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同床異夢)
2014년 11월 18일, 만 59세인 하 권사가 죽었다. 10월 초에 정읍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갔다. 어깨와 허리가 몹시 아파서 입원했다고 했다. 우리는 권사님이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연골이 닳았나 봐요, 라고 하며 가벼운 병문안을 하고 돌아왔다. 며칠 후 전주에 있는 종합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다시 며칠 후 종합병원 암센터에서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 손 쓸 수가 없으므로 퇴원하라고 해서 전주 근교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권사님의 남편이 어느 누구도 병문안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체 전화를 받지 않고 소식을 두절시켜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한 동네 사는 장 권사가 “목사님도 지금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장 권사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 권사의 남편이 성질이 고약하므로 아내의 사형 선고가 내려진 마당에 아무에게라도 폭언과 횡포를 부릴 수가 있으니 목사님의 위신과 안전을 위해 충고한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성도의 불신자 가족에게서 폭언과 횡포를 당할지언정 위기에 처한 때에 자기 몸의 안위를 위해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부부는 수십 번의 전화 연결을 시도한 끝에 간신히 하 권사의 외동딸과 연락이 되었다. 아마도 누구의 전화도 받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잠시 잊고 부지중에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딸을 통해 병원 이름을 알아낸 우리는 10월 17일 금요일 밤에 병문안을 갔다. 병원 마당에 주차를 하고 보니 곁에 하 권사 남편의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는 복도에서 만난 간호사에게서 하 권사의 입원실을 알아 낸 후, “하나님, 하 권사 가족이 마음을 열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마침 남편, 딸, 아들이 모두 병원에 있었다. 먼저 가족실에서 남편과 딸에게서 하 권사의 병세를 들었다.
“◯◯병원 암센터에서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 길면 6개월 살 수 있다고 내보냈어요.”
하 권사 남편은 평생 아내의 속만 썩이던 사람으로서는 의외라 싶게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하 권사 불쌍해서 어쩌지요? 라고 물었다. 목사님은 남편과 딸에게 의사가 포기했으니 이제 남은 방법은 한 가지, 하나님께 맡기는 거라고 설명했다.
“암 환자로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의사가 포기한 사람과 의사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어요. 그리고 암 환자 가운데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힘껏 도울 테니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의지해 보시렵니까?”
남편과 딸은 목사님의 권면에 희망을 갖고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다음 날 하 권사 가족은 하 권사를 퇴원시켜 집으로 왔다. 토요일 밤, 우리 부부는 그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 권사의 암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다. 월요일에는 자연치유에 관심이 많은 담양의 김 목사님을 찾아갔다. 김 목사님은 암을 이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연치유법을 제안했다. 구운 마늘과 죽염 요법, 미네랄 요법, 16과탕 요법 등. 병원에서 포기한 암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치료법을 제안 받아 돌아오는 길에 하 권사와 그 가족들은 힘이 솟았다. 김 목사님의 생기방에서 하루 동안 노폐물을 빼고 오고 싶었는데, 하 권사를 병문안하기 위해 서울에서 시누이들이 온다 해서 오전에만 생기방에서 땀을 빼고 정오에 출발하여 돌아왔다.
하 권사에게는 두 부류의 시누이들이 있다. 하나는 큰시어머니 딸들이다. 큰시어머니가 딸만 내리 여섯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리하여 둘째 부인을 얻어 첫아들을 낳고 아래로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두 어머니는 모두 믿음을 가졌고 한 집에서 사이좋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죽자 아들은 배다른 누이들의 부추김을 받아 자기를 낳은 어머니와 친동생들을 쫓아냈다. 어머니는 멀리 쫓겨나 어린 자식들과 가난하게 살았다. 배다른 누나들은 잘 배우고 넉넉한 집으로 시집을 가서 모두 잘 살았다. 친동생들은 배우지도 못하고 결혼 후에도 모두 힘들게 살았으나 어머니의 믿음을 물려받아 모두 예수를 믿었다. 하 권사는 처음 시집을 왔을 때부터 남편을 따라 배다른 시누이들과 친하게 지냈으나 친시누이들과는 두절하고 지냈다. 배다른 시누이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보태주므로 하 권사는 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난 후에도 머리로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마음이 바꿔지지 않았다. 중년에 하 권사도 예수를 알게 되었고 권사에 취임을 하게 되었다. 권사로서의 그녀의 양심은 더욱 더 괴로웠다.
하권사의 시누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 중 하나는 철저한 불교도였다. 그들은 제사를 잘 지내야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하권사의 시어머니는 우리 교회 초창기 성도로서 예수를 잘 믿고 살다가 돌아가셨다는데 자식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지 못했다. 시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이면 친정에 몰려와 제사를 거창하게 지내곤 했다. 하 권사는 교회를 안 다닐 때에는 제사가 뭔지도 모르고 열심히 음식을 장만하여 시누이들을 만족시키곤 했다. 그러나 권사가 된 후에는 그러한 제사는 귀신에게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으므로 기일만 돌아오면 며칠 전부터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 제사를 끝내고 시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며칠 동안 끙끙 앓곤 했다. 장 권사는 그런 하 권사에게 자기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믿음의 사람은 끊어야 할 것은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러나 하 권사는 그러하지 못했다.
믿음으로 해보겠다고 목사님에게 굳게 약속한 날 오후에 배다른 시누이들이 몰려왔다. 시누이들은 오기 전에 무당에게 들러 처방책을 가져 왔다. 악귀가 하 권사를 암에 걸리게 했으므로 대문 앞에다 고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 권사 남편은 목사님과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누이들과 함께 대문 앞에 상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 그날 밤 갑자기 하 권사는 온 몸에 열이 나고 의식이 가물거려 말도 못하게 되어 119를 불러 병원에 입원했다.
하 권사가 며칠 후 퇴원해서 집에 있다 해서 우리 부부는 심방을 했다. 목사님은 하 권사에게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겠느냐고 물었다. 하 권사는 진통제로 인하여 졸음에 겨운 눈을 겨우 뜨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회는 특별 기도를 선포하고 매일 새벽기도회, 수요일밤예배, 금요기도회 때 하 권사의 병 낫기를 위해 모인 성도들이 간절하게 기도했다.
며칠 후 시누이들은 또 다시 무당에게 물어 처방책을 남동생에게 알려주었다. 남동생을 낳은 어머니의 무덤을 잘못 써서 그러니 그 무덤을 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주말에 하 권사는 또 다시 악화되어 입원했다. 우리 부부는 날마다 병원을 찾아가서 성경을 읽어주고 하 권사의 치유를 바라는 기도를 했다. 그러나 하 권사의 남편은 틈틈이 어머니의 무덤 이장에 대한 일, 하 권사의 무덤 미리 파놓는 일, 장례 준비 등을 하고 있었다. 김 목사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니 하나님께 하 권사를 고쳐달라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고쳐주십니다. 이럴 때에는 가족이, 특히 남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니 저희와 함께 힘을 합쳐 믿음으로 나갑시다”라고 말하면 입으로는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서는 행동은 전혀 다르게 하곤 했다. 남편이 아내의 장례를 준비하면 할수록 그녀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가더니 결국 의사의 사형 선고가 내려진 지 한 달 만에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