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75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전혀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이 기사를 노아의 무지개 언약 이후 이어지는 아브람의 언약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노아에게 나타나신 이후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억이나 증언에 무관하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10대 할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그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당연히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브람에 대한 사명의 부여이다. 하나님은 75세의 아브람에게 멀고 낯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의 말로 바꾸면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있어서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요나서 1장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셨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 욥바로 내려갔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 말씀에 순종했다. 아브람에게도 요나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은 익숙하고 낯익은 환경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낯설고 먼 타국에서의 삶은 하루하루가 긴장과 피곤함의 연속이다. 무슨 일을 한 가지 할 때마다 매번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에 대한 인정도 용인도 없다. 항상 본인이 정당하고 선하며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살아야 한다. 요나에게도 아브람에게도 이 일은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이겠는가? 더구나 요나는 왕으로부터 인정받는선지자였다. 부와 명예가 다 있는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당시 적국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라는 것이므로, 요나의 도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아브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브람은 도망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했다.
아브람의 기사에서 호기심 어린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땅에서 복을 받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울려 잘 대해주고 함께 살면 그들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좀 억울하지 않을까?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누리면서 성도들과 잘 지내기만 하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무슨 이유로 낯설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래서 창세기 12장의 기사를 언약의 측면이 아니라 사명의 측면에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명을 아브람에게 주신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축복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흘러가도록 하는 축복의 통로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아브람에게 사명을 주신 목적이다. 우리가 무엇때문에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며 목회를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개척하는가? 그것은 바로 성도들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함이다. 교회 사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한 축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명을 아브람은 75세에 받았다. 낯설고 힘든 타국 생활을 감당하기에 결코 수월한 나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순종했다. 나중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익숙함과의 결별을 마다하지 않은 순종이었다. 믿음은 순종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들음에서 믿음이라는 개념이 발출되지만 그 믿음은 순종이 없으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순종의 연습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