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단원으로서 1451년 연촌이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어떤 일을 했는지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전주최씨 연촌공파 후손이라면 연촌과 관련하여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구체적으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두 가지 의문이 있다.
첫째는 집집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가르쳐오기를 “연촌공은 사육신보다 훌륭하신 분이시다.”라고 했지만 정작 어째서 연촌이 사육신보다 훌륭하다는 것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나 또한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들었고 “연촌공이 사육신보다 훌륭한 분이라면 당연히 교과서에 나올 터인데 사육신은 교과서에 나오지만 연촌은 왜 나오지 않는가?”의심을 하기도 했었다.
둘째는 연촌 묘소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주덕산에 있고, 아내 평양조씨 묘소는 전남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척동에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중랑장공파 종회장을 지내고 돌아가신 봉사공(경립)파 24세 최관호씨께서 오래 전에 나에게 “영암에서 운구하여 왔는가? 아니면 이장을 한 것인가?”하고 질문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공부가 부족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연촌은 1451년(문종 1) 10월 29일 은퇴 상소를 윤허 받고 11월 08일 한강변 송별연에서 많은 저명인사가 참석하여 글을 지어 주어 <연촌유사>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연촌은 은퇴 3년 4개월 후 1455년(단종 3) 4월 5일 돌아가셨다. 은퇴 당시 나이가 이미 68세이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영암에서 돌아가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묘소는 주덕산에 있으므로 최관호씨 생각에는 400리 먼 길을 운구해 왔던지, 아니면 영암에 장사지낸 다음 전주로 이장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지만 부인 평양조씨는 왜 운구를 해 오거나 이장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연촌은 영암으로 은퇴한지 3년 4개월 만에 돌아가셨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영암에 있어야할 것 같은 묘소는 왜 주덕산에 있는 것일까?
오늘 여수는 그에 관하여 명쾌한 답을 드리겠다.
<제연촌선생유사후(題烟村先生遺事後)>박세채(朴世采, 1631~1695)
무릇 선비는 지극한 덕을 통해서만 세상에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간혹 그 사람이 어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어떤 이유에서 어질다는 평가를 받는지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夫士有至德範世而民或知其賢不知其所以爲賢
연촌공파 일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연촌은 매우 위대하신 분이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정작 연촌의 업적이 무엇이냐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이유는 바로 박세채가 말하는 것처럼 연촌의 업적이 숨겨져 있어서 보통사람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연촌이 어떤 일을 했다고 적혀 있지 않을 뿐, 연촌이 은퇴한 이후에 취한 행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을 수록한 문헌이 매우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소론의 영수로서 우의정, 좌의정을 두루 거친 이른바 반남박씨 명문가 출신인데, 1683년(숙종 9)에 지은 <제연촌선생유사후>에서
<제연촌선생유사후(題烟村先生遺事後)>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선생은 직제학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하셨는데 문종 2년 벼슬을 사양하며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난 후 얼마 오래지 않아서 나라에 불행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뜻밖의 사건에 휘말려 피해를 보았다.
先生仕至直提學乃於文宗二年乞退而歸未幾國家多故人皆橫罹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 1657~1723)는 대제학, 대사헌, 예조판서, 판돈녕부사 등 고위 관료를 역임한 사람인데, 1714년(숙종 40) 지은 <녹동서원기>에서
<녹동서원기(鹿洞書院記)> 송상기(宋相琦, 1657~1723)
존심양성의 이치를 깊이 있게 성찰하여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으로, 그 가득 찬 깊이가 매우 정밀하고 또 적절하였기 때문인 즉, 그 뒤에 나타난 결과가 비록 어떤 사람은 살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죽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간에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온갖 변화를 일으킨 것에 불과할 뿐이다.
以是存養省察致知之功若是其崇邃精切則其後所値雖或否泰相乘酬酢萬變而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조선 후기 유명한 문인화가로 좌의정 이경억의 손자,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등을 지낸 이인엽의 아들인데 문집 <두타초>에 수록된 기행문 <남유록>에서
<남유록(南遊錄)> 이하곤(李夏坤, 1677~1724)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나라에 변고가 많았는데 선생만이 홀로 초연하게 물외에 물러나 있으면서 세상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였으니 실로 대단히 고상하고 명철한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辛未癸酉之際國家多故先生獨超然物外不罹世網實有大雅明哲之智
나와(懶窩) 기언정(奇彦鼎, 1716~?)은 유명한 성리학자 기대승의 후손으로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는데 1774년 지은 <연촌최선생화상기>에서
<연촌최선생화상기(題烟村先生畵像記)> 기언정(奇彦鼎, 1716~?)
무괴한 사람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통하여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년 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생육신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도 있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연촌 최 선생이다.
無愧於殺身之忠千載之下尙以生六臣稱之而起敬者其一烟村崔先生
기언정은 <연촌유사>에 수록된 <존양루 차운(存養樓次韻)>을 지은 기건(奇虔) 후손인데 기건 또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연촌을 생육신이라고 적은 기록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연촌은 생육신이 아니다.
생육신은 병자사화 이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세조 조정에 반대한 여섯 명의 신하를 말하는데 연촌은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생육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행실을 증명할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관란은 단종이 죽자 토굴 속에 들어가 삼년상을 치렀고, 이맹전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청맹과니 행세를 했으며, 조려는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는데, 오직 후손들이 그렇게 주장할 뿐 증거가 없다.
생육신 조려(趙旅)의 문집 <어계집(漁溪集)>에 남기제(南紀濟)가 지은 <아아록(我我綠)>을 인용한 글 <병자사화>에서
<병자사화(丙子士禍)> 어계집(漁溪集)
연촌 최덕지는 역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세상 사람들이 사육신에 비교하였다.
崔煙村德之亦棄官歸鄕世人比之六臣
설하거사(雪下居士) 남기제(南紀濟)는 노론계 학자이다.
유광천(柳匡天, 1732~1799)은 사간, 승지 등을 역임하였는데 1774년 지은 <연촌최선생영정중모후>에서
<연촌최선생영정중모후(題烟村先生影幀重模後)> 유광천(柳匡天, 1732~1799)
내가 생각하기에 사육신의 충성스런 죽음은 매우 슬픈 일이며 또 오랜 세월을 두고 영원토록 어두움 속에서 그 빛이 찬란하게 빛나서 태양과 밝기를 다툰다고 평가할 만하지만 만약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그 비밀을 미리 알아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초연하게 살아간 것으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람이 당시에 여섯 명이 있었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연촌 선생이시다.
余嘗悲六臣之死千古幽䆓光爭烈日而乃若早掛東門之冠超然於世禍者當其時有六人爲其一卽烟村先生也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로 유명한 완산(完山)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연려실기술> 중 <단종조 고사 본말, 정난에 죽은 여러 신하>에서
<단종조고사본말> 이긍익(李肯翊)
1453년(단종 1)에 나라에 사고가 많았으니, 공이 그 이전에 스스로 물러간 것은 참으로 하늘의 비밀을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기를 밝은 지혜와 바른 학문과 높은 절개를 세상에 견줄 데가 없다 하였다.
癸酉年間國家多故公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稱明智正學高節無比
이와 같이 수많은 후대 석학들은 연촌을 사육신, 생육신과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연촌공의 행적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학 교수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 중에는 연촌이 실제 업적에 비하여 높은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