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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4
마태복음 2:1-12
동방 박사들의 경배
복음서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로 전하면서 다양한 각도로 묘사하고 있고 전개 방식이 다르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일차독자가 유대인이었기에 예수님을 왕으로,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대상으로 하여 종으로,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일차독자로 생각하여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요한복음은 모든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기에 강조점이나 초점이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서로 상충되거나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관되고 상호 보완적이다.
그중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기록한 복음서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종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였기에 종이나 하나님 아들에 대한 족보를 기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가장 먼저 예수님을 경배한 사실을 기록하고,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나신 이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경배하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1절). 마태는 “헤롯 왕 때”라고 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였다는 것을 밝힌다. 우리 성경에는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 ‘이두’(‘보라!, 자!’)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번역하였다. 즉 ‘보라! 박사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라는 말이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이목을 집중시켜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방의 박사들은 누구이며 왜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는가? 또한 마태는 왜 그들의 경배를 기록하였을까?
이들의 신분을 우리 성경에서는 “박사”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마고스’는 ‘마술가, 점성가, 귀신추방자, 강신술사’을 지칭한다. 사도행전에서도 “마술을 행하는 자”(행 8:9, 13:6, 19:13)로 표현하였다. 이들은 구브로의 총독과 사마리아의 높고 낮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하찮은 속임수로 요술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당시에는 악한 영들의 힘을 빌려 점을 치거나 여러 가지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일들에 대하여 별을 보고 짐작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서 2장에도 보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꾸었으나 그 내용을 잊어버리자 나라 안의 모든 박수와 술객들을 불러 꿈과 해석을 말하도록 명령하였는데 그들은 왕이 꾼 꿈을 해석하고 하늘의 징조, 별들의 운행을 지켜보면서 역사의 흐름을 읽고 개인이나 국가의 특별한 일들을 점쳤으며 영적인 힘을 빌려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기에 고대사회에서 ‘마고스’는 왕의 자문을 맡고 국가 대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식인이나 제사장 계급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어쩌면 자기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는 사절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방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나셨다고 하였는데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라고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즉 별의 움직임을 보고 왕의 탄생을 생각하였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별로 상징되는 왕에게 “경배”(헬, ‘프로스퀴네오’), 즉 예배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오랫동안 오해된 것에 대해 먼저 선입견을 내려놓고 본문을 자세히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헤롯 왕 때의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마구간이 아니라 “집”(11절)(헬, ‘오이키아’)에 있는 예수님을 방문했고, 우리 성경에 “아기”(9,11,13,14절)라고 번역된 표현을 영어 성경에서는 “유아”(the young child)로 언급되고, 헤롯이 2살 이하의 아이를 죽인 것으로 보아 우리가 흔히 그림이나 성탄절에 많이 하는 연극에서처럼 동방 박사들이 마구간에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 최소한 여러 달 혹은 1년여가 지난 후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동방 박사들이 몇 명인가에 대해서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세 가지 선물로 보아 세 명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절)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상의 무리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그들을 왜 ‘동방 박사’로 언급하고 있는가? 물론 단순하게 동쪽에서 왔기 때문에 동방 박사로 불린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는 그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 전체적인 안목을 가지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2:8에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라고 기록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동쪽으로부터 분리하여 어떤 곳에 에덴을 두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이후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에덴의 동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나타내며 동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관계가 멀어지는 것(창 4:16, 11:2, 겔 8:16)으로 표현하였으며, 반대로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광야에서 성막을 지어 그 출입문이 동쪽에 설치된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주셨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들어가지 않고 모압과 암몬 땅을 돌아서 요단강 동편에서 서쪽으로 진행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이방인을 지칭하는 중요한 표현 중의 하나가 “동방 사람”이다(참고 창 29:1, 삿 6:3, 7:12, 사 2:6, 렘 49:28, 겔 25:4). 그러면서 종말에는 동방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동방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회복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말씀들을 성경 곳곳에 기록하고 있다(사 41:2, 43:5).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5)
동방 박사들은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페르시아 땅에 바벨론 포로 중에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던 유대인들(Diaspora)의 종교적 지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들은 이 별이 한 왕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동쪽의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경배한 사건이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언약 성취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을 미리 예시해 주는 사건이다. 동방 박사들이 이스라엘에 당도하면서 별을 좇지 않고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가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임을 이방인들에 의해 폭로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이방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왕으로 경배하였다는 것만 강조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헤롯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4절)라고 물었고 그들은 “유대 베들레헴”(5절)이라고 분명히 답변하고도 경배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5b-6절)라고 말씀의 성취를 분명히 언급한다.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 60:1-7)
여기서 “유대인의 왕”(2절)이라는 표현 자체가 성경에서는 아주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누가복음 1:5에서 헤롯을 “유대 왕”, 즉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부를 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과거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들에 대해서도 이런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찾는 왕이 단순히 이 땅의 나라에 속한 지도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메시아를 가리키는 특별한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유대인의 왕”을 “그 그리스도”(4절)라는 표현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4절, 마 27:11, 17, 22).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에만 목적이었다면 별이 바로 베들레헴으로 인도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발칵 뒤집어 놓은 현상이 된 것은 정작 메시아의 탄생을 먼저 알고 축하하며 기뻐했어야 할 유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으로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구약 성경 미가서에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1 딸 군대여 너는 떼를 모을지어다 그들이 우리를 에워쌌으니 막대기로 이스라엘 재판자의 뺨을 치리로다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1-2)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리적 장소로만의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에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고 여기는 지도자들에 의해 쫓겨난 자들을 “딸 군대”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재판자(지도자)의 뺨을 칠 자가 베들레헴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베들레헴으로 오시는 이는 인간 재판자를 심판할 자라는 의미이다.
동방 박사들의 예물은 “황금, 유향, 몰약”(11절)이었다. “황금”은 구약 시대 성소와 지성소의 기물들에 사용된 것으로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불변과 영광의 상징이다. “유향”은 당시에 일반 백성은 사용할 수 없는 향료로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향을 만들 때 사용한 구별된 것이다(출 30:37). “몰약”은 마취제, 방부제로 사용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 것이다(막 15:23, 요19:39).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된 왕으로 고난과 죽음을 이루실 것을 예견된 존재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이방인들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별의 인도를 받고 찾아와 직접 메시아를 눈으로 보면서 박사들은 이방을 향한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뜻을 확인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곧 모든 이방의 왕이 되시며 온 세계와 천지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실 왕이심을 확인하고 그에게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 박사들의 경배는 앞으로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시해 주는 사건이 된다. 동방을 비추던 별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표적이었다.
이제 하나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드러날 것이다. 마태가 1:1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은 단순히 조상 중의 한 인물을 소개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라는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202311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