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 경남 사천
경남사천 답사자료
* 일 시 : 2019.02.27. (넷째 수요일) 07:30 ~ 18:0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 – 흥사리 매향비 – 다솔사 – 조명군총 – 선진리성 -
- 점 심 ( 사천찐짜순대 식당 ) -
- 삼천포바다케이블/각산봉화대 – 대방진굴항 - 늑도 - 마산박물관 =
* 해설 : 고 명 천(답사회 회장) * 인솔 : 김 인 국(상임이사)
* * * 경상남도 사천시 * * *
경상남도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고성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남해에 접해 있으며 북쪽은 진주시와 접하고 있다.
- 전체 면적 : 398.24㎢
- 인구 : 117,054 (2019.01.31.)
- 행정구역 : 1읍 7면 6동
- 역사 - 삼한시대 변진 12국 중에 속함
신라시대 나해왕(209)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에 속함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한 때는 백제에 속함
- 1995.05.10.
도농 복합 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4948호에 의거
삼천포시와 사천군의 시군 통합, 사천시로 개칭
* * * 사천 흥사리 매향비
소재지 ; 곤양면흥사리산48
지정번호 : 보물 제 614 호(1978.03.08.)
규모 : 2㎡
매향비란 향나무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비를 세워 두는 것을 말함인데 다시 말해서 내세의 발원(소원을 비는 것)을 위하여 향을 강이나 바다에 잠기게 묻고 그 사실을 돌에 새겨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말 우왕(禑王) 13년(1387)에 세운 것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여 나라의 운명마저 불안해지자 승려 중심의 불교신자 4,100명이 향계를 맺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평안함을 미륵보살께 비옵니다”라는 뜻의 204자의 글을 새겨 놓았다.
* * * 다솔사[ 多率寺 ]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용산리 86).
이칭 ; 영악사(靈嶽寺), 영봉사(靈鳳寺)
511년(지증왕 12) 조사 연기가 창건하여 '영악사'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이 다시 '영봉사'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국사 도선이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다솔사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불자들의 순례지와 기도도량으로 신성시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적멸보궁(대웅전)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돼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다솔사 안심료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저술된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솔사는 우리나라 녹차의 태생지라 할 수 있습니다.
다솔사를 창건한 연기조사나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이 모두 이름 난 차승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차 씨앗을 심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솔사 뒤 봉명산 주위에는 1만여 평의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 * 다솔사 괘불도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623호 (2014.10.29.)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가로 421.0㎝, 세로 744.0㎝
본 아미타 괘불도는 아미타불·관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을 그린 괘불도로 삼존 아래 중단부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장 하단에는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있다.
* * 다솔사 대양루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83호(1974.02.12.)
규모 : 4,634.8㎡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고 폐허화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숙종 12년(1686)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10년 세월에 걸쳐 중창불사(: 절을 다시 이룩함)로 크게 중흥하였다. 그러나 62년이 지난 영조 24년(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재앙을 겪었다.
그리하여 영조 34년(1758)에 여러 스님이 또 합심하여 명부전과 대양루사왕문을 중건했다. 그런데 1914년 12월에 또 한번의 대화로 모든 전각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으나, 이 때 유독 대양루만은 그 화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누각은 맞배지붕의 2층으로 된 목조 기와 지붕으로서 높이가 13m나 되며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무거운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처음 건축 당시에는 사왕문이라 하여 아래층은 출입문 구실을 하였으나 뒤에 건물 왼편에 돌계단이 새로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로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 * 다솔사 극락전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48호(1985.11.07.)
규모 : 81.8㎡
다솔사 경내에 있는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목조와가의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다솔사의 연혁이 말해 주듯 크게는 임진란 때의 병화로 폐허가 되고 그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그러나 영조 24년(1748)에는 3전과 3당이 불타는 재앙을 겪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 또 한번의 화재로 대양루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그 이듬해부터 3년간 걸친 중창불사 끝에 현존한 것이 이 건물이다.
이 법당에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을 품은 부처 즉,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있고, 그 양쪽에는 극락정토에서 아미타불의 협시(좌우에서 가까이 모심)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는다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 * 다솔사 응진전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49호 (1985.11.07.)
규모 : 77.3㎡
다솔사 경내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목조와가의 맞배집이다. 이 전각도 앞서의 극락전과 같은 시기에 건립한 건물로서 건축구조도 역시 극락전과 동일하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 가섭(과거 7불의 여섯 번째 부처)과 아난다(석가의 십대 제자 중의 한 사람)를 비롯한 16나한을 모신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산스크리트 아라한을 음역한 것이다. 응공, 응진의 뜻을 지녔다.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자”,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하는 자” 즉 성자를 아라한이라 부른다.
* * 다솔사 안심요
다솔사에 있는 요사채
등신불의 모티브 ‘다솔사’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 김동리는 창작에만 집필 하고자 조용한 곳을 찾던 중 형의 소개로 다솔사에 머물게 된다. 다솔사의 요사채 안심요에 머물렀던 것이다. 《황토기》의 장사 와 절맥설 모티브, 《당고개 무당》의 당고개, 《황토기》와 《산제》의 주산, 《바위》의 다솔사 앞 장군석과 문둥이 마을 등 그의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사천 다솔사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다솔사에 얽힌 전설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황토기》이고 다솔사에 있었던 소신대를 바탕으로 한용운 스님과 범부 범술 세 분의 ‘소신공양’ 담론에 충격을 받고 쓰여진 작품이 《등신불》이다.
* * *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
소재지 ; 곤양면성내리195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287호(1982.11.04.)
규모 : 424㎡(약300년가량)
원래 이 비자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옛 곤양군 시절의 당시 읍성 안에 청사가 즐비해 있던 그 중 형방(죄인을 구치하던 곳)터였다고 전해지며 그 때 형방 앞뜰에 심어 놓은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고 한다. 두 그루 중 하나는 높이 21m, 둘레 5m 가량이며 또 한 그루는 지상에서 3~4m 높이의 줄기가 썩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겼는데 10여년 전 줄기가 꺾여 나갔다. 그러던 것이 가지가 새로 돋아나서 지금은 나무의 키가 약15m에 이르고 있다.
* * * 사천 조명군총
소재지 ; 용현면선진리402
지정번호 : 기념물 제80호(1985.11.07.)
규모 : 1,534㎡
조명군총은 조선조 선조 30년(1597) 1월에 왜적이 재침하여 일어난 정유재란 당시 선진리성(당시는 신채라고 함)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20칸(35m)의 방형분묘(네모반듯한 무덤)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해방 전까지는 무덤 위에 [당병공양탑]이라 쓰인 높이 1m 가량의 표석이 서 있었으나 해방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무덤만은 약 400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1985년 11월 7일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되어 조명군총이라 명명하여 보호되고 있다.
조명군총의 유래를 살펴볼 것 같으면 1597년 1월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에서는 9월 6일 괴산 근방 소사전투에서, 해상에서는 9월 16일 노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북진과 서진계획이 저지되자 전국에 일대전환이 왔다. 그리하여 일군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 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는 울산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순천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에 성을 쌓거나 또는 수축하고 분주하였다. 이때 사천지방에는 그해 10월부터 12월 3개월에 걸쳐 왜장 모리길성이 선진에 상륙하여 성을 수축한 것을 그 이듬해인 1598년 왜장 도진의홍 부자가 진을 쳤는데 명나라 동정군의 중로제독 동일원과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채, 곤양성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의 적도 크게 무찌른 후 10월 초하루에는 선진의 신채를 다그쳐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려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에 아군 진중의 폭약궤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란으로 적계의 역습을 받게 되어 아군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때 분사한 전사자의 수급을 적의 손으로 장사된 곳이 이 무덤인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베었다고 공칭하였으며, 도진의홍은 그의 부하인 후시래손좌위문에게 명하여 성 밖에다 사방 20간 되는 땅을 파서 수급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진승 졸사파가 장례를 집행한 후 ‘경관’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수한 수급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 공물로 본국에 보냈다고 도진의홍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전사한 명군의 수는 7~8천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어 3만 명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이총(耳塚) : 군총 옆에는 임진란 때 전공공물인 일본 경도 풍신수길묘 앞에 있는 이총(귀무덤)의 원혼을 환국하여 안장한 곳이 있다.
** 당병공양탑(唐兵供養塔)
* * * 선진리성
소재지 ; 용현면선진리 770일원
지정번호 :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 274 호 (1998.09.08.)
규모 : 76,637㎡
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5km 떨어진 선진리 북쪽의 얕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과 서쪽, 북쪽 3면은 바다에 임하고 있고 동쪽의 한 면만 육지와 이어져 있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축조한 일본식 성곽으로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되기도 한 전적지입니다.
석루가 무너져 현재는 토성과 문지, 장대지로 추측되는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입구 돌계단을 올라와 마주하는 성벽을 따라 성문을 통하면 천수각 터와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전적기념비(충령비)와 이곳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를 볼 수 있습니다.
* * * 대방진 굴항
소재지 ; 사천시대방동250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93호 (1983.12.20.)
규모 : 4,621㎡
대방진 굴항은 고려시대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구라량의 영이 있던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었다. 그 뒤 구라량이 폐영이 되면서 소규모의 선진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 말경 순조 때 비로소 이곳에 굴항을 축조하였다. 이 역사에는 진주목에서 관내 72개 면민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으며 굴항이 축조된 다음에는 이곳에 조곡 운송선과 전함이 정박했다.
* * * 각산봉수대
소재지 ; 사천시대방동산2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96 호 (1983.12.20.)
규모 : 896,7㎡
각산의 정상인 해발 408m의 고지에 있다. 이 봉수는 고려 때 설치된 간봉이며 남해의 금산에 있는 구정봉의 연락을 창선면 대방산을 거쳐서 받았으며 이를 다시, 고려 때부터 설치된 용현면의 침지 봉수와 곤양면의 우산 봉수로 보냈으며 조선시대 세종 때 봉수망의 정비로 침지봉수와 성황당 봉수를 폐지하고 용현면 안점 봉수를 다시 설치하여 서로 연락하였다. 또 한편으로 사량도의 공수산 봉수를 고성 하일면의 좌이산 봉수에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던 곳이다.
* * * 사천 늑도 유적지
소재지 ; 늑도동 일원
지정번호 : 사적지 제 450호(2003.06.23.)
규모 : 250,671㎡
늑도패총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점토대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유적으로써 신석기시대의 유물부터 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선사시대의 많은 주거지 등 생활관련 유물과 낙랑관련 유물 및 일본관련 유물 등 외래계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어 활발한 대외교역과 중개지로서의 기능을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학계에서는 각종 유구와 유물로 보아 삼한시대 문화상의 연구, 당시 한·중·일 간의 관계 교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로 평가되어 국정교과서에서도 실려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전시관건립을 촉구하게 되어 늑도 패총에서 출토된 인골, 동물유체, 석기, 토기, 철기 등 13,000여점 가운데 전시 가능한 유물 2,000여점을 선별하여 전시·연구용으로 활용할 계획이고 출토유물을 통한 삼한시대 남해안의 사회상과 문화상은 물론,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한·중·일 문화교류 관계의 연구산실로 활용할 계획이다.
마산문화유산답사회
첫댓글 이번 답사에서많은것을보고 마음속에도많이담아왔습니다!! 고회장님의 수고덕분이라생각됨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답사가 놀이로 그치지 아니하고,
관심과 보람되기를 바라면서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