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논문]
수필의 장르적 성격
이향아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
* 장르란 무엇인가.
문학에서 '장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이래 문학의 형태를 구분하는 기본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을 모방의 양식이라 정의하고 이를 서정 양식, 서사 양식, 극 양식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극 양식은 다시 비극시, 희극시, 희비극시 등 하위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즉 장르는 문학의 객관적인 틀과 양식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도 장르에 대한 논의와 주장들은 계속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을 양 대별하여 정리한다면 '장르는 제도다'라는 견해와, '장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발전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는 제도다'라는 주장에 의존한다면, 작가의 창작행위는 창작에 적합한 제도, 즉 형식(장르)에 복종하고 있음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기존의 사회제도에 적응하면서 법을 준수하고 질서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실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고정된 제도에 우리를 순치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상적이고 쾌적한 삶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이미 존재하는 제도를 수정하고 개혁하기도 한다.
후자, '장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발전한다'는 주장은 장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면서 과학적인 법칙으로 논의하는 방법이다. 즉 '장르'라고 지칭하는 문학의 형태는 스스로 발생, 성장, 분화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는 생물학상의 진화론을 문학의 장르 이론에 도입한 것이다. 스스로 발생, 성장, 분화한다는 이 이론은, 문학 향수자의 의지로 장르를 수정하고 개혁할 수 있다는 앞의 이론과 차별성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문학의 형태를 장르의 분화법칙에 따라 연구한 본격적인 논문으로 고정옥의 <국문학의 형태>를 들 수 있겠다. 고정옥은 장르를 고정된 제도나 틀로 인식하지 않고, 역사적인 산물로서 생성, 성장하며 소멸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김윤식은 장르를 질서의 원리라 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문학 장르가 단순한 역사적 산물만이 아니라, 문학상의 구조와 조직을 가진 특수한 형태임을 규정하고 있다 하겠다.
장르에 임하는 한국문단의 태도와 인식은 매우 편협하고 도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필가가 시를 쓰거나 시인이 소설을 쓸 경우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별로 긍
정적이 아니다. 마치 경계를 넘어 타인의 영역을 침범한 사람을 바라보듯 마땅치 않게 생
각하는 것이다. 한국의 문인은 일단 한 장르로 등단했다 하면 마치 출가한 여자가 지조를
지켜 일부종사 하듯이 그 장르에 전념해야 하며, 만일 다른 장르에 관여하려면 다시 새로
운 입문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는 의식이 그것이다. 한국 문인의 이러한 의식에 대입
시켜 장르를 정의한다면 '장르는 고정되어 있으며 불변하는 제도다'라고 하는, 보다 견고하
고 강력한 제 3의 이론이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국문학을 역사적으로 돌아다보면 시대적 상황에 여러 장르들의 출현과 소멸이 반복되면
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향가와 고려가요와 경기체가와 가사문학이 모두 그러하다.
문학의 장르 역시 자연과학에서처럼 유개념과 종개념에 따라 분류된다. 산문문학과 운문
문학으로의 분류한다면 유개념의 분류가 될 것이고 다시 산문문학에 소설과 수필과 희곡
등의 장르를 포함할 때 이는 종개념의 분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구분은 구분의 기
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모습을 달리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 수필문학과 장르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 이 논제가 요구하는 것은 물론 수필문학을 다른 문학과 차별화할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논의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다소 견강부회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이라는 본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다.
하나는 표제가 시사하는 의미 그대로 '수필문학의 장르적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필문학이 그 내부에 포괄하고 있는 복합적 장르의 성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나누어 고찰하려고 하는 것은 수필의 장르적 성격이 곧잘 논의되고 있는 것은 수필문학이 포괄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가능성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수필문학의 특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이들 두 관점은 결국 하나로 통합될 것이며,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을 보다 확실하게 규정하게 할 것이다.
문장의 초보 시절 우리를 수련했던 소위 '작문'이라는 영역은 다름 아닌 수필이었다. 그 작문이라는 이름의 수필로부터 시와 소설과 희곡과 평론이 각각 분화해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장르의 문제는 다분히 전도된 듯한 감이 있다.
시의 장르는 시이고 소설의 장르는 소설이며 희곡의 장르는 말할 것도 없이 희곡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시문학에서의 장르의 문제'라든가, '소설문학에서의 장르의 문제'라는 명제는 듣기에 오히려 어색하다. 우리는 수필 외의 이들 장르가 그냥 '시'이며 '소설'이고 '희곡'임에 대하여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 장르임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유독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에 대하여는 빈번하게 논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수필의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문제일 뿐이며 수필문학의 문학적 독자성 혹은 가치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은 결론적으로 그냥 '수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의 장르적 성격이 시이며 소설의 장르적 성격이 소설인 것과 다름이 없다.
필자는 먼저 수필문학의 장르적 성격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수필문학의 특성을 재고할 필요를 느낀다.
a)
수필은 그 영역이 광범하고 형식적인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시, 소설, 평론과 같은 문학의 다른 장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서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지성이 번쩍이는 산문이고 플롯을 가지면서도 소설이 아니라는 데에 수필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산문인 수필이 시, 소설, 평론 등의 영역으로 확대 심화해 가면서도 수필의 성격을 갖는데 수필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
b)
수필이 무형식의 형식이란 말은 일반화되었다. 이는 장르적인 특유의 구성과 수사로서
허구화된 틀에 짜 넣는 과정이 없다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결국 수필은 그와 다른
입장에서 쓰게 된다는 뜻이 된다. 수필은 쓰는 사람의 체험,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시대와
세계, 개인적인 인생론, 사상이나 예술관, 사물에 대한 인식 내지 판단, 가치간 등에 이
르기까지 모든 것을 자신을 기준해서 쓰여지게 된다. 다른 장르의 문학은 마음 속에 얻은
것을 밖으로 펴지만 수필은 밖에서 얻은 것을 안으로 삼키는 것이다.
c)
수필의 종류를 논할 때 그 분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가장 보편적인 기
준으로 '어느 장르에 가까우냐'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하루의 체험, 견문, 감상 등은 일기적 수필 (또는 일기), 여행기는 기행적 수필(또는 기행
문), 편지 형식은 서간적 수필(또는서간문), 노상의 교통 사고를 쓴 것은 신문기사적 수필,
짧은 평론이나 논문 형식은 평론적 수필이다. 신문사설도 평론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a)는 수필 제재의 광범위함과 형식의 자유스러움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필의 특
성은 타문학으로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수필의 고유성을 견지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b)는 수필의 형식이 자유로워 구속이 없다는 주장에서 a)와 동일하나 거기 덧붙여 수필은
허구성이 없으며, 다른 장르와 달리 자기를 구심점으로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것을 강조하
였다.
그리고 c)는 수필의 종류를 나누는 일은 타문학과의 유사성이나 관련성에 의해 결정된다
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상 a, b, c의 요지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수필문학의 특성이 수필문학의 장르적 특성을
결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구체적인 수필 작품을 임의로 선정하여 타문학 -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과의
연관성을 고찰함으로써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지면이 허락되는 한에서 시와
소설에만 한정하여 살펴보게 된 것, 그리고 여러 작품을 인용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을 스스로 미흡하게 생각한다.
* 수필 속에서 만나는 시의 얼굴
문학의 어떤 장르에서건 '이 작품은 시적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을 때 그것이 칭찬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욕이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적이란 말은 그만큼 내용이 응축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은유와 상징성에 의존한 표현이 여과장치를 통해 정화되었음을 지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필에도 물론 시적인 수필이 많다. 이를 달리 '문예적 수필', 혹은 '서정적 수필'이라
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별칭이 붙지 않았다 할지라도, 수필 전편이 유도하는 분위기나 문장 표현의 섬세함, 혹은 작자가 지향하는 주제의 Fantasy 혹은 ambiguity가 오히려 시보다 더 시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시적 수필은 문장의 간결성과 함축성으로 표현의 탄력성을 부각시키고, 절제된 어휘의 고급한 비유가 시에서의 부자유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시적 수필이 정작 시를 능가하여 유려한 미감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수필의 자유'에 그 원인이 있다.
또 어떤 수필은 시적인 문장의 효과와는 별도로 수필의 내용에 적절한 시를 삽입함으로 전편에 시적 분위기를 띄워 정서를 고조시키는 경우도 있다.
바람이 분다. 구름은 온 세상을 휘돌아 다닌다. 나 또한 구름처럼 떠돌고 싶다. 도시락에서 해방되면 내게도 시간이 주어질 줄 알았다. 학교 급식이 완비된 나라는 얼마나 좋을까. 종일 동동거리며 살 수밖에 없는 전업주부는 고달프다.
온갖 규제에서 풀려난 새내기 시절, 아이들은 또 다른 고4 시절이기도 하나. 매일 술자리 환영식과 미팅에 바쁜 그들, 얼굴 보기가 힘들다. 술에 찌들어 한밤중에 들어오는 자녀들 기다리기에 마음 졸이는 부모들. 새학기가 되면 폭음으로 신입생이 죽는 사태까지 일어나도 나쁜 풍조는 쉬 없어지지 않고 있다.
술잔을 돌리며 마시는 음주문화 때문에 간암 사망률이 높아만 가는데도 이제는 여학생도 가리지 않고 큰 사발에, 구두 속에까지 술을 부어가며 마시게 한단다. 몬도가네가 따로 없다.
처음 직장 다닐 때, 유학 다녀온 직원이 회식 때 자기의 잔에만 마실 만큼 술을 따라 홀짝거린다고 다른 직원들이 쪼다라며 흉본다. 그때는 그래도 여직원에게는 술을 권하지 않았는데.
학년이 높아가 숨돌릴 만하면 아들은 군에 가야하고 딸을 시집 보낼 걱정에 진이 빠진다. 결혼만 시키면 한가할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손자가 태어나면 어머니들은 도우미 보모가 되어 또다시 아기를 돌봐야 한다.
독신자는 얼마나 좋을까. 머리카락이 없어도 비구니의 깨끗한 인상이 부럽다.
골목길에 수도공사를 한다. 아침 7시부터 밤까지 전등을 켜가며 일을 한다. 추운 날씨에 진흙탕 물 속에 발이 잠긴 채 노후관 교체 공사를 12시간이 넘게 하는 아버지가 있기에 그들 가족은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뼈빠지게 벌어 가족 뒷바라지 하다보면 어느새 머리에는 서리가 내리고 노인이라 푸대접이 싫어 염색하느라 더 고달프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젊은이 9명이 머리 깎고 집단 출가해서 화제가 되었다. 세속에서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 가면 늪에 빠지듯 허우적거리게 됨이 두려웠을까. 복잡한 세상살이가 싫어 세상인연을 끊은 것일까.
류시화의 시에,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9인의 용기가 대단하기는 하나 자유에 지쳐 하산하지나 않을지 염려된다. 단풍이 고운 때는 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돌고 싶다. 일상의 잡다한 일 떨쳐버리고 바람처럼 거침없이 떠나고 싶다.
비록 자유에 지쳐 쓰러질지라도
- 백해원 <바람처럼 구름처럼> 전문 -
위의 글은 詩的인 소재를 다루지 않았다. 날마다 아이들 도시락을 싸는 전업주부의 고달픔으로부터 말문을 열어, '비록 자유에 지쳐 쓰러질지라도' 일상사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작자의 소망을 부르짖으며 끝이 난다. 詩的이라기보다는, 별로 내세울 것 없이 그럭저럭 나이 들어가는 삶의 한스러움과 회의가 전편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 한스러움과 회의는 단순한 '한스러움'과 '회의'가 아니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담담한 체념과 달관을 저변에 깔고 있다. 비판을 동반한 달관과 체념의 중량, 이것이 담긴 작자의 시선이 생활적인 수필에 시적인 構圖를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시적 구도란 첫째 단 한 문장이라도 삭제하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했을 때 전체의 질서가 흩어져 버릴 듯 응집력 있는 구도를 이름이다.
새벽도시락으로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이 겨우 미팅과 술잔치로 아까운 세월을 보냄. 군에 입대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아도 부모는 그것 때문에 더욱 부자유해질 뿐임. 낡은 수도관을 교체하는 머리 허연 인부를 통해서 바라본 인생의 허무. 어려운 시험을 치뤄 뜻을 이루고도 머리를 깎고 산으로 올라간 아홉 명의 사법고시 합격생들. 이들 모티프들이 강물 위에 적당한 간격으로 놓인 징검돌처럼 설명이 아닌 암시와 진동으로 시적 효과를 준다.
그리고 각개의 징검돌들은 다시 하부적 Texture를 거느리고 있다. '폭음으로 신입생이 죽는 사태', 그러나 '구두 속에까지 술을 부어가며 마시'게 하는 몬도가네식 음주문화, '독신자는 얼마나 좋을까'고 독백처럼 읊는 탄식, 노인이라는 푸대접이 싫어서 백발에 염색하는 고달픔에의 공감, 자유를 그리워하다가도 자유에 지치면 쓰러진다는데 입산한 젊은이들이 자유에 지쳐 하산할까봐 염려하는 작자의 마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들 Texture는 전체적 골격인 Structure를 보필하여 하나의 통일된 Climax를 향해 상승한다.
또 '바람이 분다. 구름은 온 세상을 휘돌아 다닌다. 나 또한 구름처럼 떠돌고 싶다'로 시작하여, '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돌고 싶다. 일상의 잡다한 일 떨쳐버리고 바람처럼 거침없이 떠나고 싶다. 비록 자유에 지쳐 쓰러질지라도'에서 종결함으로 수미상응 시키고 있다.
그러나 마치 시의 연을 나누듯이 몇 줄 이어 쓰다가 한 줄 띄어 쓰고 다시 몇 줄 이어 쓰다가 띄어 쓴 것이 미숙한 초년생의 글쓰기 연습 같은 인상을 준다. 작자는 생각의 전환 혹은 비약을 그런 형식으로 나타냈거나, 감정의 상승에 따른 호흡조절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을 자주 띄어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문장에 긴장감을 주고 내용의 진행을 밀도 있게 한다. 산문에서, 마치 시의 연을 나누듯 자주 덩어리를 구분하는 것은 호흡의 지속을 저해할 수 있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형식이 자유롭고 다양하다는 수필의 특성이 없다면 위의 글은 그 장르상에 상당한 의문과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작자는 말하자면 수필 형식이 자유롭다는, 그 자유를 유감없이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절제된 시와 자유로운 수필의 영역을 동시에 활보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형식이 무한정 자유롭다는 수필문학의 장르적 특성은 오히려 복병처럼 부자유를 불러, 수필 장르의 자유로운 확장에 예상치 않은 한계를 초래할 할 수도 있다. '무형식의 형식'이란 수필이 언어 예술인 이상 어림없는 말이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니다.
* 수필 속에서 만나는 소설의 얼굴
수필 중에는 소설적인 장면과 사건을 연출한 수필이 있다. 소설에 가까운 수필을 서사적 수필이라고 하며, 서사적 수필이란 일정한 플롯 속에 사건과 스토리를 포함하고 있는 수필이다. 이는 서사시가 영웅적이고 역사적이며 국가적인 이야기를 다룬 장시이며, 서사희곡이 전통적인 구성 방식과 관계없이 일련의 사건을 전개하는 희곡 양식임과 같다 하겠다. 그리고 서사무가는 이야기 문학의 특징을 가지는 무가이며, 서사민요가 이야기로 엮어진 민요임과도 궤를 같이 한다. 다시 말해서 서사적 수필이란 소설적인 수필인 것이다.
서정 수필이 주관적 정서를 나타내고 있음에 반하여 서사수필은 객관적 서술로 되어 있으며, 서정적 수필이 이름 그대로 서정성이 짙은 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 반하여 서사수필은 어떤 사물에 관하여 줄거리 있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수필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분류일 뿐 서사수필이라 하여 서정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서사적 수필과 소설의 차이성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소설의 특성을 알고 그와 결부된 문제점을 추출해야 할 것이다. 우선 소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자.
① 소설의 등장인물과 그들 Character의 문제,
② 소설의 사건과 Plot의 문제,
③ 소설의 가공성(Fiction)과 Reality의 문제,
①항에서...이는 엄밀히 말해서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수필에도 각기 개성이 다른 등장인물이 있고, 각기 다른 개성은 특정한 사건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개성은 바로 그들의 향방을 결정하고 철학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②항에서...수필에도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려면 구성의 기법이 중시될 수밖에 없다.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필에서의 사건은 주인공의 운명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 수필의 사건은 진행과 해결을 위해 있지 않고, 사건 속에 있는 필자의 자화상, 그 모습을 드러내어 표출하고 다시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함으로 인생을 해명하는 데에 더 큰 목적을 두는 문학인 것이다.
③항에서...Fiction은 소설과 수필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작문학인 수필에서 Fiction의 삽입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수필이 천편일률 사실의 기록만으로 일관한다면 수필의 예술성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반론들이 만만치 않다. 이들 반론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Fiction이 필수요건으로 소설의 특징으로까지 규정되지만 수필에서의 Fiction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요, 보조적 장치, 수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기법이다.
수필은 창작문학임과 동시에 고백문학이며 자조문학이라는 것, 수필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건 그 사건을 주도하고 진행하는 사람은 바로 작자 자신이라는 것, 그것을 묘사하거나 서술하는 사람도 작자 자신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수필에서는 왜 Fiction을 임시로 차용하듯 하는가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Reality는 Fiction과 상반되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있는 사실을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만이 Reality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가공성에 개연성을 부여하여 필연적인 결과처럼 나타나게 하는 것이 Reality인 것이다. Reality는 수필이 체질적으로 타고난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오히려 Fiction이 요구되기도 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정반대의 개념으로 보이는 Fiction과 Reality는 한 물체의 표리처럼 긴밀한 거리에 있다.
현실은 오히려 작품에서보다도 인과관계가 없으며,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음에서 실제의 작품을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시카고 국제 공항은 정말로 끝이 없이 넓었는데도 빈 자리를 찾아 주차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뉴욕 일정을 끝내고 일행들과 갈라져 혼자 시카고에 가 동생 집에서 사흘을 머물고 라스베가스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한 일행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중략) 그러나 라스베가스행은 오로지 혼자였다. 언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나의 영어 실력으로였다. 가뜩이나 긴장이 된 터에 주차에 시간을 빼앗겨서 비행기 출발 시간이 빠듯해지자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조급해졌다. 동생 내외와 함께 단거리 선수처럼 젖 먹던 힘까지 짜 내달려서야 탑승대 출구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출구가 열려 있었고 출구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아! 살았다. 나는 재빨리 사람들 속을 뚫고 들어가 비행기표를 확인 받았다.
후유!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고 탑승구로 들어가면서 동생 내외에게 이제 무사히 비행기를 타게 되었으니 안심하라는 뜻과 잘 있으라는 이별의 인사를 곁들인 눈길을 보내며 손을 높이 치켜들어 빠이빠이를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순식간에 시카고가 모습을 감추자 잠시 숨어 있던 라스베가스에의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일행들의 일정에 차질이 없어 계획대로 상봉이 이루어 져야 할 텐데."
만에 하나, 발생할 불행(?)쪽의 다른 생각을 애써 피하고 행복했던 시카고의 며칠 간을 추억하는데 문득 조금 전 헤어질 때의 동생 남편 표정이 떠올랐다.
눈물을 훔치는지 손등으로 눈을 부비며 마주 손을 흔드는 동생과 달리 동생 남편의 표정은 조금 야릇한 것이었다. 단순한 석별의 정이 담긴 반응이 아닌, 무언가 황당하고 낭패스런 꼴을 본 듯한 눈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과도하게 폐를 끼치고 떠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나치게 시간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함께 뛸 때까지 기분이 좋았었는데 왜 그렇지?
좌석은 2인석이었고 나는 창쪽이어서 손수건만한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지만 가슴과 머리가 안정이 안 되어 이런저런 두서없는 생각이 밀려오고 밀려갔다.
기내를 훑어보니 동양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TV화면과 영화에서 보았던 생김새의 서양사람들 뿐이었다.
(중략)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서양 사람의 체격치곤 키가 작고 뚱뚱하였다. 슬쩍 옆얼굴을 훔쳐보니 날카로운 코끝이 안으로 굽은 매부리코였다. '저런 얼굴은 멕시코인들에게 많지.' 그에게는 일행이 많아 통로를 사이하고 말이 많았다. 그에게 일행이 많다는 사실은 안도와 공포를 동시에 가져와 내 신경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중략) 내가 어떤 고통(?)에 시달렸던 간에 비행기는 아무 일 없이 잘 날아서 라스베가스에 착륙하였다. 그런데 승객들이 다 내릴 때까지 옆 좌석의 그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몸집이 뚱뚱한 그가 앉아 있는 의자와 앞좌석과는 전연 공간이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처럼 '좀 나갑시다'라고 소리치며 앞 사람을 밀치고 나서기에는 이미 주눅이 들어 용기를 잃은 후여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가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일행들이 무어라고 한마디씩 건네면서 웃고 지나쳐 나가고 맨 마지막으로 천천히 그가 몸을 일으켰고 나도 겨우 뒤를 따라 기내를 벗어났다.
그가 탑승 시에 내 새치기를 그런 식으로 징계하였음을 깨달은 것은 일행들이 라스베가스의 야경 구경을 나간 빈 방에 남아 녹초가 된 심신을 침대 위에서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동시에 시키고 공항에서 동생 남편이 보였던 표정의 까닭도 확연해졌다. 동생 남편은 서슴지 않고 새치기를 감행하는 처형의 태도에 아연 실색하였던 것이다. 국제적 추태를 자행하고도 좋다고 손을 흔드는 처형을 전송하는 동생 남편의 처지를 생각하니 어찌나 무안하고 부끄러운지 도무지 어떻게 처신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중략) 세상에 나서 처음 나가본 외국 미국 일주였다. 얼마나 이야기가 많은가? 그러나 나는 여행 마치고 돌아와 여행기를 쓸 수가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기내에서 맨발로 돌아다녔다고 신문 방송이 한 차례 소나기를 퍼부을 대 나는 그 기사를 읽는 것조차 삼갔다. 국회의원에는 어림없지만 나도 그때 공인으로 비자를 받았으니까.
오늘 아침, 내가 세운 택시를 어떤 날쌘 청년이 가로채 타고 가버렸다. 멀어져 가는 택시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문득 묵은 생채기 덧나듯 시카고 공항의 기억이 상기되면서 스스로 그렇게 멋쩍을 수가 없었다.
-김순영의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서-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이 소설에 가까운 구성을 보인다.
첫째 인물의 성격은 간접 묘사를 통해 나타나 있다.
① 동생의 남편은 교양과 예절을 중시한다.
② 동생은 혈육간의 애정이 돈독한 우리 한국의 보통 여자다. 언니와의 이별이 아쉬워 '손등으로 눈을 부비며 마주 손을 흔들었고, 언니가 잘 도착했는지 먼저 전화했다.
③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은 뚱뚱하고 작은 체격으로 매부리코의 짓궂은 남자다.
둘째 큰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시종 긴장감을 주는 갈등이 작품의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했으며 주차하기까지 힘들었다. 동생의 남편이 갑자기 황당하고 야릇한 표정을 지어 작자를 불안하게 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작자에게 심리적인 압박과 공포감을 주었다.
셋째 위기와 갈등이 해결되면서 확실한 대단원이 나타난다.
작자가 비행기에 오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치기를 했다는 것, 옆자리 외국인이 작자의 새치기에 대한 복수를 그런 식으로 했다는 것, 동생의 남편도 그 때문에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 여기서 모두 해명된다.
그러나 여기 덧붙여야 할 것이 작자의 개성이다.
이 개성은 수필의 색채와 형태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수필이 내포하는 철학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작자의 개성을 표면에 직접 노출하지 않는 반면 수필은 그대로 드러낸다. 작자의 성격은 단순 솔직하며 겁이 많다. 그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비행기 안에서 주눅이 들어 있으며, 옆자리의 외국인이 성경을 읽는 것으로 보아 악인은 아닐 거라고 판단한다. 그 사람의 일행이 많음을 알고 두려움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지만, 늦게까지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데도 찍 소리를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자가 남의 잘못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을 돌아다보고 반성할 줄을 안다는 것이다. 외국인의 자신에 대한 복수와 징계를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외국에 나가 나라망신을 시키는 사람들, 그 중에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작자는 귀국 후 여행기를 쓸 수 없었다.
- 오늘 아침, 내가 세운 택시를 어떤 날쌘 청년이 가로채 타고 가버렸다. 멀어져 가는 택시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문득 묵은 생채기 덧나듯 시카고 공항의 기억이 상기되면서 스스로 그렇게 멋쩍을 수가 없었다.-라고 한 이 수필의 종결은 수필문학에서만 아무런 구속이 없이 허락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자성의 장면이다. '자신을 돌아다보고 반성함', 이 점이 바로 수필이 가지는 타문학과의 차이점일 것이다.
* 맺는 말
16세기 몽테뉴가 에세이집(La Essaise)을 발간하면서 수필이란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초기 시대의 에세이는 주로 필자의 사적 수상록의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의 파장은 의외로 커서 다른 장르의 문학이 주는 감동의 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문학이 주는 쾌락이 카다르시스이며 카다르시스란 바로 '감동의 다른 명칭'이라고 할 때, 수필문학이 주는 충분한 감동은 기타의 다른 장르들에 앞서 수필의 문학적인 입지를 선양하는 데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수필은 작자의 취향과 집필 의도, 제재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필은 일기체, 기행체, 서간체, 논설문, 보고문, 문예문 감상문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적인 수필이 있는가 하면 소설적인 수필도 있으며 희곡의 구조를 가진 수필도 있다. 또 작품의 제재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수필을 분류할 경우는 다른 장르의 문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 질 것이다.
수필의 장르적 분화와 파생적 에너지가 다양하고 강력한 것은 수필문학의 특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문학의 장르가 타문학의 범주를 내왕하면서 다양한 파급력을 가진다는 것은 수필문학의 우월성으로 발전시킬 일이지, 결코 수필문학의 취약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문사에서 공모하는 신춘문예에 수필장르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수필문학을 소홀히 대접하기 때문이라고만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수필문학이 종합적 장르의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며, 수필의 집필 내지 구성의 능력은 곧 보편적 포괄적 문장력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희곡, 소설 등의 문학이 가공적 현실을 창작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꾸며내는 것과는 달리 수필은 현실적 자각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글이다. 다시 말해서 수필은 시처럼 비유와 상징으로 암시하는 문학도 아니고 소설이나 희곡처럼 허구로 얽어놓은 문학도 아니다.
수필은 근원도 대상도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근원도 대상도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수필의 성격은 모든 문학의 최종 종착점이기도 하다. 수필이 외로운 독백이라면 그만큼 진지하고 절박한 자기응시가 될 것이며, 이것은 또한 독자를 작자의 세계로 강하게 흡인하여 사로잡는 힘이 될 것이다.
자료 = 이향아 교수(시인)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