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234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頌)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頌)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강설(江雪,
차가운 강물 위에 내리는 눈)
유종원(柳宗元) 선사
千山鳥飛絶 천산조비절
萬逕人踪滅 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 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 독조한강설
수 천개의 산(山, 온 산)에는
새(鳥)의 자취(날개짓) 끊기고
만 길(逕, 길이란 모든 길)에는
사람들 발자취 흔적 다 사라졌네
외로운 배(舟) 위에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눈 내리는 겨울 강에서
저홀로 낚시를 하네.
"
* 경(逕) :
길 경, 지름길 徑(경)과
통하는 글자이며
* 종(蹤) :
발자취 종 또는 흔적
* 사(蓑) :
도롱이 사, 도롱이는 짚으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雨衣)을 말한다.
천산(千山)과
만경(萬逕)이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숫자(數) 개념이 아닌
많은 수를 형용한 것이다.
폭설(暴雪)이 내린
산하에 새(鳥)도 날지 않고
오가는 사람도 없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삿갓에 도롱이를 두른 노인이
작은 배를 타고서
낚시를 한다.
한 폭의
동양화(東洋畵)를
떠오르게 하는
한 편의 글이
시중유화(詩中有畫)를
그려내었다.
이러한
정경(情景, 시인의 정한과
풍경에 묘사)도 뛰어나지만
문장(文章) 속에서
끊기고 소멸(消滅)되었다는
일구(一句)의 마지막 구
《절(絶)》자(字)와
이구(二句)의
마지막 구 《멸(滅)》자(字)
두 글자에 주목하면
시인(詩人)의
현재마음(心經)을
읽을 수 있다.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를
지은 사람(作者)은
유자후(柳子厚)라고
불리던 유종원(柳宗元)으로
중국
당(唐) 나라 시대의
문장가(聞章家)이며
시인(詩人)이다.
당면한 시대의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혁신적(革新的)인
정치 집단(政治集團)에
참여(參與)했다가
실패(失敗)하여
지방(地方)을 전전하며
울분을 달랬다.
그래서
공허(空虛)한 세상(世上事)을
등(背) 지고
폭설(暴雪, 폭정)에 의한
끝없는
정적(政敵 정치적 대적자에서
정적(靜寂 고요함))의 세계로
침잠(沈潛)하려는
의지(意志)가 구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유종원(柳宗元)이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를
지은(作) 곳은
소상팔경
(瀟湘八景)으로 알려진
강(江) 상류의
영주(永州)라는 곳이라 한다.
본의(本意)는 아니지만
지방(地方)으로 좌천되었어도
이겨내고
이렇듯
대단한 명문장(名文章)을
남겼다.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자(字)는
자후(子厚)이며
당송 8대가
(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사람(人物)으로
산서성 운성시에서
태어난 하동(河東) 사람이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유종원(柳宗元)을
《유하동(柳河東)》이라고도
부르며 말하였다.
가까이로는
당(唐) 고종(高宗) 때의
재상인 유석(柳奭)의
후손으로
멀리는
서초(西楚) 황제
의제(義帝)의 후예이다.
진사 시험을 거쳐
33세에 상서예부원외랑이
되었다.
그 해 정월(1월)
당 나라 덕종이 죽자
순종이 즉위하고
유우석 등과 함께 왕숙문,
왕비 등의 정치개혁운동에
가담했다.
그 정치개혁운동은
환관이나 그들을 이용하는
귀족 세력(勢力)을 누르고
쇄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개혁운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8월에
순종 재위에 수반되어
개혁파는 모두 물러나고
유종원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는 중앙 정치(수도)에
돌아오지 못하고
43세 때에는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겨졌으며
47세로
그 곳 유주(柳州)에서
사망했다.
유종원(柳宗元,
773~819)은 봉건사회 구조를
의문시한 합리주의자였다.
《봉건론(封建論)》
이라는 제목의 글은 유명하다.
합리주의 정신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자
우화(遇話) 성격을 띠는
기법을 사용한 산문(散文)을
즐겨 썼다.
유종원(柳宗元)의 글은
한유(韓愈)의 글에서
보는 듯한 원리론에서 부터
서술을 진행하는
이론상 장점은 없으나
세상이나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를
주제로 한 비판정신을
늘 내포한다.
지방관리로 좌천된 이후
산수(山水)를
소제, 제재(題材)로 하는
시 문장(詩文章)을 지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시인(詩人,
문장가)으로서는
왕유, 맹호연, 위응물과 함께
《왕· 맹· 위· 유》라고
칭해졌다.
참고적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는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여덟 명(8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는 다음과 같다.
당(唐) 나라 시대(2人)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宋) 나라 시대(6人)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이며
위에 기록한
여덟 사람 가운데
소순(蘇洵)
소동파(蘇東坡, 소식)
소철(蘇轍)은
부자(父子 아버지와 아들)
형제(兄弟 형아우) 사이이며
묶어서
삼소(三蘇)라고 말하며
이름하여 부른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