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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지, 번뇌 없애는 지혜수련 경지
법상‧법성 같고 다름 숙지해야
인간 본성 관련 불교철학 정립
‘청정한 마음’ 인정 여부 따라
법상종과 법성종으로 갈라져
지난주에 이어 제4지 ‘염혜지’를 좀 더 소개하기로 한다. 중국의 경학자들은 ‘화엄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유가사지론’ 내지는 ‘성유식론’ 등 소위 ‘유가행파’의 수행이론을 많이 인용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현실 배경이 있다. 중국 당나라 정관 22년(648), 현장 스님은 ‘유가사지론’(100권) 번역을 마쳤는데, 이 책은 인도 유가사(瑜伽師, yogācāra)들의 ‘관찰 수행법[觀法]’ 관련 이론과 체험을 총 17지(地)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새로운 불교 사상이 인도에서 당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새로운 사상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지식인들이 움직였다. 불교(佛敎)는 물론 도교(道敎) 수행자들까지도 말이다. 텍스트를 분석하던 당나라 ‘경학’ 전통에 새로운 문헌이 소개된 셈이다. 이런 상황을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중국 고유의 ‘경학’을 알아두어야겠기에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분서갱유’로 기억되는 진시황과 당시 집권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실제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담은, 예를 들면 농사와 의학과 기술과 점술 관련 등의 문서만 남기고, 철학 역사 문학 군사 외교 관련 사상을 통제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정보 훼손이 생기자, 한(漢) 왕조는 유교(儒敎)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지난 과거의 정보 복원에 착수했다. 사실 그대로의 ‘팩트(fact)를 보존’하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문화(文華)’ 부흥을 국책으로 시작했다. 이것이 ‘경학’인데, 이는 향후 중국 지성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불경을 번역하는 ‘역경승(譯經僧)’과,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의해승(義解僧)’들도 역시 중국 고유의 ‘경학’ 전통을 확장 발전시켰다.
‘화엄경’이야말로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담고 있다고 믿는 천재적 ‘의해승’들이 ‘경학’에 가담했다. 구마라습 스님 이전의 고역(古譯), 구마라습 스님 이후의 구역(舊譯), 현장 스님이 시작한 신역(新譯), 이 모두를 참조하여 ‘화엄경’의 본문 해석을 풍부하게 했다.
해가 갈수록 해석의 전통이 쌓였으니, 법장-청량-규봉-자선-정원으로 이어지는 당-송 시대의 ‘의해승’들이 빛났다. 뒷사람들은 이들을 ‘화엄종 종사(宗師)’라 불렀는데, 이들의 경학은 조선을 거쳐 일본까지 퍼져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확인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화엄의 경학자들은 ‘유가행파’ 수행자들이 따르던 인간 이해와 삶의 가치에 대해 서로 입장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저들 사상을 법상종(法相宗)이라 이름하고, 자신들 사상을 법성종(法性宗)이라 이름했다. 이렇게 이름하는 과정은 당연, ‘비평과 수용’이라는 철학적 해석 작업이 수반되었다.
‘법상종’과 ‘법성종’ 사이에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교리상의 차이 있는데, 그 내용을 조선의 승려들은 규봉 종밀 스님이 지은 ‘선원제전집도서’라는 책 속에서 학습하고, 좀 길게 공부 한 스님들은 ‘화엄경수소연의초 현담’에서 정교하게 배운다. 이 두 책을 독파하여, ‘법상종’과 ‘법성종’ 교리 행상의 같고 다름을 숙지해야만 인간 본성에 관한 형이상학, 행위에 관한 가치론, 지식에 관한 인식론, 등 불교 철학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다.
화엄종 종사들은 법상종의 이론을 도입하여, ‘화엄경’ 10지(地)의 순서가 왜 이렇게 배열되었는지 그 이유를 해설한다. 즉, 제1지 ‘환희지’에서는 ‘의요(意樂, aśaya; 기꺼이 하려는 마음)’를 청정하게 하고, 제2지 ‘이구지’에서는 ‘계율’을 청정하게 하고, 제3지 ‘발광지’에서는 ‘선정’을 청정하게 하고, 제4지 ‘염혜지’부터 제10지 ‘법운지’까지는 ‘지혜’를 청정하게 한다고 해설했다.
위에서 사용된 ‘4종류의 청정한 수행’ 발상은 ‘잡아함경’을 비롯 ‘화엄경’에 이르는 곳곳에 등장하는데, 화엄의 경학자들은 ‘유가사지론’에서 그 정보를 수집했다. ‘염혜지(焰慧地)’는 ‘(번뇌를) 태워 없애는 지혜 수련 경지’란 뜻이다. 번뇌가 신·구·의 3업으로 겉으로 드러나 ‘청정한 마음’을 장애하는 즉 ‘소지장(所知障)’에 속해있는 ‘본능에 배어든 번뇌[俱生惑]’를 태워 없애는 수행이다.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임은 같지만, ‘청정한 마음’의 인정 여부에 ‘상종’과 ‘성종’이 갈라진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 ananda@yonsei.ac.kr
[1670호 / 2023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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