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潛在
중추신경계 약물의 LD(lethal dose)/50에 관한 실험시간. 실험 대상은 흰쥐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정도의 크기에 새하얀 눈송이가 내린 듯한 털옷을 입고 있는데, 유독 그 튀어나올 듯한 눈망울은 루비가 쏟아질 듯 새빨갛고 초롱초롱하다. 피 실험 대상이 쥐라는 것에 잔뜩 혐오감을 가졌던 여학생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작고 귀여운 녀석들의 앙증맞은 자태에 매료되어 버렸다. 액세서리로 치장을 하듯 어깨 위에 올려놓기도, 상의 포켓에 넣기도 했다. 심지어는 남학생의 뒷덜미 속으로 집어넣는 짓궂은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다섯 조로 나뉘어 실험은 시작되었고, 약물의 투여단위는 미리 계산된 최소 치사량과 최대 치사량 사이를 열 개로 나누었다. 각 단위별로 스무 마리의 쥐가 할당되었다. 실험이 끝난 뒤에 살아남은 쥐는 250마리 정도였고, 예비로 준비했던 것들을 포함하니 삼백 마리를 상회했다. 약물을 투여받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놈들은 본능적인 생존의지에 의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놈, 일정한 패턴의 행동만 반복하고 있는 놈, 광기 어린 눈으로 다른 쥐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놈…. 하찮은 미물이지만 엄습해오는 죽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듯,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모습은 비장함을 느끼게 했다.
교수님은 남은 흰쥐들을 모두 폐사하라고 했다.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되었다. 실험 중에는 무수히 죽어가는 쥐들을 보면서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연민의 감정이 그제야 들게 된 것에 스스로 놀랐다. 실험에 사용되지 않은 쥐들만이라도 잘 키웠다가 다음 실험 때에 쓰면 안 되겠냐는 나의 억지 의견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애초에 실험용으로 일정한 기간과 체중으로 키워진 그놈들은 실험을 통해 살아남아도, 요행히 실험 대상이 되지 않아도, 실험이 끝남과 함께 그들의 운명은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삼백 마리가 넘는 쥐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 난감했다. 실험을 통해 죽은 것은 그렇다 치고 생명을 직접 죽인다는 것, 그것도 한두 마리도 아닌 그 엄청난 수의 생명을 내 손으로 직접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개수대에 물을 가득 받아, 이미 약물을 투여받고 사경을 헤매는 다수의 쥐들을 그 속에 쏟아부었다. 조금이라도 인연을 맺었던 녀석들의 숨통을 직접 끊을만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쥐들은 30여 분이 지나도 단 한 마리도 익사하지 않았다. 억지로 익사시키기 위해 널따란 판자를 가져다가 수면 위로 떠오른 생쥐들의 머리를 물밑으로 눌러 가라앉혔다. 제법 시간이 지나 이제는 죽었겠지 하고 판을 들어내 보니, 이미 반쯤은 약물에 절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것들이 경이롭게도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생존본능은 때로 상상을 초월하는 초자연 현상을 낳는다고 하더니….
갑자기 등 뒤로 격노한 교수님의 호통이 들려왔다. 생명을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죽일 수밖에 없어 죽일지라도 죽임에도 격이 있다고 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일지라도 적어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의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배려라며 몇 가지 방법을 알려 주셨다. 생쥐의 목덜미를 잡고 메스나 실험용 가위로 경동맥을 자른 뒤 흐르는 물에 피를 흘려보낸다. 흔히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할 때,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자른 뒤 체온과 비슷한 물에 담그면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면서 잠이 들듯 죽게 되는데, 그 순간 극락을 맛본다고 한다.
그마저도 역겨운 피비린내와 함께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길다고 느껴지면, 목뼈를 부러뜨려 글자 그대로 절명시키는 방법도 있다. 꼭 익사시키기를 원한다면, 큰 주사기로 쥐의 복강에 공기를 주입하여 풍선처럼 만든 뒤, 물에 넣으면 공기가 든 배는 위로 떠오르게 되고, 머리와 몸뚱이는 거꾸로 뒤집혀 곧바로 물을 먹고 익사하게 된단다.
하지만 그 모든 방법들이 내게는 무척 힘들어 보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두고 나는 무엇을 주저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살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아니면 내 안에 잠재된 인간의 원초적 선善 때문인가. 그런 주저함 속에서 진행되는 어설픈 가위질이 쥐를 더한층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목덜미를 잡은 나의 손끝으로 격렬한 저항이 전해져왔다. ‘찌-익, 찌-익.’ 죽음을 재촉하는 발악인지, 삶을 구걸하는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생존을 위한 날카로운 절규.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금속성 파열음. 그 소리는 내 안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악마성을 불러일으키는 신호가 되었다.
나의 메스용 칼날이 쥐의 목덜미 사이로 깊숙이 꽂혔다. 그렇다. 최대한의 부드러움으로 가능한 한 가장 급소인 곳을 찾아 부담 없이 꽂았다. 이후, 무자비한 살육이 무감각하게 무한정 진행되었다. 목살이 잘려지고 뼈가 가위에 걸리는 소리가 들린다. ‘뚜둑’. 나도 모르게 힘을 가하자 목뼈가 잘려나가면서 쥐의 목덜미가 힘없이 뒤로 젖혀진다. 잘려나간 경동맥에서 뿜어지는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대가리가 이탈된 상황에서도 몸뚱이는 여전히 내 두 손가락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 진행되었고 심장의 펌프질은 계속되었다. 이윽고 사지가 뻣뻣해지면서 쥐의 몸뚱이는 물먹은 걸레처럼 늘어진다.
어느덧 내 육신은 폭력에 대한 죄책감이 무디어져갔고 내 감각은 살육에 대한 쾌감이 일기 시작한다. 섬뜩하게만 느껴지던 가위의 금속성이며 뼈가 부딪히는 소리는 짜릿한 전율을 몰아왔고, 흩뿌려지는 시뻘건 피의 분출은 흩날리는 꽃잎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손끝에 와닿는 저항의 힘이 강해질수록 내 손은 거칠어만 갔고, 비릿한 피의 냄새는 월경하는 여인의 냄새처럼 자극적으로 되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살육의 향연이 끝났다. 희푸른 실험실의 불빛 아래 하얀 실험복은 붉은 피의 흩뿌림에 흠뻑 젖어 있었고, 나의 동공은 죽은 쥐들의 눈동자나 마찬가지로 초점을 잃어 있었다. 개수대 안에는 핏물에 젖어 범벅이 된 대가리와 몸뚱이가 거의 분리되기 전의 흰 시체더미로 쌓여있었고, 그 옆에는 기름 위에 떠오른 익은 도넛처럼 시체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도 나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 어떤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술용 고무장갑을 끼고 죽은 쥐들을 덥석덥석 잡아 자루에 쑤셔 박았다. 싸늘함, 물커덩 거림에도 나는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느낌이 없었다.
망나니가 단칼에 신수이처身首異處하는 것은 죽는 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일 터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어찌 인간적인 자책과 갈등이 없었을까. 그것을 죽이고 잠재된 악의 화신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나름의 어떤 의식이 있어야만 했으리라. 영화에서 보면 그들은 사형수의 목을 치기 전 술을 마시며 기괴한 춤사위를 놓고 있었다. 자신을 위하고 망자를 위한 예식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과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죄인을 자신이 목숨을 끊어야 하는 인간적인 망설임과 자책을 떨쳐버리고 일순간이나마 잠재된 마성을 끌어내기 위한 자기최면의 행위이지는 않았을까?
캠퍼스 건물 뒤, 양지바른 곳에 흰쥐의 주검 더미를 묻어주고는 후문의 흙길을 터벅거리며 걸어 나왔다. 과연 진정한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생명을 빼앗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연민이라는 굴레 속을 벗어나지 못해 생명을 욕되게 했던 여린 내 마음이 나의 본 모습일까? 아니면 냉정하고 단호하게 살생을 받아들이면서 무감각하게 향연을 즐기던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내 두 어깨 위에 내리는 붉은 노을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