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로, 이제까지 찾아왔던 태풍들은 한반도 상륙을 앞두고 세력이 약해지는 게 보통이었다. 필리핀 남쪽 바다의 적도와 북회귀선 사이에서 발생하여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해마다 북상하는 27여회 태풍 중 한반도 해역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경우는 한 두 차례, 대부분 육지를 관통하면서 위세를 크게 잃었고 동해로 빠져나갈 즈음 열대성고기압으로 사멸하곤 했다. 그런데 올 늦여름의 불청객 ‘매미’는 달랐다. 작년 ‘루사’에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찾아와 남해안 일대의 도시를 맹렬하게 할퀸 매미는 백두대간을 넘고도 기세를 진정하지 않고 일본열도를 강타하고서야 열대성저기압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전대미문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초속 50미터의 바람으로 나뭇잎들을 일찍 떨어뜨린 대구보다 부산의 가로수는 훨씬 처참했다. 태풍과 동행한 강력한 소금바람은 잎사귀 뿐 아니라 가지와 줄기도 가격했는지 축 늘어진 모습은 남도의 활기와 거리가 멀었다.
육지의 매미 소리가 삭으러들 무렵 남해안을 상륙한 매미는 무엇 때문에 한반도를 관통하고도 제 분을 삭이지 못한 것일까. 단지 이변이었나. 구름만 과시했던 마른장마가 소문도 없이 꼬리를 감추자 기다렸다는 듯 불특정 지역을 몰아친 장대비는 요 몇 년 사이 기상대 예보관들만 허둥지둥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농부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여서 이삭 패는 논의 물꼬트기 바빴다. 중국 양자강 일대에서 발달한 묵직한 구름덩어리가 편서풍을 타고 넘어와 한반도 여기저기에서 ‘물풍선’을 터뜨리는 현상은 예년에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기상이변인가. 시간 당 퍼붓는 강우량의 기록이 최근 거듭 갱신되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현상을 그저 간단히 ‘기상이변’으로 특징짓기에 무언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국지성 호우가 잠잠해진 이후 한반도를 향해 북상하면서 전례 없이 강력해진 태풍의 파괴력은 연이어 선보이는 근래의 기상이변과 관련이 없을까.
양자강 상류를 가로막는 삼협댐은 이재민 수가 천만이 넘고 수력발전만 한해 1,800만 킬로와트를 예상하는 거대한 규모로, 이번 여름 물막이 공사 완공으로 이미 물을 담기 시작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한여름 뙤약볕에 범람하면서 양자강은 해마다 거대한 수증기를 발생시켰는데, 삼협댐 완공을 계기로 우리나라 상공에서 물풍선이 더는 터지지 않을 것인가. 그게 아니면, 소양강댐의 14배 규모인 댐이 만들어낸 거대한 호수는 양자강 하구 범람 이상의 수증기를 발생시켜 우리는 허구헛날 물풍선 세례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다른 이야기도 들린다. 계곡이 깊은 삼협댐으로 양자강 하류의 폭이 크게 줄어들면 수증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 우리나라에 가뭄이 닥칠지 모른다는 염려다. 어찌되었던 중국의 삼협댐은 이래저래 우리나라의 기상에 큰 걱정거리를 던져줄 모양이다.
마른장마 뒤의 국지성 호우와 양자강 하류 범람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진단한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발생하는 일련의 현상들은 분명 심상치 않다. 지구온난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정이 빗발친다. 전에 없이 뜨거워지는 지구온난화는 양자강 유역의 수증기 발생을 전에 없이 강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해역의 바닷물도 데우는 데 일조한다는데, 이미 충청도 권의 황해역이 아열대화 되었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한반도로 다가오면서 오히려 강력해진 이번 매미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뜨거워진 바다에서 에너지를 보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나라로 다가오는 태풍들의 위력은 점점 강력해질 텐데,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종합적이며 정확한 진단을 발판으로 근본 대책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할 텐데, 언론사들의 수재의연금 경쟁에 상당부분 떠맡기는 일 말고 우리는 어떤 재해 대책을 서두르고 있을까.
2. 최근의 생태계 징후
해마다 반복되는 뉴스가 되었듯, 올 가을에도 계절을 잃은 개나리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텔레비전은 전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한 모양이다. 가을철 잠시 나타나는 더위를 미국인들은 ‘인디언 서머’로 표현하는데, 가을이 깊어질수록 차가와져야 할 날씨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치자 개나리와 진달래는 물론, 배꽃까지 화면 가득 꽃눈을 펼쳤고, 어떤 나무는 심지어 잎눈까지 열어, 때 아닌 신록을 연출하는 게 아닌가. 기상 전문기자는 야생화 전문가의 인터뷰를 통해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 현상이라고 간단히 마무리한다.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본래 나그네새였으나 동강의 텃새가 된 비오리가 너무나 귀엽고 예뻐서” 1999년 제1회 ‘풀꽃상’을 동강의 비오리에게 드렸다. 흐름이 느리고 폭이 넓은 중류 하천이나 저수지에 둥지를 트는 비오리는 쌀쌀해지는 가을이면 남녘으로 날아가는데, 왜 추운 동강에 남으려했을까. 먹이가 유난히 많기 때문이었을까. 동강에 민물고기가 많은 것이야 비오리 뿐 아니라 동강을 찾는 수달과 청호반새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따뜻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나그네인 비오리가 굳이 동강에 남은 까닭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영월다목적댐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동강에 둥지를 쳐준데 감사하는 뜻으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풀꽃상을 비오리에게 드렸지만, 비오리는 동강이 그다지 춥지 않아 남았을 것이다. 그해 3월 29일 수상식장에 모습을 나타나지 않은 그 비오리 가족은 동강을 따뜻하게 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떤 모자란 이는 지구가 온난화가 되면 우리나라 해안에 종료나무가 자생할 것이라며 그윽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남국의 엽서에서 보는 낭만적인 그림은 함부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동강 비오리가 사람들에게 감사해하듯, 남쪽 지방에서 잘 열리는 감이나 탱자를 중부 이북지방에서 재배하기 쉬워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예상은 가능하겠지만, 온난화되는 우리 해안은 기후와 환경이 종료나무에 맞게 송두리째 둔갑하지 않는 한 남국의 그림은 터무니없다. 지구온난화는 감상적인 변화보다 부정적인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1980년대 연간 16만 6천 톤의 어획고를 자랑하던 명태가 최근 800분의 1로 줄었고 한류성 어류인 대구와 도로묵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늘어난 어종도 더러 있다. 난류성 어류인 오징어가 1980년대에 비해 4.6배 이상 잡혔고 멸치 어획고도 1.3배 이상 증가했다고 부산과학수산원은 밝히고 있다(대한매일, 2003.11.1). 그러나 원래 잡혔던 어종이 조금 늘었을 뿐이다. 새로운 종의 출현은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을 급하게 한다.
“한반도의 바다 속에 대 이변이 발생했다!” 혼잡했던 여름을 멀리 보내고 쓸쓸한 가을이 깊어지는 지난 11월 초, 한 언론은 겨울을 준비하는 우리 바다에서 최근 잇달아 발생하는 이상 현상을 선정적으로 표현한다. 무게 200킬로그램에 달하는 큰덤불해파리가 인천 앞 바다에 무시로 출현하는가하면 제주도에 자생하는 감태가 울진 연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아열대화를 의심한다는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에 산호가 서식하고 양양 해역에서 보라문어가 잡히는 현상은 해양 생태계의 변화가 눈에 띌 정도라는 걸 웅변하는데, 새로운 종의 출현은 생태계의 질서가 교란되고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기존 물고기의 분포에 닥칠 변화와 그에 따르는 어획고의 변화, 그리고 해양문화의 변화를 차례로 예고한다.
전문가들은 지난 30년 동안 황해의 수온이 0.8도 상승했다고 부언한다. 0.8도 정도의 수온 상승은 생태계 변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까. 이에 대한 심층 연구 결과는 아직 나온 것이 없다고 말하는 해양 전문가는 “해양 환경 변화는 부지불식간에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고 경고한다(한국일보, 2003.10.29). 하지만 해양학자의 경고와 관계없이 0.8도는 우리가 피부로 느낄만한 온도 변화는 아닐지 모른다. 《0.6°》(현암사, 2003년)를 쓴 김수종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지구 기온은 100년 동안 고작 섭씨 0.6도 상승했다고 말한다.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0.6도 정도의 기온 변화는 감지하지 못한다. ‘일교차가 클 경우 하루에도 15도 이상이 오르내리는데, 100년 동안 0.6도 올라간 게 뭐가 대수인가’ 하고 의아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평균 0.6도 상승은 무시할 수준을 넘어선다. 국가 폐업을 신중히 고려하는 ‘투발루’라는 태평양의 작은 국가가 있는가 하면 킬리만자로의 눈이 곧 볼 수 없게 될 것으로 우울해하는 기상학자도 있다. 김수종 논설위원은 체온이 0.6도 오르면 몸살기를 느끼는 사람과 비교해보라며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데, 황해의 수온이 30년 사이에 0.8도 올라간 현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강화도 인근 울도에 사는 70대 노인은 자신이 어렸을 때 연안에서 대구와 청어를 잡았다고 회고한다. 지금 강화 인근 수역에서 대구와 청어는 전혀 잡히지 않는다. 대구 청어만이 아니다. 그 흔하던 조기 갈치 홍어 한 마리 구경하기 힘들다. 한강에서 마구 쏟아지는 온갖 쓰레기와 오폐수가 남획 이상의 큰 영향을 주었겠지만 갯벌 매립 못지않게 수온이 올라간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관료들이 주문을 외듯, 온난화로 감수하는 어획고는 수입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올라오는 물고기가 바뀌면 관련된 여러 문화가 바뀐다. 어업문화만이 아니다. 밥상문화도 바뀐다. 빙하기가 최절정일 때 지구의 평균 온도는 지금보다 6도 낮았다고 한다. 기상전문가는 100년 후 지구는 최소 1.4도에서 최대 5.8도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지구온난화는 장차 밥상문화만 바꾸지 않을 것이다.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인간 자체를 위협할지 모른다.
3. 환경변화와 생물종 변화의 관계
첫 서리가 내리는 한로에서 겨울의 문턱인 입동마저 지나갔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모기가 앉아있다. 강원도의 첫 얼음이 근교 저수지의 살얼음으로 이어져도, 아예 꽝꽝 얼어도, 아파트의 모기는 풀이 죽어 있을 뿐, 절대 제 모습을 감추려들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방심한 틈을 타고 아기의 연한 피부를 이따금 노리기도 할 것이다. 이른바 ‘지하집모기’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자 나타난 지하집모기는 환경변화에 능동적인 작은 곤충의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면, 살충제로 무장하는 사람은 어떤가. 밖에 나가자마자 안경에 이슬 내리도록 여름철 냉방장치가 집요하고 외투 속에 반팔 티셔츠를 입어야 할 정도로 겨울철 실내 난방에 철두철미한 사람은 과학기술이라는 꾀와 자본이라는 힘으로 환경변화를 극복하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인가.
DDT를 뿌리자 전멸했다 싶었던 메뚜기가 다시 출몰하는 걸 보고, 흔히 “메뚜기에 내성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때 내성은 김치가 매워 먹지 못하던 외국인이 점차 젓가락을 대는, 즉 한 개체가 바뀌는 환경에 ‘익숙해지는’ 현상과 다르다. DDT에 노출된 메뚜기에 나타난 내성은 개체가 아닌 집단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진화 현상이다. DDT를 뿌리자 없었던 내성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내성이 없는 대부분의 메뚜기들은 DDT로 죽고 말았지만, DDT 내성이 있는 유전자를 가진 집단 내의 소수 개체들이 주로 살아남아 후대를 이었다고 본다. DDT 내성 유전자는 20세기 어떤 사람이 DDT를 발명할 것을 대비한 어떤 조상 메뚜기의 선견지명일 리 없다. 먼 과거, 어떤 돌연변이에 의해 우연히 집단에 들어온 유전자였을 것이다. DDT가 없을 때 DDT 내성 유전자는 불필요하다. 따라서 열성이었다. 하지만 열성 유전자가 DDT가 살포된 환경에서 구세주가 될 지 어떤 메뚜기도 예전에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메뚜기 집단은 열성 유전자 덕분에 멸종되지 않았으므로 해피엔딩일까. 메뚜기 ‘집단’ 차원으로 보자면 그렇다고 여길 수 있지만, 메뚜기 ‘개체’ 개개의 처지에서 판단하자면 해피엔딩이라고 흥겨워하기 어렵다. 대부분이 우성이었던 개체들이 환경이 바뀌면서 전멸하지 않았던가.
지하집모기는 겨울 환경에 어떻게 적응한 것일까. 겨울이 아무리 따뜻하기로 변온동물인 모기가 생존할 정도는 아닌데. 지하집모기가 영하의 겨울에도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DDT를 극복한 메뚜기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DDT와 같이 급작스럽게 환경을 교란하지 않았겠지만, 사람의 에너지 과소비는 기존 모기를 충분히 진화시켰을 것이다. 실내는 물론 실외의 겨울까지 서서히 따뜻해지면서 모기 개체들은 가지고 있는 유전자 차이에 따라 희비를 엇갈려야 했을 것이다. 환경변화에 따라 적응과 도태를 거듭한 끝에 지금의 지하집모기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강건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기나 메뚜기에 비해 현저하게 오래 사는 사람들은 환경변화에 둔감하다. 효과가 떨어진 DDT를 오래 전에 폐기한 사람은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는 살충제만을 갱신할 따름이다.
생물종의 진화는 종이 아니라 개체에 의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개체들의 집합에 의해 결정되는 진화는 합목적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기린은 높은 나무의 잎을 따먹기 위해 목이 길어지지 않았다. 먹이 경쟁이 치열한 자연에서 편안한 높이의 잎사귀를 차지하지 못하는 기린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따먹어야 생존이 가능한 소심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부대끼기 싫어하는 기린의 처지에서 긴 목을 지닌 개체들이 그렇지 못한 개체들에 비해 충분히 먹어 건강했고, 건강한 암수가 만나 짝을 이룰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을 테니 부모를 닮아 키가 큰 후손이 집단 내에 늘어났을 것이다. 키 큰 기린이 늘어나면서 먹을 수 있는 잎사귀는 더 높은 가지로 올라가고, 후손 중 키가 더 큰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게 된다. 이렇듯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확률이 키 큰 개체에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세대를 거듭하면서 기린의 목은 길게 진화했고 현재에 이른 것이다. 기린의긴 목은 우연일까, 필연이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목이 짧아 진화 과정에서 도태된 무수한 개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애도해야한다. 나뭇잎을 제대로 따먹지 못해 기력이 없으므로 쉽게 천적의 먹이로 희생되었거나 짝짓기 경쟁에서 밀렸을 테고, 새끼도 제대로 부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도 잘 뛰기 위해 발굽이 하나인 동물로 진화된 것이 아니다. 사람도 도구를 사용하려고 지능이 뛰어나고 손마디와 근육이 복잡해지지 않았다. 환경변화에 따른 적응과 도태의 결과로 이렇게 진화된 것이다. 환경변화는 예고된 방향이 없다. 따라서 현 생태계에 진화돼 나타난 개체들은 다분히 ‘우연’의 산물이다. ‘필연’과 거리가 멀다. 화석상 무수히 도태된 말과 사람의 조상을 살펴보면 살아남은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지만 무수한 조상 개체들은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DDT와 메뚜기, 따뜻한 겨울과 지하집모기도 마찬가지다. 살충제에 이겨낸 모기와 바퀴벌레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추석을 맞아 집에 온 동생은 주섬주섬 독감 백신을 꺼낸다. 지금까지도 독감 한번 걸린 적이 없었고, 주사 안 맞고 병 안 걸리는 ‘주의’를 신봉하던 나는 손사래 치며 투약을 거부했건만, “사스로 오인되면 격리 수용될 수 있다”는 의사인 동생의 협박과 아내의 채근에 난생 처음 독감 백신을 온 가족과 맞아야 했다. 그런데 주사 맞고 며칠 지나자 몸에 오한과 미열이 생기면서 몸살 증세로 연결되는 게 아닌가. 경험자 말로는 약간의 독감 증세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데, ‘다행스럽게’ 몸살 비슷한 독감증세는 금방 사라졌다. 독감 예방주사 계절에 앞서 언론은 ‘다행스럽게’ 백신의 재고가 충분하다고 보도한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독감 백신이 품귀였다. 그래서 그런가, 마음 급한 시민들이 보건소 담장을 크게 감싸며 줄서는 진풍경을 연일 연출하는데, 시민들의 안달과 관계없이 올해 생산한 백신은 제 역가를 내내 발휘할 수 있을까. 분자량이 매우 작은 독감 바이러스는 환경변화에 아주 민감하여 묵은 백신은 소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데, 과학기술은 점점 나약하지는 시민들을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독감 바이러스처럼 분자량이 작은 에이즈 바이러스도 환경변화에 매우 민감하다고 한다. 백신을 개발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백신 개발속도보다 바이러스의 변화가 더 빠르기 때문이라는데, 어떤 장내 세균은 항생제가 몸을 빠져나가기 전에 내성을 지닌다고 한다. 무더기로 죽여 상아를 잘라가는 밀렵이 성행하자 엄니를 성장시키지 않고 번식하는 코끼리가 등장하고, 어린 개체까지 남획하는 그물이 지천이자 참치의 몸집이 작아지는 현상은 무엇을 웅변할까. 돈벌이를 위해 환경을 교란시키는 사람이 변수로 등장하자 새롭게 진행되는 일종의 진화 현상이 아닐까. 산사나무 열매에 알을 낳던 파리가 사과나무에 옮겨가고, 다시 블루베리로 옮겨가 새로운 종으로 거듭 진화하는 현상은 산사나무가 자생하는 자연을 밀어낸 사람이 그 자리에 사과와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라고 《핀치의 부리》(이끌리오, 2002년)에서 조나단 와이너는 말한다. 적응이 가능한 생태 조건의 폭이 좁고 한 세대의 시간이 짧은 파리는 사람에 의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며 ‘사람의 시간 기준’으로 보아 빠른 기간 내에 진화에 성공한다. 하지만 한 세대의 시간이 길고 생태 조건의 폭이 넓은 대형 동물에게 섣부른 진화는 가당하지 않다. 자신의 세력권까지 파고든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즐겨 따먹는 멧돼지는 그렇게 진화된 것이 아니다. 평소에 도토리를 주로 먹으면서 새로운 문화에 익숙해진 것이다. 김치를 즐기기 시작한 외국인들처럼.
사람들이 품종 개량한 복숭아를 먹은 멧돼지는 농약 묻은 복숭아는 사양했다고 피해 농부는 전하는데, 겉모습만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살충제와 제초제를 뿌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잠시 잠잠하던 해충과 잡초들이 내성을 가진 모습으로 다시 극성이기 때문이란다. 자연을 획일적으로 개편한 사람들은 넓은 경작지에 단일 작물을 심는다. 단순한 농작물로 이루어진 생태계에는 몇 가지 곤충과 야생식물들이 떼로 덤벼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적이 드문 까닭에 공생하자는 야생생물의 개체수를 자연적으로 조절하지 못한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강화된 제초제와 살충제를 거듭 개발하지만 이내 한계에 부딪힌다.
최근 사람에게 고질병이 급격히 늘었다. 생물체의 생명현상을 억제하여 죽이는 화학약품이 농작물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몸의 저항력이 떨어지면서 암과 같은 퇴행성 질환이 많이 늘고, 의료비가 상승하는 요즘 의료자본은 살찌는데, 사람들은 언제까지 과학기술로 환경변화를 이겨낼 수 있을까.
4. 기후 변화가 이끄는 생태적 부작용
수많은 동식물로 어우러지는 자연 속의 생태계는 촘촘한 그물과 같다. 먹이와 에너지, 생식과 성장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의존한다. 그물망으로 얽힌 생물들의 복잡다단한 생산과 순환은 독특한 습기와 토양을 가꾸어가고, 습기와 토양은 다시 생태계의 조성에 영향을 주며 오랜 세월 안정된 질서를 유지해왔다. 안정된 생태계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국지적인 환경변화는 작은 생물들의 진화를 여기저기에서 유발시키며 그물코를 어지럽히지만 곧 안정된다. 반면 지구온난화와 같은 거대한 환경변화는 장기적으로 생태계 전반의 막대한 변동으로 연결될 것이다. 열대우림이 사바나에 밀려나거나, 사바나가 확산되는 사막에 자리는 내주는 일련의 변동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그 시나리오가 얼마나 빨리 또는 서서히 진행되느냐에 따라 생태계의 변동도 달라지겠지만, 긴밀했던 생태계의 그물코는 연결고리를 잃어 한동안 흐트러질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기존 생물종이 대거 도태되거나 새로운 생물종으로 진화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하지만 환경이 안정되어 생물종의 다양성이 회복되면 그물코도 수리될 것이다. 문제는 개별 생물종과, 그 생물종 내의 개체들이다. 변화되기 이전의 생태계에 적응하며 살아가던 수많은 생물종과 개체들에게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초래된 뒤일 것이다.
생물종 다양성이 보전된 생태계는 변동이 생겨도 다시 안정하게 되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 구성하는 생물종이 달라질지언정 과거의 건강한 모습을 거의 회복할 수 있다. 반면 단순 수목을 식재한 조림지나 단일 품종을 파종하는 대규모 경작지처럼 분포하는 생물종이 단순한 생태계에 변동이 초래된다면 사정을 다르다. 고추밭을 예로 들어보자. 많은 소출을 보장한다고 광고해서 큰 돈 내고 구입한 고추종자는 유전적 다양성이 없다. 그런 고추를 파종한 고추밭에 탄저병이 돈다면 농민은 바싹 긴장해야 한다. 방심하다 보면 투자비를 몽땅 잃을 수 있다. 배나무 풍뎅이, 벼 이삭도열병들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품종을 획일적으로 심고 파종한 경작지에 발생하는 질병은 방심하면 치명적이다. 농부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농촌지도사들은 해충과 바이러스를 추정하고 그에 대응하는 몇 가지 약제를 적기에 살포하라고 충고하지만, 만만치 않은 농약 값보다 농민들을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농약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기후 변화는 기존 경작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예상할 수 없는 강우와 기온은 변화된 환경에 취약한 단일 품종 작물의 면역을 크게 떨어뜨리고, 일찍이 경험하지 않은 질병이 확산되면서 농민의 영농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지 모른다. 농민은 물론 농촌지도사도 변화하는 경작지 환경에 어떤 농작물이 어울릴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다가 아열대화한다고 종료나무가 우리 해안에 자생할 수 없듯 기온이 아무리 상승한다고 바나나나 파인애플과 같은 열대 과일을 아무데나 심을 수 없다. 전통 농작물을 파종했던 우리 경작지의 토양과 기후 조건은 열대 과일과 거리가 먼 것이다. 열대 과일에 맞춰 토양 조건을 개선하려고 많은 비용을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농 기술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아 소출이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그 돈으로 수입해 먹는 편이 차라리 경제적일 것이지만, 문제는 다른 데 더 있다. 방제 방법을 모르는 곤충과 잡초가 새로 들어온다면 속수무책일 가능성이 높다. 열대 과일은 주식이 아니므로 포기하고 다를 주곡을 찾으려 해도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변화된 기후에 적합한 다른 작물을 찾았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전통 밥상에 익숙한 음식문화는 새로운 식사법을 거부할 공산이 크다. 음식처럼 보수적인 문화도 없다지 않은가.
기존 생태계가 무너져 생긴 빈 공간에는 엉뚱한 생물종이 깃든다. 이른바 ‘귀화종’이다. 작은 물고기와 토종 개구리는 물론, 뱀과 새까지 잡아먹어 큰 충격을 준 황소개구리는 섬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국 농업용 저수지를 주름잡고 있다. 천수답 가장자리의 물웅덩이를 없애버린 관개농업은 모내기철이 되어야 논에 물을 공급하는데, 이는 3월과 4월에 동면에서 깨어나 물이 고인 논에 산란하는 북방산개구리와 참개구리들의 수를 크게 줄였다. 개구리의 감소는 때까치와 청호반새의 수를 차례로 줄이고 논 주변을 기웃거리던 무자치까지 보기 드물게 만들었다. 결국 여름철에 수만 개의 알을 낳는 황소개구리만 번성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뜨거운 봄날, 동면에서 잘 못 깨어난 황소개구리가 본능적으로 웅덩이를 찾았다가 제 암컷으로 착각한 두꺼비가 등을 타고 끌어안자 죽어버린 경우도 있다. 두꺼비 피부의 독이 황소개구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당시 전문가는 설명했다. 황소개구리의 확산에 놀란 정부는 급조한 이벤트를 통해 황소개구리 잡기에 한때 열 올렸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돈으로 낚싯대를 든 사람을 유인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황소개구리는 백로나 왜가리와 같은 야생조류가 개체수를 조절한다. 관개와 화학농법으로 먹이가 줄어든 들판보다 군용 숟가락만한 황소개구리 유생이 우글거리는 저수지를 즐겨 찾기 때문이란다.
담수어류 전문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절대 제거할 수 없으니 더는 확산되는 걸 막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한 큰 호수의 배스나 블루길도 파괴 또는 변형된 우리 생태계에 자리 잡은 외래종이다. 저수지를 비울 수도 없는데 깊은 호수에서 토종 물고기를 폭식하는 배스와 블루길의 수를 제어할 마땅한 수단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천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완용으로 들여와 분양했지만, 덩치가 커지자 방생한 붉은귀거북도 관리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호수 가장자리의 모래밭을 없애 산란을 차단하는 방법은 토종 남생이와 자라의 번식을 가로막을 것이다. 기계가 접근하기 어려워 놀리는 경작지나 버리고 간 집터, 등산로로 파괴된 숲 가장자리에 터 잡고 여간해서 물러서지 않는 미국자리공도 수입 곡물을 통해 들어온 돼지풀이나 서양민들레처럼 다양성이 실종된 생태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에 의한 기후 변화와 생태계 파괴가 일찍이 없었던들 결코 초대받지 않았을 귀화생물들이 이 땅의 주인처럼 자리 잡은 이상 제거할 수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다. 바뀐 생태계에 사람이 적응할 차례다.
5. 나가는 글
추운 지방에 갈수록 표피가 줄어드는 현상을 생태학에서 ‘버그만의 법칙’으로 정의한다. 열대지방 토끼 개체들은 귀와 다리가 긴 반면 한대지방의 개체들은 짧고 몸도 통통하다. 표피가 상대적으로 작으므로 체온을 덜 빼앗길 것이다. 혹자는 체온을 덜 빼앗기기 위해 몸이 통통해졌다고 설명하고 싶겠지만, 소심한 기린이 높은 가지의 잎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통통한 몸이라야 상대적으로 살아남기 쉬운 환경이 한대지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체들마다 차이가 있어 다리와 귀가 큰 토끼도 간간이 태어나겠지만, 다리가 길고 귀가 크면 천적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하고 빨리 피신할 수 있겠지만, 천적보다 추운 기후가 토끼에게 더 두려운 존재였던 게 분명하다. 곰도 순록도 늑대나 호랑이도 더운 지방의 유사종에 비해 훨씬 통통하다.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북극의 이누잇보다 아프리카 주민들의 몸매가 훨씬 날씬하다. 환경 조건에 따라 유전자가 다르게 발현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지구가 서서히 더워지면 한대지방 토끼의 귀가 커질지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짧은 귀를 가진 토끼들은 서서히 도태될 거라는 뜻이다.
뜨거운 물을 어항에 쏟아 넣으면 잽싸게 튀어 달아날 개구리도 서서히 데워지는 어항 물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는다. 사람들의 욕심 사나운 개발로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있다. 기후대가 바뀌고 기상이변이 속출하며 많은 생물종은 멸종 행진을 멈추지 못한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질병이 출현하는가 하면 과거의 질병이 강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변화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진화해가는 생물종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은 생태계의 예기치 않은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 낭비를 멈추기는커녕 전혀 줄이지도 않는다. 자본과 과학기술을 총동원하며 자신만의 환경을 유지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쓴다.
가장 오래 살았던 수렵채취 시절, 사람들은 자연의 환경을 거의 변형하지 않았다. 최초의 경작이 시작되고 산업혁명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자연을 개조했어도 자신의 삶까지 위협하지 않았다. 산업혁명 시대에서 핵무기 시대를 지나 생명공학 시대로 접어든 요즘,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과소비하며 불필요한 물건을 양산하고, 순환 불가능한 폐기물로 생태계를 오염시키면서 자신의 터전까지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생태계 구석구석에서 불길한 징후가 속속 드러나고 있건만 인간의 지독한 근시는 사태의 본질을 읽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외면하는지 모른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걸 알면서도 지갑 여는 승객들의 즐거움을 막고 싶지 않아 그대로 돌진한 선장처럼, 무너지는 징후를 간파하고도 털어내는 손님들의 전대를 의식해 대피방송을 자제했던 삼풍백화점의 사장처럼, 문제를 인식하고도 입 다물고 싶을지 모른다. 체르노빌 핵발전소와 핵연료 공장이 거푸 폭발해도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을 강행하고,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가운데 삼협댐을 건설하며, 적조가 확산되는데 갯벌을 거듭 매립하는 무모함은 누구를 배려하는 배짱이던가.
추우면 석유 펑펑 태우며 여우 가죽 벗겨 입고, 더우면 핵발전소 가동하며 에어컨 팡팡 트는 사람은 정수기와 공기정화기로 환경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돋아 오르는 송전탑과 넘치는 방사성 물질은 백혈병과 뇌종양을 증가시키고 농약에 절은 농작물과 남용하는 항생제는 전에 없이 많은 사람에게 퇴행성질환을 유발시키는데, 생명공학을 떠받드는 사람은 서서히 더워지는 어항 속의 개구리처럼 근본이 위협받는 생태계의 변화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외면한다. 자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을 확신하기 때문일까. 집중호우도 예견하지 못하는 과학기술로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지 모르지만 똑똑한 사람이 아무리 기고만장해도 부처님 손바닥이다.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든 거대한 유리 돔 내부에 인공 생태계를 조성해보았지만 실패하고 만 사람들은 이제라도 자연 앞에서 좀 겸손해야 한다. 타이타닉 호가 방산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을 때, 삼풍백화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때, 자신이 탈 구명선을 확보하려 애쓰기보다, 먼저 빠져나가려 혼잡한 승객을 밀치기보다, 아직 타이타닉호의 방향키를 돌리거나 백화점 승객들을 대피시킬 여유가 있다면 근본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사람도 생물인 이상 사람에게도 맞는 환경이 있다. 승용차나 고층건물이 아니다. 자신의 데우고 있는 어항 속에서 헐떡거리는 사람은 이제 본연의 환경을 되찾아야 한다. 한대지방의 토끼는 통통해야 건강할 수 있듯, 사람들도 자신의 타고난 유전자에 맞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지구온난화의 징후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아직 제 땅에서 제 철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때, 제발 겸손하고, 부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생명이지, 철근 시멘트나 자동차를 뜯어 먹거나 반도체와 제 후손을 삶아먹는 괴물이 아닌 것이다. (환경과생명, 200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