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신 구 자
어쩌다가 매연으로 찌든
이곳까지 흘러와서
힘겹게 울타리 의지하고 있는가
그래도 한 때는
올망졸망 식솔들 거느리고
아침 햇살에 튀어오르는 싱싱한
숭어같이
희망의 폭죽 팡팡 터뜨리며 환하게
길 밝혔었는데,
칠월 땡볕 아래 몸 부빌 곳 찾아
막무가내 허공 속으로
새벽을 잡아당기며 얼레를 풀고 있는
저 눈물겨운 몸부림
낫골 가는 길
마디마디 맥풀린
봄날 같은 늦가을
비루먹은 개 잔등 같은 가로수 가지에
걸터앉은 잿빛 하늘 사이로
눈 맑은 단발머리 친구
병 문안 간다.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엔
몸여윈 새떼들만 하늘을 날고
찬란한 청춘의 한때를
고스란히 벗어놓고
긴 묵상에 잠긴 나목들과
저 세상 넋처럼 저문길 밝혀주며
등짐 풀고 누운 갈대들,
서걱서걱
무너지는 하늘 강둑에 부리며
서러운 황혼길
낫골 간다.
落照
팔십평생
맷돌 잡고 계시던 손
다 내려놓고
미투리 끌며
서산 넘어시던
어머니의 붉은 바다
사이와 사이
흩어지면 죽고 모이면 산다고
힘 모아 계곡을 만든 물 알갱이들
그 물길따라 상처난 나뭇잎 하나
길 잃은 채 우왕좌왕 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동행했던 것일까
반짝이는 햇살 받으며 자기 중심에 대해
날개 펼쳤을, 한 때도 있었으리
끊긴 기타줄 같은 신세 된 채
물 먹으며 허둥대고 있다
목숨이란, 단지 들숨과 날숨,
그 사이와 사이에 있을 뿐 인 것을
쓸쓸한 봄날
산수유꽃 배시시 실눈 뜬 청량산
중턱 까치집처럼 얹혀 있던
빈 둥지의 집 한 채
비에 젖고 있었네
헛간 시렁에는 호미며 쇠스랑 낫들이
흙의 속살과 뜨겁게 땀 흘리던
추억 되새김질 하며
낮달처럼 걸려 있고
반들반들 세월이 쉬었다 간 외양간 구유통
더운김 피어 오르던 여물 먹으며
순한 눈망울의, 엉덩짝 토실한 암소의
달랑대는 풍경소리
들리는 듯 했네
윙윙 콧노래 흥얼대며
신나게 꿀 쟁였을 벌들의 아방궁들
텅빈 영화 끌어아고 패잔병처럼
딩굴고 있는 마당귀
노오란 병아리떼 어미닭 따
종종종 금방이라도 나올 듯 했네
모두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때는 꽃피고 잎지는 아침 저녁
밤 짓는 연기 굴뚝 타고 날아올라
아랫목 따뜻이 데웠을테고
그 속에서
주렁주렁 자식들 속살 채우며
감자꽃 같은 꿈과 안식
꽃 피웠어리라
空手來 空手去 空手來 空手去
되뇌이며 떨어지던 처마끝 낙수물 소리
내 마음 골짜기로 스멀스멀 산안개
늪처럼 차오르던
쓸쓸한 봄날
調和
비틀비틀 갈지 자 걸음 걷는
뒷모습 보여주는 세상
서로 부딪히지 않고
굴러가는 이치 보려거던
봉황산 기슭 결가부좌한 채 禪定에 든
부석사 석축 가서 보거라
잘 여문 바람결에 고개 끄덕이는 나뭇잎들처럼
절로 고개 끄덕여지리니
큰 수레덩이만한 것에서 갓 태어난
아가의 주먹만한 것들이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 모습처럼
둥것 것 모난 것 길죽한 것 넙적한 것들
위에서 아래서 그리고 옆에서
희망과 절망, 적막까지도 서로 받치고 끌어안은 채
푸른 이끼 낀 세월 흐트러짐 없는
자태 만날 수 있으리니
중암암 풍경소리
단층 벗겨진
중암암 처마끝 풍경소리
문밖 서성이는 귀
흔들어 깨우는 가을날 오후
山竹은 나직이 무릅꿇고 앉아
비파를 뜯는다
내 안일까 밖일까
가슴 문지르며 맑게 씻긴
번뇌의 속옷
중앙로에서
오늘도
중앙로에서 성긴 바구니에
꿈을 줍는다
가을날
에메랄드 눈처럼 반짝이던
영혼의 조각들과
언제나 통곡같은
절절한 목마름으로 엉겨피던
불꽃 사르비아
지금은 썰물처럼 지워버린
황량한 이 거리에서
영혼이 은비늘 같이 퍼덕이던 곳은
어디쯤 일까?
낮선 대문 기웃대는
지천명의 아낙이여
오늘도 중앙로에서
성긴 바구니에
꿈을 줍는다
빛을 줍는다 물러선
세월의 잔해를 줍는다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
휘영청 보름달 같은 종조할아버지
청주댁 소실 데리고 압록강 수풍댐 공사장 십장으로
철새처럼 떠나버린 뒤
낙과된 두 남매 데리고 한평생 삯바느질로
개미허리 삶 꾸려온 종조할머니,
그 남매 알밤같이 키워 출가시킨 뒤 홀로 남아
앞뒤 돌담 위로 꽃 진 자리 또 꽃
붉게 붉게 피워 올렸던 능소화
세상사 돌고 돌아 쩍쩍 주머니 낡아 모래바람 일자
버림받은 종조할아버지
허옇게 머리칼 서릿발 내려 굽이굽이 고개 떨군 채
뒤돌아온 조강지처 품속,
외로움과 서러움의 불면들 기다림으로 쌓아올렸던
종조할머니 한 생애 굳어가던 돌담 속
연민으로 용서로 구들장처럼 품어주던
종조할머니 그 능소화
지금도 따뜻이 피고 있을까
회양목 어깨 위에는
혼자 어디에서 왔을까?
모여든 사람들
저마다의 소원으로 북적대는
*대원사 대웅전 앞
절벽 같은 회양목 어깨 위에 엎드리고 있던
뱀 한 마리,
저 아득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부추긴
제 조상 업 닦음인가
제 업이 무언지 모를 수도 있는,
그러나 사탄으로 낙인찍힌
징그러운 저 슬픈 몸,
라싸 조캉사원 향해 길 떠나는 순례자처럼
오체투지로 환생을 꿈꾸며
제 업 닦고 문지르며
저렇게 또아리 틀고 있나보다
*대원사 경남 산청에 있는 비구니 참선도량
약력
1940년 경북 약목출생
1994년 《대구문학》과 1999년 《불교문예》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낫골 가는 길】과 【지금도 능소화는 피고 있을까】출간
2013년 도동 시비동산에 〈중암암 풍경소리〉세워짐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여성문인협회, 현대불교문인협회,
칠곡문인협회 회원
반짇고리문학 회장 역임
사림시와 솔뫼동인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크게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신구자선생님ᆞ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