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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관하여」,「우정에 관하여」
나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노년에 대한 문제인 것 같다. 어떻게? 더 즐겁게, 더 보람차게, 좀 더 잘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만난 책이 이 책이다. BC 45년경에 로마에 살던 사람이 쓴 고전 중의 고전으로, 우리로 치면 신라가 나라를 형성하던 그 무렵이지만 BC 753년에 건국된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문화가 한창 무르익던 시절에 쓰진 책이다.
저자는 BC 106년부터 BC 43년까지 63살을 살다 간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Cicero)로 웅변가, 정치가, 철학자·문인으로, 또 수사학의 대가로 고대 라틴 산문의 창조자며 완성자이다. 그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110㎞ 떨어진 아르피나움에서 기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법률과 철학을 공부한 뒤에 변호사가 되어 굴직한 사건의 변론을 맡아 승소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기원전 69년에 조영관(aedilis), 66년에 법정관(praetor), 63년에는 로마 최고의 정치지도자인 집정관(consul)이 되었다.
그는 제정(帝政)에 반대한 공화정(共和政)의 붕괴를 막기 위해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카이사르와 반목하여 은둔 생활을 하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정계에 복귀했으나 기원전 43년 자신이 탄핵했던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끝까지 주장했던 공화정은 로마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으며, 고전 문화에 대한 공헌 또한 불멸의 것이 되었다. 그의 저술은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사상은 문명화된 가치 체계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국가론』『법률에 관하여』『웅변가에 관하여』『부루투스』『웅변가』『최고선과 최고악』『투스클룸에서의 담론』『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운명에 관하여』『노선에 관하여』『노년에 관하여』『우정에 관하여』『예언에 관하여』『의무에 관하여』등 주옥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은 〈노년에 관하여〉와 〈우정에 관하여〉이 두 권을 한 권으로 묶은 것으로 『노년에 관하여』는 키케로가 평생지기였던 아티쿠스에게 헌정한 것으로 그가 62세 되던 해, 기원전 150년 84세였던 ‘카토’라고 하는 실존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노년의 짐을 어떻게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지, 노년에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카토 자신의 경험과 선현들의 이야기, 책을 통해 접한 고대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포도주가 오래되었다고 모두 시어지지 않듯이, 늙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비참해지거나 황량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의미 있게 즐길 수 있는 노년이 있다고 역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노년에 관하여〉에서 ‘카토’는 노년에 관한 불평을 반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노년에도 정치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체력 저하는 절도 있는 생활로 늦출 수 있으며, 정신활동을 늘임으로써 체력에서 잃은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 감퇴는 오히려 노년의 큰 축복이다. 그래야만 정신이 제대로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이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노년에도 정신활동과 농사일을 통해 절도 있는 쾌락을 즐길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인생의 모든 시기가 죽음에 노출되어 있다. 노인은 젊은이가 바라는 것, 즉 장수를 이미 누렸다는 점에서 젊은이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은 재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영혼이 불멸한다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카토’는 “대담을 하게 된 계기를 되돌아보고 영혼은 불멸한다는 믿음을 고백한다. 이를 부인하는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을 비판하며 젊은 대담자 ‘스키피오’와 ‘라일리우스’도 자기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한다”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자, 이제 ‘카토’의 입을 빌려 ‘키케로’의 사상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생각건대 노년이 되어 가장 비참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성가신 존재가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거지”카이킬리우스의 이 말에 카토는 말한다. “노년은 성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다네! 마치 현명한 노인들이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젊은이들을 보고 좋아하고 젊은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음으로써 노년이 더 수월해지듯이, 젊은이들도 덕을 닦도록 이끌어주는 노인들의 지도를 좋아한다네. 자네들이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 못지않게 나도 자네들에게 즐거움을 준다고 나는 생각하네. (…)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 새로운 것을 더 배우는 사람들도 있다네. 이를테면 솔론(아테나이의 입법자 겸 시인)의 경우가 그러하네. 우리도 알다시피 그는 자신이 쓴 시구에서 자기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더 배우면서 노인이 되어간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말일세. 나도 그렇다네 나는 노인이 되어서야 그리스어를 배웠으니 말일세. (…) 소크라테스가 즐겨 배우던 현악기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말을 듣고는 나도 그렇게 해보기로 하였다네. 아무튼 그리스어만큼은 열심히 배웠다네”
“내 이야기로 돌아가겠네. 나는 여든네 살이지만 지금 나는 내가 병사로 그리고 또 재정관으로 포이니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히스파니아에서, 또는 그보다 4년 뒤엔 마니우스 글라브리오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 연대장으로 테르모펠라이에서 싸웠을 때와 같은 체력은 없지만, 그래도 자네들도 보다시피 노령이 나를 완전히 약골로 만들거나 기를 꺾어놓은 것은 아니라고 말일세. (…) ‘오랫동안 노인으로 남으려면 일찍 노인이 되라’고 하는 옛 속담에 나는 결코 동의 하지 않네. 나로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노인이 되느니 차라리 잠시 노인이 되고 싶다네. 그래서 나는 나와 면담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만나주기를 거절한 적이 없다네”
“밀론(남이탈리아 출신 운동선수)은 어깨에 황소를 매고 올림피아 경주로를 따라 걸었다고 하네. 자네들은 밀론의 체력과 피타고라스의 정신력 가운데 어느 것이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더 바라는가? 힘이 있으면 재산을 쓰되, 없다고 아쉬워하지는 말게나. 청년이 소년시절을, 장년이 청년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인생의 주로(走路)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 번만 가게 되어 있지.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스키피오여! 자네 조부님의 친구인 마시닛사는 지금 아흔 살로 어떻게 지내는지 자네도 들었으리라 생각하네. 그는 도보로 여행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출발하면 말에서 내리지 않네. 아무리 비가 오고 아무리 추워도 그는 머리에 모자를 쓰는 법이 없네. 그리하여 그는 강인한 체력으로 왕이 해야 할 업무를 몸소 처리하고 있지. 따라서 노년에도 훈련과 절제를 통해 이전의 체력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다네”
“이미 연로해진 소포클레스에게 어떤 사람이 아직도 성적 접촉을 즐기느냐고 묻자 ‘아이고, 맙소사! 사납고 잔인한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제 나는 막 거기서 빠져나왔소이다’라고 대답했다네. 그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아마도 혐오스럽고 괴로운 일이 되겠지만, 그런 것에 물리고 신물이 난 사람들에게는 즐기는 편보다 없는 편이 더 즐겁다네. 하지만 아쉽지 않은 사람은 결핍도 느끼지 못한다네. 그런고로 나는 아쉽지 않은 것이 더 즐거운 법이라고 말하는 거라네. 암비비우스 투르피오(가토 시대 인기 배우이자 연출가)는 맨 앞줄의 관객에게 큰 즐거움을 주겠지만 맨 뒷줄의 관객에게도 즐거움을 주듯이, 마찬가지로 성적 접촉에서도 젊은이들은 가까이에서 보기 때문에 더 많은 쾌감을 느끼지만 멀리서 보는 노인도 거기에서 충분한 쾌감을 느낀다네”
“노인은 고집이 세고, 불안해하고, 화를 잘 내고, 괴팍스럽다고들 하네. 알고 보면 어떤 노인은 인색하기까지 하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성격상의 결함이지 노년의 결함이 아닐세. 그리고 고집과 방금 언급한 다른 악덕들에는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용납할 수 있는 것 같은 변명거리가 있다네. 말하자면 노인들은 자신들이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일세. 또 몸이 허약해지면 사소한 공격도 싫은 법이지. 그러나 이 모든 결점은 좋은 성품과 교육에 의해 개선될 수 있네. 노년의 탐욕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네. 나그넷길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노자(路資)를 더 마련하려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끝이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내게는 길다고 여겨지지 않네. 끝이 오면 이미 지나간 것은 사라져버리니까 말일세, 남는 것은 자네가 미덕과 올바른 행동으로 이룩한 것뿐이라네. 시간과 날과 달과 해는 흘러가고 과거는 돌아오지 않으며,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에 만족해야 하네. 주어진 수명이 짧다 해도 훌륭하고 명예롭게 살기에는 충분히 길다네. 마치 과일이 설익었을 때는 따기가 힘들지만 농익었을 때는 저절로 떨어지듯이 젊은이에게는 폭력이, 노인들에게는 완숙이 목숨을 앗아간다네. 내게는 이런 완숙이란 생각이 몹시도 즐겁다네. 내가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드디어 육지를 발견하고 항구에 들어서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
“가장 현명한 자는 누구나 가장 평온한 마음으로 죽는데 가장 어리석은 자는 왜 마지못해 죽는 것일까? 더 많이 더 멀리 보는 영혼은 자신이 더 나은 곳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알지만 시력이 무딘 영혼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무튼 나는 내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자네들 부친들을 만나보고 싶은 열망에 들떠 있네. 하지만 내가 그분들을 보러 일단 출발하면 어느 누구도 나를 뒤로 끌어당기거나, 펠리아스처럼 나를 꿇어 회춘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설사 요람에서 울게 해주겠다고 해도 나는 단호히 거절하겠네. 말하자면 경주가 다 끝난 지금 나는 결승선에서 출발선으로 도로 소환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네”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이라면 사람은 역시 적절한 때에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네. 자연은 모든 것에도 그렇지만 삶에도 한계를 정해 놓았기 때문일세. 노년은 인생이라는 연극의 마지막 장인 만큼 거기에서 기진맥진해지는 것은 피해야 하네. 인생에 물렸을 때는 특히 그러하네. 이것이 노년에 관한 내 견해일세. 나는 자네들 둘 다 노년에 이르러 나에게 들은 것이 사실임을 실제 경험을 통해 인정하게 되기를 바라네”
【2】〈우정에 관하여〉는 기원전 44년 써졌으며 키케로의 평생지기 앗티쿠스에게 헌정되었다. 기원전 129년 라일리우스가 사위들인 판니우스와 스카이볼라를 정원에 불러놓고 들려준 대화편으로 키케로가 젊었을 때 ‘스카이볼라’문하에서 법률을 공부했는데 그때 스승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장인인 라일리우스는 사위 둘의 질문을 받고 우정의 본질이 무엇이며, 지켜야 할 원칙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준다.‘우정은 미덕에 기초하고 미덕에 의해 유지되며, 우정의 핵심인 조화와 신뢰는 미덕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내용이다.
격조 높고 차분하며 운치 있는 문장으로 키케로의 대화편 중에서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우정에 관하여」는 단테(1265∼1321)가 자신이 동경한 여인 ‘베아트리체’가 죽은 뒤에 이 글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우정의 본질은 이익 추구가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다. 우정을 향한 충동은 우리 안에 내재하며 타인에게서 미덕을 보자마자 깨어난다. 우정은 서로 주고받을 때 두드러진다”고 한 라일리우스의 이야기를 통해 키케로를 만나본다.
“자연이야말로 올바른 삶을 위한 최선의 길잡이이네.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나 누구나 서로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렇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자연이라고 나는 믿는다네. 가까운 관계일수록 인연도 더 강해진다네. 그래서 인연은 이방인들 사이에서보다 동포와 시민들 사이에서, 타인들 사이에서보다 친척들 사이에서 더 강한 법이라네. 이방인들이고 서로 낯선 사이에서도 자연은 우정을 맺어주긴 하지만 그런 우정은 기초가 그리 튼튼하지 못하지. 진정한 우정은 인척 관계보다 더 힘이 있네. 인척 관계는 선의(善意-호의) 없이 존재해도 우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네. 우정에서 선의가 빠지면 우정이라 할 수 없지만, 인척 관계는 선의가 빠져도 존재하니까 말일세”
“우정(amicitia)이란 말은 사랑(amor)에서 파생되었는데, 사랑이란 이해관계를 떠나 선의를 맺어주는 것 아닌가. 우정을 가장하여 누군가에게 아부하고 순간의 필요 때문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가끔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네. 그러나 진정한 우정에는 가짜와 가장(假裝)이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진짜고 자발적이라네. 우정은 필요보다는 우리의 본성에서 얼마만큼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냐 하는 계산보다는 사랑의 감정과 결합된 호감에서 비롯된 것 같네. 이러한 감정이 어떤 성질인지는 많은 동물들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네. 동물들은 특정한 시기가 될 때까지 새끼들을 사랑하고 또 새끼들한테 사랑받는 까닭에 그 감정은 쉬이 드러나지. 사람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분명히 드러난다네”
“우정에도 규칙이라는 게 있네. 친구들에게 옳지 못한 것은 요구하지 말 것이며, 친구를 위해 옳은 것만 행하되 부탁해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항상 돕겠다는 열성을 보이고 꾸물대지 말며, 충고는 꺼리킴 없이 솔직하게 해야 하네. 좋은 충고를 해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가 하는 말을 항상 귀담아 듣도록 하게나. 또 자네가 친구를 위해 충고할 때는 영향력을 발휘하되 친구로서 솔직히, 필요에 따라서는 엄하게 하게나. 그리고 자네가 엄한 충고를 들을 때는 귀를 기울이되 충고받은 대로 행하게나 (…) 행복한 삶의 요체는 근심으로부터의 해방인데,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위해 염려하게 되면 그 누구도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네”
“근심으로부터 도망치다가는 미덕으로부터도 도망쳐야 하네. 왜냐하면 선의가 악의를, 절제가 방종을, 용기가 비겁을 거부하고 미워하듯, 미덕은 자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고 미워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어떤 근심 같은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지. 외로운 자들이 불의로, 용감한 자들이 비겁으로, 절제 있는 자들이 방종으로 가장 괴로워한다네. 따라서 마음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은 것은 반기고 그 반대의 것에는 괴로워하기 마련이라네. (…) 친구 때문에 가끔은 괴로워해야 한다고 해서 인생에서 우정을 송두리째 도려내서는 안 된다네. 미덕이 근심과 번거로움을 수반한다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 되는 것 못지않게 말일세”
“내가 거듭 말하지만 평가하고 나서 친구를 사랑해야지 사랑하고 나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네. 우리는 부주의했던 탓에 벌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친구를 고르고 사귀는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네. 우리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짓을 하는데 이것은 속담이 금하는 일이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날마다 만나거나 또는 호의를 주고받음으로써 서로 얽힌 다음, 우정이 한창 무르익는 도중에 갑자기 어떤 불쾌한 일이 생겨 갈라서게 되는 것이라네. (…) 어떤 신이 우리를 이 번잡한 세상에서 들어 올려 어딘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고는 그곳에다 우리 본성이 바라는 것을 무엇이든 풍족하게 대주되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했다고 가정해 보게나. 무쇠 같은 인간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생활을 배겨낼 수 있겠는가? 고독이 온갖 즐거움을 앗아가 버리지 않겠는가? 인간의 본성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여 언제나 버팀목에 기댄다네. 그리고 절친한 친구야말로 최상의 버팀목이지”
“내 친구 테렌티우스(BC 193∼159, 희극작가)는 ‘사근사근함은 친구를 낳고, 바른말은 미움을 낳는다’(「안드로스의 여인」69행)고 했는데, 바른말에서 우정의 독毒인 미움이 태어난다면 바른말은 성가신 것이네. 그러나 사근사근함은 훨씬 더 성가시다네. 왜냐하면 사근사근함은 나쁜 것에 대하여 관대함으로써 친구가 파멸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게 하기 때문일세. 가장 큰 잘못은 바른말을 외면할 뿐 아니라 사근사근함으로 인하여 자기기만에 빠지는 자에게 있네. 따라서 이런 일에는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충고에 거슬리지 않게 질책은 모욕적이지 않게 해야 하네.
테렌티우스의 말처럼 우리가 사근사근할 경우에도 상냥하게는 대하되 수많은 악덕의 하수인인 맞장구와는 멀리하게나. 맞장구는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민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네. 독재자와 사는 것 다르고 친구와 사는 것 다르기 때문일세”
“판니우스와 무키우스(스카이볼라)여, 내 거듭 말하거니와 우정을 맺어주는 것도 미덕이고, 우정을 지켜주는 것도 미덕이라네. 조화와 안정과 신뢰는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다네. 미덕이 고개를 들어 제 빛을 드러내며 남에게서 똑같은 빛을 보고 그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쪽으로 움직이며 남이 가진 것을 서로 받아들인다네. 그 결과 사랑(amor) 또는 우정(amicitia)이 타오르기 시작하지. 이 두 단어는 ‘사랑하다(amane)’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기에 하는 말일세. ‘사랑한다’함은 사랑의 대상을 필요나 이익을 떠나 자진해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네. 자네가 특별히 이익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우정에서는 이익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네. (…)
이상이 내가 우정에 관해 말하려 했던 것들이네. 내 자네들에게 충고하건데, 우정은 미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미덕을 높이 평가하되 미덕 다음에는 우정보다 더 탁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명심해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