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이다. 우리 부부는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내지 않지만 (딱 한 번 명동 거리에 나가서 인파에 휩쓸려 본 적이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특별한 인연을 선물로 받았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약국을 찾아가 감기약을 사고 (어제부터 감기에 걸렸다. 추운 나라에서도 별로 걸리지 않던 감기인데......) 누와라엘리야 시내를 돌아보다가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어제 버스에서 만났던 그 한국 여자다. 그녀는 우리를 만난 것을 매우 반가워했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혼자서 보내자니 너무 쓸쓸해서 어제 만났던 부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단다...... 길가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빗줄기가 점점 강해진다. 어디 까페 같은 데가 있으면 들어가 자고 했더니 그랜드 호텔 앞에 까페가 있단다. (다른 특급 호텔 안에도 있을지 모르지만 시가지에는 까페 비슷한 게 보이지 않는다.) 제법 먼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비가 더 쏟아져서 여자들의 운동화가 다 젖어버렸다. 운동화에 남녀가 있냐고? ㅎㅎㅎ 내 운동화는 방수 기능이 제법 작동하는 '좋은' 운동화거든.
앉아서 통성명을 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그녀가 여행작가 김남희라는 걸 알았고 추후 검색을 통해 책 10권을 넘게 쓴 유명 작가라는 걸 알았다. 여행 중인 여행작가를 여행하면서 만났으니 특별한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까페에서 차를 마시며 그리고 옆에 붙어있는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 보니 살아가는 모습이나 생각이 서로 많이 비슷했고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우연한 만남이 9일 간의 동행이 되고 또 나중까지 이어지는 인연이 될 줄이야)
(요건 호텔 식당에서 같이 먹은 인도 음식)
우리 숙소가 꽤 괜찮다고 자랑을 했더니 김작가는 구경하고 싶다면서 숙소까지 따라왔고 방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결국 방 하나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음날 (12월 25일) 일찌감치 방 청소도 안 된 시각에 가방을 들고 이사왔다. 이날은 거의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는 감기가 심해져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자들이 나가서 먹을 걸 사가지고 들어온 게 이날 활동의 전부.
(이 사진은 26일 김작가 방에서 찍은 것이다. 우리 방에도 벽난로가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피울 수는 없는 구조였고, 25일에는 여자들끼리만 벽난로를 즐겼다.)
12월 26일. 비도 내리고 몸도 좋지 않아서 오전 내내 방에만 있다가 점심 무렵에 비가 그치는 것 같아 싱글트리힐을 겨냥하고 숙소를 나섰다. (김작가는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하고 우리보다 먼저 숙소를 나갔다.) 구름이 몰려왔다 몰려갔다 불안했지만 다행히 비가 쏟아지지는 않았고 모처럼 관광을 할 수 있었다. 과연 누와라엘리야는 예쁜 건물이 많은 도시였다. 싱글트리힐 방향으로 유럽 풍의 멋진 숙소들이 많았는데 저녁에 김작가에게 들으니 하루밤에 8-9000 루피를 부르더란다.
싱글트리힐을 올라가는 도중에 차잎을 따는 여자들을 여러 번 만났는데, '포토, 포토' 하면서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분위기가 싫어서 계속 피해 다녔다. 사진 안 찍는다고 하니 '펜? 프레젠트?'하면서 노골적으로 뭘 달라고 한다. 관광객들에게 사진 찍혀주고 부수입 올리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 같다. 우리야 사진 찍어서 돈 버는 사람도 아닌데 굳이 돈을 주고 모델을 살 일은 없다. 그렇지만 하루 일이 어떤지 수입이 어떤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저렇게 부동자세로 포즈를 취하니 외면하기도 어렵다. 사진 속 아줌마가 수첩을 꺼내 보여준 바에 의하면 하루에 찻잎을 12킬로그램쯤 따며 하루 수입은 450 루피 정도란다.
(그레고리 호수. 유람선과 모터보트들이 돌아다닌다)
(텐트에 앉아 식사를 하는 특이한 식당 모습. 대통령 선거 포스터가 보인다. 우리가 스리랑카를 떠나는 날에 선거를 했는데 예상을 깨고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우려했던 불복 사태도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되었단다. 대통령 형제들이 다 해먹는다고 흉봤었는데 이젠 오히려 우리나라가 창피하다.)
저녁은 첫날 맛있게 먹었던 라이언펍의 펍스페셜을 다시 먹었다. 이번에도 역시 맛이 있었음.
우리는 내일 쯤 해서 하푸탈레로 이동했다가 거기서 호튼플레인스(world's end가 있는 국립공원)를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김작가가 내일 호튼플레인스를 구경하고 하푸탈레로 가자고 하길래 차를 빌려서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호튼플레인스를 트래킹하고 기차역에까지 데려다 주는 조건으로 5000 루피에 차량을 예약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