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이 퍼뜨리는 문화적 아이디어를 지배 엘리트가 독자적으로 창조한 경우는 많지 않다.
제국관은 보편적이고 포갈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국의 엘리트들은 하나의 편협한 전통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대신
어디서 발견한 것이든 좋은 아이디어, 규범, 전통을 쉽게 채택할 수 있었다.
일부 황제가 자신들의 문화를 정화하고 스스로 뿌리라고 생각한 것으로 되돌아가려고 한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제국은 자신들이 복속시킨 민족에게서 많은 것을 흡수하여 혼성 문명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문화는 로마적인 만큼이나 그리스적이었다.
제국주의 아바스 왕조(750~1258의 칼리프)의 문화에는 페르시아, 그리스, 아랍 문화가 모두 섞여 있었다.
제국주의 몽골 문화는 중국의 모방이었다.
제국주의 미국에서 케냐 혈통의 대통령은 좋아하는 영화(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면서 이탈리아 피자를 먹을 수 있다.
터키에 대항하는 아랍인의 반란에 관한 영국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면서 말이다.
이런 문화의 용광로가 패자의 문화적 동화 과정을 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 문명이 다양한 피정복민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것을 흡수할 지언정,
그런 혼성의 결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었다.
동화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큰 정신적 충격을 동반하는 일이 많았다.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채택하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인 것처럼,
자신이 사랑하고 친숙한 지역 전통을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피지배 민족이 제국의 문화를 수용한다해도 심각한 문제가 남는다.
제국의 엘리트가 이들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 수백 년이 아니더라도 수십 년은 걸린다는 점이다.
정복과 수용 사이에 끼인 세대는 소외되고 배제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사랑했던 지역문화를 이미 잃었지만, 제국주의 세계에 동등하게 참여할 자격은 받지 못했다.
그들이 수용한 문화는 그들을 여전히 야만인으로 보았다.
누만시아 함락 1 세기 후의 혈통 좋은 이베리아인을 상상해보자
그는 부모와 같은 켈트어 방언을 사용한다.
하지만 라틴어도 배워서, 악센트가 약간 이상한 것 외에는 흠잡을 데 없이 구사할 수 있다.
사업을 하고 당국을 상대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정교하게 장식된 사구려 장신구를 좋아하고 그는 그런 기호를 허용하지만,
아내가 이 지방의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켈트족 취향을 고수하는 게 약간 마음이 불편하다.
로마 총독의 아내가 달고 있는 장신구럼 갈끔하고 단순한 취향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는 로마식 튜닉을 입는다. 그리고 복잡한 로마 상법에 정통한 것에 적잖이 힘입어
가축 상인으로 성공한 덕분에, 로마풍 빌라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베르킬리우스의 〈게오르카〉 제 3권을 암송할 수 있는데도
로마인들은 그를 여전히 반쯤 야만인으로 취급한다.
그는 자신이 결코 관직을 얻거나 원형극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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