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날이다. 강남 간 제비가 돌아는 날이라는 심짇날이 지난 지도 두 주일이 지났다. 우리의 봄처럼 중국 강남 땅의 봄날도 온천지가 생기발랄함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상하이에 머물던 4년 전 봄에 저장성 닝보의 닝보박물관을 찾았을 때, 그곳에서 우연찮게 530여 년 전 조선 성종 때의 관료였던 최부(崔溥, 1454-1504)의 행적을 접했었다.
"시간에 쫓겨 대충 서둘러 훑어보며 지나왔던 박물관 역사관을 빠져나올 즈음, 문득 최부의《표해록(漂海錄)》에 생각이 미쳐, 넓은 역사관을 표류하듯 거꾸로 되짚어 갔다."
_ 2021.5월, '닝보박물관 관람기' 중
최부는 제주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부친상을 당하자,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한다. 흑산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명나라 저장성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에 상륙한 후, 136일만에 일행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무사히 돌아온다.
성종의 명에 따라, 명나라로 표류 후 귀환까지의 역정(歷程)을 기록한 책이 최부의『표해록(錦南漂海錄)』인데, 자신의 호 '금남(錦南)'을 붙여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이라 이름했다. 소설 ≪표해록≫을 쓴 이병주는 마로코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 표류기≫와 함께 최부의 "표해록"을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았고, ≪최부 표해록 연구≫ 등의 저자인 중국의 거전자(葛振家) 교수는 최부의 "표해록"을 세계 3대 중국 여행기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주초에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 세 권의 책을 빌렸다. 그 중 한 권이 "표해록, 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최북 作 김찬순 譯)"인데, 최부의 기록을 따라 그 일행이 거쳐간 행적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최부 일행이 1988년 윤정월 3일에 제주를 떠나 표루한 지 9일만에 중국 땅에 닿았다. 제일 먼저 도착했던 곳은 절강성 영파(宁波) 하산(下山)의 어느 섬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해적 떼에게 옷가지와 양식을 모두 빼앗기고, 배의 닻과 노, 돛대, 도구 등이 깡그리 부숴져 바다로 던져졌다.
그 다음날 바다로 내쳐져 또다시 사흘간을 표류하다가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 해변에 닿았다. 그곳에서도 뱃사람들에게 배 안의 것을 모조리 빼앗기고, 소홀한 감시를 틈타 배에서 육지로 도망하여 서당리(西里堂)에 도착한다. 마을 사람들의 호의에 안도하기가 무섭게, 몽둥이와 검을 들고 징과 북을 쳐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마을에서 마을로 50여리를 여우몰이 당하듯 몰리어 가게 된다.
선암리(仙巖里)를 지나 포봉리(蒲峯里)에서 관원들에게 인계된 최부 일행은 우중에 험한 길을 걸어 망신창이가 되어서야 임해현 안성사(安性寺)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고, 그 다음날 해문위(海門衛) 도저소(桃渚所)로 호송된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최부 일행이 최초로 표착한 곳을 관할하던 사자채(獅子寨)의 관원들이 최부 일행의 머리를 잘라 바치고 왜적이라 무함하여 공훈을 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손바닥 글씨로 뀌뜸해 준다. 최부는 그 사람이 알러준 말에 까칠하게 소름이 돋으며 몸서리치며, 훗날 조선으로 귀환 후 기록한 표해록에 아래와 같이 첨언하고 있다.
"만일 배에서 저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먼저 뭍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간악한 해안 사람들이 왜적이라 무함하여 머리를 베어 바치고 상을 탈 것을 노리니, 그들에게 걸리면 뉘 능히 실정을 밝혀 주겠는가!
이번 일로 미루어 보아, 모든 관원에게는 호패와 신분증, 사신에게는 왕명의 위엄을 높일 절원(節鉞), 연해(沿海) 주민들에게는 호패를 주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제주에서 떠난 지 16일째 되는 날인 성종 19년(1488년) 윤정월 19일 저녁, 천호(千戶) 등 관원 일고여덟 명 앞에서 실시된 도저소의 심문 끝에, 최부 일행은 '왜구'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윤정월 21일, 파총관 유택(劉澤)으로부터 재차 심문을 받은 끝에 '북경으로 보내 귀국하도록 하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
최부 일행은 태주 도저소에서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거나 걸어서 조리돌림하듯 걸어간 길을 되짚어 포봉(蒲峯), 선암리(仙巖里), 천암리(穿巖里)를 지나 태주 북부의 해포(海浦)에서 배에 오른다. 영파(寧波)의 남쪽 월계포(越溪鋪)로 접어들어, 육로로 봉화현(奉化縣)과 진사리(進士里)을 지나고 영파부를 거쳐, 다시 배로 요강(姚江)을 따라 자계(慈溪縣)로 북상했다.
2월 4일 감수(鑑水)를 따라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하여 관아의 심문을 받은 후 넉넉한 대접을 받으며 하루를 묵었다. 그 이튿날 감수(鑑水)를 따라 항주의 서흥하(西興河)를 거치고 전당강(錢塘江)을 건너, 2월 6일 항주성 무림역(武林驛)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최부는 고벽(顧壁)이라는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 중 "항저우 서쪽 팔반령(八般嶺)에 고려사가 있다"는 고벽의 말대로, 서호(西湖) 남동쪽에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라는 절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항주 포정사와 안찰사 부사로부터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결정에 따라, 최부 일행은 양왕(楊旺)의 인솔 아래, 2월 13일 항주 무림역을 출발하여 북경으로 향하게 된다. 가흥(嘉興)을 거쳐 소주(蘇州) 통파정(通波亭; 옛 이름 高麗亭)과 한산선사(寒山禪寺) 등을 스쳐지나고, 무석현(無錫縣) 상주(常州) 전강(鎭江)을 지나 장강(양자강)을 건너게 된다. 2월 22일 진강에서 양자강을 건널 때 싸움터의 무리지어 달리는 말들처럼 파도를 희롱하는 돌고래 무리의 장관을 보았다고 한다. 양자강 돌고래는 2004년 8월 마지막으로 목격되며 사실상 멸종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최부는 거쳐 지나는 지역의 현지 관원들과 양국의 관제 복제 교육 형벌 예절 등에 대해 문답하고 시로써 교유하는 한편, 그 지역의 지리 역사 인물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표해록에서 뽐내고 있다. 각 고을 관원들은 물자가 풍부한 강남답게 최부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했고 찬품도 넉넉하게 챙겨주기도 했다.
양주를 지나고 회안(淮安), 숙천(宿遷), 비주(邳州), 서주(徐州), 한 고조(漢高祖)의 고향인 패현(沛縣), 연주(兖州), 제녕성(濟寧城), 임청현(临清縣), 무성현(武城縣), 천진(天津)을 거쳐 3월 28일 북경에 도착하여 사신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위 조선 사신 숙소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게 된다. 최부는 명나라 조정의 감시와 이동 통제 속에 4월 24일 회동관을 떠날 때까지 옥하관에 머물면서, 사신단으로 온 유구국(瑜球國) 진선(陳善)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 교유하기도 했다.
북경을 출발한 최부 일행은 산해관(山海關), 광녕(廣寧), 팔도하(八渡河)를 거쳐 6월 4일 마침내 국경인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로 들어오면서, 중국 땅에서의 긴 여정을 끝맺는다. 북경의 옥하관에 머물 때 만난 왕능(王能)의 말대로, 최부 일행의 표류와 귀환 과정은 실로 천우신조의 역정이라 할 만하다.
"일행이 많고 날짜가 오래 걸리면 비록 평상시일지라도 간혹 병이 나 죽는 이가 생기거든, 하물며 모진 폭풍을 만나 바다를 표류하였는 데도 한 사람도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으니, 이는 천고에 드문 일입니다."_《표해록》4월 11일 기록
최부는 말미에 표류 후 지나온 노정과 지세, 물길 이용 제도, 살림살이와 옷차림새, 인정과 풍속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의 남북을 둘러본 것은 실로 천재일우이나 상중인지라 감히 나가 구경할 수 없었다는 심경을 고백하면서 끝을 맺는다.
"구실아치 네 사람을 시켜 날마다 나가 게시판에 쓰여 있는 글도 보고 지방의 이것저것을 물어도 보게 하였다. 그러나 만의 하나나 건졌을까? 대략을 기록할 뿐이다."
한-중 수교 10주년이 되는 2002년 7월 11일 오전에 최부의 후손, 한중 양국 학자, 현지 정부와 마을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부가 거쳐간 닝하이(寧海縣) 월계(越溪)에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 준공되었다. 2006년 2월 15일에는 전남 나주시의 재정지원과 최부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최부가 심문을 받았던 중국 도저고성(桃渚古城)에 최부정(崔溥亭)과 중한민간우호비(中韩民间友好碑)가 건립되었다.
같은 해 우시(无锡) 시혜공원(锡惠公园)에도 <최부 무석 내방 기념비(崔溥访锡纪念碑>'가 세워졌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_澎湃新問 2023-05-06
최부가 최초로 표착한 싼먼현에는 최부의 호를 딴 '금남로(錦南路; Jinnan Lu)'라는 도로가 생겨나기도 했다.
_중앙선데이, 조선의 꼿꼿 선비, 중국인 마음 뒤흔들다, 2016.8.21.
절강성 태주시 삼문현(浙江省 台州市 三门县) 정협(政协)에 접수 상정된 206건의 안건 가운데, '최부 동상 중수(重树崔溥雕像)'가 문화건설 부문 안건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정협 제10기 삼문현위원회 제4차 회의 안건 심사상황 보고(政协第十届三门县委员会第四次会议提案审查情况报告), 2025.2.20일》상에 확인된다.
동 보고서의 '중수(重樹)'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최부의 동상이 삼문현 어딘가에 세워져 있다가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초기 가까워졌던 한-중 관계가 2016년 사드 배치 문제로 급랭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최부 일행이 거쳐간 중국 내 각지에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물이 세워지고, 중앙과 지방의 방송과 언론에서 조명되고, 관련자료 전시와 특별전이 여러 박물관에서 열리는 등 2000년 초부터 햔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그에 대한 평가와 중국 내 높은 관심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최부의 기록이 당시 그가 거쳐간 각 지방과 명나라의 사회상을 상세하게 고스란히 담고 있어, 이방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객관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두 백과(百度百課)의 최부와 "표해록"에 대한 평가가 그 중금증에 대한 대답을 얼마간 풀어주고 있다.
"최부는 명나라 때 경항대운하의 전 항로를 거친 첫 번째 조선인이 되었다.
그는 귀국 후 136일 4400km에 이르는 중국에서의 경험을 한문으로 기록한 표해록를 남겼다.
책 전체는 약 5만 4천여 자로, 중국 명나라 홍치 초기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 및 시정 풍토 등의 상황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귀국 후 최부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관직을 역임했고, 연산군 3년(1497년)에는 성절사(聖節使) 질정관(質正官)으로 임명되어 북경을 방문하기도 했다. 무오사화 때 평소 김종직의 문인이라 자처한 때문에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고, 6년 후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그곳에서 참형을 당했다.
최부는 불행하게도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록한 불후의 표류기 "표해록"을 통해 530여 년이 지금까지도 한-중 양국 외교와 민간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은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