 체면
땅 밟고 엉거주춤 설 자리 여기인가
다시금 생각해 보니 흙이 나를 낳았네
바위 15-바다 꿈
이 몸이 산 속에서 떠난 적 없었건만
연어와 바다 여행 함께 할 평생 꿈에
돋아난 물고기 비늘 넓은 등을 덮었네
첫댓글 자식들 피아노 학원 다니면서 바이엘은 초보, 체르니는 상급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비롯된 것 같네요. 바이엘은 기초부터 차근차근 음악의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니 바이엘이 읽어준 이야기는 초보를 넘어서겠지요? 심오합니다. 바이엘을 바탕으로 체르니까지 파이팅!입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서주의 릴력은 안제 어디서나 으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