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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텁지근한 여름철 더위를 이겨내는 우리의 전통적 방법은 이열치열이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더위에 오히려 펄펄 끓는 삼계탕을 먹으며 연신 ‘시원하다’고 소리쳤다.
사실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음식을 먹으며 땀을 한 바가지 쏟아내면 배 속뿐 아니라 온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열치열도 여름철 어쩌다 한두 번이지 매번 이열치열을 적용하자면 그것도 고역이다.
솔직히 진짜 더울 때 간절하게 생각나는 음식은 먹으면 오장육부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음식이다. 더위에 지쳐 몸보신은 하고 싶은데 뜨거운 삼계탕이 부담스러울 때, 여름 더위를 한방에 날려줄 것 같은 음식이 초계탕이다.
초계탕은 닭고기 육수를 차갑게 식혀 식초와 겨자로 간한 후,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 넣어 만든다. 여기에 오이, 당근, 배추, 배 등을 얹어 시원한 닭 국물에 메밀국수를 함께 말아 먹는다. 초계탕은 예전 평안도 지방에서 즐겨 먹던 이북 음식이고, 임금님도 궁중에서 즐겨 드신 여름철 보양식이었다.
초계탕은 아무나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요리책이나 문집에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고, 왕실의 잔칫상을 적은 의궤나 《승정원일기》에 초계탕이 보인다. 그것도 시도 때도 없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왕태후의 생일 잔칫상에 나온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초계탕을 즐겨 먹은 것 같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인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100리 길을 떠나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의 화성 행궁으로 행차해 모친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다. 기록에는 윤 2월 9일에 궁궐을 떠나서 13일 화성 행궁 봉수당에서 연회를 열고 16일에 환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의 회갑 잔치를 기록한 책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인데 바로 여기에 초계탕이 보인다.
사실 혜경궁 홍씨의 생일은 음력 6월 18일이다. 그러니까 수원 화성 행궁에서 연 회갑연은 미리 당겨서 연 것인데 《승정원일기》에는 진짜 생일인 6월 18일에도 정조가 모친을 위해 잔칫상을 차렸다고 나온다. 임금을 비롯해 문무백관이 모두 혜경궁 홍씨를 찾아와 하례를 올렸는데 이때도 초계탕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의 초계탕 기록에는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조선 후기인 정조 때, 혜경궁 홍씨의 잔칫상에 처음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정조 무렵을 전후해 발달한 음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하나는 주로 왕태후의 잔칫상에 초계탕을 올렸다는 점이다. 헌종 14년인 1848년 2월, 창경궁 통명전에서 열린 대왕대비의 생일잔치와 고종 때 덕수궁 경운당에서 열린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칠순 잔치에도 초계탕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자세히 살펴보면 왕실 가족의 상에는 초계탕이 놓여 있지만 신하들의 음식상에는 초계탕이 보이지 않는다. 특별한 고급 요리였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초계탕이 대중화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가 아닌가 싶다. 1934년에 발행된 《간편조선요리제법》에 초계탕이 소개돼 있고 1937년에 8판이 발행된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도 초계탕이 나온다.
어쨌든 초계탕은 식초를 넣어 새콤한 닭 육수에 가늘게 찢은 닭고기를 넣어 ‘초계탕(醋鷄湯)’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식초[醋]와 겨자[芥]를 넣어 시원하고 매콤한 ‘초개(醋芥)탕’인데 평안도 발음으로 초계로 잘못 알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지금의 새콤하고 코끝을 찌르는 요리법을 감안하면 초계탕이라는 이름이 식초와 겨자를 넣는 데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있다.
식초와 겨자로 만든 장인 초개장(醋芥醬)은 진작부터 있었다. 정조의 증조할아버지이며 영조의 부친인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의 장례식을 기록한 문서인 〈국휼등록〉에 초개장을 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 역시 초개장에 닭무침을 먹었다고 했으니 닭고기를 식초와 겨자로 시원하게 조리한 것에서 초계탕이 비롯됐을 수도 있다. 시원하고 새콤한 초계탕을 먹으며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식히면 그만일 것을, 너무 꼬치꼬치 기원과 역사를 따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