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나는 이시를 이렇게 읽었다)
시적 리저렉션(resurrection)-생의 관조
이 령
<들어가는 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인불백일호(人不百日好) 라던가! 겨우내 움 추렸던 만물이 기력의 습생을 꿈꾸며 화락화락 꽃차례로 앞 다투어 피었다가 금세 지고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이다. 이처럼 자연의 순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듯하다.
봄이 경이로운 것은 비단 꽃의 외양이 아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새로움을 선사하는 불굴의 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개화는 지난 계절의 낙화가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도 자연의 순리처럼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옳고 그름도 개인의 지혜 범주 내에서 가치판단이 바뀌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감개를 놓치거나 무심하게 살아가기 쉽다. 주어진 생의 현장으로 달려 가야하는 마음의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연륜이라는 것이 그저 주어지지 않듯 사람이 깊어간다는 것은 무수한 시련을 딛고 견딤으로써 우뚝 새로워지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지난 계절에 실린 작품들을 숙독하며 생을 관조하며 견딤의 미학을 일구어 새로움으로 시적 리저렉션(resurrection)을 제시하는 세편의 작품을 골라 다시 읽었다.
꽃 먼저 내는 나무는 죽음의 편이다
꽃눈이 열릴 때부터
햇빛의 방향을 서쪽에 맞춰 놓고
가장 예쁜 색으로 접시마다 상을 차린다
제단에 오른 것들은
바람의 말을 잘 듣고
한도 없는 웃음을 가져
봄의 중앙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된다
쓰디쓴 울음은 어디에 감추는지
다가가면
제 몸으로 품어 그늘이 깊은 바닥
거기 어디쯤
꿈으로 돌아가는 잠의 예약이 싱싱하다
먹이 쪽으로 눈이 먼저 날아가는 벌처럼
제수는 뜨고 지나가는 길
몇몇 후회와 만족이 함께 사는 한 철
늦은 끄트머리에
아직 떠나지 못한 꽃송이 목이 아프다
제물은 시작부터 환생을 꿈 꾸었던가
꽃은 지고 싶어 활짝 핀다
-「꽃 제단」, 강우현, 우리詩 2월호
‘쓰디쓴 울음’을 감추고 해마다 ‘제 몸으로 품어 그늘이 깊은 바닥 거기 어디쯤 꿈으로 돌아가는 잠의 예약’을 지켜내고 ‘제단에 오른 것들은 바람의 말을 잘 듣고 한도 없는 웃음을 가져 봄의 중앙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살’인 꽃, 제단이 엄숙하고 깊다.
이 시의 객관적 상관물로써 ‘꽃’은 주관의 객관성을 담보하면서 독자의 감동을 추동한다. 그것은 개화이전에 이미 낙화의 의미를 깨달은 시인이 생을 바라보는 관조의 천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물, 현상들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그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따라서 없어진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고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는 현상이다. 죽음은 죽음 자체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닌 반드시 태어남이라는 반연(攀緣)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일반인에게 있어선 필사(必死)지만 깨달은 자에겐 불사(不死)라고 했던가?
‘꽃은 지고 싶어 활짝 핀다’ 는 시인의 사유가 개화 너머 낙화의 순간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감정이입, 대조적 자연, 객관화를 통한 정서의 투영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완결성이 높은 작품으로 읽힌다.
연필로 ‘이별’이라고 쓰고
지우개로 문지르면 지우개도 아픈지
하얀 몸 까맣게 태우며
‘이별’을 돌돌 감고 쓰러지네
책상 위 지우개 똥
거룩한 성자의 이름도
화려한 스타의 이름도
억만장자 이름도 돌돌 말아 흩어져 있네
몸 문질러 지워낸 자리
하얗게 비워지네
내가 누군가의 허물을 돌돌 말아
지워내고 남은 지우개 똥이라도 좋겠네
-지우개 똥, 남대희, 우리詩 2월호
‘몸 문질러 지워낸 자리 하얗게 비워진’ 지우개 똥은 시인의 사유가 집약된 객관적 상관물이다.
‘몸 문질러 지워낸 자리 하얗게 비워지네’ 거룩한 성자의 이름도 화려한 스타의 이름도 억만장자의 이름도 ‘허물’이라 규정한다. ‘내가 누군가의 허물을 돌돌 말아 지워내고 남은 지우개 똥이라도 좋겠네’ 지우개 똥이라는 시상의 촉발을 통해 생에 대한 시인의 상념, 생각을 드러내며 독자에게 생의 가치기준을 제시하며 환기를 선사하고 있다.
지우개 똥이라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상관물을 빌어 시인자신의 회감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하던 많은 ‘허물’들에 대한 반성을 유발하고 있다.
근심하지 않는 곳에
근심이 무성해지고
그리워하지 않는 곳에
그리움 무성해진다
산골짜기는
토끼를 잃어버려
토끼풀로 무성해지고
나는 너를 잃어버려
너로 무성해졌다
茂盛해지는 일은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잃어버린 것에서 비롯된다
無盛에서 비롯된다
-무성해지는 일은, 허향숙, 우리詩 2월호
이 시의 주제의식을 집약한 ‘茂盛해지는 일은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 잃어버린 것에서 비롯된다 無盛에서 비롯된다’는 진술이 인상적이다. ‘산골짜기는 토끼를 잃어버려 토끼풀로 무성해지고 나는 너를 잃어버려 너로 무성해졌다’는 시인의 경험적 고백이 설득력 있게 선(先)전개되었기에 앞선 진술의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
시인의 전언처럼 불안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과잉에서 오는 것 일지도 모른다. 과잉을 동경하고 쫒아가는 삶은 더 큰 결핍과 소외를 남긴다. 결국 과잉은 허상이기에 넘칠수록 공허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유는 과잉이 허상임을 알아버린 시인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 일 테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빌 2:7-8)의 말씀처럼 과잉이 아니라 결핍을 지향하는 ‘케노시스’적 인생관이 피력된 작품이다.
(마무리 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등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맥락에서 논의되어 온 리저렉션(resurrection)은 부활을 의미한다.
부활이란 사후 새롭거나 변형된 상태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로 구원과 밀접한 기독교 신학적 개념이든 환생과 밀접한 힌두교적인 개념이든 깨달음을 얻어서 환생의 순환을 끊고자 하는 불교적 개념이든 부활은 전생을 통해 후생을 새롭게 예비하고자 하는 갱신의 의지와 공통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개념일 것이다.
이상 세편의 시는 시를 통해 지난한 생의 좌절과 극복의지를 세워 새로운 깨달음을 제시하고 희망을 추동하고 있다. 시적 리저렉션, 시인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시를 쓰는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