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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받은 승리
성경본문 : 에스더 4: 13-17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대로 다 행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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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는 부림절(Purim)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던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고 오히려 원수들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원과 승리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금도 이 부림절을 지킵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아달 월,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 2월과 3월 사이에 지키는데 대중적인 축제입니다. 부림절이 되면 이스라엘 국민 모두가 어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즐기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보냅니다.
저희 나라가 내일, 7월 1일을 월드컵 성공을 축하하는 공휴일로 정했는데 국민 모두의 축제라는 점에서 부림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이 부림절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삼일절이 되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부림절에는 에스더서 전체를 낭송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몰살하려던 음모를 꾸미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에스더서 9장 16절을 보면 최소한 칠만오천 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큰 승리입니다.
이 큰 승리는 끝에 가서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큰 위기를 만났는데 그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극복하여 할 때 이 승리는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 월드 컵 경기를 보면 대부분 전반적으로 우세한 팀이 결국 점수를 얻어 승리를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변이 많았다고 하지만 경기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이변이 없었습니다. 이길 팀이 이기고 질 팀이 졌습니다.
전반전에서 잘 한 팀은 승리가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스더서는 1장과 2장은 발단과 진행, 3장은 위기, 오늘 본문인 4장에서 믿음으로 승리가 약속되고 5장, 6장, 7장에서 승리로 가는 여러 단계를 밟아 드디어 8장, 9장, 10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믿음으로 이기는 교회"인데 에스더 당시 에스더, 모르드개, 그리고 유다인들은 믿음으로 승리를 약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한 해의 중간인 지금, 우리도 믿음으로 승리를 약속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연말에 믿음으로 이겼다는 승전가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승리를 약속 받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합니까?
본문은 세 가지 믿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내가 안 하면 하나님은 다른 것을 들어 쓰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승리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14절 앞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은 유다인을 멸망시키지 않는다. 유다인은 택함 받은 백성인데 멸망당하는 것을 왜
방관하시겠느냐? 유다인은 지금 포로생활을 하고 있고 더구나 하만의 음모로 몰살 직전의 위기에 놓여 있지만 반드시 놓임과 구원을 얻는다' 하는 믿음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에스더야 네가 유다인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라. 왕에게 나아가서 동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에4:8) 모르드개는 이렇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처음에는 이 부탁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모르드개에게 '궁중의 법도에 임금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나가면 죽습니다. 다만 임금이 금 규를 내밀어야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입니다.' 이렇게 회신합니다.
'나는 그 위험한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왕비로서 궁중의 법도를 지키며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완곡한 거절입니다.
여기에 대한 모르드개의 책망 겸 가르침이 지금 말씀 드린 14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 또는 다른 것을 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바른 말을 해야 하는데, 전도를 해야 하는데, 찬양을 해야 하는데, 잠잠하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돌을 들어 쓰기까지 하십니다.
모압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해서 발람을 불러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깨우치는 일에 나귀를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습니까? 그 사명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고, 나귀가 하고 심지어는 돌이 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빛으로 살라는 사명, 소금으로 살라는 사명, 경건하게 살라는 사명, 전도하라는 사명을 공통으로 받았습니다.
그 위에 개인적으로 받은 개별적인 사명, 특별한 사명이 있습니다. '너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하는 사명, '너는 이 일을 해라' 하는 사명, 이런 사명들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위험하더라도, 힘들 것 같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안 될 것 같더라도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십니다. 성서적인 표현으로는 이것을 '촛대를 옮긴다'라고도 합니다.
단순히 옮기기만 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집을 벗는 것이 되어서 편해져서 좋습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그렇습니다.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사명을 회피하는 사람,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민족을 하나님은 벌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말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만 바로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사명을 받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시지 바랍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 출전 명령을 받은 선수들, 출전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참 잘 싸웠습니다. 이탈리아와의 연장전, 스페인과의 연장전, 그 다음에 별로 쉬지 못하고 다시 독일과의 경기, '아이쿠! 나 힘들어 못 뛰겠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다른 선수를 내 보내주십시오!' 하지 않고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그 모습이 전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출전 명령을 받지 못한 선수와 같습니다. 저는 지금 '사명을 받지 못하는 것은'이라고 하지 않고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 일을 내게 맡기셨다. 나는 이 일을 해야 한다. 안 하면 안 된다!' 하는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해 주시고 그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둘째, "이 때를 위함이라"는 믿음을 새롭게 해야 승리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14절의 뒷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모르드개의 말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강력한 긍정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손을 쓰라고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겠소?"
이번에 압박 축구로 저희가 효과를 보았는데 이 말은 에스더를 압박하는 말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말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것 쉽지 않았지요. 에스더서 2장 7절을 보면 에스더는 부모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아입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온 민족 출신입니다. 왕비를 선택할 때 용모만을 본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왕 앞에 나갈 때 별로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족들이 몰살당하는 위기의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때를 위함이라"는 믿음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게 이런 재능 주신 것, 이 때를 위함이라'
'내게 이런 자리를 주신 것, 이 때를 위함이라'
'내게 이 물질을 주신 것, 이 때를 위함이라'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여러분은 승리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이세호(李世鎬)라는 감리교 원로장로가 계십니다. 목사의 아들인데 평생을 군인으로 보냈습니다. 주월한국군 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지요.
군인으로 있을 때 이 분의 복무지침은 "내 때에 통일을 이루겠다는 사명감"이었습니다. 그 때는 평화통일이 아니라 북진통일이 강조될 때였는데 이 말을 풀이하면 "내가 군인이 된 것은 통일의 때를 위함이라" 이렇게 됩니다.
20여 년 전에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가 창립되었을 때 크리스천 연예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기를 주신 것은 이 때 전도하기 위함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열매가 있었고 대중문화를 통한 전도라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습니다.
"목양교회에 이렇게 넓은 부지를 주시고 아직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좋은 성전을 주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라"
이런 믿음을 가질 때 이 교회는 승리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말인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집니다만 목양교회는 특별한 사명을 받은 교회라는 자각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목양교회의 특징을 말할 때 첫 번째는 "전통적인 경건에 충실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반적인 일들,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고, 교육 잘 하고,봉사 많이 하고 이런 것들을 모두 함축하는 말을 찾다가 "전통적인 경건,' 이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두 가지 특징이 더 들어갑니다. 통일과 북한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기독교문화 발전과 보급에 앞장서는 교회, 에스더에게 왕후의 자리를 주신 하나님은 이 사명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인적 자원과 여건을 저희 교회에게 주신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으면 에스더 14장 전반부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셋째,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믿음을 새롭게 할 때 승리를 약속 받을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깨우침에 에스더는 드디어 마음을 바꾸고 기도를 부탁하며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합니다. "내가 규례를 어기고서 왕에게 나아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을 전달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면 이기지 못할 이치가 없습니다. 또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한자에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 하면 죽는 법이다"라는 뜻입니다.
일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친일을 했다가 명예를 잃고 죽은 목숨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그룹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따라 행동합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각오로 흔들리지 않고 이 일을 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에스더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결사적인 기도를 뒷받침으로 하고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에스더는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이 다 모여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보통 기도가 아니라 밤낮 삼 일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유다인들도 몰살의 위기 앞에 생명을 걸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에스더도 이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왕실의 규례를 어기고 왕 앞에 나갈 일을 앞두고 생명을 걸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잘 알려진 예화가 있지요. 어느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을 냇가로 끌고 가더니 아무말하지 않고 머리를 물 속에 처박아 넣고 짓눌렀습니다. 한참 그렇게 한 다음에 청년에게 "지금 공기가 그리웠지? 그런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네!" 에스더와 유다인들은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기도를 음악에 비교해 보면 모르드개는 지휘자이고 에스더는 솔리스트이고 유다인들은 합창대가 되어 기도의 합주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기도의 합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에스더가 임금 앞에 나갔을 때 왕이 어떻게 했는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어 금 규를 내밀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5:3) 했습니다.
저희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대목을 읽습니다만 사실은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아닙니다. 정상적이라면 왕은 에스더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궁 안 뜰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이것 봐라, 전 왕후 와스디는 불러도 오지 않더니, 새 왕후는 한 술 더 떠서 부르지 않았는 데도 제멋대로 오네! 모두 왜 이 모양이야!'
그 당시 법도로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나오는 것은 불렀는데 나오지 않은 것 못지 않게 큰 죄였습니다.
왕이 부르지 않으면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은 왕의 신변보호를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였는데 나중에는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오해받기도 쉽고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에스더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 봐라. 내가 삼십 일 동안 부르지 않았더니 외로움을 못 참아서 제 마음대로 나오네! 정숙하지 못한 왕후로군!'
그리고서 먼저 왕후처럼 폐위시키거나 아니면 더 심한 조치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 정상적인 진행입니다.
그러나 일은 그 반대로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힘 때문입니다. 기도가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각오로 기도에 임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기도에 응해주십니다. 그리고 승리를 약속해 주십니다.
"미션 바라바"라는 전도영화가 있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일본인 야쿠자 가운데 한 사람이 회개를 하고 속죄의 뜻으로 큰 십자가를 매고 전도를 하면서 일본을 종단하고 한국에 와서도 십자가 행진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그 행진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실화라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야쿠자라는 말은 들었어도 야쿠자의 세계가 그토록 잔혹하고 험한 것인지는 몰랐습니다. 주인공이 그 험한 야쿠자 세계에서 빠져 나와 전도인이 되도록 한 것은 그의 아내입니다. 한국인인 아내가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야쿠자 세계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갈수록 더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이 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화가 임한다' '이 때를 위함이라'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이기게 하셨습니까?
'부르'가 변해서 부림절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르는 '제비'라는 말입니다. 하만을 중심으로 유다인들을 멸망시키려는 무리들이 '언제 그 일을 할까?' 정하기 위해서 모여서 제비를 뽑습니다. 에스더서 3장 7절을 보면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 년 첫째 달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달 째 달 곡 아달월을 얻은지라"부르를 뽑아 '아달월에 우리가 유대인을 몰살하도록 합시다' 결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유대인이 몰살당하는 날이 아니라 하만과 그 일당이 몰살당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유다인들이 이 날의 이름을 부림일이라고 했습니다.
에스더서 9장26절을 보면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몰살당하기로 된 부르가 승리의 날 부림이 되었습니다.
일본이 이차대전 말기에 여러 가지 무리한 일을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이에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평양 감옥에 가두고 심한 고문을 했습니다.
뒤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8월 18일에 이들을 모두 살해할 계획을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흘 전인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을 했고 8월 17일, 갇혀 있던 교회 지도자들은 감옥 문을 나왔습니다. 이들을 출옥성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가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북한이 어제 서해에서 어이없는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전사한 윤영하 대위, 조천형 하사, 황도현 하사, 서후원 하사, 모두 스물한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의 꽃다운 젊은이들에게 조의를 표하면 그들의 유족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실종자와 열아홉 명의 부상자들도 기억해야합니다. 대통령이 오늘 일본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방일에 앞서 이들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부상장병들을 위문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은 한쪽 손은 내밀어 햇볕정책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이것 저젓 받아들이면서 한쪽 손으로는 주먹질을 합니다. 모순된 일이지요. 북한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서해에서는 군함이 내려와 총질을 하고 동해로는 금강산 유람선이 오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김정일이 정권을 승계한 이후 점점 더 심해지는 이 모순이 결국 북한을 파국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두 주일 전에 전세기를 타고 직항로로 감격스럽게 북한을 방문했다가 아리랑 축전을 참관 안 한다고 호텔에서 꼼짝 못하고 이 일 저 일 겪으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들 가운데서 '오라고 한 놈은 누구고 오라고 해서 온 손님을 호텔에 가둬놓는 놈은 누구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중앙일보 대기자인 김영희(金永熙) 선생이 같이 갔었는데 돌아와서 쓴 기사에서 이것을 "북북갈등"이라고 했더군요. 좋은 표현입니다.
자유주의 세계는 갈등이 있으면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하지만 사회주의 세계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다듬기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식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해 주십니다. 그럴 때 2002년의 목양교회는 믿음으로 이기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내일은 덤으로 얻은 공휴일입니다. 여러분 내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하반기의 설계를 하면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부림절을 아달 월에 있는데 아달월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열두째 달, 마지막 달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달을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믿음을 새롭게 하여 지금 승리를 약속 받고 하반기는 그 승리가 실천되어나가서 연말에는 '우리는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간증을 나눌 수 있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고, 또한 목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