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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새로운 시작]
26. 부르심의 소망
2020. 6. 13. 이현래 목사
창세기는 인생의 근본을 말한 책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지었고 어떻게 그 기능을 발휘해서 목표를 달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한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지어졌고(창1:27),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여 땅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 ‘다스린다.’는 말은 세상적인 통치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만유에게 분배한다는 뜻이다.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라는 말은 분배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통치는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인데 생명의 세계는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창세기 2장이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이 되었다고 하였다. ‘산 혼’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 정, 의를 포함한 정신적인 기능이다.
왜 이것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흙’이라고 한 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흙 스스로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런데 씨가 들어오면 그 씨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생육하고 번성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흙의 고유한 기능이다. 흙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형상화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생명이라면 그 생명을 인격화한다는 뜻이다.
생명이 있어도 인격화가 안되면 만유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인가? 창세기 2장 마지막에는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연합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인간의 근본에 대한 계시다.
불교는 잡다한 신들이 있는 세계에서 출발했다. 그런 어리석은 것을 다 벗어버리고 참 지혜를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잡다한 모든 생각을 버리고 사람 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으면 사람은 완전한 자유자,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독존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데 관념상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홀로 독존적인 존재가 된다면 멸망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고 위대한 것도 홀로 있으면 없어진다. 아무리 시시한 것이라도 둘이 연합하면 영원히 생존한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짐승도 있고 나쁜 짐승도 있다. 좋은 식물도 있고 나쁜 식물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둘이 연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연합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명이시지만 형상이 없다. 사람은 형상이지만 영이요 생명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연합하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역사상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사람이 온전해지는가?’ 하고 찾았다. 특별히 아리안족인 희랍 사람들은 절대라는 것을 가정하고 진리를 추구해 왔다. 진리도 절대, 하나님도 절대, 모든 것을 절대라고 가정하고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고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절대’라는 것은 없다. 내가 하나님을 말한다면 나와 연합된 하나님을 말할 수 있지 나와 따로 있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나와 상관이 없는 ‘절대적 신’만 추구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십계명은 맨 처음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그분을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다. 이끌어 내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 뭐라고 할 수 없는 존재다. 있어도 뭐라고 부를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분과 연합된 곳에서 그분을 우리가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맨 처음에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 때문에 젊은 날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교회는 어려서부터 다녔는데 중간에 ‘과연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이 없다면 기도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는데 나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찾다가 못찾고 결국은 ‘아,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존재구나. 그렇다면 나는 피조물이구나. 누군지 모르지만 내 위에 먼저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구나.’라고 시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본 일이 없어도 무조건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나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알려고 했는데 알 수 없어서 결국은 내가 굴복하게 되었다.
그분이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스스로 한 일이 없다. 위태로운 일을 여러 번 당했고 어려운 일을 여러 번 당했는데 그때마다 나 아닌 누군가가 해결해 주었고 나 아닌 누군가가 이끌어 주었다. 그를 나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상대적이다. 하도 하나님이 완전하시다고 알고 있어서 이 말을 잘못 들으면 하나님이 불완전하시다는 말로 들리는 모양이나 하나님이 완전하신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완전하다는 것인가? 나를 지으셨으니까, 내가 없는데 있게 하셨으니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나 되게 하실 수 있으니까 완전한 것이다. 나를 나라는 사람이 되게 하려면 그분이 없으면 안된다.
지금도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 다 모른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내 간증을 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도 어디 가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여러분과 관계되는 하나님밖에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외에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이나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은 백날 말해봐도 소용없다. 그런 것은 찾아 봐야 소용없다.
그런 것을 안다는 사람을 보면 아무것도 변화가 없다.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은 많다. 기독교인들은 다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교리적으로 성경에는 이렇고 저렇게 되어 있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교리는 대답이 안된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교리로 말하면 그 말이 먹히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참고할 일이지 성경을 내놓고 말하면 그 말이 먹히겠는가. 나와 관계되는 하나님을 말해야 비로소 나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모른다. 알 수 없다.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보다 먼저 있어야 알 수 있지 하나님으로 인해서 있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는가.
만물이 다 그러하다. 자식을 낳아 놓고 부모가 어디로 가 버리면 자식은 자기 부모를 알 수 없다. 누가 “이 사람은 네 아버지고 이 사람은 네 엄마다.”라고 알려 주지 않으면 부모를 만나도 모른다. 우리가 부모를 알고 있는 것은 우리를 키우면서 부모가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엄마는 엄마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들을 부모로 아는 것이다.
사람이 별 것인 줄 알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다 아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모른다. 네 살 전에 부모를 잃은 사람은 부모를 모른다.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안다 할 수 있겠는가. 전생이 어떻고 후생이 어떻고 하는 것은 말짱 헛일이다. 관념에 관한 이야기지 자기를 낳아 준 부모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전생을 알겠는가.
우리는 나와 관계된 하나님밖에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 2장을 보면서 나와 관계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이번에 사랑방에 이런 질문이 올라왔다. 어린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 묻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되겠는가? 철학적으로 대답하면 되겠는가, 과학적으로 대답하면 되겠는가. 아이들은 “그러면 우주인이 있어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그런 것은 과학적인 문제다.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나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형상으로 지어졌다. 생명을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흙으로 지어졌다. 형상으로 표현할 때나 생육하고 번성할 때나 이 원리는 동일하다.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상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전부 문명이라는 곳으로 가고 있다. 문명은 생명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생명은 발전이 안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한다 해서 사람이 돼지처럼 아이를 열 명씩 낳을 수 있겠는가. 원시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문명이 발전했다 해서 내가 낳고 싶은 대로 낳지 못한다. 내가 모양을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지 못한다. 씨 생긴 대로 밖에 안된다.
흙이 그러하다. 옥수수 씨를 받았는데 콩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옥수수 씨를 키우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체성을 알려면 창세기 1, 2장을 나와 관계된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사탄은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고 속였다. 이 말은 스스로 있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스스로 있는 자가 될 것이라며 연합을 비난한 것이다.
“너는 왜 꼭 하나님과 연합해야 되느냐?”그 말은 여자에게 “너는 왜 남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을 생각만 하느냐?”라는 말과 같다. 이것을 먹으면 스스로 아기를 낳을 텐데 무엇 때문에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느냐는 말과 같은 말이다.
생명의 세계는 식물이나 동물이나 다 같다. 식물도 혼자 스스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다. 이것이 진리다. 홀로 무엇이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둘이 연합해서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말은 진실이고 사실이다. 신화도 아니고 상징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흙으로 지으셨다는 말도 하고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도 한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세계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는데 하나님은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하셨다(창3;22).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동산에서 추방하셨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해서 동거하는 세계에는 하나님이 둘이 있을 수 없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둘이 있으면 되겠는가.
생명의 세계에서는 아버지가 둘일 수 없다. 그래서 씨가 완전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새들이 노는 것을 보니 똑같이 생긴 박새인데 색깔이 달랐다. 희고 검은 털을 가진 놈이 있고 붉고 노란 털을 가진 놈이 있는데 같은 색을 가진 놈들끼리 같이 논다. 같은 박새라도 다 같이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따로따로 노는 것이다. 유전인자가 다르고 게놈지도가 다르고, 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를 단순히 생물학적 세계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근본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인공위성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녀도 이 기본이 없어지면 멸망이다. 아주 시시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인데 이것이 진리다.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을 듣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된 결과가 창세기 3장 이후에 나오는 일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예배를 드리다가 죽인 것이다. 예배는 원시사회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가장 신성한 데서 맨 처음 죄악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거기서 가인보다 칠 배나 더한 악을 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일단락되었는데 그것이 연속되어 셋의 후예들이 되었다. 그 사람들은 팔백 년 구백 년씩 달다 죽었다. 아무 일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살다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 사람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결합해서 네피림이 되었다. 그들이 거인이고 용사요 당대에 유명한 자들이다.
사람의 소원이 첫째는 오래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위대해지는 것이다. 첫 번째 세대에서 오래 사는 것이 보였고 두 번째 세대에서 위대해지는 것이 나타났다. 그러나 위대해진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 땅을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야 할 기본적인 질서가 깨진 것이다. 사람은 땅에 살아야 한다. 물 위에 살 수 없다. 앞으로는 우주에 가서 산다는데 며칠간은 살겠지만 거기서 자식을 낳고 살기는 불가능하다.
땅이 패괴하였다는 말은 사람이 살 기본적인 것들을 망쳤다는 것이다. 땅은 인생의 기본적인 제일 환경이다. 생존의 제일 조건이 땅이다. 그것을 패괴하게 한 것이다.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망가뜨린 사람들이 누군가? 영웅들이 그렇게 한다. 난세는 영웅들이 만들어낸다. 보통 사람들끼리 살면 조용한데 위대한 사람들이 나오면 큰 싸움이 벌어진다. 일차 세계대전이나 이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것은 농부들이 아니라 그 시대의 천재들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커질수록 자기 터전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어디로 가는가? 바벨탑이다. 벽돌을 만들어서 성을 쌓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고 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세상이 꼭 그러하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던 인간 역사의 종말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들을 흩어버려서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분열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높아질수록 점점 분열된다. 초등학교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위로 올라갈수록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가 된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서로 일등 이등을 하면서 살 때는 소극적인 경쟁을 하지만 만일 그 사람들이 서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앉으려고 하면 원수가 되고 만다. 대통령은 한 사람밖에 할 수 없다.
일당독재가 무서운 것이 그것이다. 한 당밖에는 할 수 없고 그 이외에는 용납이 안되니까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없다. 다양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예 있을 수 없다. 임금 외에는 아무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세종에게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정리하려고 했다. 걸그치거나 문제가 될 사람들을 다 죽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세종의 장인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세종 시대가 평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평안했는데 세종 시대가 끝나자마자 단종애사가 생겼다. 그러니 세상은 절대로 평화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임금은 한 사람밖에 없다. 공산주의 사회에 당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바벨론의 결과가 지금 세상이 가고 있는 길이다. 그것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구원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고 하시고 멸망의 홍수에서 살아남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에서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벨로 갔던 것이다. 그래서 바벨로 간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셨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 왜 이 사람을 선택하셨을까? 하나님의 선택에는 후회함이 없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시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부르시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시대에 아브라함 한 사람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베드로에게만 이 말씀을 하셨겠는가. 거기 있는 사람 중에 그렇게 들린 사람이 베드로였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사람이 바울뿐이었겠는가. 바울이 예수 믿는 잔당을 없애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벼락이 쳤는데 그것을 바울은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들었던 것이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우레가 울었다고도 하고 번개가 쳤다고도 했으니 객관적으로 보면 그런 사건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주관적으로 그렇게 들었다. 그래서 사도가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같은 말씀을 듣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들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들린다. 학문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책에 써놓으면 그 사람은 없어도 된다. 그런데 생명의 말씀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누가 부름받았겠는가. 아브라함이 부름받았다고 했는데 왜 아브라함이 부름받았겠는가. 아브라함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 살던 사람이다. 갈대아 우르는 지금 이라크에 해당되는 곳으로 유프라데스 강 유역이라고 한다.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 강 가운데 있는 곳으로 지금 페르시아만 위쪽에 있는 지역이다. 그곳이 바벨론이었던 땅이다. 이라크는 옛날 바벨론 땅으로 지금도 벽돌을 찍어서 성을 쌓던 터가 발굴된다고 한다. 고대 중동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솔을 이끌로 유프라데스 강 상류쪽인 하란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을 건넌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이라고 한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곳에서 부름받은 것이다.
우상이 무엇인가? 우상은 헛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이다. 생기기는 사람처럼, 혹은 소처럼 생겼는데 생명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짓이다.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여도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절에 가면 부처상이 있는데 그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은 우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은 형상으로, 상징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지 우상이 아니다. 금강경독송회라는 데서는 아예 불상을 놓지 않는다. 불상이 있으면 헛것을 보게 되기 때문에 두면 안된다며 그 자리에 방석만 놓아 두고 거기서 금강경을 배우기도 하고 외우기도 한다. 조계종에서도 불상은 부처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샤머니즘과 합해졌다. 절에 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한다. 사실은 부처님이 사람 마음 속에 있으니 절할 데가 없는 것이다.
‘우르’는 갈대아 남부로 당시 바벨론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지금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부근이었던 것 같다. 느브갓네살 왕이 나와서 유다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갔던 곳도 그곳이다. 옛날에는 강대국이 침략을 하면 유능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부려먹으려고 잡아갔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도 그때 잡혀간 사람이다. 이라크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지금 뉴욕 같은 곳이다. 뉴욕커라고 하는데 같은 미국 사람이라도 뉴욕에 사는 사람은 주민세가 다르다. 우리나라도 서울특별시민은 다르다. 서울에 가니까 대구니 광주니 이런 데는 시골이라고 한다. 처음 들을 때는 이상했는데 오래 있다 보니 나도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에 있다가 충주로, 시골로 내려왔다. 다 서울에 있으려고 하지 시골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서울에 있으려고 했는데 밀려서 충주로 내려온 것이다. 내 생각대로 되었으면 서울에 있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충주로 밀어내셨다. 그래서 대구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의 한 수 였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내가 그 땅을 네게 기업으로 주고 네게 후손을 주겠다.”고 하셨다. 땅과 아들을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 땅에 가서 아브라함은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백 살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원하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아들은 이스마엘이었다. 최선의 방법으로 사라와 합의해서 첩을 데려다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백 살이 되었을 때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내년 이맘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했고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백 살이 되었을 때의 아브라함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스마엘을 낳기 전까지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았는데 구십구 세 때에는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사라는 장막 뒤에서 듣고 웃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구십 세가 된 할머니가 내년에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웃으면 되겠는가,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면 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아시고 “아니다.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말을 잘못하더라도 꼭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나도 잘못한 것이 많다. 그런데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부름받았을 때 나는 돌아갈 더 이상의 세계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내가 하나님께 “나는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라고 말한 일이 없다. 하나님은 이미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니 다 돌봐 주셨지 불러 놓고 나 몰라라 하시겠는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달랐겠지만 하나님은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 당시는 세상 전체가 밀려와서 나를 몰아냈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4년 동안 나는 그것을 불의라고 생각하고 항거했다. ‘나는 불의에 굴복할 수 없다.’며 항거했던 것이다. 갈 데가 없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권위에 순종해야 되는데 왜 순종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갈 데가 있었으면 나는 거기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갈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순종하고 말고 할 것이 없이 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있으면 안되겠어서 나왔다. 대책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돈 한 푼없이 아무 대책이 없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어쩌려고 나왔는지, 나와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용기도 힘도 없는 사람인데 어쩔 수 없어서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살 길이 생겼다. 다 준비를 해 주셨다. 그래서 살았다. 나는 한 푼도 없었다. 방 한 칸 얻을 정도가 안되는 돈이 있었는데 고향 사람에게 빌려 주고 한 푼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목회를 하러 나간다고 하니까 광주에서 양장점을 하고 있었는데 맨 먼저 당시에 제일 비싼 천으로 검정 양복 한 벌과 오바를 해 준 사람이다. 그때 나는 양복이 없어서 동대문 시장에 가서 구호물자를 구해서 입고 다녔는데 양복을 맞춰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가. 요즘은 양복이 별 것 아니지만 그때는 양복점에서 맞추거나 동대문 시장에 가서 구호물자를 구해서 입어야 했다. 구두도 동대문 시장에 헌 구두를 파는 데서 남이 신던 헌 구두를 사 신었다. 그렇게 그 교회 전도사로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양복을 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업을 크게 해 보겠다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쫄딱 망해 버렸다. 오죽하면 나를 찾아왔겠는가. 내가 전도사로 있으니까 교인 중에 누구에게 돈을 빌려 줄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는데 그럴 수 없어서 나에게 있을 것을 털어 주었는데 가더니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내가 거기서 나올 때는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돈 달라고 할 데도 없었다. 그렇게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 나올 때도 어쩔 수 없어서 나왔다. 나오지 않으면 안되니까 나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다 아시고 길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래서 그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분을 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를 하면 그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한다. “전에 내게 이러지 않았습니까. 전에 내게 이런 은혜를 베풀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내가 어떻게 따로 하나님을 알겠는가. 내게 은혜 베푸신 것밖에 모른다.
여름 밤에 바깥에 나와 앉아 있으면 옛날 생각이 나고 감사가 밀려온다. 바닷가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옛날 일들이 밀려온다. 그러면 눈물이 난다. 나는 슬픈 일에는 울지 않는다. 슬퍼서 울어 본 적이 없다. 슬픈 일이 생기면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울었다. 촛불처럼 꺼져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 때문에 고생하신 일이 생각났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 우리 어머니같이 고생하신 분이 없다. 그런데 촛불처럼 꺼져가는데 너무 불쌍해서 한 번 울었지 그 외에는 울어 본 적이 없다. 나를 무정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슬플 때는 가슴이 싸늘해져서 머리 속이 말개지고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은혜를 생각할 때 외에는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다. 위험한 일을 당해도 그렇고 슬픈 일을 당해도 그렇고 내 자신에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싸늘해진다. 그런데 은혜가 밀려올 때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신 분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를 인도하시고 내 일생을 이끌어가신 분이다. ‘주의 손에 이끌려’를 왜 썼는지 아는가. 그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나의 간증록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성공 비결을 자서전에 써 놓는다. 사람들은 거기서 도움을 받으려고 자서전을 읽는다. 정주영 씨 자서전이나 이병철 씨 자서전은 많이 팔린다. 그런데 내 자서전은 읽어 봤자 성공할 일은 없다. 성공할 사람은 읽어도 소용없다. 내 성공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베푼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도움이 된 사람은 기가막히게 되었을 것이고 도움이 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읽어 봤자 돈 한푼 안나온다.
백 세에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이 길은 부르심의 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하였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했는데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면 그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렀는데 왜 불렀는지 알아야 될 것 아닌가.
‘나를 왜 부르셨을까?’ 이 소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부르신 것, 그것이 내 소망이다. 소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 그것 자체가 소망이다. “무엇 때문에 나를 부릅니까?”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를 부르신 것 자체가 소망이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부르신 것 자체가 소망이다. 오후 3시까지 일을 얻지 못해서 길 어귀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에게 “내 농장에 들어오라.”고 하면 그 말만으로도 소망이 아닌가! 천국은 그런 것이다. 아침에 부지런히 나가서 들어가야 당연한 곳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기다려도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불러갈 사람이 없었다. 오후 세 시가 되었는데 누가 오더니 “너는 왜 여기 있느냐?” 하기에 “나는 갈 데가 없어서 이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래? 내 농장이 들어오거라.” 하면 무엇을 할지 모르지만 그 자체가 소망 아닌가.
하나님은 아침 일찍 온 사람이나 오후 세 시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을 주신다. 이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정말 재미있는 것이고 감격스러운 것이고 놀라운 것이다. 하늘 저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 보고 “일어나라.” 하면 그것 자체가 소망이다.
백 세에 아들을 주셨으니 이 길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이상한 길이다. 그런데 이 길로 사람을 부르셨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길은 바벨로 가는 길이다. 새로운 길은 바벨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길이다. 하나님께는 당연한 길이고 당연하게 부르신 것인데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이 길로 부름받았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길로 부르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왜 부르시는가? 나는 바쁜데 무엇을 주려고 부르시는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 부르심 자체가 감사한 사람이 천국을 누린다. 밭에 묻힌 보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밭에 묻힌 보화다. 남이 가져가지 않는 것이다.
남이 알았으면 먼저 가져가 버렸을 것이고 주인이 알았으면 팔겠는가. 그러니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나만 아는 것이다. 나만 아는 것인데 거기 천국이 있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다. 백 세에 아들을 주셨다. 백 세에 어떻게 아들을 주겠는가! 백 세에 낳은 아들이 이삭이다. 그러니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신기하네. 신기하네.’ 하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천국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분이고 두 번째는 부르시는 분이다.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만 확실하면 앞날은 보장되어 있다. 부르심에 앞날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지 내가 다 알고 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는 예상 문제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래서 이삭을 얻었다.
그런데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모리아산에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잡으려고 하다가 수풀에 걸려 있는 양을 대신 드렸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특이한 길이다. 우리 마음대로 가고 안가고 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우리 마음대로 가면 이 길로 못간다.
내 마음대로 가면 바벨로 가게 되어 있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벽돌 찍는 곳으로 가서 벽돌 공장 공장장이 되는 것이다. 벽돌이 얼마나 좋은가. 집을 짓기도 좋은데 왜 아니라고 하는가? 생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흙은 고유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벽돌이 되면 끝이다. 생명과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문명을 자세히 보자. 편리하고 좋지만 생명과 전혀 관계 없다. 인간관계가 점점 소외된다. 문명국가일수록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산다. 같이 살면 분쟁만 일어나고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고 생각해서 거리를 둔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어색한데 미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Hi, Hi.” 하며 웃고 아는 체한다. 그런데 속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하나님이 부르신 세계는 아주 다른 길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길에서 부르신다. 이렇게 알고 보면 바벨론이 보인다. 거대하고 견고하고 높은데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고 알게 된다. 단지 필요해서 사용해야 될 세계지 우리가 의지할 세계는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에 살지 않는가, 자동차를 타지 않는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너무 많다. 앞으로는 좋은 것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길과는 멀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된다고 알아야 한다. 부르심의 길은 농사짓는 길이다.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식량문제가 대두되었다. 요즘은 식량이 중국산이 들어와서 농산물이 싸다. 미국과 FTA한다고 반대 데모를 하고 난리쳤는데 지금은 미국 농산물이 아니라 중국 농산물이 판을 치고 있다. 미국과 FTA로 중국이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 문제가 생기면 중국은 식량부터 봉쇄한다. 그때는 금덩어리도 소용없다. 콘크리트도 소용없고 벽돌도 소용없다. 싼 밀가루, 옥수수가 필요하다.
우리 인생에 생명이 필요할 때 그때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다. 교회도 그러하다. 이것을 봐야 교회가 보이지 이것이 없으면 ‘왜 이것은 없고 저것은 없느냐? 왜 조직은 안하느냐? 일은 왜 저렇게 하느냐?’ 하게 된다. 그러면 말짱 헛일이다. 그러려면 교회에 올 필요 없다. 그런 것은 세상이 더 잘한다.
어느 작은 교회에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 그런 일로 걸렸다기에 밤에 전화를 해서 “교회에 가는 것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교회에 가면 안된다. 그런 교회는 바깥에도 많은데 뭐하러 우리 교회에 왔느냐?”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해 주었다. 그런 교회를 원하면 다른 교회에 가라고 했다. 교회에 오면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는 모르고 일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다가 분쟁이 일어나면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만다. 교회에 오면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려면 뭐하러 교회에 오는가? 맥을 잘못 짚은 것이다. 교회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맥을 잘 잡아야 하듯이 맥을 잘 잡아야 되지 헛된 길을 잡아 놓으면 평생 예수를 믿은 것이 헛일이 되고 만다. 싸우려면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과 싸워야 하고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는 사람에게 가면 되고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림 그리는 데 가면 된다. 교회에 와서 이러니저러니 할 필요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집이다. 교회는 다른 세계다. 우리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본 그 세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세계가 목표다. 이 목표를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 새예루살렘이라고 제시해 놓았다. 우리는 거기를 향해서 가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야 한다.
잘못하면 도로 바벨론으로 가 버린다. 교회 바벨론, 바벨론 교회가 되기 쉽다. 안가고 말지 그런 데로 가면 안된다. 길을 똑바로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야 한다. 나는 8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설교를 했으니 얼마나 설교를 많이 했겠는가. 주일 날, 수요일, 구역예배에서 했으니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그런데 무엇을 설교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 길을 몰랐다. 어디로 가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보니 그때 나는 길을 모르고 있었다. 잘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길을 모르고 했던 것이다. 그때는 길을 모르고 헤맸어도 그래도 좋아서 사람들에게 선전했고 목이 터져라 설교를 했다. 마이크도 없던 때라서 설교를 한번 하고 나면 힘이 다 빠졌다. 거기서 계속 설교를 했더라면 설교를 하다 쓰러졌을 것이다.
길을 모르고 걸어갔으니 어디로 갔겠는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했을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헤맨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못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대로 잘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길을 몰랐다. 어느 길로 가는지 모르고 갔던 것이다. 새예루살렘은 앞으로 언제 올 것인가, 역사의 종말은 어느 때 오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있다는 것을 몰랐다.
부르심 안에는 소망이 있다. 그냥 공짜로 부르시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부르셨으면 그 안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해 주고 안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 자체가 소망이다.
젊은 사람들은 지금 길을 잘 잡아야 한다. 젊었을 때 여호와를 알라고 하였다. 젊었을 때 알면 얼마나 희망을 가지고 가겠는가. 아쉬운 것은 이 길이 열렸는데 이 길이 열린 대로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부르심의 길에 왔다. 이 길로 가면 모두 하나가 된다. 바벨론은 갈라지는 길이지만 이 길은 갈수록 하나가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