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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은 배구선수였다. TV가 귀했던 시절, 어느날 우연히 보게 된 TV에는 일본의 유도시합이 비치고 있었다. 유도를 알 리 없는 여중생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그냥 흰색 도복에 검은 띠. 근데 그건 놀라운 대비였다. 여중생은 그순간 거기에 매료되어 버린다. 자신이 하고 있던 배구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그길로 소녀는 부산 중앙동의 강무체육관이라는 곳을 찾는다. 그곳에서는 TV에서 본 것처럼 흰 도복에 검은 띠를 맨 사람들이 있었다. 유도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약간 살집이 있는 몸매에 날렵할 것 같지 않은 모습, 거기에다 어린 여학생. 관장은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리곤 한마디로 소녀의 청을 거절한다. "집에 가서 엄마 일이나 도와라."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배구선수 여중생은 쉬지 않고 도장 문을 두드렸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 소녀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매력적인 운동을 하염없이 쳐다봐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걸 배울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소녀의 눈에 대걸레로 청소를 하던 관원이 보였다. 아하, 이거라도 열심히 하면 가르쳐 줄지도 모르지. 그때부터 누가 뭐라하든 수십 일 동안 대걸레로 묵묵히 도장 청소를 했다. 너무 애처롭게 보였던 탓일까. 하루는 관장이 자신을 불렀다. 무슨 말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관장은 다짜고짜 소녀를 업어치고 메쳤다. 이리저리 내던졌다. 아팠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 없었다. 넘어지면 두말 않고 번쩍 일어났다. 몇 번 내던지기를 반복하던 관장이 마침내 입을 열였다. "뚱뚱해도 운동신경이 있구나. 한번 해봐라."
여자 유도인 서경애(61·부산여자대학 경찰경호행정과) 교수는 그렇게 탄생한다.
서경애 부산여대 경찰경호행정과 교수가 남자 사범을 상대로 누르기를 하고 있다. 서순룡 기자 seosy@kookje.co.kr· | |
서 교수를 만난 건 부산여대 유도연습실에서였다. 손녀뻘 되는 어린 여대생들을 상대로 유도 실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쩌렁쩌렁한 구령이 연습실에 울려 퍼진다. 사람좋아 보이는 후덕한 인상. 길에서 마주했다면 그냥 수수한 이웃집 아주머니로 지나쳤을 터. 저 평범한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하지만 알고 본즉 서 교수는 유도 6단의 실력자. 우리나라 여자 유도계의 최고수다. 아니, 아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용돈을 털어 도복을 사고 본격적으로 유도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1962년, 남성여중 2학년 때였죠. 그때부터 낮에는 학교에서 배구를 하고 저녁에는 2시간가량 유도를 배웠습니다. 밤에는 또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창 때라 그런지 그 당시에는 몸이 무쇠였어요. 아픈 것도 몰랐습니다."
관장의 허락은 받았지만 문제는 부모님. 반대는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운동을 마치면 도복을 집 근처의 세탁소에 맡겨 놓고 짐짓 모른 체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하루는 훈련 도중 팔을 다친다. 그제서야 부모님이 알게 됐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래도 서 교수는 유도를 계속했다.
여자가 유도를 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주위에서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처신하기도 힘들었다.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 모든 걸 혼자서 해결했다. 근력을 키우기 위한 아령과 튜브훈련, 음식조절법 등도 스스로 터득해 냈다.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어린 여자제자들을 가르치는 서 교수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동작 하나하나를 챙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머니의 자세다. "요즘은 여자 유도도 많이 보급되지 않았습니까. 어느 운동이건 처음에는 힘들죠. 그러나 자꾸 하다보면 매료됩니다."
공격자의 힘을 역이용, 업어치기로 상대를 넘기고 있는 서경애 교수. | |
제자들을 지도하던 서 교수가 수업을 돕는 남자 사범과 손을 섞는다. 도복잡기가 몇 번 이어지는가 싶더니 서 교수의 업어치기가 번개처럼 들어간다. 깔끔하다. 시원한 한판. 굳히기와 누르기는 또 어떤가. 서 교수의 억센 팔뚝에 제압당한 사범은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한다. 웬만한 장정이라도 서 교수의 손에 잡혔다가는 제대로 건사하기가 힘들 듯하다.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장정 서너 명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겠습니다라고. 가벼운 웃음과 함께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질문을 종종 받는데, 솔직히 도장이 아닌 곳에서 남에게 실력을 행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유도를 하면서 남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고요. 덩치가 크고 하니 시비를 거는 남자는 한 명도 없었어요. 대학 다닐 때는 일반 학생 친구들 하고도 잘 지냈습니다."
6단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질문이 빗나갔나 보다. 결국 서 교수의 실력은 그가 6단을 딸 때까지 수없이 치렀던 남자 유도인들과의 대련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서 교수가 유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여자 유도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 당연히 모든 연습이 남자들과 이뤄졌다.
문제는 남자 수련생들. 같이 대련을 하는 것을 저어했다. 아닌 말로 '이기면 본전, 지면 창피'한 까닭. 서 교수의 승률은 반반이었다. 이기기도 했고 지기도 했다. 서로 봐주는 것은 없었다. 상대는 여자에게 질 수 없어 있는 힘을 다했고 서 교수도 그에 맞서 이를 악물었다. 수없이 다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어릴 때는 힘이 좋아 남자들에게도 안밀렸다"고 회상한다. 간혹 남자 유도인들을 만나면 예전을 회상하며 서로 웃는다. 그때 확실하게 이길 수 있었는데라며 서로 농담도 건넨다.
남자 유도인을 당혹스럽게 한 이런 일은 서 교수가 6단을 땄던 지난 2004년에도 되풀이됐다. 당시 고단자 심사 대상에 포함된 유도인은 10명가량. 그 가운데 당연히 여자 유도인은 서 교수 혼자였다. 남자 유도인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여실히 묻어났다. 승단이 되려면 대련 때 세 판 가운데 적어도 두 판은 이겨야 한다. 근데 서 교수와 대련을 하게 되면 전략수립에 차질이 생긴다. 예순을 바라보는 여자 유도인을 이기자니 나중에 '속 좁은 남자'라고 욕먹겠고, 그렇다고 져 주면 자신들의 승단이 어려워지기 때문.
"아마 남자 유도인들의 고민이 아주 많았을 겁니다. 첫 대련에서 상대방에게 효과 하나를 얻어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유도회 측에서 더 이상 대련을 시키지 않더군요. 나이 먹은 여자 유도인을 떨어뜨리기가 딱해 아마 배려를 좀 해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승단에 필요한 필기 이론 시험 등은 모두 당당히 통과했습니다."
서 교수가 6단까지 오는 기간은 순탄치 않았다. 남자와 똑같은 훈련을 소화해 냈고 승단심사도 동일한 기준에서 치렀다. 자신의 말대로 '오직 노력만으로' 이뤄냈다. 5단에서 6단으로의 진입은 더 힘들었다. 아기를 낳고 양육하느라 몇 년간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한 기간이 있어 더욱 그랬다. 이 공백기가 없었다면 거뜬히 7, 8단은 됐을 것이란 게 서 교수의 생각이다.
여자 유도계의 선구자로서 올림픽 출전 등에 관한 아쉬움은 없을까.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인 여자 유도시합이 열린 것은 1979년. 그때 서 교수는 서른을 넘은 나이. 선수가 아닌 심판이었다. 그전까지는 여자 유도시합이 없었기 때문에 서 교수는 한 번도 공식시합에 나가보지 못했다. 여자 유도의 활성화가 좀 더 빨리 시작됐다면 그도 국제대회에 선수로 당당히 출전할 수 있었을 터다. 서 교수가 말을 슬그머니 돌렸다. 표현은 않지만 아쉽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난해에 태국에서 열린 여자유도 국제대회에 선수단을 이끌고 갔습니다. 일본 임원들이 반갑게 맞아주며 인사를 하더군요. 그때는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전국대회에서도 후배들의 인사를 많이 받습니다. '선생님이 계셔서 지금의 여자유도가 있다'라는 말을 들을 땐 눈물이 글썽거리기도 했습니다. 유도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가르치는 것은 즐거운 일
서 교수는 현재 부산여대에서 주 4시간 유도 실기수업을 한다. 경찰경호행정과의 특성상 여학생이라도 무도는 필수다. 서 교수가 대학강단에 서기는 1970년대 말 부산여전(부산여대의 전신)에서 시간강사로 교양체육을 가르친 뒤 20여 년 만이다. 지난 2006년 첫 강의를 한 이래 그해 열다섯 명의 초단을 배출했고 이듬해에는 열여섯 명의 유단자를 만들었다. 그냥 소박하게 호신술 강의 정도를 기대하던 학교 측이 깜짝 놀랄 만한 성과였다.
서 교수는 대학에서 가정학과를 나왔다. 유도 장학생으로 동아대에 들어갔지만 원하던 체육학은 전공하지 못했다. 당시 자신을 대학진학으로 이끈 총장이 여자가 유도는 하더라도 시집 제대로 가려면 가정학과가 낫다고 권유한 때문이다.
"근데 이게 대학을 졸업하니 '반쪽 인생'인 거예요. 유도계 쪽에서는 체육계통 학과를 나오지 않았다고 눈치를 주고, 가정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하려고 하니 또 전공보다는 유도장학생 출신이라며 반가워하지 않더군요. 아주 후회가 됩디다. 그래서 나중에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아예 체육학을 전공하게 됐죠."
수업 중에는 가급적 인간성을 강조한다. 유도는 누구나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그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큰 하자가 없는 한 학점도 후하다.
외모에서 받는 서 교수의 인상은 그닥 나이가 들어보이지 않는다. 자신은 그 이유를 학생들과 어울려 사는 것에서 찾는다. 젊은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자꾸 젊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서 교수는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들과 똑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그들과 비슷한 음식을 먹는다. '방가방가'라는 젊은이들의 인사말이 입에 달려 있고 들고 다니는 가방도 대학생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학생들에게 인기작전을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할 일만 하면 주위의 평가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교수라고 해서 근엄해져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도 서 교수는 아주 질색을 한다. 요즘의 세태 변화는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그걸 따라가야 그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는 지금의 이 생활에 아주 만족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나 갖는 행운이 아니잖습니까. 학교에 나오니 제 발전을 위해서도 아주 좋습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책도 보고 공부를 계속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끼리끼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부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그냥 아줌마로 있었으면 영원히 아줌마에 머물게 됐을 겁니다."
서 교수는 학교생활뿐 아니라 외부 일로도 바쁘다. 학창시절의 경험을 살려 부산어머니배구단에 몸담고 있으며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한다. 유도계를 떠날 수 없어 부산시유도회 부회장 직함도 지니고 있다. 부산시원로체육인회에도 관여를 한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서 교수는 지난 2005년 부산사회체육대상 개인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도인은 유도를 했으면 유도에서 생을 끝내야 합니다. 생명 이상으로 유도를 가꿔야죠. 저는 유도인으로 살아온 날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습니다. 아무리 헤매더라도 결국은 유도인이거든요. 앞으로도 유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남은 삶을 바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