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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차 상현스님과 함께하는 행복한 여행 안내드립니다
♣ 경북 문경 대승사 → 운필암 → 김용사 → 점심
▶여행일시 : 5월13일 일요일 (매달 둘째 일요일)
▶출발시각 : 오전7시발 (정시출발예정)
▶ 출발장소:동래지하철역
(지하철 3번출구 맞은편)
▶버스NO:낙동투어 3656
♣부산은행(단나사)
101-2022-9213-04
『회비 50,000원. 아침김밥ㆍ점심공양포함』
♧예약을 우선으로 하며,
입금순 마감합니다.
※상기일정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단 나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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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대승사大乘寺]를 찾아서
● 08월 05일(토) [문경시 대승사大乘寺]에서 발길을 멈추다
문경 여행길에서 이정표에 ‘문경(점촌)’이라 표시되어 있어 조금은 의아했다. 그러나 1995. 1월 1일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하여 ‘문경시’가 되면서(법률 제4774호) ‘점촌’이라는 지명을 병기하게 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문경시청과 문경경찰서는 모두 점촌에 자리하고 있었다. 숙소인 문경새재 관광호텔에서 빠져나와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승사길 283 에 자리잡은 대승사에 이르기까지에는 조금 긴시간이 요구되었다. 여행일정에서 사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숭사에는 각종 문화재도 많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속의 대승사는 주볼 것도 많고 주위 풍광 또한 뛰어났다.
사불산 대승사大乘寺는 아름다운 창건설화와 함께 비교적 풍부한 사적을 보우하고 있다. 창건 이후의 사적에 대하여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승사사적기>에 따르면 선조 37년(1604) 서총대사가 대웅전 서쪽의 승당을 중창하였고, 다시 효종 2년(1651 경묵 대사가 대웅전 동쪽의 선당을 중창하였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인조 8년(1630)에서부터 숙종 29년(1703)에 이르는 사이에는 계담 대사, 각인 대사, 선림 대사, 혜탄 대사, 종수 대사, 원응 대사, 등 역대제사의 중수가 있었다. 당시 건물의 명칭은 대웅전, 응진전, 관음전, 시왕전, 금당, 요사, 종각, 일주문, 누각, 수각, 주고, 문랑 등 전각이 사불산 내에 가득하여 교남의 대가림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종 12년(1875) 목각후불탱을 부석사로부터 이안하여 계속 시비가 일기도 하였으나, 결국 대승사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1922년 여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에 의운, 취월, 덕산 대사 등이 정재를 모아 1927년에 옛 모습대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1956년 1월에 다시 화재를 입어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 등을 남기고 불타버리자 남인, 대휴, 설월, 정암 대사 등이 힘을 모아 대웅전, 응진전, 대방, 일주문 등을 중창하였다. * 대승사의 창건 설화 * 사불산의 본래 산명은 공덕산이었다. 그러나 ≪삼국유사≫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의 내용에 따르면 “죽령 동쪽 백여 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 갑신년에 홀연히 사면 10자 정도되는 큰 돌이 사방에 불상을 새겨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왔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예경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 ≪법화경≫을 독송하는 망명(이름을 밝히지 않은) 비구를 청하여 절을 주관케 하였더니,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돌에 공양하여 향화가 끊이지 않았다. 산을 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하였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절은 ‘천강사불하고 지용쌍련’의 설화로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대승사의 보물★ ①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聞慶大乘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腹藏遺物:
보물 제1634호.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목조관음보살상과 목조대세지보살상이 협시하는 구도로 대승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다. 그러나 협시보살상들은 양식상 조선시대 후기로 편년되어, 고려시대 후기의 특징을 지닌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원래 협시상은 아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가 87.5㎝이며, 무릎의 폭이 63㎝이다. 불상 속에 있던 대부분의 복장 유물은 없어졌지만, 대덕(大德) 5년(1301)에 인쇄한 다라니가 확인되어 불상의 조성도 대략 이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불두 부분에 아직 남아 있는 복장 유물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확인된 복장 유물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편년되는 다라니류 3종 12매이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아미타불의 설법인을 결한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약간 경직된 느낌을 주는 코를 제외하면, 내리 뜬 눈과 약간 긴 인중, 살짝 다문 입 등 위엄있는 원만한 상호를 갖추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깨는 좁고 약간 처져 있으며, 옆모습을 보면 상체가 앞으로 약간 굽어진 자세이다. 가슴과 복부가 풍만한 상체에 비해 하체는 무릎의 높이가 낮아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머리와 육계의 구분이 거의 없고, 머리의 중앙과 정상에는 둥근 형태의 계주를 갖추고 있다. 귓구멍(耳孔)은 8자 형태이며, 그 아래에 다시 8자 형태의 홈은 1280년에 중수된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의 물방울 형태에서 진전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후기의 당진 신암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 조선 초기로 편년되는 안동 개목사 목조관음보살상과 예천 용문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모양의 귀는 고려시대 후기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인은 엄지와 약지를 부자연스럽게 맞댄 아미타불의 설법인이다. 이런 형태의 수인은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보물 제986호)과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이 시기 불상의 대부분 손금은 卄의 모습이지만, 이 불상은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등과 같이 井자형이다. 법의는 대의와 내의 등을 통견형식으로 착용하였다. 왼쪽 팔꿈치에 Ω형 주름이 나타나지 않거나, 마름모꼴 금구장식이 없는 승각기, 승각기 아래로 표현된 나비 매듭의 띠 자락은 각각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71호),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19호),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호) 등과 비교된다. 한편 오른쪽 발목 아래의 八자형 주름과 왼쪽 무릎의 날카로운 잎사귀 모양의 주름은 14세기에 조성된 남원의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17호)과 유사하다. 따라서 불상은 불두의 모습과 착의법 등을 통하여 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복장 유물의 상당수가 이미 없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불상 조성 당시에 궁궐도감 별장 정승설(丁承說)이 복장 납입을 위해 1301년에 특별히 인출한 다라니가 13점 발견되었다. 즉 1301년에 인출한 아미타삼존다라니(阿彌陀三尊陀羅尼) 1장(33×34.5㎝), 고려시대 1292년에 판각하고 1301년에 인출한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 8장(37.5×34㎝), 아자 범자원상 태장계만다라(阿字 梵字圓相 胎藏界曼茶羅) 3장(33×35.5㎝)이 그것이다. 판각과 인쇄 시기를 알 수 있는 이들 다라니는 서지학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편년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불상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는 정상계주와 불신 조성에 사용한 동의 재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의 불상이 원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불상을 통하여 정상계주가 이미 고려시대 14세기 무렵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복장물을 넣은 후 불상의 밑바닥을 나무판으로 마감하는 과정에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밀납과 송진 등을 이용해서 막는 새로운 방식도 불상에서 확인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②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 聞慶大乘寺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關係文書:
보물 제575호. 4매. 이 문서는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尙州大乘寺外四寺僧徒等狀)」· 「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尙州四佛山大乘寺僧徒等狀)」·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道內尙州四佛山大乘寺諸僧等狀)」·「완의(完議)」이다. 등장은 소지(所志)의 일종으로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연서하여 관에 올려 인증을 받는 문서로서, 이 목각탱에 관계되는 등장은 1869년(고종 6)과 1876년(고종 13)에 작성되었다.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있었던 것으로, 1862년(철종 13) 대승사의 화재로 법당이 불에 타 없어지자, 새로 법당을 짓고 폐찰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목각탱화를 옮겨놓았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여 시비가 일게 되자 등장을 올리게 되었고, 1876년 대승사에서 부석사의 조사전(祖師殿) 수리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합의를 보게 되어 「완의」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문서는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에 얽힌 유래와 조선 후기의 부석사와 대승사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밖에 1875년에 작성된 『순흥부석사승도등장(順興浮石寺僧徒等狀)』도 대승사에 보관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③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聞慶 大乘寺 四面石佛):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에 있는 신라의 석불이다. 2007년 12월 31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탑상조의 기록에 의하면, 대승사 사면석불에 대한 내용이 신라 진평왕대에 보이고 있어 그 조성시기는 6~7세기로 추정된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는 사각형 형태의 방주석(方柱石)으로 각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으며 사면(四面)에는 모두 불상 1구씩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세부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모두 여래상인 것으로 보인다. 동쪽과 서쪽은 좌상(坐像)이고 남쪽과 북쪽은 입상(立像)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동쪽의 좌상은 가장 상태가 양호하다. 이 사면석불은 사방불이면서도 신라의 왕도인 경주가 아닌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비록 마멸이 심하여 불상의 세부파악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현존 몇 안 되는 우리나라 사방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므로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로 지정한다. 현지 안내문에는 <일연의 《삼국유사》"권2. 탑상제4, 사불산·굴불산·만불산 조"에 의하면 "죽령 동쪽 백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신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의 상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이 이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을 깨끗이 쓸고 향화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이라고도 했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쓰여 있다.(<위키백과>에서) ④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聞慶 大乘寺 金銅觀音菩薩坐像 1989.04.10, 보물 제991로 지정) 진평왕 9년(587)에 세운 대승사에 모셔진 보살상으로 유리상자를 씌워 모셔 놓았다. 불상 속에서 나온 관음보살원문(觀音菩薩願文)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중종 11년(1516) 불상에 새로 금을 칠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귀는 약간 짧고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팔에 걸쳐 내려 무릎을 덮고 있으며, 전신에 걸쳐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가슴, 배, 무릎에 표현된 구슬 장식이 경상북도 영덕의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과 흡사하지만 어깨와 등의 번잡한 장식이 옷속에 감추어진 점이 다르다. 특히 띠매듭 바로 위의 치마상단이 긴 상체의 가운데에 표현되어 마치 보살상을 둘로 나눈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또한 이 불상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서)
2008.11.03.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5호로 지정됨 1876년에 제작된 이 지장탱화는 원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되었던 불화로서, 현재는 명부전(冥府殿)에 모셔져 있다. 화면에는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十王과 그 권속이 함께 그려져 있다. 중앙의 지장보살삼존 좌우로 왼쪽에는 홀수의 시왕과 판관, 사자, 옥졸 등을, 오른쪽에는 짝수의 시왕과 판관, 사자, 옥졸 등을 배치한 형태이다. 여기에 화면 상단의 지장보살 주위로 6보살이 좌우 대칭으로 첨가되어 있다. 문양의 생략, 음영이 심한 옷주름 표현, 적색, 녹색, 청색, 황색, 흰색 등의 두드러진 채색 등에서 19세기 말경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⑥ 대승사윤필암목조아미타여래좌상및지감(大乘寺潤筆庵木造阿彌陀如來坐像및紙龕) 1997.12.19.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됨. 대승사 윤필암은『대승사사적』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 각관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나무로 만든 작은 불상에 금칠을 했기 때문에 불상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얼굴은 계란형으로 조선 후기 불상양식과는 다르며, 목에는 3개의 주름이 뚜렷하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비교적 단조롭게 처리되었다. 이 불상은 두터운 한지로 정교하게 만든 검정색 감실(鑒室:불상을 모시기 위해 불당 건물을 본떠 작게 만든 공간)안에 모시고 있었는데, 이 감실은 불상을 만든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⑦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진영(聞慶大乘寺妙寂庵懶翁和尙影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25.5㎝, 가로 81.5㎝.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봉안되어 있는 나옹화상진영은 1803년에 신겸(愼兼)이 조성하였다. 나옹화상은 오른쪽을 향해 결가부좌한 전신좌상(全身坐像)에 주장자와 염주를 든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얼굴과 신체 및 장삼과 가사의 옷주름 표현에서 제작자인 신겸의 화풍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나옹혜근은 1347년(충목왕 3)에 원(元)의 연경에서 지공(指空)선사의 법을 계승하였다. 공민왕 때 고려로 귀국해 회암사의 주지가 되고 왕사(王師)로 봉해졌으며 보제존자라(普濟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나옹혜근은 1340년(충혜왕 1)에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묘적암에는 나옹화상진영이 봉안되었다. 나옹화상진영을 그린 신겸(愼兼)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를 이끌었던 수화승(首畵僧)이다. 사불산에 위치한 대승사는 신겸의 옹사와 스승인 괄허취여(括虛取如)와 취운의정(醉雲義貞)이 주석했던 사찰이다. 대승사에 기반을 둔 화승 신겸은 산내 암자인 묘적암의 나옹화상진영의 제작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화상진영은 화면 왼편에 “공민왕사나옹대화상(恭愍王師懶翁大和尙)”이란 영제(影題)가 적혀 있다. 나옹화상은 고려왕사로서 위엄있는 모습보다는 조선 후기 선사(禪師)로 표현되었다. 화면 중앙에 나옹화상은 청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있으며 한 손에 주장자(拄杖子)를 쥐고 다른 손에는 단염주(短念珠)를 쥐고 있다. 등 뒤에 가리개가 있으며 가리개에 용두불자(龍頭拂子)가 걸쳐 있다. 배경은 바닥에 화문석과 가리개로 이분화되었다. 화문석과 가리개는 19세기 진영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며, 배경과 가리개의 격자문은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문양이다. 나옹화상의 청색 장삼과 홍가사, 단염주·주장자·불자의 표현 등은 신겸이 1795년에 제작한 김룡사 화장암의 침운당선사진영과 구성이 유사하다. 다만 얼굴과 신체 비율에 있어 나옹화상진영은 사실성이 크게 떨어진다. 즉 얼굴은 타원형에 이마와 광대가 둥글게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신겸이 불보살과 나한을 그릴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넓은 어깨에 긴 허리와 팔, 상대적으로 좁은 무릎 폭으로 이루어진 신체 역시 신겸의 보살도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신겸은 나옹화상진영을 제작하면서 실존 인물보다는 보살이나 나한에 가깝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과 신체 표현 외에도 가사 끈을 고정하는 금박의 가사 고리, 무릎 위에 과장되게 너풀대는 소매자락 또한 신겸의 특징적 표현이다. 화면은 왼편이 사선으로 찢어지고 안료가 일부 박락되었지만 제작 당시의 표현과 색감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액자형의 그림틀에 화면 외곽을 흰색과 녹색으로 마무리하는 조선 후기 장황 방식 또한 그대로이다. 화면 하단에는 제작 시기와 봉안처, 화승 및 제작에 참여한 이들을 기록한 화기가 적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⑧ 문경 대승사 노주석(聞慶 大乘寺 露柱石)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조각품이다. 2008년 11월 3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07호로 지정되었다. 대승사 대웅전 앞에 나란히 놓인 2기의 노주석은 사찰에서 야간에 법회 등의 행사 때 주위를 밝히는 석등의 일종이다. 석등보다 선행되는 형식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노주석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조선시대의 몇몇 예가 영남지역에 남아 있을 뿐이다. 사각기둥을 한가운데 세우고 그 위에 받침이 있는 화반(花盤)을 올려놓았다. 오랜 세월 사용되면서 화반(花盤) 일부가 금이 간 부분이 있으나 비교적 완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형태가 질박하여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간주(竿柱)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1729년이라는 제작연대와 공인(工人)의 이름을 알 수 있어 불교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되므로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로 지정한다.● |
사불산 대승사는 아름다운 창건설화와 함께 비교적 풍부한 사적을 보우하고 있다. 창건 이후의 사적에 대하여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승사사적기>에 따르면 선조 37년(1604) 서총대사가 대웅전 서쪽의 승당을 중창하였고, 다시 효종 2년(1651 경묵 대사가 대웅전 동쪽의 선당을 중창하였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인조 8년(1630)에서부터 숙종 29년(1703)에 이르는 사이에는 계담 대사, 각인 대사, 선림 대사, 혜탄 대사, 종수 대사, 원응 대사, 등 역대제사의 중수가 있었다.
당시 건물의 명칭은 대웅전, 응진전, 관음전, 시왕전, 금당, 요사, 종각, 일주문, 누각, 수각, 주고, 문랑 등 전각이 사불산 내에 가득하여 교남의 대가림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종 12년(1875) 목각후불탱을 부석사로부터 이안하여 계속 시비가 일기도 하였으나, 결국 대승사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1922년 여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에 의운, 취월, 덕산 대사 등이 정재를 모아 1927년에 옛모습대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1956년 1월에 다시 화재를 입어 극락전, 명부전, 산신각 등을 남기고 불타버리자 남인, 대휴, 설월, 정암 대사 등이 힘을모아 대웅전, 응진전, 대방, 일주문 등을 중창하였다.
대승사의 창건 설화
사불산의 본래 산명은 공덕산이었다. 그러나 <삼국유사>권3<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의 내용에 따르면 “죽령 독쪽 백여 리 지점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진평왕 9년 갑신년에 홀연히 사면 10자 정도되는 큰 돌이 사방에 불상을 새겨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로부터 산의 꼭대기에 내려왔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예경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 <법화경>을 독송하는 망명(이름을 밝히지 않은) 비구를 청하여 절을 주관케 하였더니,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돌에 공양하여 향화가 끊이지 않았다.
산을 덕산, 또는 사불산이라 하였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꽃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절은 ‘천강사불하고 지용쌍련’의 설화로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김용사
전에부터 점촌쪽에 가끔 탐석을 나가다 보면 이곳도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많고 가볼곳이 많구나 하는걸 느낍니다 첫째 문경새재와 도자기와 온천을 비롯 석탄박물관 그리고 각종 영화촬영지등 구경거리라 셀 수 없이 많지요 그밖에 점촌 특유 석질의 돌밭도 곳곳에 산재해 있어 지금도 끊임없이 수석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돌밭이 고갈되어 한점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지만 아직 가능성이 있는 곳이 남아있어 산천경계를 벗삼아 시간나는대로 두루두루 누벼볼 생각입니다 어제는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운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김용사탐방과 계곡을 탐석하고 왔습니다 이쪽은 주로 석회질의 보잘것 없는 돌들이 계곡에 널려 있지만 간혹가다 특이한 강석질의 돌들이 나와 가끔 놀라울 정도의 명석이 나오곤 하지요 가은이나 구랑리등의 돌밭과는 다른 험난한 탐석코스가 되겠지만 말이지요 이곳에 오시면 김용사뿐만 아니라 부근에 대승사도 있어 관광 코스로도 안성맞춤인것 같습니다 대승사는 전에 탐방을 했기 때문에 이번엔 김용사를 가보기로 하고 핸들을 좌측으로 꺾어 달립니다
안내 포지판에 김용사에 대한 내역이 간단히 적혀 있네요
김용사로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왼쪽에 범종각이 보이는군요
네분의 사천왕께서 계시는 천왕문입니다
김용사의 이름에 걸맞게 연못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금용(金龍)이 보이네요
맑은 약수물이 흐르는 약수터구요 한모금의 약수로 운달산의 정기를 몸안에 가득 채웁니다
소나무와 목백일홍이 에워싸고 있는 요사채가 고즈넉해 보이네요
대웅전의 모습입니다 마침 주지스님께서 예불중이시네요
잠깐 들어가 부처님을 뵙고 나오겠습니다
운달산 푸른 산새와 잘 어울리는 김용사가 참으로 깨끗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며 부처님께 참배하고 부근의 계곡과 산자락을 탐석하기 위해 사찰을 내려옵니다
맑은 물위에 떠있는 돌들... 잡석과 석회암들 사이로 쟁쟁한 쇳소리의 강석질 돌들이 섞여 있어 기대감에 부풀어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탐석을 하다보니 배가 고프네요 다시 강가로 자리를 옮깁니다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차안에서 라면을 끓여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먹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바로 이맛이야~!" 돌밭에서 먹는 라면의 맛 세상에서 제일 가는 천하일미로 라면 한그릇에 세상 부러울것 없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요? 아마 그것은 자연의 품에서 만끽하는 자유와 돌밭에서 누리는 석향(石香)이 있기 때문일것입니다 고을님들 저와 함께 저 라면 한젓가락씩 드시며 즐거운 인생 오래오래 함께 하자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