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Last Supper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다 주셨는데 미사에서는 신부님과
부제들만 빵과 포도주를 받아 모시고 일반 신자들은 성체만 받아 모시는지요? 최후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며 "이는 내 몸이다"
하시고,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는 내 피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식을 통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언제나
기억하도록 하시고 주님의 구원사업이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1고린
11,24-25) 하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강림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만찬 예식을 행하는 가운데 빵과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새겨듣고, 자신들 역시 예수님처럼 성부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시오"(1고린 11,26)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체와 성혈을 영했던 가톨릭교회가 왜 성체만 받아 모시게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적 이유
일반적으로 11세기까지는 양형영성체(성체와 성혈을 다 받아 모시는 것)가 지켜졌으나 12세기말에 이르러 단형영성체(성체만 받아 모시는
것)가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다음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사제가 신자의 입에 직접 성체를 넣어 주었습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함부로 다룰까 염려하여서
그러했으나, 성체를 입에 영해 줄 때 사제의 손에 신자의 입에서 나온 침이 묻게 마련이었습니다. 침을 일일이 닦을 수 없는 사제로서는 침 묻은
손가락으로 계속 성체를 영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위생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어느 한 신자가 전염병을 가지고 있다면
성체를 영하는 신자는 모두 사제의 침 묻은 손가락을 통해 전염될 것이 아닌가 하고. 이에 신자들의 성체께 대한 신앙의 성숙을 함께 고려한 교회는
입으로 성체를 영해 주는 방식 대신 신자의 손에 성체를 얹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미국 가톨릭 교회는
미국주교회의에서
1970년에 양형영성체를 도입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라 성체와 성혈을 전부 받아 모시는 것이 주님과의
완벽한 일치를 할 수 있다는 권장사항에 의거 들다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다만, 에이즈(AIDS)와 전염병 등에 대한 우려때문에 반드시 흰
수건으로 신자들이 성작에 입에 댄 부분능 닦은 후 다음 차레의 신자들에게 성혈을 받아 모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작에 입을 대기를
꺼려하고 성혈을 받아 모시지 않는 교우들도 있습니다. 성혈을 모시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성작에 직접 입을 대야 하는데, 자기보다 먼저 성혈을 영한
사람 가운데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고 흰 수건으로 닦고 성혈을 주지만 결벽증에 있는 교우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이유가 중세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아직 병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였던 중세에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입니다.
둘째, 공동체의 규모가 커진 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초기 사도시대 교회나 우리나라 농촌 성당처럼 가족적인 분위기의 소공동체에서는 양형영성체를 하는 데 별반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 같은 대도시의 큰 성당에서 양형영성체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사 전례가 지나치게 길어짐으로써 신자들이 얼마나
피곤해질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큰 본당에서는 성체를 영해 주는 것만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성체 분배자가 여럿 있으면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성체 분배 자체가 하나?시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에 성혈까지 영해 준다면 예식이 얼마나 장황하게
될는지요. 성작을 들고 있을 복사들이 성체 분배자마다 한 명씩 따로 있어야 할 것이요, 한 신자당 영성체하는 시간도 자연 길어지게 마련일
것입니다.
신학적 이유 단형영성체를 정당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신학적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라는 형상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말할 때, 이는 빵(성체) 안에는 예수님의 살만 존재하고 포도주(성혈) 안에는 예수님의 피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성체에도 온전히 예수님이 계시고 성혈 안에도 예수님이 온전히 계시다는 신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학이 발전하게 됨으로써 성체만 영해도 예수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란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다른 한편 성혈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는
신학이 발달함으로써, 미사 때 성혈을 마시다가 성혈을 쏟을까 두려워하는 가운데 점차 성혈을 마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방 교회의 이러한
단형영성체 관행은 항상 양형영성체를 하는 동방 교회들과 서방 교회의 일부로부터 반박을 당하게 되었고, 이에 로마 교회는 1415년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양형영성체를 금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양형영성체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양형영성체로 위에서 말한 실제적 이유와 신학적 이유로 인해서 단형영성체 관행이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었지만, 성찬례(미사)의 의미를
꿰뚫어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 개혁은, 신자들이 양형영성체를 할 때 미사의 본의미가 더 잘 드러나게 된다고
천명하였습니다.(미사경본의 총지침 240-252항 참조). 즉, 최후 만찬 모습과 가깝게 지냄으로써, 최후 만찬이 드러내고자 하였던 십자가
제사의 의미를 신자들이 좀더 실감나게 접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제 신자들이 양형영성체를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중세의 현실적인 이유들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한 까닭에 양형영성체를 실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큰 본당은 작은 본당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소공동체 미사, 피정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드리는
미사 때는 양형영성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고민: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도 그 행위에서 어떤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의미를 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매주일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모셔 보았지만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영성체에 대해 회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부님들도 미사를
집전하시다 보면, 신자들이 영성체할 때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성체를 받아 모신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실망스럽고도 허탈한 기분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미사 때 성체를 반드시 받아 모셔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약
3년간에 걸친 설교 활동 끝에, 이제
예수님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당신의 복음 선포 임무를 중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죽음, 이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고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여태껏 가르쳐 온 제자들이 아직도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죽으면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세 번씩이나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최후
만찬 유대교 지도자들이 당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간파한 예수님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 선포가 중단되어서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항구히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는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빵을 드실 때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하시고, 식사를 끝마치면서 입가심으로 포도주를 돌릴 때 다시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선언하시면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십자가 제사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최후 만찬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어린양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양을 성전 사제에게 "넘기면", 어린양의 목은 사제들의 칼에 찔려 피를
"흘렸습니다". 이렇게 어린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말씀하신 것은,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의 처지와 비교하여 장차 당신이 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항구히 기억하게 만드는 성찬례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만찬에서 보여주신 행동을 그 즉시 이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최후 만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강림 후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보여준 최후 만찬을 본떠 함께 모여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분이 자기들에게 가르치신 바를 "기념"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예식은 얼마 안 있어 말씀 전례와
합하여 오늘의 미사(성찬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파스카 신비에 동참함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 때 사제를 중심으로 모여 "주님의 만찬"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의 사건,
2,000년 전에 예수라는 한 개인에게 일어났던 비극적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뜻하는 바를 지금 이 자리, 그분의
명에 따라 행하는 성찬례 안에서 되살리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분의 죽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빵(성체)과 포도주(성혈)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의 뜻에 따라 살리라는 결심을 다지며, 이 사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과 투쟁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증거하겠다는 세례성사 때의 약속을 다시 한번 결심합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로 열려진 구원의 여정이 완전히
완성되는 순간이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합니다.
영성체를 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함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행위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성체가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영물(靈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영성체 때
사제가 나누어 준 성체를 영하지 않고 집에 가져와 모셔 두거나 목걸이 함을 만들어 그 안에다 보관하여 걸고 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체를
보관하기를 주장하는 이단이 우리나라에도 얼마 전 있었음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성체와 성혈은 예수님의 죽음과 그분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상기시킬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예수님 뒤를 따르라는 초대장과 같습니다. 불행히도 그
초대장은 행복에의 초대장이 아니라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라는 고통의 초대장입니다. 물론 그 고통 뒤에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체를 할 때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세례 때의 결심을 계속
반복하여 갱신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영성체를 하면서도 아무런 감흥도, 신앙 생활의 변화도 느끼지 못하거나 한다면, 일단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세례로써 구원의 완성에 다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이다; 동방 교회들의 형성 지금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단 하나의 총대주교좌 교회가 있었으니 그것은 곧 로마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서유럽 전역을 복음화함으로써 후에 서방 교회는
로마 교회를 가리키게 될 정도로 서유럽 거의 전부를 자기 관할권 밑에 두었습니다. 이에 반해 네 개의 총대주교좌 교회가 있었던 동유럽과 중동
지방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 지역은 인종과 문화, 역사가 서로 다른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또 이미 독자적으로 발전한
교회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각기 나름대로 발전한 독특한 신학과 전례를 가진 교회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후에 정교회(正敎會)라 불리게 되면서 동유럽을 중심으로 발전을 이룩하였으니, 지역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정교회는 주로 동유럽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에집트에서 곱틱 교회로
발전되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은 이보다 복잡하게 발전되었으니, 처음에 서시리아 교회, 동시리아 교회로 발전되다가 후에 신학상, 지리적 이유
등으로 인하여 여러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현재 옛 소련의 남부인 아르메니아 지방(터키와의 접경 지대)과 터키 일부에는 아르메니아 교회가,
이란과 이라크 국경을 사이에 둔 지역에는 깔다이 교회가, 레바논에는 마로니트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또 에티오피아에는 에티오피아 교회가, 인도
남부에는 말라바르 교회가 있습니다. 한때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까지 진출하였던 네스토리오 교회 역시 동방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의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들이 갈 수 있는 모든 지역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큰 도시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에 대한 기록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바울로 사도의 서간들 안에서 생생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으며, 이 복음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비록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인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다 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인 이는
모두 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이 하나인 까닭에 그리스도 교회 역시 하나였던
것입니다.
다섯 교회의 형성과
발전 로마 제국 안에는 각 지방마다 경제·문화·사회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큰 도시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이런 큰 도시들에 제자들이 복음을 먼저 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 형성된 공동체를 위해서 제자들은 신도들 가운데 유능한 이를 책임자로 임명하였고, 또 큰 도시 신자들 가운데는 학식있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이런 큰 도시 교회는 자연적으로 그 지방의 중심 교회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도들이 직접 세운 것으로 전해진 큰 도시
공동체는 각별한 중요성을 인정받았으니, 3~4세기에 이르러 바울로 사도가 창립한 것으로 간주된 안티오키아 교회(지금의 소아시아 지역), 베드로
사도와 바울로 사도가 창립한 것으로 인정받은 로마 교회, 마르코 복음사가가 창립한 것으로 전해진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집트)는 당시 각 지역을
대표하는 3대(三大) 교회로서 인정받았고 또 그에 걸맞은 발전도 이룩하였습니다. 4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그 지역의 중심 교회로 발전되었고, 또 5세기에는 모교회(母敎會)인 예루살렘이 위의 네 교회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교회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5세기에는 교회 행정적으로 독립된 5개의 총대주교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각기 자기네가 위치한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복음을 재해석하여 전례와 신학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주변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관할권에 두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동방
교회가 아니라 동방 교회들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는 달리 동방 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 교회들은 행정적으로뿐만 아니라 신학적·전례적으로도 다른 교회와는
독립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 교회들이 여럿 있다는 뜻에서 "동방 교회들"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정교회가 가장 큰 덩치를 이루고
있고 또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서 이를 동방 교회와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동방 교회들을 무시하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때 신학이
다르다 해서 서로를 적대시한 적도 있고, 아직도 그러한 움직임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들 동방 교회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는 가운데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동방 교회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들에 대해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로마 교회와
일치된 동방 교회들 일반적으로 동방 교회들은 로마 교황의 행정적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 역시 동방 교회들을 일방적으로 로마 교회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자 하지 않습니다. 동방 교회들과의 일치
노력은 계속되어 왔으니, 1964년에 있었던 정교회의 수장(首長)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과의 만남은 그동안 로마 교회와 정교회
사이에 있었던 반목과 상호 파문(破門)을 없애고 앞으로 일치를 위해 서로 노력할 것을 다짐하는 상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치 노력은
역사적으로도 계속되어 왔으며, 그 결과 전례는 자기네가 속한 지역의 동방 교회의 전례를 따르면서도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선언한 교회들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대다수가 로마 교회와 일치를 선언한 경우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소수가 로마와의 일치를
선언하면서 따로 교회를 이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집트의 곱틱 교회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로마 교회와 일치를 선언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를 "로마 교회와 일치를 이룬 곱틱 교회"라 부릅니다.
성당의 품위 일부 도시 성당의 신부님들이 농촌을 돕기 위해
직거래장을 열고 있다는 것은 참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직거래장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신음하는 농촌을 건강한 농촌으로 되살리고자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농산물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농민의 입장에서 볼 때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데 드는 품을 시중보다 얼마간 더 값을 쳐주는
직거래장에서 보상받을 수 있어 좋습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일반 시장에서보다는 조금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지만 안심하고 먹을 수 있기에
결국은 이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업은 사람의 손을 훨씬 더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기농산물 자체는 농민의 땀과 피를 더 많이 요구하게 되어 있으며, 이런 점에서 소비자는 유기농산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부 소비자들은 일반 농산물보다 더 비싸게 사는 만큼 유기농산물 먹거리가 겉보기에도
깨끗할 것을 요구합니다. 고추나 오이는 똑바르고 잘생겨야 하고, 콩은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깨끗한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장도 잘해야
합니다. 이러니 무공해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만 전념해야 할 유기농업 농부들은 어떤 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유기농업이 땅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기농업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무공해 농산물이라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야 할 소비자들의 또 다른 과도한 요구가 유기농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자람 우리나라에는 절이 일종의 관광 명소로 되어 있듯이 이탈리아에는 관광객의 발걸음을 부르는 많은
성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당들의 입구에는 경비원이 서서 관광객들의 옷차림을 조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성당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성당 입구에서 옷을 바꾸어
입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옷차림은 각자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인데 왜 간섭하는 것이냐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항의는,
자신만을 생각한 나머지 성당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 짧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당은 관광지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경배하는
장소임을 인정한다면, 성당에 들어설 때의 옷차림과 행동이 경망스러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당은 무엇하는
곳인가? 성당이 무엇하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신자들에게 이 질문을 가끔
던집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왜 성당에 나오며, 성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당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곳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신비로 이루어진 파스카 신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서 기원한 미사를 드림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찬양하며 우리 또한 그리스도처럼 살기를 다짐하는 자리가 바로 성당입니다.
성당을 성당답게 성당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성당의 본래 목적에 맞게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는 데 알맞도록 설계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이때문에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구조와
장식들로 이루어진 성당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양식의 성당이 파스카 신비를 드러내는 데 더 적합한지는 계속 토론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성당의 장식과 구조가 파스카 신비의 거행에 적합해야 한다는 대원칙만 지킨다면 어떤 구조, 어떤 장식도 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 한편,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성당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물론 무엇이 목적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가리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제대와 독서대가 성당의 중심으로 드러나는 데 지장을 주는 장식들, 지나치게 사치스런 인상을
주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성당의 장식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을 후임 신부가 신자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주관적 판단만으로 부수고 또다시 새 장식에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면, 이 역시 하느님 경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요즘 지역
사회에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성당을 예배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간혹 볼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다 보면 성당의 본래 목적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지나치게 장식에 신경을 쓰다 보면, 빛 좋은 개살구처럼 하느님 찬양이라는 알맹이는 뒷전에 밀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소박하고 검소한 성당 안에서 하느님을 더 쉽게 찬양하는 경험들을 갖게 됩니다. 많은 돈을 들여 지은 냄새를
풍기는 성당에서는 왠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이 안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제대의 발전 과정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예배에 있어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제대라고 지난 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제대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당연히 제대의 발달사(發 達史)에 대해 어느 정도 간단하나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지난 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듯이 말입니다. 먼저, 이동식 나무 제대(식탁)에서 돌 제대(제단)로의 변화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 이후 300년간 가정에서 미사를 드렸고, 이 때 제단으로 사용된 것은 나무로 만든 식탁 모양의 것이었습니다. 이 때 강조된
것은 "주의 식탁", 즉 잔치로서의 미사의 측면이었으며, 제사적 측면은 그다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박해가 끝난 후, 성당들이
세워지면서 여기에 걸맞은 제대가 필요했는데, 이로써 돌로 만든 고정된 제대가 교회의 관습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517년 프랑스의
에빠온(Epaon) 지방공의회에서는 나무 제대의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하였으나 12세기까지는 나무 제대가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돌 제대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 생명의 물이 솟아 나오는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에 돌제단이
적합하였고, 이에 따라 제대에 대한 신도들의 공경심도 커졌기 때문에 항구적인 제대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8세기까지 제대의 모양은 아주
단순한, 성작과 성반 그리고 미사에 필요한 책을 올려놓기에 충분한 정도의 넓이를 가진 정사각형의 제대였습니다. 하지만 순교자 무덤 위에 성당을
세우고, 그 중심지에 제대를 세우면서 제대와 순교자의 유해 또는 유품을 제대와 연관시키게 됨에 따라 제대의 형태가 다양해집니다. 제대에 성인의
유해 또는 유물을 모시는 관행은 1596년 교회법으로 확정되었으나, 지금은 성인 유해와 상관없이 제대를 축성하여 사용합니다. 16세기까지 성체를
모시는 감실은 성당의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자리를 잡았지만, 16세기 이후 제대 위 또는 제대와 가까운 곳에 감실을 모시게 되었고, 제대를
장식하기 위한 꽃, 초, 십자가를 위한 자리도 16세기 이후에나 등장합니다. 원래 초는 빛을 밝히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으며, 11세기 이후
제대 근처에 놓이고 나서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꽃은 16세기 이후에나 제대에 놓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제대의 발전사를 보았습니다. 처음엔 아주 단순한 형태의 제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요소들이 제대에 첨가되었고, 이로 인하여 제대의 본래 모습이
많이 흐려지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제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제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돌로 만든
제대는 모퉁이돌이신 그리스도,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대가 그리스도의 무덤을 상징한다거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드러낸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제대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구원의 계약을 갱신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를 드리는 곳이 바로 제대입니다. 한편
제대는 주님의 최후의 만찬, 하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지는 식탁이기도 합니다.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미리 천상 잔치를 맛보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제대는 그리스도의 제사가 올려지는 곳, 그리스도와 함께 온 신도가 같이 친교의
식사를 나누는 곳입니다. 이처럼 제대가 중요하기에, 교회는 제대로부터 우리 마음을 멀리하게 하는 요소들, 즉 감실, 초, 꽃과 그 외 여러
장식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으니, 사실 위에 말한 여러 요소들은 중세 말에나 제대 근처에 등장했던 것들입니다. 참된 미인은 화장하지 않을 때,
화려한 옷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드러납니다. 제대가 여러 복잡 다단한 요소들로 뒤덮인다면 우리가 과연 제대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제대에 걸린 그림, 조각을, 그 주위를 장식한 꽃을 보고 감탄합니다. 제대를 이러한 요소들로부터 해방시켜 우리가 다시 제대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실과
믿음
우리가 성당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성당 중앙이나 제대 옆 벽에 켜 있는 빨간 불일 것입니다. 그 옆에 있는 황금색 감실은 신자들로 하여금, "아, 저기에 바로
하느님이 계시는구나"하는 마음과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경외심을 갖게 만듭니다. 감실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빨간 불과 아름답게 장식된 감실, 그래서 성당에 처음 온 사람이나 오래 전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켜 온
이나 할 것 없이 감실이 성당의 중심인 양 생각하게 됩니다. 더더구나 주님의 몸인 성체가 그 안에 있으니, 그러한 생각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같은 생각이 과연 옳은가요? 4세기 초까지의 박해시기에 교회는 성찬례를 가정집에서 드리곤 하였습니다. 이 때
사제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수보다 조금 더 많이 빵을 축성하였는데, 이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거나 병으로 인하여 성찬례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중에 축성된 빵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제는 자기 집 특별한 곳에 축성된 빵을 모셔 두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감실의 기원이라 하겠습니다.사제가 자기 집에다 성체를 보관하는 것 외에도, 일반 신자들도 성찬례(미사) 때 축성된 빵을 집에
가져가 자기 집에 있는 감실에 모셨는데, 이는 매 식사 전 성체를 먹기 위한 것으로서, 이러한 관습은 로마, 스페인, 소아시아 교회 일부,
에집트에서 6세기 경에 행해졌습니다. 종교 자유(313년) 이후 성당들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때 제대가 성당의 중심을 차지하였고, 감실은
여전히 신자들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8세기 무렵의 로마예식서에는 교황님이 미사를 드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에 의하면
제의방에 성체를 모셔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에 접어들면서 신자들이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로 미사에 제대로 참여치 못했고, 또
영적 순결주의에 빠져 성체를 영하기를 두려워하는 반면 성체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는 이상한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대신
성체를 바라보는 것으로 미사 참례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지요. 교회법에서도 성체를 모시는 것을 부활대축일에 한번만 해도 되는 것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미사 때 축성된 빵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란 생각에 성체께 대한 신심이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성체를
신자들이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감실을 제대 위 또는 제대에서 가까운 곳에 놓아두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불을 밝혀 두기까지 하였으니, 자연히 신자들의 관심은 제대에서 감실로 옮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히 감실이 성당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근원은 십자가 제사요, 이 십자가 제사를 재현하는 성찬례(미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성찬례가 행해지는 제대가 우리 믿음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지요? 현재 교회는 감실을 위한 경당을 따로 지어
신자들이 조배할 수 있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신자들의 관심이 다시 제대, 즉 현재 행해지는 성찬례에 돌려질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당의 공간이 충분치 못하다면 성당 안에 감실을 모시되, 제대 중심의 성당 구조를 해치지 않는 위치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감실의 목적이 원래 병자와 미사 밖에서의 영성체를 위해 성체를 모셔 두는 것임을 생각합시다. 또 성찬례(미사)가 바로 우리 신앙의 중심이므로
성체께 대한 경의는 바로 이 성찬례, 즉 십자가 제사와 연결되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 감실과 제대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합시다. 우리 중에는
혹시라도 미사를 소홀히 하면서도 성체조배는 열심히 하는, 균형 잃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는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탄 대축일 미사의
유래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탄 대축일 미사를
총 네 대를 드린다. 예수 성탄 대축일에 전야 저녁미사 외에 세 대의 미사를 드린다. 성탄의 신비는 크고 깊기 때문에 24일 저녁부터 점차적으로
성탄의 신비를 강조한다. 그 절정은 성탄 밤미사이다. 그래서 이 네 대의 미사는 모두 성탄 대축일 미사이다. 어느 미사이든지 한 대만 하면 성탄
미사 참여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시간을 계산하는 전통은 전날 해가 지면서부터 그날 축제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성탄 대축일 역시
24일 성탄 대축일 시간전례 제1저녁기도부터 대축일이다. 중세에 위령의 날에 미사를 세 번 드리는 풍습은 갈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성탄
대축일에 미사를 세 번 드리는 것은 고대 로마 교회의 고유한 관습이었다. 12월 24일에는 성모 대성당에서, 밤에는 구유 경당에서, 새벽에는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서, 낮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전례를 거행하였다(그레고리오/아드리아노 전례서 609).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말하는 세
대의 미사는 벌써부터 있었던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사제가 세 번 미사를 드렸다는 뜻이 아니라 교황 자신이 세 번에 걸쳐
장엄한 ‘순회 미사(Missa stationalis)’를 거행하였음을 말한다. 전례에서 ‘순회(statio)’란 거행을 위한 모임이나 회중을
뜻하며, 보통 행렬과 미사를 포함한다. ‘순회 미사’는 로마 전례의 특징으로서, 교황이 성직자들과 교우들과 함께 정해진 날에 도시의 지정된
성당(순회 성당)에서 드리는 미사를 말한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순회 미사’ 체계를 정리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로마 미사
전례서』에 ‘순회’가 표시되어 있었다. 1) 낮미사: 성 대 레오 교황 시대까지 로마 교회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낮미사 하나만을
거행하였다. 이 미사는 아침나절에 드렸고, 요한복음 서문을 읽었는데, 로마에서는 초기부터 성탄 거행 때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라는 구절을 주제로 삼았다. 11세기부터는 이 미사를 성모 대성당에서 거행하였다. 2) 밤미사: 로마에서 성탄 대축일에 밤미사를
거행하는 전통은 아마도 5세기에 나타난 것 같다. 예루살렘 전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5세기 초에 공현 축일(실제로는 동방의
성탄 축제)을 지내면서 성대한 밤 전례를 거행했는데, 여기에는 베들레헴 순례가 들어있었다(『에테리아 여행기』). 베들레헴에서 한밤중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대성당 안에 있는 성탄 동굴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교우들은 새벽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잠깐 쉰 다음 두 번째 미사에
참여했다. 이 거행을 로마가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 교회는 성모 대성당 안에 베들레헴 동굴 경당을 본떠 측면 경당을 만들어 ‘구유
경당’이라고 불렀는데 성탄 밤 예식은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예식이 구유 경당에서 이루어졌고 구유의 표지가 있었기 때문에 밤미사는 교우들의 정서에
맞게 다듬어졌다. 그 결과 밤미사에는 성탄에 관련된 역사 사건들, 천사, 목동, 구유에 계신 아기에 관한 복음이 선택되었다. 3)
새벽미사: 마지막으로 생긴 미사는 새벽미사이다. 6세기에 교황은 아벤티노 억덕 건너편에 있는 팔라티노 억덕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서 두 번째
성탄 미사를 드렸다. 이 성당은 또한 사순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교황 순회 미사에서 교황이 이곳에서 기도한 다음 행렬로 아벤티노 억덕에 있는
성녀 사비나 대성당에 가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드렸다. 비잔틴 통치 시대에 이 성당 가까운 곳에 비잔틴 궁전이 있었고, 비잔틴 관리들은 이
성당을 궁정 성당으로 만들었다. 이날 그들은 이 성당에서 비잔틴에서 깊은 공경을 받던 시르미움의 순교자인 아나스타시아 성녀를 공경하였다(우연히
이 성당의 수호성인과 이름이 같다). 비잔틴 사람들을 존중하여 교황은 이날 순회 전례를 이곳 아나스타시아 성당에서 하였으며, 미사 때 성녀 고유
기도문 대신에 성탄 기도문을 사용하게 되었다. 성모 대성당에서 밤미사를 마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는 도중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을 지날 때는
새벽이었기 때문에 두 번째 미사는 새벽미사가
되었다.
미사의 마침
예식
미사에서 영성체 후 기도가 끝난 다음
미사 전례 전체를 종결짓는 예식이다. ‘마침 예식’이라 한다. 성목요일, 장례 미사 등과 같이 미사 끝에 다른 전례 예식이 이어지면 마침 예식은
생략된다. 미사 전례 외에도 시간 전례, 여러 축복 예식, 여러 신심 기도 모임 등 교회의 다양한 전례 예식 끝에는 항상 그 예식을 마무리하는
마침 예식이 있다. 미사는 ‘시작 예식’, ‘말씀 전례’, ‘성찬 전례’ 그리고 ‘마침 예식’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부분이 말씀의 식탁에서 하느님 말씀을 배령하는 말씀 전례와 그리스도 몸의 식탁에서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성찬 전례이다. 이 본질적인
부분에 도입하는 기능을 시작 예식이 하고 그리고 이 본질적인 부분을 마무리하는 기능을 마침 예식이 한다. 따라서 마침 예식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찬례 전체를 마무리하고 전례에서 일상 삶으로 건너가게 하는 기능을 한다. 구원의 말씀과 생명의 빵으로 양육된 전례 집회는 마침 예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파견되는 공동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마침 예식은 예전부터 매우 짧고 간결했으며 미사의 다른 예식들과는 달리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3세기 테르툴리아노는 단순히 “미사가 끝나면 백성은 파견된다...”라고 했다 (De anima, 9; PL 2,660A).
4세기 후반 시리아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는 ‘사도 헌장’ (Constitutiones Apostolicae)에서는 미사 끝에 주교가 영성체
기도를 바치면 회중이 “아멘”이라고 응답하고는, “부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머리를 숙이십시오’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주교가 긴
강복 기도를 바친 다음 모두가 “아멘”하고 응답하고, 마지막으로 “부제가 ‘평화로이 물러갑시다’ 하고 말한다” (VIII, 15). 이렇게
미사가 끝난다. 4세기 후반의 문헌인 ‘에제리아 순례기’ (Itinerarium Egeriae)에서도 여러 전례 거행 끝에 주교가 신자들에게
강복을 하고 파견이 완료된다는 것을 자주 기록하고 있다. “주교는 신자들에게 강복을 하고, 그렇게 파견이 완료된다.” 5-8세기 교황이 특수
전례 시기에 로마 시내의 여러 바실리카 대성당을 순회하면서 거행한 미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로마 예식 1권’ (Ordo Romanus
I)에서 초기 로마 교회 미사의 마침 예식을 비교적 상세히 볼 수 있다. 교황은 모든 신자의 영성체가 마무리되면 성가대에게 영광송으로 영성체
후렴을 끝내라고 지시한다. 교황은 제대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말하고 영성체 후 기도 (oratio ad
complendum)를 바친다. 대부제가 부제들 가운데 한 부제를 선택하여 파견을 선포하게 한다. 부제가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Ite,
missa est) 하고 파견을 선포하면 백성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한다. 그 다음 교황과 봉사자들은 제의실로 퇴장한다
(117-126항). 1570년 비오 5세 로마 미사 전례서의 마침 예식은 여러 요소들이 논리적인 배열 없이 섞여 있었다. 파견을 선포하는
“Ite, missa est”가 사제가 하는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파견 다음에 사제의 강복, 요한 복음 서문 (요한 1,1-14)의
봉독, 세 번의 성모송, 그리고 다른 두 가지 기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마침 예식의 요소들을 단순화하고
논리적으로 재배열했다. ⟪2002년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에는 마침 예식의 기능과 의미에 관한 내용이 없다. 2002년 로마 미사 전례
총지침에서 마침 예식의 구조를 보면 크게 네 부분막?구성되어 있다. 1) 필요하다면 짧게 공지를 한다. 2) 인사와 강복은 몇몇 날이나 어떤
경우에는 백성들을 위한 기도나 다른 형태의 장엄 강복을 할 수 있다. 3) 부제나 사제가 하는 백성의 파견으로 각자는 자신의 좋은 일에 돌아가고
주님을 찬양하고 찬미한다. 4) 사제와 부제가 제대에 침구하고, 그러고는 사제와 부제와 다른 봉사자들은 제대에 깊이 절한다 (90항). 이
구조는 미사의 시작 예식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마침 예식의 구성 요소를 시작 예식의 구성 요소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시작
예식: a. 입당 - b. 제대 인사 - c. 제대에 입맞춤 - d. 십자 성호 - e. 신자들에게 인사와 응답 - f. 도입말 마침
예식: f. 공지 - e. 신자들에게 인사와 응답 - d. 강복과 파견 - c. 제대에 입맞춤 - b. 제대 인사 - a. 퇴장 이렇게
마침 예식의 구조는 시작 예식과 비교할 때 대칭 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히 비교하면 마침 예식은, 시작
예식은 물론 미사의 다른 예식들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간결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 맺음말과 공지 사항
영성체 후 기도가 마치면 사제는 거룩한 행위 전체 (31항)를 마감하는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다. 이 맺음말을 통하여 신자들은 삶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성찬례의 의미를 짧게나마 기억하게 된다. 또한 사제는 필요에 따라 공지사항을 알린다. 공지사항은 짧아야
한다.
2) 인사와 응답 사제는 두 팔을 벌리며 신자에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인사하고 백성은 “또한 사제와 함께”
하고 응답한다. 이 인사 형식은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이며 성서에서 자주 사용된다 (룻 2,4: 2데살 3,16; 2디모 4,22
등등). 우선 이 인사는 헤어질 때하는 인사이고, 동시에 당신의 약속 (마태 18,20)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현존하신다는 것에 대한 강한
기억이다. 따라서 미사 중에 말씀과 성찬을 통해 신자들 안에 오시어 구원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서 사회생활 중에도 계속 그들과 함께 계시기를
기원하고 확언하는 인사이다. 신자들의 응답은 직역하면 “또한 당신 영과 함께” (Et cum spiritu tuo)이다. 성 바울로는 “주님이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며” 하고 말한다 (2디모 4,22; 갈라 6,8; 필립 4,23; 필레 25 참조). 언어학적으로 보면 이 응답은 “또한
당신 영과 함께”의 셈어를 번역한 것뿐이다. 주례자의 인사가 단순히 주례자의 개인적 선의와 통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 선포인 것과 같이, 신자들도 단순히 개인적 말로 사제에게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느님 신비의 관리자” (1고린
4,1)인 주례자의 직무에 대해 인사하는 것이다. 전례를 집전하는 구체적인 한 사람 (liturgicus) 안에 현존하는 ‘영’
(spiritus)은 사제의 인격이나 영혼만이 아니라 그가 입은 특은 (charisma)을 분명히 드러내는 말이다.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해 모든
이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이 영을 수여받는다. 이 인사를 통하여 신자들은 주님께서 당신 은총 사제의 특은을 효과 있게 하시기를
기원한다.
3) 장엄 강복(Benedictiones sollemnes)과 백성을 위한 기도(Oratio super populum)
특별한 날과 특별한 경우에 사제는 장엄 강복이나 백성들을 위한 기도로 더 성대하게 강복할 수 있다. 2002년 미사 전례서에는 ‘미사 끝
장엄 강복과 백성을 위한 기도’라는 소제목으로 ‘미사 통상문’ (Ordo Missae) 안에 속해 있다. 말씀 전례, 시간 전례, 다른 전례
예식 끝에도 사용할 수 있다. 사제 자신이 혹은 부제가 있으면 부제가 “강복을 받기 위하여 머리를 숙이십시오” 라는 말이나 다른 적당한 말로
신자들을 준비시킨다. 장엄 강복은 갈리아 미사 전례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 당시 주교나 아빠스는 영성체 전에 영성체를 준비하거나 영성체를 하지
않고 미리 퇴장하는 신자들에게 영성체 전에 강복했다. 현재의 장엄 강복은 대부분 아니안느의 베네딕도 (약 750-821)가 만든 것으로 보는
‘그레고리오 성사집’의 ‘보충본’ (supplementum)에서 발췌한 것이고 나머지 강복들은 새롭게 만든 것이다. 2002년 미사 전례서에는
전례 시기별로 사용할 수 있는 총 20개의 장엄 강복 양식을 제시한다. 사제는 신자들을 향하여 팔을 펼치고 세 번의 강복문을 외고 신자들은 매번
“아멘”하고 응답하고 항상 끝에는 성삼의 이름으로 하는 강복으로 마무리한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는 미사를 마무리하고 신자들이 매일의 일터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 위에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빌어준 관습에서 기원했다. 중세 때 예비신자들이 퇴장하기 전 말씀 전례 끝에 바쳤던 기도와
흡사하다. 2002년 미사 전례서에는 28개의 백성들을 위한 기도를 제공한다. 이 기도를 바치는 방법은 장엄 강복과 같다.
4)
마침 강복과 파견 사제는 손을 모았다가 곧바로 왼손을 가슴 위에 놓고 오른 손을 들어 “전능하신 천주”를 말하고 계속해서 백성 위에 십자
표시를 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있는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하고 말한다. 신자들은 모두 “아멘”하고 응답한다. 주교는
신자들에게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강복한다. 사제의 강복은 중세 후기에 도입되었다. 가장 오래된 ‘로마 예식 1권’에서 보면, 교황이 퇴장할
때 여러 계층의 신자들이 “성하, 원하오니, 강복하소서” 하고 청하면 교황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복하소서”라는 말로 강복하고 신자들은
“아멘”으로 응답했다 (124항). 로마 교회에서는 강복은 매우 오랫동안 주교에게만 유보되었다. 12세기까지의 전례서들은 제대에서 사제가 하는
통상적인 마침 강복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복을 청하는 사람에게만 사제가 성작, 성반, 특히 성체포를 가지고 강복을 줄 수 있었다.
마침 강복 다음에 사제 혹은 부제가 있으면 부제가 손을 모으고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파견을 선포한다.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응답한다. 라틴말 미사 전례서에는 단 하나의 파견 형식만이 있다 (Ite missa est). 동방 전례들은 성서적
표현인 “평화로이 나아갑시다” (루가 7,50; 마르 5,34 참조)를 사용한다. “missa”라는 라틴말 단어는 원래 “missio”,
“dimissio” (파견)에서 파생했다. 이것은 후대에 가서 성찬례 전체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우리 말 미사 전례서에는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등 총 5가지 파견 형식이 있다.
5) 제대 입맞춤, 제대 인사, 퇴장 부제가 있으면 부제와 함께
사제는 제대에 입을 맞추고, 평신도 봉사자들과 함께 제대에 깊은 절을 하고 제대를 떠난다. 제대 입맞춤은 거룩한 신비가 거행되고 감사의
희생제사가 완성되는 ‘주님의 식탁’으로서의 제대에 인사하는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제대가 그리스도 몸의 형상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De
Sacramento, 4,2,7)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인사이기도 하다. 점차 제대의 재로가 나무에서 돌로 바뀌면서 제대는
영적인 바위이며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 (에페 2,20)를 더욱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 초기부터 제대 입맞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인사하신다는 표시로 의미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교황 인노첸시오 3세 (1198-1216)는 제대에 입을 맞추는 주교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신부에게 인사하신다고 했다 (De sacrae altaris mysterio, II,15: PL 217,807). 또한 순교자의 무덤 위에
제대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제대 입맞춤은 순교자의 무덤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여겼고, 더 나아가 성인 공경 신심과 결부되어 제대에 성인 유해를
안치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성인 유해와 함께 제대는 전투하고 고통받고 승리하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자연히 주교는, 유해와 함께
제대에서 드러나는 교회인 신부에게 다가가는 신랑인 그리스도로 인식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제대를
경배한다는 초기 의미를 다시 찾았다. 또한 이전에는 미사 중에 여러 번 제대에 입맞춤을 했지만 이제는 성찬례의 시작과 마침에 하도록 그 수를
축소한 것도 초세기 의미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성찬례 모임과 감사행위의 중심으로 제대를 경배한다. 제대는 살아있는 돌 그리스도 예수
(1베드 2,4; 에페 2,20 참조)를 더 분명하고 항구하게 나타낸다.
- 참고 문헌 이홍기, 미사 전례, 분도 출판사,
1998 재판; B. 노인호이저, 김인역 역, 문화사에 따른 전례의 역사, 분도출판사, 1992; J. Hermans, La
celebrazione dell'Eucaristia, Editrice Elle Di Ci, 1985; M. Righetti, Storia
liturgica III. La Messa, 1966; J. H. Emminghaus, The Eucharist, The liturgical
press, 1997; A.G. Martimort (ed.), The Eucharist, Irish university press, 1973;
D. Borobio (ed.), La celebrazione nella Chiesa 2, Editrice Elle Di Ci,
1994.
생명의
말씀
저의 조그만 방에는 예수님
얼굴을 그린 동방 교회의 이콘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은 저를 항시 응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獵纛?눈길은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늘 그윽하고
인자한 눈으로 저를 보시다가도 제가 엉뚱한데 정신을 팔 때는 아주 무서운 눈으로 제 내면의 어두움을 질타하십니다. 이처럼 한 장의 이콘은 성찰과
묵상을 통하여 우리를 늘 깨어있게 합니다. 흔히 이콘을 전통적 방법으로 그린 동방 교회의 성화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콘은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 말씀의 현현(顯現)입니다. 성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 했습니다 (골로 1,15). 이
‘모상’ (eikon)이란 단어에서 이콘이라는 명칭이 나왔습니다. 이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와 말씀을 눈으로 경청할 수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동방 교회에서 이콘은 성서와 같은 권위가 있고 특히 전례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오늘 귀를
기울여 듣고자 하는 이콘은 15세기 경 러시아의 루블료프 (Rublev) 학파가 그린 성탄 이콘입니다. 이콘에서 구약의 예언서를 비롯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 말하는 성탄의 신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이콘의 전체 배경은 금색입니다. 이 색깔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 (ouranos)과 하느님의 ‘빛’ (phos)을 상징합니다. 이 배경으로 말미암아 이콘에 등장하는 지상의 인물이나 사물들은 하느님
영광의 상징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적 역사의 차원이 천상적 초자연적 신비의 차원으로 높아집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을 눈여겨봅시다. 아기
예수님의 머리 위에 “IC XC”라는 글자는 “예수 그리스도” (Ιησους Χριστος)의 그리스말 약자입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마치 죽은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을 싼 포대기는 수의를, 구유는 석관을, 그리고 동굴은 돌무덤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이콘은
예수님의 성탄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육화의 신비에서 파스카 신비를 보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자신을 높이는 교만 때문에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나서 죽음의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창세
3,1-24).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가장 비천하고 낮고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케노시스 (kenosis), 곧 비움의
신비입니다 (필립 2,6-11). 아기 예수님은 빛으로 빛나면서 동굴 속 어두움에서 두드러지게 구별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탄 낮미사 때 듣게
될 요한복음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건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 1,4-5).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는 동굴입니다. 동굴은 어두운 색깔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어두운 굴은 땅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막 태어난 아기를 집어 삼키려는 용의 아가리이고 죽음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묵시 12,4-5 참조). 사실 예수님은 악의
세력을 없애시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콘의 중심에 계시는 성모님께 자연히 눈길이 갑니다.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져 있고
동정녀께서 누워계신 침상의 색이 진홍색인 것은 어머니의 존귀함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자세를 보면 이상하게도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보지
않고 목자들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계시고 그 표정도 밝지 않으십니다. 제가 수도원 피정집에서 이 이콘을 가지고 성탄전례 피정을 지도할 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자매님 대답인즉 “산후 우울증!” 이 대답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마리아를 모세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 아무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출애 33,20). 그래서 사람이신 동정녀 역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맞대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모님을 고통의 어머니로 드러냅니다. 수의에 싸여 계시는 아드님한테서 이미 수난과
죽음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아드님을 직접 보지 못하십니다 (루가 2,34-35; 요한19,25-27 참조). 성 요셉은 왼쪽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근심과 고뇌에 싸여 턱을 손에 받치고 있는 요셉은 마리아도 아들 예수님도 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요셉이 자신과 혼인하기 전에 임신한 마리아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태 1,18-19). 요셉의 이
모습에서 이콘은 두 가지 신비를 말해줍니다.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고, 마리아는 동정으로 낳은 어머니임을 증거합니다.
요셉 앞에 서 있는 노인은 아담이라 합니다. 그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아론과 이새의 막대기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막대기는 새
하와인 마리아를 상징합니다. 아담은 요셉에게 동정녀의 출산으로 성취된 예언을 상기하게 합니다. 곧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사실을 아담은 요셉에게 일러줍니다. 우리는 오른편 아래에 아기 예수님을 씻고 있는 두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여인은 아르메니아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우리의 첫 어머니 하와라고 합니다 (창세 3,20). 하와는 성모님과
비교됩니다. 첫째 하와의 불순종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둘째 하와이신 마리아의 순종으로 죄 사함과 구원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서
있는 다른 여인은 이집트 곱트 교회 전승을 따르면 살로메라고 합니다. 성가정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 할 때 같이 따라간
여인입니다. 두 여인이 예수님을 목욕시키는 장면은 아기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탄 이콘은 아담과 하와를 등장시킴으로써
성탄 신비가 잃어버린 인간의 품위를 회복시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이시고 동정 마리아는 새 하와이십니다. 이콘
왼쪽 위에 동방박사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태2,1-12). 교부들은, 이들이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바빌로니아 이방
세계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첫 선교사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점성가들이 바친 황금은 왕께 드리는 존경으로, 유향은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으로,
몰약은 장례를 위해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 중간에는 베들레헴의 목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사회에서 아주 비천한 계층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모님을 경배하고, 성모님은 그윽한 눈길로 이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목자들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이들이고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견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신앙의 선물을 수호합니다. 역설적으로 아기 예수님이 참으로
그들의 착한 목자이시고 목자들은 그분의 양떼입니다. 천사들은 두 무리로 등장합니다. 왼쪽 중간에 자리한 천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오른쪽
위에 자리한 천사들 가운데 둘은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루가 2,14)이라고 환호하고, 하나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겁내지 마시오. 자,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하겠소. 오늘 다윗의 고을에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곧 주님
그리스도이시오.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여러분을 위한 표징이오” (루가 2,10). 이처럼
천사들의 서로 다른 자세는 그들의 이중 사명, 곧 하느님을 찬양하고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임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탄 이콘에는 항상 구유 옆에
황소와 당나귀가 있습니다. 교부들에 따르면 황소는 유다인을, 당나귀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이 두 민족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고 주님을
경배합니다 (이사 1,3 참조). 우리가 이콘을 통해서 관상한 성탄의 신비를 대림과 성탄 전례에서 직접 체험합니다. 작은 이콘이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잘 것 없는 우리 역시 전례를 통하여 하나의 이콘이 됩니다. 곧 주님의 탄생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이콘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셨으며 우리가 듣고 눈으로 보고 살피고 또 손으로 만졌던 생명의 말씀, 과연 생명이 나타나셨고 이에 관하여
우리는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1요한 1.1-2).
미사의 구조;성찬례의 기원은 최후만찬이고 성찬례는 최후만찬의 모방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찬례
(eucharistia)은 최후 만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예수께서 빵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며, 빵을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같은 모양으로 만찬 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를 드리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모두들 받아서 마시시오’라고 하셨다. 당신 피로 맺는 계약의 잔이기 때문이다. 끝에 예수께서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하고 말씀하셨다. 이 행위로써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이 하신 그것을 그대로 행하도록 모델을 정하셨다. 여기에서 성찬례가 무엇인가가
밝혀진다. 곧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순명하고 그분이 하셨던 그것을 우리가 행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루가 22,19; 1고린 11,24) 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한다. 그리스도의 성찬례 제정은, 공관복음서 (마르
14,22-24; 마태 26,26-28; 루가 22,19-20)에서 서로 약간의 차이가 날뿐 거의 같은 이른바 성찬 제정문
(institutionis narratio)으로 우리에게 전수된다. 신약성서 해석학이 “성찬 제정문”이라 부르는 네 본문 전승은 예수의 말씀들을
그대로 기록한 보도가 아니다. 복음서들이 작성된 시대에 (고린토인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기원 후 55년 이전, 공관 복음서들은 70년대에),
이미 사람들은 한 세대 또는 더 긴 세대에 걸쳐 성찬례를 거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사들은 사도 공동체가 거행한 성찬례의 모습을 우리에게 또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빵과 잔의 찬양이 더 명백히 서로 병행하여 자리잡는 거행의 발전 단계를 반영한다할
지라도, 기사들은 전해 받은 전승을 보존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들이 형식과 지향 모두에서 예수의 제정을 정확히 따르고 있음을 확신하였다. 이
기사들의 분석에서 우리는 전승의 세 가닥을 발견하며 구별할 수 있다. (1) 마르코 복음서가 가장 오래된 본문인데, 이는 대다수가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구약 사상 세계를 보여준다. 마태오와 루가가 후대에 편집한 것과 연결된다. (2) 특히 루가로 하여금 파스카
신학 구도에 따라 더 오래된 본문을 (마르코) 의도적으로 결합시키도록 영향을 미친 파스카 신학에 기초를 둔 전승 (루가 22,7-23). (3)
더 후대에 속한 숙고의 단계가 드러나는 요한복음의 이야기 (요한 13,1-17.26). 루가는 최후 만찬 예식 구조를 밝히는 식으로 예식을
서술한다. 여기에는 세 부분이 있다: 시작 예식, 회식 자체, 그리고 마침 예식. 시작 예식은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잔의 예식과 빵의
예식이다. 각 예식에는 설명어가 함께 있다.
첫 번째는 잔의 예식인데, 종말론적인 말씀이 동반된다. “때가 되자 예수께서
자리잡으시고 사도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그대들과 함께 이 해방절 음식 나누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습니다. 나는 말하거니와, 해방절이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잔을 받아 사례하신 다음
말씀하셨다. ‘받아서 나누어 마시시오. 나는 말하거니와,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이제부터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루가 22,14-18). 여기에 빵의 예식이 이어진다. 이 예식에는 설명어와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예식을 반복하라는 명령이 동반된다. “또 빵을
들고 사례하신 다음 떼어 주며 말씀하셨다. ‘여러분을 위해 내주는 내 몸입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시오’” (22,19). 잔에 한
종말론적 말씀은 파스카 만찬과 잔의 예식의 중요성을 세운다. 하느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고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절박한 어둠과 함께 현재는 이미 미래의 빛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최후 만찬 안에 하느님 나라의 모상이
포함된다. 예수의 말씀으로써 이 만찬은, 자신의 신학적 가치가 파스카적임을 통하여, “표준적” 가치를 가지게 되고, 미래의 모델, 즉 앞으로 올
나라에서 있을 종말론적 잔칫상의 모델이 된다. 이를 통하여, 최후 만찬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 사이에는 뒤 단계가 없을 것이다는 의도이다. 이것이
성사들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위한 중요한 주어짐이다. 모든 만찬의 시작에서처럼, 뗀 빵을 향한 말씀들은 빵과 그리스도의 몸 사이의 신원의 명백한
연관성을 세운다. 시작 예식을 마치면 진짜 식사 자체가 있고, 이 식사 끝에는 이미 우리가 봤던 대로 유대 관습에 따라 “찬양-감사”
(Birkat ha-mazon) 기도가 있다. 이 기도는 예식을 끝맺는 잔을 손에 잡고 바친다. 루가 복음에서는 감사하기의 기도가 마지막 잔에
동반된다고는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도는 20절에서 잔을 향하는 동격 위치에 있는 부사 hosautos(“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고”)에서 추론된다. 이 부사는 앞 번에 완결된 행동은 잔에서도 그대로 완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잔에는 설명어가 동반된다. “이 잔은 그대들을
위해 쏟는 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입니다” (루가 22,20). 반복하라는 명령이 없이 여기에서 만찬에 관한 기사가 끝난다. 그러나 이 반복
명령은 앞에 나온 빵에 관한 말씀 끝에 연결되었다. 따라서 루가복음에 따라 최후 만찬 때 예수께서 거행하신 전례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었을
것이다. 잔의 예식, 빵의 예식, 만찬 (본식), 잔의 마지막 예식. 세 가지 예식 각각에는 감사하기의 기도가 따랐다. 만찬예식의 요소인 빵과
포도주는 거기에 따르는 두 기도로 구분된다. 빵을 위한 찬양 (benedictio: eulgheni)과 잔을 위한 감사하기 (gratiarum
actio: eucharistia). 만찬 때 예수께서 외우셨던 이 기도들은 교회의 감사기도 (prex eucharistica 또는 아나포라)의
기원이며 모델이다. 사실 감사하기의 본문 둘에서 오늘날 미사전례서의 감사기도 본문에 이르기까지 성찬제정 말씀의 본문은 매우 복잡한 발전과 변화를
거쳐 왔다. 성찬례의 감사기도 (prex eucharistica)가 만찬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감사하기에 대한 모방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만찬이
되게끔 하는 요소인 빵과 포도주는 만찬장에서 예수의 빵과 포도주일 것이다. 전문 용어로 하자면 만찬장의 빵과 포도주의 유사
(somiglianza)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유사인 것이다. 더 나아가,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의 예물들이 단지 예수의 몸과
피만이 아니라, 상에 앉은 동료들에게 친숙한 유대인들의 희생제 어휘들을 사용해서 예수께서는 “희생된” 몸이시며 “쏟은” 피이며, “그대들을
위해”, 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속제하는 희생이심을 명백히 드러내는 설명어에 빵과 잔의 찬양, 곧 “하느님께 감사드리기와 찬양 드리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결합시키신다. 교회의 성찬례는 최후 만찬 예식과 많이 다르다. 사실 최후만찬은 또한 모든 면에서 유효한 식사로 이 식사에 참가한
사람은 다른 모든 식사에서처럼 먹는다. 반면 미사에서는 이미 2세기부터 만찬과의 어떠한 연관성도 더 이상 없었고, 성찬례는 식사와 분리되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만찬에서는 하나는 빵을 위해서 또 다른 하나는 잔을 위한 기도인 명확히 구별되고 분리된 감사드리는 기도가 있었다. 그러나
미사에서는 하나의 기도인 감사기도 또는 아나포라만 존재한다. 즉 빵을 위한 기도와 잔을 위한 기도가 동일하다. 빵의 예식은 잔의 예식과 완전히
혼합되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교회의 거행은 신약성서가 서술한 대로, 예수께서 모델로 주신 예식 (ritus)에 포함되는 이 모든
행위들을 하여야 한다. 아래의 것이 교회의 예식을 위한 제정으로 판단된 부분이다. 1) 빵을 듦, 2) 감사하기, 3) 빵을 뗌, 4) 빵을
건네 줌, 5) 말씀하기를..., 6) 잔을 듦, 7) 감사하기, 8) 잔을 줌, 9) 말씀하기를... 따라서 교회의 성찬례는 만찬장에서
예수께서 이루신 예식에 대한 “순응”이다.
성찬례의 구조와 의미 순교자 성 유스티노에
따르면 적어도 2세기 중반이래, 아니면 더 이른 시기인 후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성찬례는 중요한 두 중심축인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되어있다. 그래서 IGMR은 말하기를, “미사는 말씀전례와 성찬전례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이 두 부분이 긴밀히 연결되어 한 예배 행위를
구성한다. 미사 때에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체를 제공하는 식탁이 마련되며, 여기서 신자들은 교육을 받고 기력을 회복하게 된다. 그밖에
거행을 열고 닫는 예식이 첨가되어 있다” (새 IGMR 28) 한다. 이 결론은 교회를 통해 세기를 걸쳐 전수되어 온 근본 가르침이다. 곧
시작예식 (도입), 말씀전례, 성찬전례, 마침 예식 (퇴장)이다.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는 성찬례의 핵심 부분이고, 반면 시작예식과 마침예식은
성찬례에 들어가고 나가는 예식이다. 20세기 초 교회 안에 전례운동이 일어났다. 당연히 이 전례운동의 중심은 성찬례 거행의 개혁에
있었다. 이전 미사전례서와 비교해서 중요한 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이 성찬례 각 부분을 명백히 구별함으로써 성찬례를 더 뚜렷하고
이해하기 쉬운 구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으로 말미암아 성당 건축에서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의 고유한 자리를 강조하기 위해 독서대와
제대의 공간을 마련했다. 특히 독서대의 도입은 중요하고도 새로운 변화였다. 전례개혁 이전에는 말씀전례는 제대에서 거행되었으나, 지금은 말씀을
선포하는 고정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고유한 중요성을 다시 발견하였다. 또 과거에는 개회식에서 말씀전례로 건너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시작 예식의 끝인 본기도 후에 주례자가 같은 장소에서 말씀전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제는 회중에게 등을 보인 동일한 자세로 같은
미사전례서에서 성서 말씀을 읽었다. 지금은 그 위치가 매우 명백하다. 주례자와 백성은 주례석과 신자석에 앉고, 독서자는 독서대에 가서 첫째
독서를 읽으며 사제와 백성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함께 모여 있다. 또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의 구별은 동등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거행하는
장소가 독서대에서 제대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찬례의 더 명백한 구조화는 거행의 의미를 높이는데 이바지한다. 다른 한편,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의 연결은 같은 제대칸에 독서대와 제대가 매우 가깝게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더 명백하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 배치, 그리고 독서대와
제대라는 중심축으로 말미암아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의 구별과 연결은 분명하다. 성찬례의 각 부분들의 의미와 기능과 함께 성찬례의 진행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서, IGMR이 말하고 있는 시작예식과 말씀전례와 성찬전례와 마침예식의 개별적인 항목을 살펴보자.
시작 예식: 모이는
공동체 말씀전례 앞에 있는 입당, 인사, 참회행위, 키리에, 대영광송, 본기도는 시작의 성격을 지니고 안내와 준비의 역할을 한다.
이 예식들의 목적은 한 자리에 모인 교우들이 하나인 공동체를 건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합당하게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새 IGMR 46).
말씀전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공동체 말씀전례의 주요한 부분은 성경 독서들과 그
사이에 부르는 노래 (cantibus)로 되어있다. 강론, 신앙고백, 보편지향기도나 신자들의 기도는 말씀전례를 더 깊이 설명하고 끝맺는다.
강론으로 설명되는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구원의 신비를 밝혀 주시며 영적 양식 (nutrimentum
spirituale)을 제공하신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신자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교우들은 이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침묵과 거룩한 노래로써 자기 것을 만들며 신앙고백으로 그 말씀에 동의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은 교우들은 보편지향기도로써 온
교회의 필요와 전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새 IGMR 55). 말씀전례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먼저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제1독서 (구약)를 통해 인간에게 내려주시고 사람은 화당송으로 하느님께 감사, 찬미, 탄원을 드린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제2독서 (신약서간, 묵시록)를 통해 다시 말씀하시고 사람은 복음 전 환호를 통해 하느님께 응답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복음과 복음의 설명인 강론을 통해 전해주신다. 그리고 인간은 신경과 보편지향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간구한다.
성찬전례: 감사드리는 공동체 최후만찬 석상에서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제사와 식사를 제정하시고, 이로써 교회
안에 십자가 제사 (sacrificium crucis)가 효과적으로 현존하도록 하셨다 (continue praesens efficitur). 주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가 주님 친히 하신 일과 당신을 기념하여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맡겨주신 것을 완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잔을 드시고
사례하신 후,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라, 먹어라, 마셔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찬전례 거행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의 이 말씀과 행위에 맞추어 놓았다.
1) 예물 준비 때:
이때 빵과 물과 함께 포도주를 제대에 갖다 바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손에 드신 요소들이다. 2) 감사기도: 감사기도로써 모든 구원업적을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물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3) 영성체 예식: 한 빵을 뗌으로 (fractio panis)써 신자들의
일치를 드러내고,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받아 모신 것과 같이 신자들은 영성체를 통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 (새 IGMR
72).
마침예식: 세상으로 파견되는 공동체 a) 필요하다면 짧게 공지를 한다. b) 인사와 강복은 몇몇 날이나
어떤 경우에는 백성들을 위한 기도나 다른 형태의 장엄 강복을 할 수 있다. b) 부제나 사제가 하는 백성의 파견으로 각자는 자신의 좋은 일에
돌아가고 주님을 찬양하고 찬미한다. c) 사제와 부제가 제대에 인사한다. 그러고는 사제와 부제와 다른 봉사자들은 제대에 깊이 절한다 (새
IGMR 90).
부활 성야 미사의 제
3독서
부활 성야 미사는 크게 보면 네
부분으로 되어있다. 곧 제1부는 빛의 예식, 제2부는 말씀 전례, 제3부는 세례예식 또는 세례서약 갱신 예식, 그리고 제4부는 성찬 전례이다.
특히 제2부인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일곱을, 대영광송이 끝난 다음 신약성서에서 둘(서간과 복음), 모두 아홉 독서를 듣는다. 이
말씀 전례에서 세상 창조부터 시작된 우리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구원경륜을 다시 듣고 되새긴다. 구약성서 독서
일곱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독서가 출애굽기 14장이다. 이 독서는 절대로 생략할 수 없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파스카, 다시 말해서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종 모세의 손에 이끌려 홍해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는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다른 구약독서 끝에는
통상대로 독서자가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회중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하고, 그러고는 침묵을 잠깐 지킨 다음 독서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시편 화답송을 부른다. 그러나 셋째 독서인 출애굽기 14장이 끝난 다음에는 독서자가 “주님의 말씀입니다”를 하지 않고 곧바로
화답송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는 화답송으로, 시편이 아니라, 방금 들은 출애굽기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는 찬미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독서자가 “... 그제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였다” (출애 15,1)까지 읽고, 곧바로
성가대의 선창으로 “주님을 찬양하세, 그지없이 높으신 분...” (출애 15,1-18)을
부른다.
‘매일미사’
소책자
가톨릭 신자는 누구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발간하는 ‘매일미사’라는 소책자를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또 많은 신자들은 미사 참례를 하러 갈 때 이 소책자를 가지고
간다. 매일미사 표지 위단에는 작은 글씨로 “매일미사를 삼 년 동안 읽으면 신구약 성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읽게 됩니다”라고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그렇지만 ‘매일미사’는 신자들이 쉽게 그날 미사를 준비하고 참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단순한 책자일 뿐이다. 우리 공동체의 어떤
형제는 달마다 폐지통에 ‘매일미사’가 버려지는 것을 보고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렇게 가치 없이 버려지니 마음이 무척 아프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 말씀을 담고 있는 책이 일반 월 잡지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또 자원 낭비도 무시 못 할 것이란 생각을 잠시
해본다. 사실 ‘매일미사’는 ‘미사 전례 성서’ (Lectionarium)라고 부르는 미사용 성서 독서집에서 월별과 그 달에 오는 전례일에
해당하는 성경 본문을 뽑아 만든 것이다. 이 미사 독서집은 ‘로마 미사 전례서’ (Missale Romanum) 가운데 하나로, 미사의 말씀
전례에서 선포하기 위해서 전례 시기나 축일의 날짜에 해당하는 성서 본문을 담고 있는 교회의 공식 전례서이다.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동안 성서의 몇 부분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이 말씀을 듣고 응답한다. 그러면 초기 교회에서 성찬례의 말씀
전례를 거행할 때 어떤 방식으로 성경 독서를 택했고 전례서로서 독서집을 갖고 있었는가? 사실 초기 미사에는 독서를 할 때 어떤 전체적인 계획도
없었고 미사 독서집도 없었다. 단지 미사를 거행하는 주례자가 아주 자유롭게 그날 선포할 성서 부분을 선택했고 성서 필사본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계시 진리와 그리스도인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성서를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교회의 단순한 지향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연속적으로 긴 성서 구절을 읽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연속적인 독서’ (lectio
continua) 라고 부른다. 이 방법은 이전 성찬례에서 읽은 어떤 성서 구절 그 다음 구절부터 매번 새롭게 독서를 시작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요즘 많은 신자들이 하는 바대로 성서를 통독하기 위해 구약이나 신약성서 처음부터 매일 조금씩 읽어가는 방식과 유사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제 각 교회들은 지역마다 특별한 순서로 구약과 신약성서를 혼합하는 관습을 마련해 갔다. 이러한 신구약 성서 독서의 배열은 이미
성 암브로시오 시대에 알고 있었다. “그분은 당신의 시편 주해에서 쓰기를, 먼저 예언서를 낭독한다. 그러고는 사도 서간, 그리고 끝으로 복음을
읽는다.” 이 자리매김으로 두 계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구원역사의 단일성을 배우게 된다. 초세기
로마에서는 적어도 주일과 축일에 세 독서로 구약성서, 사도 서간, 복음서를 읽었고, 시리아 교회는 여섯 독서를 읽었고, 이집트의 곱트 교회는
신약 성서에서만 네 독서를 읽었다. 이 러한 관습은 어떤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거행하면서 단순히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다. 이렇듯 여러 지역에서 교회가 독립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 자연히 성서 독서의 체제도 교회마다 매우 다양하게
발전했고, 성경 구절을 지시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그 첫 형태는 성서 본문의 여백에다 다양한 전례 날에 해당하는 성경 본문의 시작 구절과
끝 구절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서방 교회에서는 14세기 후반까지도 이 표기방식을 사용했다. 둘째 체제는 ‘카피툴라리아’
(capitularia)라고 하는 성서 구절 목록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카피툴라’ (capitula)라는 단어는 구절이라는 뜻이다. 이 목록은
일반 달력 날짜 옆에 그 날짜에 해당하는 전례일과 그 날에 낭독할 성서 제목과 함께 그 성서 본문의 첫 구절과 끝 구절을 적어놓은 것이다.
카피툴라리아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복음서가 아닌 사도 서간 독서 구절만을 포함하는 목록, 그리고 복음서 구절만 있는 목록, 그리고 끝으로
복음과 서간 둘 다를 포함하는 목록도 있었다. 이 목록집을 가지고 독서자가 미사 전에 성서에다 읽어야 할 부분을 표시했다. 독서를 지시하는 셋째
갈래는 그날 전례일에 해당하는 성경 본문을 완전히 담고 있는 독서집이 대표적이다. 특히 인쇄술이 발명되고서 이 방법은 더욱 발전했다. 이
독서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전례일에 해당하는 복음서 구절만 포함하는 ‘복음집’(evangeliaria)이 있고, 복음서가 아닌 사도
서간만을 실어놓은 ‘서간집’ (epistolarium), 그리고 복음서가 아닌 성서 구절과 복음서 구절을 모두 포함한 ‘미사 총 독서집’
(lectionarium plenarium missae)이 있다. 그러다가 트리엔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1570년에 로마 미사전례서가
나오면서 해당 전례일에 읽을 성서 본문이 미사 전례서 안에 함께 실렸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성찬례에서 말씀 전례의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독서 목록에 대한 전반적인 정비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새 미사 독서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64년 ‘거룩한 전례헌장 집행위원회’는
모든 성서 구절을 재검토하도록 한 위원회에게 맡겼다. 이 위원회에는 전례학 분야, 성서 주석학 분야, 교부학 분야, 교리와 사목 분야에서 선출된
전문가들이 모였다. 이 위원회는 우선 현존하는 성서 독서의 완전한 목록을 작성했다. 6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라틴 전례들을 검토하고 동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약 15개 예식의 독서 목록 문헌을 보았으며, 더 나아가 16세기에서 오늘날까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독서집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수집했다. 이러한 여러 성서 독서 목록을 가지고 작업한 후에, 1969년 교황청 경신성의 인준으로 ‘미사 독서 목록’ (Ordo
Lectionum Missae) 표준 제1판이 공포되었다. 이 독서 목록은 새롭게 자리매김한 독서 목록이었다. 제1판이 나온 후 제기된 다양한
요구와 질문에 대한 응답과 적응으로서 1981년에는 ‘미사 독서 목록’ 표준 제2판이 나오고, 이제 미사 독서 배열이 완성되었다. 이 제2판은
전례 거행에서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한 신학적 기반을 더 심오하게 했고, 더 나아가 사목자들은 전례 교리 교육을 위해 성서적 주제를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미사 독서 목록’을 기준으로 하여 우선 1970년-1973년에 걸쳐 라틴말 ‘미사 독서집’이 총
3권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표준 제1판을 가지고 각 나라의 주교회의에서는 자기 나라 말로 미사 독서집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도 1977년에 총
3권으로 된 우리말 ‘미사 독서집’을 발간하였고, 표준 제2판을 가지고 다시 작업하여 1996년에 ‘미사 전례 성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미사
독서집을 출판하였다. 이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의 결실로 '로마 미사 전례서'에서 미사 기도문이 들어있는 전례서와 미사 독서가
들어있는 전례서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가능해졌다. ‘미사 전례 성서’에는 말씀 전례에서 사용하는 모든 제1독서, 화답 시편, 주일이나 대축일에는
제2독서, 복음 전 환호송과 복음이 수록되어 있다. ‘미사 전례 성서’ 제1권에는 대림시기부터 부활시기까지의 내용이, 제2권에는 연중
제6주일부터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의 내용이, 그리고 제3권에는 성인 고유 미사, 공통미사, 예식미사, 여러 기원미사, 신심미사, 위령
미사에 사용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많은 지역 교회에서는 ‘미사 전례 성서’와 ‘미사 전례서’를 종합하여 신자들이 값싸게 살 수 있고 그날 미사
기도문과 미사 독서를 쉽게 볼 수 있도록 품위 있는 ‘신자용 미사 전례서’를 출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매일미사’와 같이 달마다 바뀌는
소책자보다는 신자용 미사 전례서를 마련하여 신자들이 이 전례서를 활용하며 사랑의 손때를 묻혀 하느님 말씀을 소중히 여겼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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