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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옥세현(玉世賢) - 일편단심 뜻만 위해 2. 홀로 고난받으시는 선생님 1 그 당시 평양에는 허호빈(許孝彬)이라는 여자 교주가 만든 복중교라는 교단이 있었다. 그들은 재림주님이 오시면 입을 옷을 장만하여 큰 방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퍼지자 보안서에서 교주를 구금하고 물품을 모두 압수해 갔다. 선생님께서도 그와 같은 단체라고 하여 구금되어 3개월간 복역하셨다. 2 옥중에서 허씨를 위해서 그 복중에 있는 예수 믿지 말고 재림해 올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것이 간수에게 발각되어 치아가 부러지고 피를 많이 흘리는 고통을 당하시고 나오신 후에 내가 찾아가게 된 것이다. 3 3주일쯤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 5일간 특별 금식을 하도록 명령하셔서 선생님과 여자 식구 3명이 금식을 시작했다. 나는 특별히 신령한 은혜를 받고 있었으면서도 선생님에 대해서 기도 한 번 안 해보고, 선생님은 그저 하나님으로 특별히 은혜받은 분이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의 그런 모습에 선생님께서 안타까우셨던지 손수 쓰시던 손수건을 주시며 ‘이걸 가지고 기도해 보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수건을 놓고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너의 선생은 어린 목자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4 나의 친정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재림주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신다. 거지 모양으로도 오실지 모르니까 너는 어떤 거지든지 정성으로 대하라’라고 하시면서 사람을 외형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그 말씀이 생각나서 선생님의 외형은 초라했지만 선생님이야말로 오시리라고 하신 어린 목자라고 믿게 되었다. 5 5일간 금식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반대가 시작됐다. 소식도 없이 5일간이나 금식하고 들어갔으니 반대를 받은 것도 당연했다. 6 1947년도에는 식구가 30명가량 되었다. 이들 거의가 기성교인 출신이었으니, 가정과 교회에서 모진 핍박을 받아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하루는 나의 몽시에 선생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고난을 받고 풀리신 것을 보고 달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매를 맞고 힘 없이 앉아 계셨다. 7 선생님께서 탄신 28주년을 맞이하는 날에는 식구 5~6명이 모여서 이날을 기념했고 밤에는 철야를 하였다. 내가 기도하고 있는데 양치는 목자 세 사람이 와서 선생님께 경배 드리고 나가자 별 3개가 선생님 앞에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나니 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8 그 해 봄에 선생님께서는 이모 댁에 가 계시다가 집회소에 다시 오셨다. 나는 아침에 가서 뵈었다. 선생님께서는 조금 있다가 가시겠다고 나가시다 돌아서시면서 왔던 김에 점심 먹고 가야 되겠다고 하시며 다시 들어오셔서 말씀을 하셨다. 9 집주인이 점심을 차려와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인주 씨네 부모가 들이닥쳐 ‘못된 놈 같으니라고, 우리 조카네 집에 와서 밥 먹어’ 하면서 선생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흔들며 말려도 듣지 않았다. 곁에 있던 몇몇 여자 식구들이 손을 깨물어서 떼어놓고 내쫓았다. 10 선생님께서는 큰 모욕을 당하시고도 아무 말씀 없이 계시다가 이내 돌아서서 이모 댁으로 가셨다. 그때부터 핍박이 더욱 심하여 선생님께서는 집회소에 계시지 못하고 20리쯤 떨어진 이모 댁에 가서 가끔 숨어 지내셨다. 11 선생님의 이모 댁 근처에 ‘나는 하나님의 부인이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박을룡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다. 그분이 선생님과 연결되어 무슨 하늘의 잔치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식구들에게 준비하라고 하셨다. 내가 여름 옷 한 벌을 해오고 다른 식구들은 각각 돈을 내어 음식을 장만하였다. 12 그 할머니는 큰 상 하나와 작은 상 하나를 차려 놓고서 큰 상은 하나님 상이고 작은 상은 선생님 상이니 선생님은 작은 상 앞에 앉으시라고 했다. 잔치를 끝마치고 음식을 나눠 먹는데 큰 상에 있는 음식은 자기의 열두 자녀에게 갖다주라고 해서 작은 상의 음식을 나눠먹고 헤어졌다. 13 다음 날 선생님을 뵙고 그 할머니의 소행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니까 선생님께서도 ‘그것 참 안 되겠는데’라고 하시며 씁쓸해 하셨다. 그리고 이틀 만엔가 선생님께서 그 할머니에게 이제는 내 말에 순종하고 굴복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그 할머니는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역사를 벌였다고 한다. 14 그 이튿날 박을룡 할머니가 사람을 보내어 나를 오라고 해서 가니까 ‘이제는 내 말만 듣고 나한테만 오시오. 문 선생은 속이 까맣게 되었으니 서울에 있는 김백문(金百文) 선생을 데려와야 한다’라고 역사를 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그저 가만히 계시면서 나더러만 자주 나오라고 부탁했다. 15 그 후에 그 할머니가 반대 역사를 하고 다니면서 선생님께 행패를 부려서 선생님은 한동안 피해 계셨는데 얼마 후에 미쳐버렸다. 그가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16 지승도(池承道) 씨가 교회에 들어와서 1948년 음력 3월 초하룻날에 하늘 잔치를 하자고 해서 준비하였다. 그런데 나의 몽시에 선생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가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무슨 큰일이 벌어진 줄 알고 달려가니 선생님께서 무얼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이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내려지는 것을 보고 달려왔다고 말씀드리니 바로 받았다고 하셨다. 17 선생님은 어제까지 하얀 명주 저고리를 입고 계셨는데 옷이 다 찢어졌고 얼굴을 보니까 심한 매를 맞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인주(仁珠)네 가족들이 와서 행패를 부리고 갔다고 한다. 내가 한심스러워서 말리지 않고 왜 방관만 했느냐고 문책하자 선생님께서 그러한 고난을 다 겪어야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18 그런 핍박이 있었어도 잔치 준비를 계속했다. 예복을 만들기 위해서 여자 식구 몇 명이 모여 일을 하고 있는데 20살쯤 되었을까 하는 처녀가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는 ‘여기가 특별히 예배를 보는 곳이지오’라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도 신앙을 갖고 있고 자기 모친도 신앙이 돈독하다고 자기 집안 얘기를 하였다. 19 그러더니 이제부터는 여기 와서 예배보려고 찾아왔다고 하여 우리와 여러 가지 대화를 했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오셔서 그 처녀와 신앙 토론을 하시고 내일이 주일인데 예배보러 오라고 말씀하시니까 그 처녀도 오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20 그 이튿날이 주일이었는데 아침부터 마음이 허전하고 어수선하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예감이 이상하여 일찍 집회소에 가서 있는데 형사가 찾아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어제 왔던 그 처녀는 보안서의 앞잡이였다. 우리의 모든 내막을 형사들에게 얘기했는지 제일 먼저 선생님의 방에 들어가 수색을 하고는 선생님과 김원필(金元弼) 씨, 그리고 여자 식구 20명을 보안서로 끌고 갔다. 21 주인아주머니까지 잡혀가서 집이 텅 비게 되어 할 수 없이 내가 집을 지켜야 했었다. 다음 날 형사 두 명이 나와서 가택 수색을 하면서 ‘잔치를 한다더니 노리개 등 물품을 모두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물었다. 우리가 하늘 잔치를 한다는 소문이 아마 결혼하는 것으로 와전된 모양이었다. 22 내가 그것은 헛소문이라고 하면서 사실대로 얘기를 해줬다. 그들은 다 뒤져보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가더니 사흘 후에 또 왔다. 이번에는 식구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데려오라고 해서 나까지 다섯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손을 밧줄로 묶고는 보안서로 끌고 갔다. 23 3일 동안 취조하고는 여자 식구들은 모두 내보내고 나 혼자만 남겨 두었다. 우리 집은 양반 집안이어서 봉건주의 사상이 충만하여 나는 그때까지 외간 남자와는 얘기도 못해봤고 더구나 외출은 한 적이 없었다. 24 그런데 보안서에 잡혀와서 사흘 동안이나 갇혀 있었으니 우리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더구나 남편은 평양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이름 있는 분이었으니 나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25 형사들은 나의 입에서 말을 듣겠다면서 숙직실에 가두고 어떻게 해서 거기에 나가게 됐느냐, 선생님은 어떤 분이냐 등을 질문하면서 자꾸만 자기들이 바라는 대답을 들으려고 했다. 나는 사흘 동안 금식을 하며 그들의 만행에 대항했다. 26 그러자 그들은 나를 유치장에 가두었다. 유치장에 들어가니 마음이 착잡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 집사이고, 남편은 장로인데 이렇게 영창에 들어와서, 손을 묶고 재판받으러 다니면 꼴이 뭐가 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자 창피하기 이를 데 없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27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늘길을 따르다가 당하는 이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영광이 아니겠는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형사들은 유치장에까지 들어와서 잠자지도 못하게 들볶았다. 윗방에 계시는 선생님도 자지 못하게 하였다. 28 여드렛날 저녁에 2층으로 올라오라고 해서 가니까 선생님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무엇 하러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별난 예수 믿노라고 고통을 당하느냐면서 ‘선생님은 이승만의 스파이다’라고 말했다. 29 그러면서 선생님이 북한에 올라온 저의는 첫째 이승만(李承晩)의 스파이요, 둘째 돈 많은 여자들의 돈을 빼앗으려는 것이며, 셋째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그때 북한은 공산주의자들의 천하였으니 누구든지 간첩 죄목에 걸리면 꼼짝없이 총살하는 것이 실상이었다. 30 그 말을 들으니 선생님을 금방 죽일 것만 같아서 선생님은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이걸 어떻게 하나 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니까 별안간 신령 역사가 일어나서 교도소 마룻바닥에 넘어져 데굴데굴 뒹굴기 시작했다. 형사들은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다. 31 한참 후에 나의 신령 역사가 멎으니까 다시 올라와서 내가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끝날에는 남종에게나 여종에게나 물 붓듯이 은혜를 부어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대답했다. 32 한 형사가 ‘나도 목사요, 내가 목사 생활 20년 했수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에 그런 말이 있는 것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인간이 조작해서 만든 것인데 그런 것을 믿고 있느냐’라고 힐난했다.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까 이것저것 캐물으면서 새벽 1시까지 실랑이를 벌였다. 33 아흐레째 되는 날 호출해서 다시 갔다. 어젯밤의 그 형사가 나의 조카를 잘 안다면서 다시는 그런 예수 믿지 말고 집에 가서 있으라고 하며 보내주었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변호사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34 선생님에 대한 재판이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재판받으시는 날은 법정 가득히 기성교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선생님께서 삭발을 하고 수의를 입고 나오시니까 이곳저곳에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면서 왜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느냐’라고 조롱하며 ‘저런 것은 돌멩이로 때려죽여야 한다’라고 고함을 쳤다. |
証言 玉世賢 - 「一片丹心、み旨だけのために」 2. - 独り苦難を受けられる先生 その当時、平壌には、許孝彬という女性教主がつくった腹中教という教団がありました。彼らは、再臨主が来られたときに着る服を作って準備し、大きい部屋に積んでおいたそうです。そのうわさが広まると、保安署の人が教主を拘禁し、物品をすべて押収していきました。 腹中教と同じような団体だと言われて先生も拘禁され、三か月間服役されました。獄中で許氏のために、「その腹中にいるイエスを信じずに再臨してくるイエスを信じなければならない」と紙切れに書いて送ったのですが、これが看守に発覚してしまいました。そして先生は、歯が折れ、多くの血を流す苦痛を受けられました。私は、先生が獄中から出てこられた後に、訪ねていきました。それから三週間くらい過ぎたとき、先生は五日間の特別断食をするように命令なさり、先生と女性食口三人が断食を始めました。 私は、特別に神霊的な恩恵を受けていながらも、先生に対して一度も祈祷してみたことがなく、先生はただ神様から特別に恩恵を受けたかただと考えていました。そのような私の姿を先生がもどかしく思われたのか、ご自身が使っておられたハンカチを下さり、「これを持って、祈祷してみ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して、そのハンカチを持って祈祷すると、天から「おまえの先生は、若い牧者(キリスト)である」という声が聞こえてきたのです。 私の祖母は、篤実なキリスト教信者でした。祖母は幼い私にイエス様の再臨に関してたくさんの話をしてくれました。「再臨主様は、さまざまな姿で来られる。乞食の姿で来られるかもしれないから、おまえはどのような乞食でも精誠をもって対しなさい」と言われながら、人を外見だけ見て判断してはいけないと念を押したのです。その話が思い出され、先生の外見はみすぼらしいのですが、先生こそ、来られるといわれた“若い牧者(キリスト)”であると信じるようになりました。 五日間の断食を終えて家に帰ると、そのときから本格的に反対が始まりました。連絡もなく五日間も断食してから帰ってきたのですから、反対されるのも当然でした。 一九四七年度には、食口が三十人くらいになりました。彼らはすべて既成教会出身であったので、家庭と教会からのひどい迫害を受け、目を開けて見ることのできないようなことがたくさん起きました。あるとき、先生が十字架で苦難を受けられ、解き放たれる夢を見たので、私は急いで走って先生の所に行ってみると、本当に殴られて力なく座っておられました。 先生のご聖誕二十八周年を迎える日には、食口五、六人が集まって記念し、徹夜をしました。私が祈祷しているとき、羊飼いが三人来て先生に敬礼をささげると、三つの星が先生の前に落ちたのです。それを見てから、先生に対する信仰がさらに確固たるものとなりました。 先生は叔母さんの家に行っておられてから、その年の春、再び集会所に来られました。私は朝、集会所に行って先生にお会いしました。先生は、「少しいてから行く」と言われて、出ていかれる途中で立ち止まられて、「来たついでに昼食を食べ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おっしゃり、また戻ってこられてみ言を語られました。 家の主人が昼食を準備してきたので、食事をしようとしたのですが突然、金仁珠さんの両親が急に入ってきて、「たちの悪い奴だ。私たちの甥の家に来て飯を食うのか!」と言いながら、先生の髪の毛をわしづかみにして振り回したのです。止めても言うことを聞かないので、横にいた数人の女性食口たちが手にかみついて引き離し、追い出しました。 先生はひどい侮辱を受けられながらも、何も言われずに、その後すぐに叔母さんの家に行かれました。そのときから、迫害はさらに激しくなり、先生は集会所にいらっしゃることができず、二十里くらい離れた叔母さんの家に行かれて隠れて過ごされました。 先生の叔母さんの家の近所に、自ら「私は神様の夫人だ」と言う朴ウルリョンハルモニというかたがいらっしゃいました。そのかたが「先生と連結して何か天の宴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ので、先生は食口たちに「準備し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 私は夏服を一式準備し、ほかの食口たちはそれぞれお金を出して食べ物を準備しました。そのハルモニは、大きいお膳を一つと小さいお膳を一つ準備して、「大きいお膳は神様のお膳であり、小さいお膳は先生のお膳なので、先生は小さいお膳の前にお座りください」と言いました。宴を終えてから、食べ物を分けて食べるのですが、そのハルモニは、「大きいお膳の食べ物は、自分の十二人の子供たちに持っていってあげなさい」と言い、私たちは小さいお膳の食べ物を分けて食べ、そして別れました。 次の日、先生にお会いして、「あのハルモニの行いは間違っています」とお話しすると、先生も「あれは本当に良くないのだが……」と言われて、苦々しく思われました。 そして、二日後だったでしょうか、先生はそのハルモニに「今からは私の言葉に従順に屈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たのですが、そのハルモニは先生のみ言を聞き入れずに、役事をしていたそうです。 その翌日、朴ウルリョンハルモニが人を送ってきて、私に「来なさい」と言うので、行ってみました。そうすると、「今からは私の言葉だけを聞いて、私の所にだけ来なさい。文先生は心が真っ黒になったので、ソウルにいる金百文先生を連れ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いました。その話を聞いてから先生にお話しすると、ただじっとされながら「私の所にだけ、しっかりと通いなさい」と私に言われたのです。 その後、そのハルモニは反対の役事をしながら、先生にろうぜきを働きました。先生はその間、避けておられたのですが、何日か後にそのハルモニは狂ってしまったのです。彼女は先生のみ言に従わなかったので、使命を全う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池承道さんが教会に入ってきて、一九四八年陰暦三月の初日に、天の宴をしようと準備をしました。ところが、私は夢で先生が十字架に掛かって降りられるのを見ました。“何か大変なことが起きる”と思って走っていくと、先生は、「どのような啓示を受けたのか」と尋ねられました。それで、「先生が十字架に掛かって降りられるのを見て走ってきました」とお話しすると、「それは正しく受けた」とおっしゃいました。 先生は、昨日まで白い絹のチョゴリを着ておられたのですが、服がすべて破られ、顔を見ると激しく殴られたようでした。何があったのかと家の主人のおばさんに尋ねると、「仁珠の家族たちが来てろうぜきを働いていった」と言うのです。私は情けなくなって、「なぜ止めもせずに傍観していたのですか?」と問い詰めると、「先生は、そのような苦難をすべて経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した。 そのような迫害があっても、宴の準備を続けました。礼服を作るために何人かの女性食口が集まって仕事をしていたとき、二十歳くらいの若い女性が訪ねてきました。あいさつをして、「ここが特別に礼拝をささげる所でしょうか?」と尋ねるので、「そうです」と答えると、自分も信仰を持っており、自分の母親も信仰が篤実であると、自分の家の話をしました。そして、「これからはここに来て礼拝を受けようと思って訪ねてきました」と言い、私たちといろいろな会話をしました。 しばらくして、先生が来られてその若い女性と信仰討論をされ、「明日は聖日なので礼拝を受けに来なさい」と言われると、その若い女性も「来ます」と約束して帰っていきました。 その翌日は聖日でした。朝から心がうつろで落ち着かなかったのですが、どうしてか見当がつきませんでした。おかしな予感がしたので、いち早く集会所に行ってみると、刑事が訪ねてきました。後で分かったのですが、昨日来ていた若い女性は保安署の手先でした。私たちの内幕をすべて刑事に話したのか、一番先に先生の部屋に入っていって捜索をし、先生と金元弼さん、そして女性食口二十人を保安署に連れて行きました。家の主人のおばさんまで連れて行かれてしまって、家が空っぽになり、しかたなく私が家を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次の日、刑事が二人来て家宅捜索をしながら、「宴をすると言っていたが、装飾品などはどこに置いたのか?」と聞いてきました。私たちが天の宴をするといううわさが、おそらく結婚式をすると誤って伝わっていたようでした。私は、「それは誤ったうわさである」と言い、事実を話してあげました。 彼らは、くまなく捜してみても何もないので、そのまま帰っていったのですが、三日後にまた来ました。今度は、食口の名前を呼び上げながら「連れてこい」と言って、私を含めて五人が集められました。彼らは、私たちの手をロープで縛り、保安署に連れて行ったのです。 三日間の取り調べが行われた後、女性食口は全員送り出され、私一人が残されました。私の家は、両班の家系で封建主義思想が徹底されていたため、私はそのときまで親戚以外の男性とは話してみたことも、外出したこともありませんでした。 それなのに、保安署に連れて行かれて三日間も捕まっていたのですから、私の家の中は大騒ぎになりました。さらに夫は平壌社会や教会で名前のある人だったので、私のために多くの苦痛を受けました。 刑事たちは、私の口から話を聞き出すと言いながら、私を宿直室に閉じ込め、どのようにしてそこに通うようになったのか、先生はどのようなかたなのか、ということなどを質問しながら、しきりに自分たちが望む答えを聞こうとしたのです。 私は三日間断食をして、彼らの蛮行に対抗しました。すると彼らは、私を留置場に監禁したのです。留置場に入ると心が混乱し始めました。“私は、神様を信じる教会の執事であり、夫は長老であるのに、このようにガラス窓の部屋に入り、手を縛られ、裁判を受けに行くこのざまは何なのだろうか?”と思うと、恥ずかしいことこの上なく、恨めしい思いが突然込み上げてきました。しかし一方では、“天の道に従って受けるこのような苦痛は何でもなく、かえって栄光ではないだろうか”と、自らを慰労しました。 刑事たちは留置場にまで入ってきて、眠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嫌がらせをしました。上の部屋にいらっしゃる先生にも眠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ました。 八日目の日の夜、「二階に上がってこい」と言うので行くと、先生に関する質問をして、「何のためにその人について行くのか? なぜ変なイエスを信じて苦痛を受けるのか?」と言いながら、「先生は李承晩のスパイだ」と言いました。そして、先生が北韓に上がってきたその隠された目的は、第一に李承晩のスパイであり、第二にお金持ちの女性からお金を巻き上げるためであり、第三に社会秩序を乱すためだったと言うのです。 そのときの北韓は、共産主義者たちの天下でしたので、だれでもスパイ罪に引っかかれば、なすすべもなく銃殺されるのが実情でした。 その話を聞くと、先生を今すぐに殺してしまいそうに思われました。“先生はなすすべもなく、もう死んでしまわれるのだ。どうしたらよいのだろう?”と思い、そわそわしていると突然、神霊の役事が起きて、私は刑務所の床に倒れ、ごろごろと転がり始めました。刑事たちは、私のそのような姿を見て恐ろしくなり、逃げてしまいました。 しばらくしてから、私の神霊の役事が止まったので、再び刑事たちが上がってきて、私に「なぜそのようになったのか?」と聞きました。それで、「聖書に、終わりの日には男性にも女性にもあふれるように恩恵をそそいでくださる、と書いてあるではないですか」と答えました。 すると一人の刑事が、「私も牧師であり、牧師生活を二十年した」と言いながら、「聖書にそのようなみ言があることくらいは知っている。しかし、そのようなものはすべて人間が捏造したものなのに、そんなものを信じているのか」と難詰しました。私は、あまりにもあきれて何も言わずにいたので、刑事たちはあれこれとしつこく尋ねながら、夜中の一時までけんか腰で文句を言ってきたのです。 九日目になる日、私は再び呼び出されました。昨晩の刑事が私の甥をよく知っていると言いながら、「二度とそのようなイエスを信じずに家にいなさい」と言って送り出してくれました。 私はあまりにも無念であったので、弁護士を立てて訴訟を起こしました。先生に関する裁判が新聞紙上に大きく報道され、先生が裁判を受けられる日は、法廷いっぱいに既成教会員が集まり、超満員となりました。 先生が髪をそって囚人服を着て出てこられると、あちらこちらから「『天から降りてきた』と言いながら、なぜ頭に冠をかぶっていないのか」と嘲弄し、「あのような者は、石で打ち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叫び声を上げまし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