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4가지의 기본 입장과 그 오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철학자는 칸트(Immanuel Kant,1724-1804)입니다. 그는 여전히 기독교라는 중심 기둥 안에서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분석하고 들여다 보았습니다. 칸트는 예술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쾌감과는 다른 것으로 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쾌락주의를 배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에서 오는 만족은 직접적이고 소모적인 향락의 수단으로부터 해방된 무관심적 만족이다. 예술적 체험은 향락적인 미적 취미를 버릴 때만 자율적이다. 물론 예술적 체험에 이르는 과정은 무관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같은 주장을 한 것은 미적 반응이 인간의 직접적인 욕구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즉 예술은 고상하고 숭고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예술을 멋대로 더듬어 찾고 맛보려는 탐욕적인 속물적 태도로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이러한 논리대로 미와 아름다움을 전개시킨다면 세계 미술사에서 나타난 수많은 미술품 중에 아주 극소수 만의
것에 예술성과 미적가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플라톤적 관념의 아름다움을 계승해 더욱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것에 경계를 긋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미적 가치관은 인간의 몸에서 시작된 욕망, 생존적인 욕구로 출발한
미의식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칸트는 그의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미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네 가지의 기본적 관점을 제시합니다. 첫 째 무관심성, 둘 째 무 개념성, 셋 째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 넷 째 주관적 필연성입니다. 물론 이같은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은 기존 서구의 전통적인 관념성,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전통 사회로 형성된 사고의 체계를 기반으로 세워진 이론이므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실재로 나타난 미술계에 적용할 수 없는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모순들을 쉽게 풀어보면 첫 째 무관심성에 대해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취미는 어떤 대상 또는 어떤 표상방식을 일체의 관심없이 만족이나 불만족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다. 그와 같은 만족의 대상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같이 말하는 까닭은 미적 판단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관심이나 예전에 경험했던 것에 대한 관심, 지적인 관심 등, 모든 관심에서 자유로운 관심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대로 이런 무관심은 동양의 도가나 노장사상에서 주장하는 탈속의 경지로 신선도의 경지에 든 철학자만 가능할 것입니다. 몰론 이것은 흥미나 재미를 느끼고 출발한 미의식이 부정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거나 느끼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욕구와 흥미 혹은 재미의 가능성에서 시작됩니다. 19세기 이전의 전통적인 아카데미 미술의 입장에선 타당한 이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이 기준으로 본다면 19세기 이후의 대부분의 예술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예술이 개인의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둘째 ‘무개념성’은 칸트의 ‘ 개념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은 아름답다’는 주장은
미적 판단이란 어떤 ‘대상들을 보고 그것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하고 비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사람의 주관적인 이해와 판단’이란 생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개념’이라는 것은 기존 사고의 보편적 체계, 즉 기존의 지식으로 된 사고의 체계를 말합니다.
만약 칸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20세기의 선험적 지식을 부정하는 미적 견해들을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순수의식을 추구한 것에서 출발한 아주 고상한 것임은 저도 인정합니다.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그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도 의문입니다. 실재로 아주 드물게 ‘무개념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 같은 아름다움이 표현된 미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무개념성’을 드러낸 미의식의 표현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특히 20세기의 미술이나 오늘날의 미술에선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는 합목적성이 목적의 표상 없이도 대상에서 지각되는 한에서, 그 대상의 합목적의 형식이다.’ 그의 ‘목적없는 합목적성’의 개념은 사실 단순히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일정한 목적성이 없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합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식물이 피고 지는 것은 자연적 섭리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도 우주와 자연의 조건에선 합목적이 될수도 있을 겁니다.
그의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라는 항을 구체적으로 미술계에 대입하면 역으로 중세부터19세기 이전의 대부분의 미술이나 예술은 그의 미적기존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세 기독교 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19세기 서구의 미술은 대부분 철저한 종교적 목적성과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미술은 후원자와 그것이 필요한 장소와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들어 카라바조의 그림 ‘순례자’ 같이 이 목적성과 합목적성을 갖추지 못하면 주문자에 의해 가치가 부정되고 거절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주관적 필연성’은 그의 말 ‘개념없이 필연적인 만족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르름답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필연성’의 뜻입니다. 칸트의 미적 판단의 필연성은 ‘어떤 대상을 보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할 때, 이 판단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필연성’입니다.
미와 예술에 대한 판단이 주관성의 입장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타당한 판단이란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고가 사회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그것이 공감이라는 정서를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당연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된 정서’로 형성된 ‘공통된 감각’을 전제로 합니다. 즉 칸트가 주장한 무개념성에 도달할 수없는 일정한 개념적 사회 안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이상적 논리일 뿐입니다. 그 개념없이 통용되는 미의식의 사회에 만약 다른 문화권의 사람이 들어설 때는 반드시 개념으로 무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서구의 문화에 들어서기 위해선 기독교라는 개념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고 이슬람의 문화권에 들어서서 보편성을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생각은 서구의 한 시대의 제한된 사고로 출발한 그저 이상적 이론으로 관념적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더욱 칸트가 추구한 객관성 보편성이 그의 지역문화와 그가 생존한 시대성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적 절충된 미의식의 세계를 오늘날에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현실의 세계에서 만들어졌듯이 칸트의 관념 세계도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됨으로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전하현의 새 저서 <미술(예술)이란 무엇인가> 중의 2부의
-칸트의 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4가지의 기본 입장과 그 오류 입니다. ...................................................................................................................
2부: 미의식이 예술이 되기까지
-미의식이 미적행위로
-미적행위가 예술(미술)작품으로
-미적가치와 예술작품의 가치
-사물(유물)-미적 사물- 예술작품
역사적 전환기에 미적행위와 사물에 예술이란 이름을 준 사상가들
-동양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움과 예술
-노자와 장자가 이룬 동양의 조형미
-공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예술
-불교의 경전과 종교적 상징이 미친 예술과 미의 사상
-21세기에 다시 발현되는 무가, 무교의 미사상
-플라톤의 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보는 눈
예술이란 무엇이지?
-칸트의 미와 아름다움에 대한 4가지의 기본 입장과 그 오류
-헤겔의 미술사관에서 보이는 문제들
-미란 ‘삶’ 혹은 ‘일상의 노동’에서 일어서는 것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예술
-그림은 누구의 그림인가, 존재와 무 - 하이데거와 반 고흐의 구두
-문화와 예술은 성적 에너지가 승화된 것 -프로이드로 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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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 -퐁티의 눈과 시각
-미술작품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그 사회를 규정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반응’
-푸코의 미술 해석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것이다‘ -라깡이 보는 ‘시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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