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선수로 답사 6회차, 5월 16일.
오늘 나머지 여정을 모두 끝내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날씨는 아침과 달리 매우 더워지고 사진이 모두 뿌옇게 찍힐 정도로 미세먼지도 심하여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결국 최종목표 옥구저수지를 불과 3킬로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해가 지고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아 일정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신석(삼길천)크로스 -
삼길천의 이름이 출처불명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인근에 ‘삼길’이라는 지명이나 하천명 따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주장의 근거로 삼은 것인데, 사실은 삼길마을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이른바 삼길천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신석마을과는 27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삼길천’의 이름을 의심한 근거입니다. 더구나 남쪽 만경강으로 흘러드는 출구 배수문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신지(新池)배수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에 자연하천도 직선화하여 합하거나 없애거나 인공수로 시스템에 편입시키거나 하는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였으므로, 원래 삼길마을 인근을 통과하는 하천이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 탑천크로스 ~ 고척천(복천)크로스 -
‘삼길천잠관’에서 1.5킬로미터 지점에서 탑천 크로스를 만납니다.
번영각이라는 높은 전망대가 있어 먼 데서도 금방 눈에 띄는 경승지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도 하저 터널을 통과하여 대수로의 물이 건너갑니다. 탑천 자체가 매우 큰 자연하천이므로 규모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측하면서 접근합니다.
이 전망대와 부지는 이제 거의 일반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예목원'이라는 목공예 활동가의 작업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더구나 번영각 앞뒤 공간을 지저분하게 사용하고 있어 수로의 수질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고, 앞쪽 번영로(옛 「전군가도」)를 달리면서 보아도 유쾌한 풍경은 아닐 것 같습니다.
상류 쪽 수문에는 ‘國利民福(국리민복)’이라 휘호가 새겨진 이름판.
국리민복? 어느 나라의 이익이며 어느 국민의 행복 말인가? 라는 비꼬인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네요.
글 쓴 이는 ‘中村保吉(나카무라 호키치)’, 준공일은 ‘大正十年[1921년]’임을 겨우 읽어냈습니다. 백회로 메꾸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류 쪽 수문에는 ‘塔川潛管(탑천잠관)’, 글 쓴 이는 ‘篠原眞泰郞[시노하라 신타로오]’.
이쪽도 글씨를 읽어내기에 애 먹습니다.
하류 쪽에도 ‘탑천 전주매운탕’ 집이 있어 “수질이 괜찮을까”라는 우려가 절로 솟습니다.
많은 손님의 차로 북적이는 것을 보면 이 탑천이 오래 전부터 지역주민들에게 사랑받은 놀이터였던 것은 금방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익산천크로스를 시작으로 몇 개의 ‘잠관’을 보았지만, 요즘은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이 하저터널을 통과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8천분의1이라는 매우 느린 경사로는 자연스러운 흐름조차 원활하지 않을텐데 심지어 하천 아래를 통과하여 다시 올라오도록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습니다.
바로 그 양수장이 옆에 있는데 이름이 ‘입석양수장’입니다. 왜 입석이라는 이름일까? 궁금하여 인근 주민에게 물으니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이 하천의 끝에도 만경강과 만나는 자리, 옴서감서 쉼터에도 ‘입석배수문’이 있었지요. 입석리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런 리(里)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탑천을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습니다.
1.6킬로미터쯤 내려간 자리에 원두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쇠난간이 거의 다 삭아 떨어진 낡은 다리 옆에 새 다리를 지었군요. 낡은 다리에 한 사람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고기는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답니다.
이 다리 끝에 이곳이 군산구불길의 경로라는 나무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여기서 만경강 배수문까지는 1킬로미터쯤.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갑니다.
번영로와 나란히 흐르는 일직선 수로를 따라 2.2킬로미터를 간 자리에 또 만나는 크로스가 「복천잠관」입니다. 1백 년 전에 왜 복천이라 했는지, 지금은 왜 고척천이라 하는지 역시 매우 궁금합니다. 이곳에서 고척마을까지는 꽤 거리가 있고 그 마을을 통과하는 것도 아닌데.
번영로가 하천을 지나는 다리 이름이 ‘복교’. 예전에 이 개울 이름이 복천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터널 입구 쪽 높은 수문에 ‘年豐人樂(연풍인락)’ -농사는 풍작이고 사람은 즐겁다- 이라 휘호를 새긴 돌판이 붙어있는데, 글 쓴 사람 이름은 너무나 훼손이 심하여 도저히 읽을 수 없군요. 준공년도는 역시 1921년[大正10年].


이 터널에는 특이하게도 입구 쪽 수문 옆에 표지석이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화강암을 다듬은 굵기 20센티미터 가량의 4각기둥에 '대정십년육월 준공'이라 음각한.

이런 기둥은 진안에서도 본 적 있습니다.
은천마을숲 속에 「천연기념물 제86호 진안 줄사철나무 자생 북방한계지대」라 새긴 표지석이 그것입니다. 왜인들은 문화재나 천연기념물이 있는 곳에 이런 표지석(오벨리스크 형태)을 세우기를 좋아했고, 그것을 이어받아 해방 이후 우리 정부에서도 다소 다른 모양(넓적하고 둥근 머리)의 표지석을 세웠지요. 그런데 글씨나 새김[刻]의 수준은 많이 다른 것이 안타깝습니다.


고척천 상류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봅니다.
대수로 지역에서 이런 하천안내판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군산시장이 고척천이라 정의했고 안전총괄과가 책임지고 유지·관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설 옆에 고인 물은 정화를 기다리는 탁한 물인 듯.
고척천 하류 쪽으로도 긴 줄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시간을 너무 뺏기므로 굳이 따라가지 않기로 합니다.



다시 대수로의 본류로 돌아와 하류 출구 쪽으로 건너갑니다.
잠관의 출구 구조물에 ‘福川潛管(복천잠관)’이라 쓴 화강암 석판. 글 쓴 이는 ‘中村光吉(나카무라 미츠요시)’, 역시 1921년 준공입니다. ‘中村光吉’은 앞서 탑천 크로스에서 본 ‘中村保吉’과 많이 닮은 이름이군요. 혹시 형제간이었을까, 추측합니다.

고척천 크로스도 예전에 지은 일본인의 터널도수관은 이제 쓰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수문을 짓고 강력한 모터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옛 수문을 철거하지 않는 것은 잘 하는 일입니다. 조금 더 희망을 말한다면, 새로운 공사나 추가사업을 할 때 내력을 모르는 공사인원들이 함부로 다루지 않도록 ‘문화적 관점’에서의 시공설계와 감독을 병행해 주면 더 좋겠네요.
- 대야면 ~ 옛정미소 ~ 대야역 -
이미 대야면에 들어섰습니다. 대수로는 이제 번영로와 갈라서서 서쪽을 향하고 흐릅니다. 고속철도의 고가교 건설공사가 한창이어서 가끔 길이 통하지 않기도 하는 복잡한 구간을 걸어야 합니다.

고척천 크로스에서 2.7킬로미터를 이동.
남우삼거리를 지날 무렵 대수로의 물흐름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고척천 크로스에서 물을 품어 올리지 않고 있더니 역시 수압이 약해진 듯.
더구나 남우삼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자연하천(?) 한 줄기가 대수로를 따라 나란히 있는데 무려 1.3킬로미터나 계속됩니다. 즉, 대수로의 한쪽 둑이 자연하천의 둑을 겸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수로가 생기기 전에는 이 자연하천이 이 일대의 관개용수였을 듯하네요. 군데군데 수문이 있고 관리하던 흔적은 있지만 이미 물은 썩었습니다.

(위 사진 : 굴뚝처럼 생긴 이런 구조물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용도가 뭘까요? 폐수나 논밭의 가스를 뽑아내는 장치?)





화려한 4대강사업의 그늘 뒤 어두운 면도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손님대접 받는 대수로만 잘 되어 있고 예전부터 쓰던 자연하천이나 동네 개울은 고여서 썩어가는. 인근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새삼스럽게 대수로에 의존해야 하는 상대적 피해.
둑길은 걷기 힘듭니다. 한 구간을 온통 차지해서 농사짓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도 하고, 사실은 북쪽 대야면의 번화함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특히 카페 「리즈리」의 ‘거대한 노란 벽간판’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침 너무 덥고 점심 먹을 때이기도 하여 대수로를 벗어나 잠시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