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물리학] 32. 불교속의 과학 - 반야와 열반
있는 그대로 보며 욕망불길 꺼진 상태
‘空’을 비추어 볼수 있는 둘 아닌 한 경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보살은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이라고 경전은 설한다. 분별지에 의해 사리판단을 하는 보통사람들은 이치를 거꾸로 보기도 하며 진리를 모르기에 쓸데없이 애를 끓이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분별지를 넘어서 반야로 비추어 보는 보살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며 진리를 알기에 열반에 든다는 뜻이다. 분별지로 보는 세계는 이중성으로 나타나며 이 이중성 중 우리는 일부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여러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열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나타나는 불교의 특징은 ‘공’사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 반야이고 공을 체득한 인간이 가지는 궁극적인 자리가 열반이라는 뜻에서 반야와 열반이 불교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불교도 믿음을 중요시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적인 신에 대한 신앙을 주장하지도 않고 신의 은총으로 얻게 되는 천당이나 극락을 최고의 은혜나 복락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반야로 비추어 견성성불하고 열반에 들 것만을 주장한다. 부처를 최고의 자리로 말하면서도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선업의 결과로 얻게 되는 극락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극락마저 선업 다하면 없어지고 말 한 때의 꿈으로 여긴다. 반야가 없으면 올바로 살필 수 없기에 전도몽상이 일어나 얻은 것도 곧 잃게 된다는 뜻에서다. 사실 너와 내가 하나로 된 자리에서 얻을 것이 따로 없다는 ‘공’사상에서 볼 때 천당과 극락도 별것이 아닐 수 밖에 없지만 지혜 즉 반야를 최고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볼 때 불교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없기도 할 것이다.
열반이란 불교적 성인이 육체적 삶을 마감할 때 보통 쓰는 말이지만 불에 탄 재와 같이 다시는 욕망의 불길이 일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서 나쁘거나 좋다거나 하는 성질의 것은 물론 아니다.
반야지가 없어 모두가 연결된 하나임을 모르고 너와 나를 나누어 나만을 위해 그릇된 욕망을 불태울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가 나를 불행케 하기에 그릇된 욕망의 불 길이 꺼진 상태가 행복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이 열반의 참된 의미다. 그래서 반야와 열반을 분리시켜 말할 수는 없다. 반야로 보는 마음의 상태가 곧 열반이요, 열반에 든 마음이 보는 지혜가 곧 반야다.
반야와 열반은 분별지로 보는 사람이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반야나 열반의 상태가 어떻다하는 것을 그려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깨달으라고만 말한다.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 천당과 극락을 그려낸다 하더라도 결국엔 전도몽상하는 마음이 추구하는 그릇된 욕망이 충족된 상태를 그려낼 뿐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낙원에 빈곤을 모르고 아프지도 않으며 죽는법도 없다는 식으로 세속적인 충족의 극치를 생각해낼 뿐이다. 그릇된 욕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찾은 그 자리 곧 ‘공’에서 볼 때 처음부터 생노병사 는 없는 것인데 무엇을 더 찾겠는가. 이중성을 뛰어넘어 정신과 물질을 따로 나누지 않는 너와 나를 나누지 않고 그저 모든 것과 하나로 된 ‘공’의 자리 거기에서 무엇을 더 찾겠는가? 찾을 것이 없다.
찾는다는 마음도 없다기에 사람들은 열반과 죽음을 비교하기도 하지만 열반이란 그런 죽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열반을 함께 비교하는 것은 분별지가 만들어낸 착각이다. 분별지로 판단하는 한 반드시 이런 종류의 착각이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 현대물리학의 양자론이다.
전도몽상을 멀리 벗어난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 반야심경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것을 얻지 못했으면 즉 깨닫지 못했으면 믿고 수행하라는 것이 경전이 뜻하는 바다. 그것은 다음에 ‘크게 신비한 주문’을 말할때 다시 한번 논하기로 하겠다.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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