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齊物論제물론9
原文원문:物無非彼물무비피하고 物無非是물무비시니라 自彼則不見자피즉불견이나 自知則知之자지즉지지니라 故고로 曰왈 彼出於是피출어시하고 是亦因彼시역인피니 彼是方生之說也피시방생시설야니라 雖然수연이나 方生方死방생방사하고 方死方生방사방생하며 方可方不可방가방불가하고 方不可方可방불가방가라 因是因非인시인비요 因非因是인비인시니 是以시이로 聖人성인은 不由而照之于天불유이조지우천이니 亦因是也역인시야라 是亦彼也시역피야며 彼亦是也피역시야라 披亦一是非피역일시비요 此亦一是非차역일시비니 果且有彼是乎哉과차유피유호재아 果且無彼是乎哉과차무피시호재아 彼是莫得其偶피시막득기우를 謂之道樞위지도추이니라 樞始得其環中추시득기환중하여 以應無窮이응무궁이라 是亦一無窮시역일무궁하고 非亦一無窮야비역일무궁야이니라 故고로 莫若以明막약이명이로다.
語譯어역: 만물은 저것이 아닌 게 없고 이것이 아닌게 없다. 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으나 이쪽에서 보면 보인다. 따라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또한 저것이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을 方生방생의 설이라 한다.
그렇기는 하나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죽는 것은 또한 태어나게 된다. 가능한 것은 불능하게 되고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게 된다. 옳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른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원인이 되여 옳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같은 상대적인 설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이 이치에 바추어 보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옳음이다.
성인의 경지에서는 이것도 또한 저것이고 저것도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또한 시비이교ㅗ 이것도 또한 하나의 시비이다. 그런데 과연 저것과 이것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또 저것과 이것은 없는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대립을 지양한 경지를 ′道樞도추′라 한다. 지도리는 고리의 한가운데에 걸려 무한히 회전하게 된다. 옳은 것도 무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른 것도 또한 무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비로 대립 하는 것은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업다.고 하는 것이다.
註주: 物無非彼물무비피 物無非是물무비시: 중요한 말이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한 이것 아닌 것이 없다.는 뜻. 사물에는 상대성이 있다는 장자사상의 바탕. 이것 쪽에서 보면 상대는 저것이 되고, 저것쪽에서 보면 상대가 이것이 됨. 이렇듯 이 개념의 비교 대립에서 성립된 것이 彼我相對說피아상대설임. (彼我於是피아어시 是亦因彼시역인피) 앞의 말을 보충한 말. 이것은 저것에서 나오고 이것도 저것에서 비롯된다.
方生之說방생지설:方방은 상대적이라는 뜻. 모든 대립자는 서로 의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단독의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설. 본디 장자의 친구 해시가 주장한 궤변의 하나이며 方生方死방생방사라는 말도′천하편′에는 해시의 말로 나옴.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죽는 것은 태어나게 됨. 方방에는 같은 말이지만 견준다(比也비야)의 뜻이 있음.
因是因非인시인비 因是因非인시인비: 여기서의 因인은′......의지(依也의야)′이다. 옳은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그른 것에 의지하게 되고, 그른것에 의지한다는 것이 옳은것에 의지하게 됨.
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시이성인불유이조지우천: 由유는 因인과 비슷한 뜻을 갖음. 여기서는 유를 ′의지하다′로 해석함. 성인은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에 이것을 비춘다. 즉 상대적 차별의 입장을 초월한 자연의 입장을 사물을 보는 것.
彼亦一是非피역일시비 此亦一是非차역일시비: 그것도 하나의 시비이고 이것도 또 하나의 시비임.
道樞도추: 樞추는 문짝이 열리고 닫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도리. 도추는 도의 要口-啼)言요체란 뜻임.
樞是得其環中추시득기환중 以應無窮이응무궁: 環환은 지도리를 받는 구멍. 지도리는 그 구멍 안에 있게되어야 비로소 무궁하게 대응할 수 있다. 즈 피아와 시비의 대립은 지도리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 환중도 만물제동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함.
解說해설: 여기서의 無窮무궁을 無限무한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풀이하지 않아도 되리라.
노자에 있어서어 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무이고 공허하여야만 했다."천지 사이는 저 ′탁약′ 같다고 할까. 비었어도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天地之間천지지간 其猶(힘쓸탁)(피리약)乎기유탁약호 虛而不屈허이불굴 動而愈出동이유출)." 제5장
탁약은 ′풍구′로서 가죽 자루이다. 풍구인 가죽 자루 속은 비어있지만 무한의 공기를 내보내 주고도 끝나는 일이 없다. 도 역시 풍구의 가죽 자루처럼 공허이고, 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신화의 그것처럼 一氣生成說일기생성설을 그대로 사용해도 좋은 듯싶은데 어째서 노자는 어디까지나 무를 고집하는 것일까?
여기서 다시 도의 무한성 문제를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도는 무한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도는 또 무라고 말했다. 애당초 무와 무한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노자》에선 이것에 대답할 만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다.《장자》에서 그 해답이 발견된다. 뒤에 나오겠지만. 《장자》의 ′은제왕편′을 보면, "도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은 것으로서, 가는 자는 쫓지 않고 오는 자는 막지 않듯이 무한의 물을 迎送영송하지만, 더욱이 거울 자체는 조금도 상처받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 거울의 비유는 무와 무한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가장 알맛은 것이다. 거울면은 무색이고 투명이고 그 의미로는 무라고 할 수 있으리라.그러나 거울면은 무인 까닭에 무한인 물의 모습을 비칠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진의 필름과 같은 有유라면 일정의 유한인 물의 모습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 대신 다른 물은 모두 배재하는 것이 된다. 즉 거울은 무인 까닭에 무한의 물을 깃들이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필름은 유인 까닭에 유한의 물밖에 깃들이게 할 수ㅡ가 없는 것이다.
흔히 마음을 비워라. 虛心허심이 되라. 하는 말이 인용된다. 그 경우 마음을 비운다 하는 것은, 마음이 충만되어 있는 선잊ㅂ관을 모두 몰아 내어 공허하게 만들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건을 가득채운 자루에는 이미 새로운 물건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물건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공간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물며 무한인 물을 포용하기 위해선 무한의 공간, 바꾸어 말하면 무가 필요하다. 즋 무한이기 위해서는 먼저 무인 거쇼이 선행 조건이 된다. 무는 무한이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이장에선 또 ′성인′이란 말이 나온다.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이다. 그러나 이 성인에 대해선 많은 사람들이 반발 내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세습 왕조의 시조는 禹우였다. 우는 성인이라 처음에는 세습 왕조를 세울 의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를 보좌할 익익에서 선양했다.
그러나 우가 죽고 3년상이 지나자 익은 왕위를 우의 아들 啓계에게 넘겨주고 箕山기신에 은퇴했다계는 현인으로 백성들의 신망이 있었다.
즉 우는 성인이고, 익이나 계는 현인이었던 셈이다. 그 구별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것도 말 또는 지식에 의한 차별에서 생긴 것은 아닐런지? 유가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가 ′성인′으로 꼽히는 것은 왕조의 시조라서가 아니고 황하의 治水치수에 성공하ㅏ여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다는 공적 때문이었다.
즉 우는 요로부터 치수를 명받고도 9년(숫자의 최대수, 다년간이란 뜻)이 지나도록 그것을 성공시키지 못한 곧의 아들이었다. 곤은 이 실패 때문에 羽山우산이란 곳에 감금되었다.
이리하여 우는 순으로부터 치수를 명 받았다. 우는 결사적이었다. 아버지의 불명예응 씻어야 할 이중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장자는 이 우에 대해선"비록 산과 같은 우라도......" 하며 그 업적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우는 13년동안 집 앞을 지나면서도 가족을 만나지 않을 정도로 온 정신을 다하여 마침내 황하의 범람을 막았다.
전토ㅗㅇ적인 해석은 이러하지만 이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굴원은 그의 ′천문편′에서 물었다.
영수씨는 걱정하고,
거듭 나를 책망했네,
곤은 경직하여 몸을 망치고
우산에서 죽었재ㅣㅐ 않느냐고.
곤은 경직, 즉 너무나도 강직하여 주군이 요와는 타협하지 못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산해경》에선 곤이 인간을 위해 상제의 보물을 훔쳤다고 하였다. 그 보물은 ′息壤식양′이라 불리는 것으로 한줌의 흙이지만, 그것이 자꾸 새끼를 쳐서 마침내 산더미처럼 많아지고 제방을 쌓게 해주는 것이었다. 곤은 이것을 훔쳐 치수에 사용했는데, 상제가 그것을 알고 식양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곤의 치수는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이야기로는 재마있지만 산제니 성인이니 하는 개념에 혼란을ㅇ 준다. 상제가 유교에서 말하는 하늘(天천)인데, 백성의 어려움을 막으려 하는 곤의 선행에 왜 방해를 했던가.
말이나 지식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노자나 장자의 입장도 이런 곳에 있다. 하겠다. 굴원은 ′천문편′에서 다시 물었다.
홍수를 다스릴 재목이 아닌데
어찌 뭇사람이 이를 추대하였노.
모두들 이를 걱정없다 할 때
어찌 ′課과하지 않고 이를 썻노.
곤에게 정말로 치수의 능력이 없다면 어째서 뭇신하가 그를 추대했을까, 걱정없다고 말했으니까 곧 한 사람만의 죄가 아니지 않는가?":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책임은 지도자에게 있다. 어째서 요는 능력도 시험하지 않고 치수와 같은 중대한 일을 곤에게 일임했는가. 즉 요엣게는 책임이 없단 말인가? 굴원은 이른바 성왕인 요를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氏+鳥龜曳銜치귀예함
곤은 이를 들었노.
차례로 공을 이루고자 했는데
帝제는 어찌 刑형했노.
′치귀예함′의 네 글자는 옛날부터 해석이 구구하다. 치는 부엉이 따위를 가르킨다. 부엉이와 거북이 물고서 끌고 다닌다는 뜻은 알겠지만, 대체 무엇을 끌고 몰고 했는지 분명치 않다 朱熹주희는 치귀가 도면을 그리듯이 이끈 것을 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해석했다.
그것이야 어쨌던 곤이 순서를 좇아 단계적으로 치수를 완성시키려고 하였는데 어째서 도중에 처형했는가? 굴원은 여기서도 요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는 아버지가 실패한 사업을 계승하며 그것을 성공시겼다. 그리하여 우는 大禹대우라고 불린 성인이 되었고, 하 왕조의 시조라는 화려한 존재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