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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8: 1-7
이 일 후에
모세는 요셉이 병상에 있는 부친을 위문하고(1-2), 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은 일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1. 본문 1-2절은
"①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②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입니다.
모세는 야곱의 마지막 생애를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명심해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 조상들의 아버지로 삼으신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에 두고 교회 장차 상태에 대한 예언자 임무를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이미 부여된 임무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자신들의 집안 일을 정리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게 은혜가 계승될 것이라는 내용의 언약을 맺은 바 있는 이 거룩한 사람이 취한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를 상세하게 다루기 전에 모세가 암시하는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요셉이 부친 병환 소식을 듣고 곧장 그를 뵈러 나섰다는 점입니다.
둘째 야곱이 그의 도착 소식을 전해 듣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연약하고 후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요셉이 자기 부친을 그처럼 간절하게 뵙고자 하며 그처럼 신속하게 자기 효성을 발휘하려 한 이유는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을 더 큰 특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자기 자식들을 데려온 것은 마치 그들을 그들이 태어난 나라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그들의 원 뭉치에 되돌려 놓는 행동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인들에게서 버림을 받지 않고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취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교회의 거룩한 몸의 일부가 될 수만 있다면 모든 영화와 재물보다는 그들이 그러한 비난을 받는 편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의 앞에서 일어나면서 그에게 어울리는 경의를 표하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의 손에서 받은 친절 때문입니다. 동시에 야곱은 전에 자기 자식들에게 고취시켰던 예언 임무를 성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부족의 우두머리로 세우는 것이 그의 자식들에게 괴롭거나 불쾌하게 여겨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께 받은 자기 마지막 임무에 최선을 다합니다.
2. 본문 3-4절은
"③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④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내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입니다.
1) 본문 3절은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입니다.
(1) 이 거룩한 조상이 품고 있는 의도는 자기 자식을 애굽 재물과 영화로부터 끌어내어 그가 당분간 헤어져 있던 거룩한 조상에게 재 연합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탁월성이나 현재 부요함이나 자기 능력을 두고 교만하게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총리가 된 그 앞에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3-).
이렇게 입양(入養) 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제시될 경우 그것이 우리 온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귀하고 값비싼 모든 것에 대한 온갖 욕망을 소멸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요셉도 더 없이 고귀한 위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탁월한 고귀함이 자기 이름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후손에게 대를 이어가는 것을 내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충분한 세습재산을 물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그 아들들로 하여금 이 왕국의 귀족이 되도록 만드는 일 역시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러한 유혹에 빠질 뿐 아니라 거기에 완전히 매혹되고 만다는 점은 여러 가지 예가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마지막 소망의 빛이 남아있기만 해도 당장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며 하늘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우리라는 점을 체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단 몇 모금 술이 우리 육신을 취하게 할 정도라면 온 그릇을 다 마셔버리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노릇이겠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기 후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그 환상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세상 갖가지 유혹으로 얽어매서 우리를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을 명심하도록 하십시다.
그 목적이란 영생이라는 측량할 수 없는 보화와 비교할 때 육신이 달갑게 여기려 하는 모든 것이 징그럽게 보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요셉은 그 희미한 환상을 그처럼 귀중하게 여긴 나머지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서 지금도 애굽을 망각하고 기꺼이 교회로와 천대 받는 양 무리에게로 건너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그 왕국 문을 열어제치고 말할 수 없이 상냥하게 우리를 자신에게 초청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요셉과 똑같은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우매는 얼마나 수치스러우며 우리 무감각은 얼마나 흉측하며 우리 배은망덕은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이 되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이 거룩한 야곱이 그의 아들을 끌려는 목적으로 헛된 상상을 아무렇게나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안전하게 의지해도 좋은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을 그 앞에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할 때만 제 기초를 가지며 이것만이 신앙이 그 어떠한 계략에 의해서든 흔들거리거나 전복되는 것을 방지하기에 충분한 믿음의 견고한 버팀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우리를 이런 저런 유혹을 통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려 할 때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거기에 숨겨진 복을 확실히 의지하는 가운데 지금 육신이 매만지며 바라보는 것을 혐오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요셉이 그 땅을 열망하는 가운데 그의 마음이 애굽 왕국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2) 특별히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복을 허락하여' 라는 단어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쁘게 여기사 자기 보호아래 두심으로써 행복하게 하실 경우에서 보는 이 세상의 행복한 생활의 결과나 표현을 두고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이 자신을 복 받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자기에게 약속된 은혜를 받아 들인 이후로 그것의 결과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4절은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내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입니다.
(1)이어지는 문장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는 앞 문장의 설명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통해서 통합된 민족이 일어날 것으로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이 민족을 이루는 13 지파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 민족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후손을 온 세상에 흩으신 다음에 모든 민족으로부터 하나의 교회를 모으시는 먼 훗날 이루어질 그 위대함에 대한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이 그 옛날에 성취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보다 더 위대한 것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처럼 많은 숫자로 불어나고 인구가 많은 13부족이 열두 족장으로부터 생기게 되었을 때 야곱은 이미 하나의 통합된 민족으로 생성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이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 분산되며 여러 민족이 한 교회로 통합되는 그때부터 이 번식은 그 성취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더 없이 귀한 이 표적을 비록 그것이 육신적인 눈으로는 깊이 가려 있다해도 그처럼 귀중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를 오랫동안 보류상태에 두셨던지라 이 영감이 망령을 부린 것으로 말하는 속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 사실 오늘날 요셉처럼 당장 손에 잡히는 쾌락의 향유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선언에 굴복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확신을 의지하는 가운데 모든 시험을 극복했듯이 이제는 그의 아들 곧 그의 신앙의 참 후예인 요셉이 여호와의 말씀을 귀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믿는 약속을 비록 그것이 꿈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가 즐기던 애굽의 모든 부요보다 더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계대가, 교회의 계대가 이렇게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여기 있어서 이런 내용으로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 특별히 본문 4절은 큰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 표현의 의미를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새롭게 되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의 영구적인 상속자들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올람) 이라는 히브리어는 과거에 족장들에게 그림자로 보여진 은혜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간의 끝까지 연장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구절은 영원을 두고 사용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옛날 백성에게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도입되는 변혁기까지요 이제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그의 백성에게 위임하신 만큼 그 기업에 대한 보다 더 충족한 결실은 우리의 소유입니다.
3. 본문 5-6절은
"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⑥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 하리라"입니다.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한 사람이면서도 두 부족장이 되는 특권을 부여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이 그들의 삼촌들과 동등한 권리를 계승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둘이 제일 가는 상속자라는 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변입니까?
이 노쇠한 영감이 그의 손주들에게 그가 나그네로서 방황했으며 이제는 거기서 떠나 유랑민이 된 그 땅의 6분의 1을 왕족의 세습 재산으로 할당하다니 어찌된 노릇입니까?
그 누군가가 들으면 야곱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 수중에 없는 것을 누구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은 다들 아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가상적인 권리증서에 따라서 그 땅 주인으로 세워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그 땅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수여자인 야곱조차 자기가 애써 판 우물의 물을 마시지 못할 정도였으며 거기서 마침내 기근 때문에 추방될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조상들이 그 땅에 정착하면서 그것을 소유하기보다는 여호와의 입술을 더 의지하는 것을 택하는 가운데 얼마나 확고하게 그 분의 말씀을 신앙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망명객으로서 죽어가고 있는 처지이면서도 애굽 통치자를 불러 그의 영광된 자리에서 떠나서 망명의 길을 출발하여 마침내 행복하게 되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아버지를 결코 자기 공상을 내밴지 않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합니다.
때문에 아직까지 손에 잡힌 소유처럼 명백하게 되어본 일이 없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제공되고 있는 이 지배권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요셉의 다른 아들들을 이 두 형제들의 가족으로 여길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신에게 입양하는 두 손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입양하도록 지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4. 본문 7절은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입니다.
1) 야곱이 자기 아내 라헬의 죽음과 매장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요셉의 어머니의 이름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자극제가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야곱의 모든 자식들이 수리아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앞서 우리가 다룬 바 있는 역사 곧 그들의 부친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의 명령과 보호아래 자기와 함께 아내들을 데려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통하게 안다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인들이 자기들의 부친을 떠나 먼 나라로 여행하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 모범은 그들의 자식들로 하여금 애굽을 작별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가나안 땅을 소유하도록 준비를 갖추는데 있어서 적잖은 자극제가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2) 지금까지 말씀을 종합하고 마치겠습니다.
늙은 선지자 야곱은 자기에게 명명된 임무를 최종적으로 완수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선지자의 음성을 하늘의 음성으로 듣고 받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시대의 교회를 하나로 묶어두고 그 후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 중에 일으켜 질 영광스런 하나님의 교회를 내다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 후손들이 애굽인으로 살게 하지 않고 가나안 인으로 살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땅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 시민으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창 48: 8-16
이스라엘이
모세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대면한 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8-11절은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 까지 보이셨도다" 입니다.
야곱이 자기 상속자들을 부르기 전에 그들의 어린 것들에 대해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도치법'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대답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는 점, 곧 태의 열매는 우연히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선물로 여겨야 한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은 사실 우리 모두가 쉽게 내 뱉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신들의 후손이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들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대다수는 갈수록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배은망덕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결과를 식별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의도를 간략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엄숙한 상징을 개입시켜서 그것으로 입양을 비준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손자들에게 손을 얹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가 그들을 자기 아들로 삼았으며 따라서 "한 사람"인 요셉을 '두 족장'으로 세웠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어 가는 부친이나 조부가 그들의 후손들에게 번영을 기원하는 양식에 따르는 사인(私人)으로서 소원이 아니라 후에 실제 사건으로 입증되었듯이 하나님의 권위가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이 자기 가까이 오도록 명령하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영예를 수여하려는 뜻에서였는데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것의 시여자(施輿者)로 임명받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요셉대로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있습니다.
2. 본문 12-13절은
"(12)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입니다.
모세는 그가 앞에서 한 마디로 언급했던 점을 여기서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들들을 자기 무릎에서 자기 부친의 무릎 앞에 앉혀 놓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축복을 받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일반적인 풍습에 따라서 그의 손자들을 껴안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해설자(the interpreter of God)였던 만큼 자기에게 자기 보관된 그 복을 그들에게 전가하려 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땅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그들에게 그의 자식들과 동일한 몫을 할당하고 있지만 그가 자기 두 손을 얹는데는 더 귀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교회의 두 족장이 되어 하나님의 영적 교회에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3. 본문 14절은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를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 맞겨 얹었더라" 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서 그냥 보기만 해서는 누가 장자인지 식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고의적으로 자기 손을 어긋 맞겨 얹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가 "자기 손을 일부러 움직였다" 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무렇게나 손을 내민 가운데 이 아이 저 아이를 더듬어 찾다보니 손을 엇갈리게 얹은 것이 아니라 판단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의도적으로 동생 되는 에브라임에게 그의 오른 손을 얹고 장자인 므낫세에게 그의 왼손을 얹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이 행동의 지도자가 되셔서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을 밝게 비추사 그로 하여금 가장 선명한 시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이 상징적인 행동의 성격을 읽게 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4. 본문 15절 상반은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여가 자기에게 위임된 것은 그가 효과적으로 그의 손자들을 축복하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자신을 추켜세우지 않고 오로지 기원으로 그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는 이 축복의 적법한 시행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그것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그것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과 목사들에 대한 공통 법칙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천상의 은혜의 증인으로 부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영적 의사의 시여에 대한 책임을 위임받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조시켜 볼 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자기 안에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흐리게 하지 않으려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는 법을 익히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을 임명하시는 것은 자기 능력을 훼손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이 어느 면에서든 하나님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보려 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됩니다.
야곱의 말에서 우리는 먼저 그가 하나님을 부르되 그분 앞에서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이 살았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르는 것은 축복이 그들과 맺은 언약에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조상들이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지만 이 약속은 후손이 신앙으로 그 약속을 깨닫는 가운데 그 약속이 생생한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유효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 상속권을 야곱에게까지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자기로 하여금 은혜에 대한 적법한 상속자가 되게 한 조상들의 신앙을 공연히 또는 무분별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신들과 후손들에 대한 그 큰 영예를 획득했거나 그들 스스로 탁월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저 복들을 신앙에 의해서 날인하고 재가 하심으로서 그것들이 그치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5. 본문 15절 하반은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자기 마음을 돌아보며 그가 어릴 때부터 줄곧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했다는 점을 실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조상들의 믿음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 지식을 자기가 선언하는 축복의 바탕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 체험에서 확증한 바를 덧붙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텅 빈 말만의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생에 걸쳐서 그 열매를 맛본 바 있는 그러한 축복을 두고 말하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태양을 두루 비취시며 신자나 불신자를 한 가지로 먹여 살리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신자들에게만 자기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특별히 깨닫게 해주시는 만큼 야곱이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보호를 받아 왔다는 점을 자기 신앙에 대한 확증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잘한 일입니다.
불신자들 역시 하나님의 관용에 따라서 실컷 배불리 먹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토리 나무에서 도토리가 자기들에게 떨어져도 땅에 주둥이를 쳐 박고 있는 돼지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복은 우리에 대한 부성애에 대한 보증이요 상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여받고 있는 신앙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선한 것을 약속된 은혜의 증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호와께서 얼마나 참되고 신실하게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아버지 노릇을 해 오셨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본보기와 같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는 모든 복을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우리 신앙을 확증하는 여러 가지 버팀 돌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최선의 방법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뒤에 경험적인 지식이 덧붙여집니다.
여기서 이 거룩한 사람의 탁월한 감사가 돋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숱한 고통에 휩싸여 거의 헤어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른적이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계속적인 선하심을 송축하고 있다는 점은 그에게 큰 영예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희귀하고 경이로운 능력에 의해서 숱한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숱한 질고에 휩쓸리지 않고 그 큰 장애물을 극복하고 신앙의 날개를 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향하여 날아갈 뿐 아니라 그처럼 칙칙한 흑암 속에서도 동일한 선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그 은혜로 되어진 고상하고 담대한 마음의 표적입니다.
6. 본문 16절 상반은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말하는 이 천사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그분에게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듯이 바로 그분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일반적인 천사로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을 축복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과 신분을 그대로 대행하고 있는 만큼 그가 말하는 천사는 일반 천사들보다 더 우월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보자시라는 점을 생각할 때 천사(Angel)라는 칭호가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옛 백성의 여정(旅程)의 지도자요 안내자였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고전10:4).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우리의 육신을 입고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 주는 고리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공식적으로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가리켜 천사(The Angel)로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조상들의 신앙은 항상 그리스도의 장차 임무에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바로 이 천사였던 것은 그 때도 이미 그리스도가 성도들이 중보자인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하는 뜻에서 자기 광채를 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항상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중보자 없이는 아무런 연락도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천사의 형태로 나타나셨지만 그가 참으로 '인간'이 되셨던 방법으로 '천사'가 되려고 '천사들이 성품을 취하신 것이 아니었다' 는(히2:16) 사도의 이야기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들도 인간의 몸을 입은 적이 있지만 그들이 그것 때문에 인간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를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하고 구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특수한 임무라는 점인 만큼 이 은혜를 신성 모독적인 망각 속에 파묻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신실한 자들이 자기 관리에 위임되어 있으며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듯이(요17:12) 이 은혜는 옛날 율법 시대의 성도들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더욱 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은혜가 우리 마음 속에서 더욱 성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올바른 찬양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그것의 자극을 받아 우리가 우리의 최선의 보호자의수호를 추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일인 것은 우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위험을 생각해 볼 대 단 하루도 수천의 사망에서 구원받지 않고 지나치는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것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그리스도의 아버지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7. 본문 16절 하반은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입니다.
1) 이것이 앞에서 언급된 입양의 특징입니다.
야곱은 자기 이름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이 족장의 대열에 끼이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 이 구절에는 야곱의 권속으로 취급받는다는 이외에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사4:1).
곧 아내는 자기가 복종하는 머리 곧 남편으로부터 이름을 따오는 셈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기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로마 카톨릭의 무지는 그만큼 더 터무니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야곱은 자기가 죽은 뒤에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기원(祈願)의 대상이 되는(to be invoked) 것을 원했다는 식으로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평범한 의도대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족장들의 반열에 끼어 이 거룩한 민족의 두 부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의 대상이 되다니, 이 무슨 소리입니까?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수호신을 고안해 놓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마치 그 자격이 없는 것처럼 제쳐놓고 있는데 이것 역시 기막힌 노릇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야수적인 무감각상태를 통해서 자기 이름에 대한 신성 모독적인 훼손을 복수해 오셨습니다.
2) 야곱이 그들이 '번식되게 하소서' 라고 덧붙이는 점 역시 동일한 약속과 관련됩니다.
요약하면 여호와께서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에게서 완성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창 48: 17-22
요셉이
모세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사실을 계속해서 기록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아버지가 허락지 않습니다.
야곱은 나이 많지만 하나님의 인도대로 축복권을 사용한 것이 확실합니다.
비록 육체는 쇠약하였으나 영력(靈力)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침상머리에서 경배한 일이 의미심장하게 기록되었습니다(47:31, 히11:21).
1. 본문 17-18절은
"(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입니다.
야곱이 왼팔을 장자 머리에 얹자 요셉은 실수인 것처럼 바로 잡고자 했습니다.
요셉의 생각에는 그 잘못이 침침한 시력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부친은 하나님의 영을 자신의 은밀한 안내자로 모신 가운데 자기 본성은 장자에게 수여하고 싶은 이 명예로운 직위를 동생에게 양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복을 전달하는 직무를 자의(自意)로 무모하게 취하지 않았듯이 그가 무엇이든지 자기 뜻에 따라서 시도한다는 것은 그에게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시행한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그에게 하달되었다는 점은 사건 자체가 명백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타고난 본성에 비춰 볼 때 장자였던 므낫세가 둘째 자리로 처지는 것을 잘못으로 생각했지만 이 감정은 신앙 및 예언자적 직무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자기 부친이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자로서 결코 하찮은 일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비준하신 것을 이 땅에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그가 알고 있지 않았던들 그는 어린 자식들을 잘못 껴안는 것을 그냥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통적인 자연 순서에 얽어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수차에 걸쳐서 의도적으로 자연법칙을 변경시키는 가운데 그가 값없이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것은 온전히 자기 뜻의 결과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각자가 당연히 받을 것을 주신다면 그의 은총의 분배에 있어서 일정한 법칙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부담 없이 자기 좋을 대로 은사를 수여하십니다.
특별히 그분께서는 아무도 육신을 가지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본인들에게는 자격이 없는 자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자기 무상(無償)의 자비를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그가 에브라임을 일반 관습으로 볼 때 형 므낫세 보다 추켜세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에브라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장점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하찮게 여기고 그것을 불순하게 외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자기 자유에 따라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동생에게 이 영예를 수여하는 것은 자신이 인간 공로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에게 좋을 대로 자유롭게 자기 은사를 분배하신다는 점을 입증하시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자유는 모든 종류의 선(善)에까지 확대되지만 그것은 패망한 집단 속에서 그분이 적합하게 여기는 자들을 자신에게 예정하신 첫 입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때문에 우리 본분은 하나님 전체 권력을 하나도 다치지 말고 모두 그분께 돌리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육신적인 생각이 여기에 반기를 제기할 경우 하나님의 경이로운 처사를 곰곰이 생각할 때 스스로를 눈먼 자로 여기는 가운데 모든 차이점의 원인을 오로지 '하나님께' 돌리는 자처럼 현명한 자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겠습니다.
야곱의 눈 때문에 얼핏보기에는 아무렇게 생각 없이 팔을 엇갈려 얹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에 일치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육신의 생각으로 볼 때 너무도 예리할 정도로 사물을 캐는 그의 아들 요셉에 비해서 야곱은 훨씬 더 똑똑한 시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그들의 행위를 내다보고 이뤄진 것으로 보는 미친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신앙의 기초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모두에게 공통적인 입양은 값없는 은사(恩賜)였거나 빚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빚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값없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가운데 그분의 선하심을 들춰내 보여 주고 있는 성경귀절에 의해서 그 애매성이 제거되고 있습니다.
이제 아무도 첫 자리가 공로에 따라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게 수여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기쁨이 되는데 따라서 무상으로 주어졌다는 점을 모를 사람이 없을 줄 압니다.
손 위치를 두고 거기에 십자가 신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하는 것은 터무니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른손과 왼손의 엇갈림을 통해서 의도하신 것은 습관적인 자연 질서에 대한 변화를 암시하는 것 뿐 이었습니다.
2. 본문 19-20절은
"(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 보다 앞세웠더라"입니다.
야곱은 두 아이들 중에 누가 더 값어치가 있는가 하는 점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과 각자에게 작정하신 것과 후에 일어날 것을 선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다른 이유를 찾지 않고 다만 에브라임의 수가 므낫세 보다 월등하게 더 많게 될 것이라는 한가지 말로써 만족합니다.
사실 우리의 위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뜻하고 계신 바를 명백하게 드러내시기 전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경륜 속에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동시에 므낫세에게 그의 몫으로 만족하라는 명령 속에는 죄악스런 경쟁이 금지됩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 구원으로 부름을 받고 있다고 가르칩니다(롬8:29).
그리고 선택의 제일가는 근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하신 뜻이라는 점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양에 대한 다른 원인을 찾으려 몸부림치는 자들의 짓은 메마르고 밑 빠진 샘을 파는 것처럼 아예 미친 짓이라는 것입니다.
덧붙여지고 있는 축도 형식은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점을 더 자세하게 확증합니다.
곧 므낫세가 자기 동생에게 그가 받을 바 그 이상의 것이 허락된 것을 보고 질투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양자(兩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천거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선언되고 있는 이 복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고 하는 의미와 동등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감사를 표할 근거를 제공할 정도로 요셉의 두 아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은혜가 두드러진 것입니다.
3. 본문 21절 상반은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그가 지금까지 줄곧 말한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모든 야곱의 자식들, 특별히 요셉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을 영원한 거처로 확정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가나안 땅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단순한 확증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죽음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가 결코 인간의 생활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뜻에서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 짧고 순간적인 인생은 지나가지만 끝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죽고 난 뒤에도 흥성할 것이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야곱의 자식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노인을 자기 언약에 대한 당대의 보관자로 정하셨다는 환상 이외의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들의 신앙이 자기 죽음 때문에 동요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적시(適時)에 경고함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이 임무를 최대한으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육신의 수명에 따라서 갈 길을 다 간 다음에는 죽게 되는 유한한 인간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자기 말씀을 전달하지만 자기 음성은 그들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가 죽은 다음에도 교회가 자기에게 위임되었던 가르침에 전념하기를 바란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벧후1:15).
그러므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란 말씀은 만고에 남아야 할 신앙 언사입니다.
(1) 야곱은 하나님 약속을 믿기에 자기는 죽어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약속(15:12-21)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니 만큼 자기는 죽어도 그것은 이루어지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50:24 참조).
4. 본문 21절 하반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입니다.
야곱이 자신과 조상들이 항상 나그네로 방황했던 땅에 대한 주도권을 자신과 조상들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소망을 불러 일으키는 가운데 겨우 자기 무덤 하나밖에 받지 못한 땅을 담대하게 그리고 은총에 따라서 자기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것을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그의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 본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도록 하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느낌에 지배를 받고만 있을 경우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그리고 확고하게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머리를 들어 저 멀리 재쳐져 있는 것들을 굳게 붙잡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5. 본문 22절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도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입니다.
1) 야곱은 요셉의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뜻에서 그의 몫보다 한 분깃을 더 할당합니다.
혹자는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통해서 그를 이중의 상속자로 삼았기에 그에게는 나머지 보다 한 몫을 더 주었다는 식으로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야곱은 일정한 영토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전에 세겜으로 불리던 수가 지역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로써 모든 반론을 제거하고 있는 셈입니다(요4:5).
또 여호수아서 25장 32절에 그것이 요셉의 아들들의 소유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부분'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세켐)이라는 단어 속에는 그 지역의 고유 명칭에 대한 암시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앞에서 언급되고 있으며(수33:19) 또 앞에 나온 여호수아서에 기록되고 있듯이 그가 돈주고 산 땅을 왜 그의 칼과 활로 얻은 것으로 말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그가 천막을 치려고 산 땅은 아주 적은 부분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여기서 훨씬 더 많은 지역을 두고 언급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그의 아들 요셉에게 은 백량에 해당하는 그의 천막 친 자리 뿐 아니라 수가성에 속하는 벌판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잔혹하고 사악하게 살해된 판에 그가 그것을 칼로 얻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역시 남습니다.
부당한 전쟁을 통해서 아니 아무런 전쟁도 치르지 않고 더 없이 잔인한 배신을 통해서 얻어진 것을 어떻게 정부의 권리에 의한 것으로 불 수 있겠습니까?
제롬은 이것을 풍자적으로 그 땅이 돈에 의해서 얻어졌지만 이 돈이 힘이나 정의로 통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시일전기(時日前記)로 봅니다.
곧 야곱이 장차 이 당의 취득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배척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너무 억지 같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더 타당한 해석을 취합니다.
첫째로 야곱은 불법적인 정복자였을 뿐 아니라 학살 만행 이후 단 한치의 땅도 얻지 못한 강도와 같은 두 자식, 시므온과 레위에 의해서 결코 아무것도 취한 바 없다는 점을 증거 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얻기는커녕 자기들의 부친으로 하여금 도망하게 했으며 기적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도주마저 불가능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렇기는 하지만 야곱은 그들에게서 그들의 헛된 명칭을 빼앗는 것으로 이 승리의 권리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용하신 것으로 말함으로써 자신 있게 양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그들의 사악을 중요했으며 다음 장에서도 비난할 것이지만 그들이 자기 온 집안 식구들을 무장시킨 셈이었으므로 그들은 자기 지휘 아래 싸운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세겜 시민들을 살려 두고자 했으나 이것을 그는 성사시킬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그래도 그가 그들의 파멸로 텅비고 황폐하게 된 이 땅을 자기 것으로 할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생각하시고 살인자들을 살려두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2) 이제 말씀을 종합하고 마치겠습니다.
(1) 야곱은 인생 일생을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자기 본성에 메여 역사하지 않고 주의 영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집중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전통적이고 자연스런 순서에 얽어매려는 오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2) 야곱은 선택의 제일원인을 이렇게 하나님의 값없는 선하신 뜻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양이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깊은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3) 야곱은 자기 사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와 함께 계실 것임으로 하나님의 언약, 곧 진리가 보전되고 확산될 것이라는 점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가정과 교회의 갱신이 이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