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독한 천재
지난 2월 20일의 PRIDE29(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고독한 천재] 타무라 키요시가 오랜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등장음악 [Flame Of Mind]가 울려퍼지며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이 고독한 반항아는 여전히 담담하면서도 약간은 슬픈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UWF에서도 U인터에서도 언제나 외톨이였지만 그 실력만큼은 단연 발군이었던 타무라.
그는 UWF와 RINGS의 정신을 계승한 마지막 사나이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서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경기는 어이없는 기권승. 상대로 나선 알리에프는 급소가격의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기권해 버리고 만다.
가장 황당한 표정을 지었던 것은 역시 타무라였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또 다른 남자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의 에이스 [그레이시 헌터] 사쿠라바 카즈시였다.
그리고 경기 직후 마이크를 가지고 뛰어든 사쿠라바는 "타무라씨, 이따위 시합을 해봐야 재미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4월에 저랑 시합해 주십세요!"라며 타무라를 도발했다.
그러나 타무라는 손가락에 심한 골절상을 입고 있었고 병원으로 직행, 사쿠라바의 발언에 대답하지 않았다.
[프라이드FC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파이터 3인방]
2.UWF시절의 인연
타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8년, UWF-인터내셔널의 전신인 UWF의 공모 연습생 제1기에 응모, 단 한 명의 합격자로 입문이 허용된 천재였다.
대부분이 프로레슬링이나 타 무도의 베테랑이었던 UWF에 그냥 고교졸업생이 바로 입문하게 된 것은 그의 천부적인 센스가 어느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든 타무라는 UWF가 처음부터 키워낸 문자 그대로 「UWF의 산물」적인 선수이다.
그리고 4년 후인 1992년에는 대학을 졸업한 사쿠라바도 연습생 테스트에 합격, 타무라와 같은 코스를 걸어가게 된다. 그러나 둘의 나이는 똑 같았다.(69년생)
3.고독한 반항아의 등장
타무라는 원래부터 프로레슬링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쇼맨쉽도 부족하고 말 재주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강렬한 그라운드 공방이었다. 초기 UWF와 UWF-인터내셔널은 타무라의 이런 열정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안면 가격은 손바닥으로만 할 수 있었으며 그라운드에서는 그래플링 공방이 아주 치열했다. (이 룰은 바로 판크라스로 이어져, 초기 판크라스의 룰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UWF 인터내셔널이 여러가지 이유로 경영이 무척 어려워지자 다카다 노부히코(현 PRIDE의 총괄 본부장)는 결국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고개를 숙이고 만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이끄는 신일본의 각본에 짜여진 시합이 싫어 UWF를 만들었던 다카다 노부히코는 결국 경영난으로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단체와 각본이 정해진 시합을 다시 치룰 수 밖에 없어진 것이다.(사실 이 경영난은 다카다의 국회의원 출마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결국 1995년 10월에 다카다는 [신일본 프로레슬링 VS U-인터]라는 대회를 개최하게 되고, 타무라는 이런 전개에 강한 실망감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다카다 노부히코는 이런 각본 없는 대결을 중시하는 타무라를 상당히 성가시게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다카다가 선거를 치루던 중이었던 7월에는 타무라 키요시가 "다카다씨, 저와 붙어주십시오!"라며 도발까지 해, 다카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실력적으로 이 젊은 천재 타무라에게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다카다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시합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대한 반발로 타무라는 10월의 신일본과의 대항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타무라는 U-인터 내부에서도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타무라에게 K-1으로부터의 러브콜이 날아들게 된다.
바로 K-1의 이시이 관장이 직접 시합을 제안한 것이었다. UFC 경험자인 패트릭 스미스와의 발레투도전을 제안, 1995년 12월 9일 K-1 HERCULES에서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시합은 MMA가 아니라 NHB, 즉 노 홀즈 바드-무규칙 시합이었던 것이다. 글러브도 없었고 심판들의 시합진행도 지금보다는 살벌한 감이 있었다.
타무라는 UWF-인터내셔널의 원래의 취지-실전 지향적인 프로레슬러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겠다.-에 입각해 이 승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합은 겨우 59초만에 타무라의 힐 훅이 작렬, 순식간에 승부가 나고 말았다. UWF에서의 부족한 쇼맨쉽 때문에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하던 타무라는 이 시합을 통해 많은 격투기 팬들에게 UWF의 본연의 취지를 강하게 어필하였고, [고독한 천재], [외로운 반항아]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타무라 키요시는 패트릭 스미스와의 대전을 통해 순식간에 실전 프로레슬링의 최강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결국 다카다 노부히코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다시 불러오기에 이른다.
그러나 타무라에게 자신들이 다시 실시하기 시작한 각본있는 게임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유머러스하거나 지나치게 장난스러워진 UWF-인터내셔널에 타무라를 상대할 선수는 없었다. 타무라의 실전 지향적인 성격과 강한 실력은 이미 U-인터 내에서 기피대상 1호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나이 만큼은 예외였다.
4.고독한 반항아를 막아선 IQ레슬러
이 기피대상 1호가 지명한 것은 바로 사쿠라바 카즈시. 당시 사쿠라바는 굉장한 그래플링 능력과 재치있는 말솜씨 등으로 이미 U-인터 내에서는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그는 실전에도 굉장히 강했지만 프로레슬링의 각본에도 충실한...다시말해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파이터였다.
엄밀히 마래 타무라와는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닌 것이 이 사쿠라바였다. 타무라는 이 사쿠라바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와 진검승부를 벌여보고자 했다.
당시 UWF 내에서는 상당수의의 실력있는 실전형 파이터들이 판크라스나 RINGS쪽으로 빠져나간 뒤였기 때문에 타무라의 진검승부 요구를 받아들일만한 선수는 없었다.
다카다 조차도 피했는데 그의 제자들이 이 타무라를 상대로 싸우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다카다 또한 이 타무라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타무라의 시합이 현저히 적어지면서 "UWF-인터내셔널은 실전 레슬링이라고 주장하면서, 막상 각본없는 타무라와의 대결은 무서워서 못하는거냐?"라는 비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다카다를 구해낸 것은 바로 자신의 애제자 사쿠라바였다. 그는 간단히 "타무라씨와 싸우는 것은 재미있으니까요. 타무라씨라면 제 모든 기술을 걸어도 다 받아내 줄 겁니다. 전력으로 부딪히는 건 재미있어요."라고 말하며 모두가 피했던 이 고독한 천재와의 시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벌어진 3연전.(1996년 3월부터 5월까지, 빌리 스캇과의 싸움이 중간에 있기는 했다.) 사쿠라바는 당시 자신보다 월등히 강했던 이 타무라에게 3번 내리 패하고 만다. 타무라는 이 어려운 역할을 소화해준 자신의 상대 사쿠라바에게 상당히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 사쿠라바와 타무라는 자신들의 이런 실전 지향적 프로레슬링의 유지를 위한 행동들이 훗날 역풍이 되어 자신들을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
첫댓글 2편은 언제 올린건가요?
제맘대로입니다, 내킬 때 올릴겁니다.
이런깍쟁이~ㅎㅎㅎ;;농담이고, 항상 좋은글 잘 보고 있습니다..^^
마츠오님 오랜만에 엔진 거셨군요..이제 계속 밟아주세요..^_^
빨리 내켜 주시죠잉~!! 여포님~ 깍쟁이라 하신거 저도 동감~!! 밑에 후기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사람 애타게 할라꼬 일부러 늦출수도 있죠~?? 이 깍쟁이 !!
타무라 70년생
70년생이라는 자료도 있는데, 타무라 키요시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타씨가 직접 물어본 결과 69년생이라고 타무라 본인이 그랬다고 합니다.
뭐, 일부러 늦추는 건 아니구요~ 코트 행님 우짜는가 구경쫌 하다가 쓸라구요 ㅋㅋㅋ
여포님, 광동님께도 감사드리고...에 또 고정 팬이신 미스티님한테도 안부 인사를 ㅋㅋㅋ(이거 무슨 국회의원 멘트 비스무리한 것이....)
타무라 멋져~ㅜㅡ
핫 예비군 받고온 사이에 올리시다닛~ㅎㅎ 잘봤습니당~~
호~ 역시 마쯔오쇼장님..오로치돗포님.. 아주 박학다식하신..
'')이잉?키뚜하까님 전 아무것도 한것이 없는데 저까지 ㅋㅋㅋㅋ
오호호...멋있서요. 이런 멋진 스토리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