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초장지
인조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定遠君)의 아들로 태어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집터는 현재 경희궁 자리이다. 원래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사저였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는데 곧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일제 강점기에 헐리고 그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서울고등학교는 60년대에 서울대를 약 260여명이 들어가는 명문중에 명문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명문고가 있었는데 바로 경기고등학교이다. 경기고등학교는 약 350명 정도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경기고 다음으로 서울대에 진학하는 학생 숫자가 많았던 곳이 바로 서울고등학교인 것이다. 이러한 명당터에서 인조는 태어났고 ‘왕기가 서려 있다’는 술사들의 말대로 인조는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현재는 ‘풍수가 미신이다.’, ‘말도 안되는 사술이다.’ 등등 말이 많지만 인조의 경우를 보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듯하다.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대로 왕위에 올랐고, 그 자리에 들어선 고등학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고등학교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취급을 받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조는 왕위에 올라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나,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등을 겪어야 했으며,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을 가는 안타까운 모습도 연출한다. 가정사도 안정되지 못했는데, 자신의 큰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벗지 못했으며,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게하는 비정한 모습조차 보이고 있다. 며느리 강빈도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으니, 무엇을 위해 반정을 하고 집권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보다 나은 점은 무엇이고 뛰어난 업적은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인조는 죽은 후 파주에 안장되는데,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 54-2번지가 초장지에 해당한다. 이후 이곳이 불길하다는 상소가 잇달았고 새로운 길지를 찾아 이장한 곳이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6번지에 있는 장릉이다. 그런데 인조의 초장지와 흥선대원군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래 흥선대원군의 묘는 마포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마포에 아소당이라는 별장을 짓고 이곳에 머물다 죽어서 아소당 뒤편 언덕에 안장되었다. 물론 흥선대원군이 생전에 본인의 무덤터로 낙점한 곳이다. 그런데 일제가 도시계획을 이유로 파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인조의 초장지였던 곳이다. 이후 70년대에 이곳에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다시 흥선대원군의 묘는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번지로 이장된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흥선대원군의 운명은 평탄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는 이곳에는 세종의 증손자 의인군(宜仁君)이 묻혀있다. 인조의 초장지에서 흥선대원군의 이장지로 그리고 세종의 증손자 의인군의 묘터로 사용중인 것이다.
첫댓글 역사적으로 풍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조의 경우처럼 특정 장소가 개인의 운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단순한 미신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교수님 덕분에 현장에서 직접 느낀 경험이 경이롭고
그 모든 것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니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단절되고 주름진 이곳의 월사맥 입수룡이 시사하듯 풍수는 역사와 함께 이어져 왔다는것을 재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