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2016년 10월호 게재원고
올페(Orfeo)의 ‘뒤돌아봄’에 대한 사유 – 창극 <오르페오전>
김향
재창작·연출 : 이소영
단체 : 국립창극단
공연일시 : 2016/9/23~9/28
공연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극일시 : 2016/9/23, 2016/9/24
김향 (연극평론가)
1. ‘오르페오’ 사랑 이야기의 무대화
요즘 국악을 활용한 공연 또는 전통문화예술을 현대화, 대중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특히 이들 공연이 내세우는 것은 한국전통문화와 현대적인 미디어 장르들 간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장르적 융합 또는 문화 간의 교류이다. 전통예술전공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한국적인 공연으로 세계 문화 시장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기획자들 및 여타 예술가들의 의지의 발현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들 공연이 과연 한국전통문화의 중심을 잃지 않은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작품으로 제작되고 있을까? 한국전통문화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그리 중요할까?
적어도 창극 공연에서는 그렇다. 창극은 한국전통연희의 하나인 판소리를 근간으로 20세기 초에 탄생한 현대적인 공연예술 장르라 할 수 있다. 창극은 ‘판소리’와 ‘서구 연극 개념’이 융합되어 형성되었기에 ‘현대적인 융합적 음악극’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판소리꾼 여럿이 분창하여 부르는 극’이라는 초보적인 개념은 탈피한 지 오래이며 독창적인 창극 제작을 위한 노력은 1962년 국립국극단(국립창극단 전신) 설립 때부터 지속되고 있고 21세기 들어서는 창극 공연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면서 관객의 수도 많아지고 무엇보다 다채로운 방식의 창극 제작이 시도되고 있으며 창극 <오르페오전> 역시 그 흐름 속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오(Orfeo)와 에우리디체(Eurydice)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시인이자 하프 연주자였던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체와 사랑하는 부부였다. 아름다운 에우리디체가 어느날 뒤쫓아오는 한 청년을 피해 도망가는 중에 뱀에게 물려 죽게 되고 죽음의 땅에 가면서 오르페오와 이별하게 된다. 슬픔에 통곡하던 오르페오는 하프를 연주하여 신을 감동시킨 후 자신을 에우리디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곳에 도착한 오르페오는 또 하프연주로 지옥문을 지키고 있는 괴물들을 감동시키고 에우리디체를 데리고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단, 에우리디체를 데리고 나올 때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오르페오는 그 조건을 지키며 에우리디체를 데리고 나오고 있었으나 ‘왜 자신을 보지 않느냐’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에우리디체를 오르페오는 끝내 돌아보게 된다. 그 자리에서 에우리디체는 다시 죽게 되고 홀로 남은 오르페오는 또 다시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리고 이후 여성들을 저주한 죄로 바커스의 여신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는 근대적인 오페라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은 오페라 <오르페오>를 새롭게 만드는 가운데 서사와 음악을 단순화시키고 춤을 삽입하여 고전적인 음악을 강조하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창극 <오르페오전>은 글룩의 <오르페오>를 원전으로 삼고 있는데, 이 작품을 연출한 이소영 연출이 추구한 것은 ‘이야기의 단순화’와 오르페오의 ‘뒤돌아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2. ‘오페라창극’에서 추구한 것
이소영 연출은 창극 <오르페오전>을 통해 ‘오페라창극’이라는 장르 확장을 꾀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오르페오전>이 또 다른 창극 레퍼토리로 자리잡기를 바란다는 염원을 담았다. 그리고 전통 오대가 창극의 이야기 중심적 흐름을 ‘단순화된 이야기 속 이미지 중심’으로 변형하고자 했다. 그래서 창극 <오르페오전>은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함께 현실 세계로 갈 것인지를 갈등하는 장면이 유독 길게 확장되었고 이 장면에서 시각적 무대 형상화가 강조되고 있다.
창극 <오르페오전>에서는 현대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며 주인공들의 이름이 올페(김준수, 유태평양 분)와 애울(이소연 분)로 바뀌었고 이들이 서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현대의 무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꿈을 향해 날개를 달고 날게 된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에우리디체가 죽고 오르페오는 그녀를 따라 자살하려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지하세계로 가게 되고 거기서 피리를 불어 지하세계의 정령들(국립창극단 및 국립무용단 단원들)을 감동시키게 된다. 다시 에우리디체를 만나게 된 오르페오는 ‘돌아보지 말고 가라’는 정령들의 약속을 지키려 하였으나 그와 달리 순리에 따라 죽음의 세계에 남으려는 에우리디체와의 갈등 속에서 ‘스스로 에우리디체를 돌아보기를 선택’하게 되고 다시 에우리디체와 헤어지게 된다. 이들의 이별 뒤에도 다시 현실 공간의 일상은 지속되고 있으며 오르페오는 다시 열심히 피리, 정확하게는 피콜로 악기를 불고 있다.
이소영 연출이 추구하는 바대로 창극 <오르페오전>에서는 무대의 시각적 표현과 조명이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하세계로의 전환은 사선 무대 위 원형 회전무대가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등 스펙터클한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무대 전체를 방패연의 이미지로 꾸몄고 얼레, 종이비행기, 연실, 그림자, 조각보, 꼭두인형과 상여 등의 이미지를 통해 동양적인 ‘인연설’ 등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판소리가 사설(말)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그 의미를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적인 무대 중심의 창극에서는 ‘새로운 창극의 리듬’이 경험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판소리에 근거한 창극 장르에서 중시하는 것은 관객과의 소통이며 다채로운 방식의 개방성이라 할 수 있는데, <오르페오전>의 무대는 철저한 제4의 벽으로 가려져 관객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오르페오>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발레 ‘축복받은 정령들의 춤’은 창극 <오르페오전>에서는 현대적인 비트의 음악과 한국무용을 응용한 역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화가 지하세계의 기억과 어떠한 유관한 의미를 지니는지 의문만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창극이기에 음악이 중심된 흐름으로 작용해야 하는데, 시각적인 무대 이미지가 음악과 별개로 제시되고 있다고 여겨졌다.
창극 <오르페오전>의 음악을 담당한 황호준 음악감독은 또 다른 양식적 실험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판소리 어법에 기반했다기보다는 서구 음악 어법을 중심으로 판소리를 활용한 형태였다. 그래서 <오르페오전>의 음악은 판소리적이라기보다는 화성 중심의 국악뮤지컬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창극이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구 음악과 달리 화성이 없고 변주되는 선율 중심이 아니며 시김새가 있고 소리꾼들에 따라 ‘청’이 다르기에 전조가 안 되는 국악기들로 전조를 만들어내야 하는 점들을 해소하는 과정이며 판소리의 장단과 성조가 무대 이미지로 구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르페오전>에서는 사설도 3·4, 4·4조의 운율 중심이 아닐뿐더러 주인공들의 아리아를 판소리적으로 작곡했다고 하는데, 판소리의 장단과 성조를 경험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저 듣기 좋은 뮤지컬 음악이었다. 황호준 음악감독은 부침새를 하기 어려운 사설이었던 점 등을 이유로 주된 아리아 외에는 서구적인 음악어법으로 음악을 짜면서 창극 음악의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였다고 했는데, 음악감독이 추구한 것에 비해 관객들은 새로운 창극 음악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창극이 다른 음악극과 달리 ‘창극’일 수 있는 이유는 판소리에 근거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창극 음악의 확장은 판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화성과 선율 중심이 아닌 장단과 음조 중심의 것이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지금과 같이 화성과 선율 중심에 일부 판소리적인 음악을 활용하는 것은 중심을 잃은 창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는 운율이 있는 사설을 장단과 성조로 표현하는 것이며 그 의미의 표현 속에서 시김새가 작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설 자체가 선율을 만들어내는데 어려움이 있으며 철저하게 ‘말의 운율’을 중심으로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창극 <오르페오전>은 사설이 아닌 가사에 서구 음악적인 기법을 중심하고 판소리를 활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음악은 창극 음악의 새로운 면모로 보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러한 시도는 창극 음악 양식의 확장이라기보다는 한국적인 판소리의 색채를 일부 활용한 국악뮤지컬로 여겨진다.
‘오페라창극’이라는 어휘부터가 어불성설이지만 이 시도에 가치를 두자면, 창극 장르의 경계를 넘어 오페라와의 융합을 통해 창극의 영역을 확장하겠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창극 <오르페오전>의 과도한 무대 형상화가 과연 오페라 장르의 특징이었는지, 음악이 클레식한 오페라적인 것이었는지도 의문이 든다. 물론 최근 서구 및 국내 오페라에서 시각적인 장경과 무대 이미지가 강화된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음악의 중요성은 유지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소영 연출이 창극 <오르페오전>을 통해 추구한 ‘오페라창극’이라는 것은 ‘오페라적인’ 면들로의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이소영 연출의 장끼인 무대 형상화가 우선시되는 음악극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소영 연출은 ‘오르페오’와 상관없는 ‘방패연’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오르페오 이야기’로 접합시키는 가운데 무대 장경을 확장한 경우로 보이며 황호준 음악감독의 작창과 작곡의 경우도 오페라적으로도 창극적으로도 경험되지 않으며 듣기 좋은 뮤지컬 또는 월드뮤직으로 경험된다. <오르페오전>에서는 사설, 음악 그리고 춤이 판소리 사설의 운율과 장단에 토대를 두고 구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각 예술가들의 장끼가 나열되어 제시되는 공연 형태였다고 보여진다.
더불어 이소영 연출이 중요시한 올페의 의도적인 ‘돌아봄’이 동양적 사유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논리적으로 연결짓기 어렵다. 죽음이라는 순리를 받아들이겠다는 애울의 태도를 존중하는 올페의 행위는 동·서양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인식으로 여겨지지 ‘동양적 사유’로 여겨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심화하자면, <오르페오전>이 왜 ‘방패연’ 등의 이미지와 합쳐지면서 동양적 이미지로 강요되어야 하는지 그 상상력의 근원에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오르페오’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이기에 동시대 관객들의 삶과 거리가 있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재해석이 필수적이지만, ‘방패연’ 등의 이미지를 꼴라주하여 ‘동양적 사유’를 보인다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판소리 자체가 동양적인 사상을 표출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 왜 ‘오르페오 이야기’를 통한 동양적인 사상을 경험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동양적인 사상’인지 의문이 든다. <오르페오전>은 마치 해외 관객들을 겨냥한, 서구에 익숙한 ‘오르페오’ 이야기에 한국 민속문화 이미지를 꼴라주하여 ‘이국적인’ 이미지로 상품화한 음악극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3. 창극의 경계 확장의 위험성
‘오페라창극’ 또는 창극 음악양식의 모색이라는 것은 창극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융합의 추구라 할 수 있겠으나, 중심이 판소리에 있지 않다면 상당한 위험해진다고 여겨진다. 창극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서구음악에 비해 모자란 점, 빈약한 점 그러나 서민대중의 소망과 꿈이 담긴 ‘거칠고 한스러운 그리고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판소리의 무대’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창극의 한계는 서구 문화에 익숙해져 판소리가 서구음악에 비해 모자라다고 여기는 사회·문화적 인식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고 신기해하면서도 ‘비합리적이고 이국적이다’라고 여기는 서구 문화 중심의 사회·문화적인 인식 때문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한류의 시대가 도래하자 창극은 세계음악을 향하고 있는 듯하며 판소리 및 한국민속문화가 하나의 ‘문화적 장식’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올페와 같은 ‘더 큰 사랑을 위해 이별하는 자기 폭력적’ ‘뒤돌아봄’이 아닌 참된 우리 문화를 깨닫고 성찰하기 위한 ‘상생의 뒤돌아봄’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아마도 창극 작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이건 창극이 아니라 오페라야.’가 아니라 ‘이건 창극이 아니라 판소리야.’가 아닐까 생각된다. 판소리를 근간으로 한 창극이 오페라 등 다른 장르들을 배제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다른 장르들과의 융합을 시도했어도 그 모든 시도가 ‘판소리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소리는 남도소리를 근간으로 한다지만 문장체 고소설, 야담, 설화, 소화 등과 같은 서사 양식과 시조, 가사, 사설시조, 한시, 단가, 잡가, 민요 등과 같은 서정 양식도 담고 있으며 속담이나 수수께끼, 중국의 고사성어, 불경, 서사 무가 등도 담고 있지만 이 모든 장르들이 ‘판소리’로 수렴되는 개방성을 보인다. 그래서 ‘창극이 판소리적이다’라는 찬사는 ‘판소리처럼 현대적인 융합에 성공했다’는 칭찬이 될 것이다. 단순한 ‘판소리 모방 또는 복제’가 아닌 것이다. ‘판소리적’이라는 것은 판소리를 들을 때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과 더불어 배시시 바보 같이 웃으며 ‘얼씨구’를 내뱉게 되는 그 ‘삶의 감수성’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나아가자면 ‘판소리를 넘어서는 창극 공연 고유의 감수성’의 창출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연극』, 2016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