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딴따라 아들의 회상
아버지의 고향이자, 선산이 있는 H 읍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면사무소 옆, 짜장이 국산 된장처럼 구수한 중국집 대신 브랜드 커피점이 자리 잡았고, 정면에 허름한 점포 대신 농협 마트가 있었다. 어릴 때 할머니 댁에 놀러 오면 지금은 고인이 된 막내 삼촌이 이곳에 종종 데려왔다. 그리고 청년기, 그때 나는 서울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재차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할머니 댁에 몇 달을 머물렀다. 할머니 댁에서 걸어서 삼사 십분 걸리는 읍내에 종종 나는 산책을 나왔기 때문에 이곳의 지리를 훤히 알 수 있었다.
이장을 전문으로 하는 인부 몇이 면사무소 앞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것도 없이 그는 그들에게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고 이내, 차는 선친의 산소로 향했다.
“잡풀이 너무 자랐구먼.”
내 뒤를 따라오던 인부가 혀를 찼다. 추석이 멀리 있어 아직 벌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풀을 헤치며 산등성이를 올라가다, 나는 또 회상에 빠졌다.
그때도 무척 더운 초여름이었다. 영구차가 산소를 팔 곳 밑까지 진입할 수 없어 도롯가에서부터 관을 메고 이곳까지 올라왔다. 젊은 나이였지만 불볕더위에 답답한 상복을 입고 산을 오르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미망인이었던 어머니는 매장이 끝난 아버지 무덤 옆에 앉아 멀리 저수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여기요? 그럼 상주는 이만 가소. 무덤 파헤치는 것 보면 억장이 무너질 터이니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요.”
인부도 그와 똑같은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한참이나 아버지의 산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앞으로는 벌초하러 올 필요가 없었다. 사는 게 힘들 때마다 가끔 혼자 이곳에 와서 무덤에 소주를 부으며 넋두리할 곳이 없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나는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마지막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무덤 앞에 두고 내려왔다.
면사무소는 정각 9시에 문을 열었다. 그 사이 그와 나는 근처 국숫집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커피까지 마셨다. 친절한 직원 덕분에 이장에 관한 서류는 금방 처리했고 그것을 재차 작업 중인 인부의 차 안으로 던짐으로써 아버지의 고향, H 읍 방문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 이곳에 올 일은 없었다.
사흘 전이였다.
다음 날 이웃 마을에 있을 마을 행사에 통기타 공연이 잡혀있어 막 기타 연습을 하려 하는 참에, B 시의 병원, 요양보호사로 있던 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머니를 그제 중환자실에 옮겨두었는데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다며 급히 내려오라는 전갈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각각 직장과 학교에 간 뒤였다. 나는 서둘러 옷을 바꿔입고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야야. 나는 안 죽고 싶다. 이리 살아도 나는 살고 싶다. 그런데 우짜노! 내가 빨리 안 가면 너거가 고생 아이가?”
지난 어버이날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를 찾았는데 그때 당신이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나는 증손주까지 본 구순이 넘은 어머니가 어린아이같이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고생은 무슨 고생? 그럼요. 백 세까지는 사셔야죠. 어머니 보니 거뜬할 것 같습니다. 하하.”
“맞제? 근데 니는 시골에서 어찌 지내노? 농사는 잘되나? 니, 설마 거기서도 딴따라 하는 거 아이제?”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그날, 어물쩍 웃음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