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자신의 심령의 고통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1절에 욥이 자신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말합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욥은 자신의 영혼이 곤비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이 괴로운 마음을 토로하겠다고 합니다. 10장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욥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2절을 봅시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욥의 신앙에 대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심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3절에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8-12절. 시 139편 13-14절) 욥이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고 하나님께 탄식을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신앙을 분명히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왜 이런 재앙이 임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왜 이런 큰 고통을 주셨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만을 욥이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알거나 하나님께서 욥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을 안다면 이 고난을 더욱 잘 극복해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가르쳐 달라는 것이 욥의 하나님을 향한 요구입니다. 이 고난의 의미만이라도 제대로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그의 심정입니다.
욥은 이 고난의 시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섰습니다.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더욱 분명히 고백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어려운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욥을 통하여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왜 이런 고난이 왔는지,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 어리저리 다니면서 어찌할 바 모르는 그런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고 우리 자신을 더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좀 더 바르게 알 수 있는 시간입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욥은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3절을 봅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악인의 꾀’는 악인의 생각, 악인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악인의 계획이 형통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기도입니다. 4절에 하나님도 사람처럼 눈이 있어서 보시느냐고 여쭙니다. 그리고 5-6절에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고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시간에 쫓기는 분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에 쫓기듯 어찌하여 자신의 허물을 찾고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 간다는 뜻입니다.
7절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악하지 않는 줄 아신다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무죄함을 알고 계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에서(주의 손이라고 함) 건지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자신을 죄인처럼 다루느냐고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8절에 주의 손으로 자신을 만드셨는데,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입니까? 9-12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는데, 그런데 왜 멸하려고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2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데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신에게 왜 이렇게 대하시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14-15절에 욥 자신이 범죄 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죄악을 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자신이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며 자신이 의로울지라도 부끄러움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욥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따지면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16절에 하나님께서 젊은 사자처럼 자신을 사냥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말하기 위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하여 17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주 공격한다고 말합니다.
욥은 지금 큰 고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좀 과격함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욥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욥은 이런 생각을 깊이 해보았을까요? 이런 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때때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시간을 우리로 하여금 그 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생각을 더 넓게 하시는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하십니다. 16장 16절에 팔십 육세가 나오고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86세 때 낳은 것을 보시고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가 99세 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있는 듯 보이는 시간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식
욥이 고통 중에서 탄식을 합니다. 그 내용이 18-22절인데 욥이 크게 좌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8절을 봅시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욥은 17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시며 자신을 향하여 진노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알고 있지 못함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왜 태어나게 하셨는가? 죽어서 나왔더라면 지금의 이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21-22절에 죽음을 ‘어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20절에 죽기 전에 잠시나마 평안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잠시라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합니다.
훗날 보면 이 욥이 받는 고난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욥 자신에게도 그러하지만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의미를 갖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면서 고난을 받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인내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것도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큰 고난으로 인하여 “왜 태어났는가?” 묻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자신이 태어난 의미라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지 않는가?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인생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 고난이 존재한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큰 고난에 처하다 보면 이런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인생의 낭비가 아닌가? 그러나 성경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낭비하는 인생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생에 고난이 있다고 해서 낭비라고 생각을 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신 목적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큰 유익을 줍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63절에 주를 경외하는 사람이요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이 큰 유익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낭비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기회를 낭비로 채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심판이 선언이 됩니다. 그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30절에 무익한 종이라고 하십니다. 아무 유익이 안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둘째로 26절에 “게으른 종”이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게으르게 보냈습니다.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얼마나 살았느냐? 얼만 가졌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짧게 살 수도 있고 다른 사람보다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전체적으로 낭비했습니다. 30년을 살았다면 그 만큼 살았다는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을 낭비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셋째로, 26절에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이란 도덕적인 개념이라기보다 관계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비뚤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삶은 인생도 낭비하고 유익도 주지 못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낭비되는 인생을 기뻐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을 헛되이 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시편 78편 33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헛되이, 무의미하게, 낭비하도록 보내게 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창조했거나 그렇게 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40절에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다고 합니다. 42절에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대적에게서 구원하신 날도 기억하지 아니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행동을 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구원하신 의미, 그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들 마음대로 행하도록 두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고난은 삶을 낭비시키는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는데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바르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http://cafe.daum.net/mokeumchurch...이남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