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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시공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의 줄거리:
권위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감의 사정거리를 말씀하시다 갑자기 서기관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십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존재감, 즉 하나님 있음에 대한 느낌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말씀은 오감에 가려져 계신 하나님의 인기척입니다.
시공 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
(누가복음 20장 45절~47절)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시공 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시공 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커튼의 역할을 해서 하나님은 가려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얘들아 나 여기 있다.”라고 인기척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언급하신 이유는 그들의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말씀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연구하고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이들의 평생의 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삼아서 서기관들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타의 모범이 되기는커녕 개탄스러운 지경에 빠져있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앞선 말씀의 맥락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권위 문제와 존재감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권위란 “내가 있다”라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권위로 번역된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밖으로 나오다”라는 접두어와 “내가 있다”라는 동사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내가 있다”라고 말하며 존재감을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럴 때 내가 첫 번째로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이 바로 권위의 대상입니다. 이처럼 권위의 문제와 존재감은 핵심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편 다른 모든 대상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로는 느낄 수가 없기에 다른 모든 대상들에 비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하나님을 빛 이외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첫 번째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육체의 오감을 통한 세상 것들의 있음에 찌들어 있습니다. 세상 것들의 있음에 대하여 장아찌가 되어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예수님보다 천년 가까이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시간의 틀에서 생각하면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이 다윗보다 먼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굳이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였던 일개 청년의 상황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별명을 가진 메시아의 이름을 준 다윗 장본인보다 먼저 있었고 태초 이전에 계셨던 분이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구원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의 한계를 깨뜨리고 시간 밖으로 나가서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태초 이전의 상황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고 가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몸이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 태초 이전의 상태로 들어감으로써 삼위일체로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신으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첫 번째로 느끼는 사람은 신이 됩니다. 그리고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가는 신화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자기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본 11장에서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의 위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문제시하고 지적해오셨습니다. 그런데 권위로부터 존재감의 거리가 이야기 되고 있는 가운데 특별히 서기관들이 언급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서기관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은 임박해있었습니다. 고작 이삼일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별세의 사건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는 제자들이 서기관들처럼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서기관들과 같은 일을 할 사람들로 보시고 서기관들의 잘못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서기관들이 맡았던 말씀은 구약성경의 말씀이었고, 제자들이 맡을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이야말로 제자들이 맡아서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가르쳐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전할 때에 절대로 서기관들처럼 되어서는 안 되기에 예수님께서는 백성들 중에 특별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 대한 경계를 통해 존재감과 권위의 문제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결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은 태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 영원의 차원에 계셨고 지금도 영원의 차원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이 없는 영원함 속에 계신 분입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있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속에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인간은 태어나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개념 속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결과적으로 영원함 속에 계신 하나님이 세상에 의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있게 된 것들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리는 커튼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라는 커튼으로 가려진 상태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있다”라는 말씀을 통해 권위를 드러내시고 인기척을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인기척입니다. 말씀 자체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미를 이해하여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시공의 커튼에 의해 가려진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신 말씀이 기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담 너머에 누군가 있다는 기척이 느껴질 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 기척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고 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모든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보다 말씀이 쓰인 이유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상에게서만 있음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그러는 동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이시고 영원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내가 있다”고 기척을 내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이해하고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면 성경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기관들은 이와는 반대였습니다. 서기관들이 하는 일은 성경의 관리와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었기에 모든 말씀을 필사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양가죽을 말려서 만든 양피지나 갈대를 엮어 만든 파피루스에 성경을 필사하였고, 그것을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가 있다”고 기척을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기척을 모아놓은 말씀을 평생 연구하는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정에 있을 때 배우자나 자녀를 대면하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마음이 향해 있는 동안 배우자나 자녀는 하나님을 가리는 커튼이 됩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동안에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하나님을 가리는 커튼이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기척을 내십니다. “너는 배우자나 자녀가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오히려 그들은 있게 된 자이고 나는 있는 자이다. 유일하게 진짜 있는 자인 내가 너의 배우자와 자녀도 있게 했고 너의 문제들도 내가 있게 했다. 그러므로 나부터 있음을 느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들이 해야 했던 일은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의 기척임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있었습니다. 46절을 보면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긴 옷을 입었다는 것은 자기들이 남들과는 구분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과 잔치 자리에서 상석을 좋아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어서 47절을 보면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과부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경제력이 약하고 존재감이 미약한 계층이었습니다. 이들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삼킬 정도였으니 서기관들이 얼마나 돈의 존재감에 찌들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관리하고 가르친다는 서기관들이 가진 특권과 책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은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세상 대상들의 있음을 비대하게 느끼는 동안에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은 고사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서기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몸과 연관된 일들과 문제들에 대해서 있음을 느낍니다. 세상의 있음에 찌든 장아찌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있음은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향해 말씀을 통해 인기척을 내고 계십니다. 예수님 때의 서기관들처럼 말씀을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면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치고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선민들 또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민들 중에서 평생을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던 사람들이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느끼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합니다. 서기관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고백을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입으로는 고백해도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이 조금도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나 이론에 대해 박사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느낌의 달인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래 서기관이야말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달인들이어야 했습니다. 시공의 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으로써의 말씀을 평생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리와 이론의 박사들은 되었지만 하나님을 느끼는 달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에 대해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아무리 말하며 살아도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은 제로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율법의 내용을 외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행동을 규정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부모를 대할 때에 어떤 행동과 말이 나와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단지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동과 말이 어떻게 나와야 하는가를 인격적으로 생각하고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이 있음을 느끼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계명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들은 그저 이것만 지키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동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시공의 커튼에 가려진 태초 이전의 영원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끼라는 기척이 바로 계명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의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에 정복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있다”라고 알려주시는 기척입니다. 즉,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것은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있음을 최우선의 대상으로 느껴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정복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250만 명이나 되었으나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사람들을 이끌어서 이미 국가체제를 완비하고 있었던 가나안 민족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맡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전법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전쟁을 코앞에 둔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전법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에서 무기를 쏟아주시기라도 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여호수아의 마음에 가장 강렬하고 우선적으로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상은 무찔러야 하는 가나안 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것은 원수들이라는 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복지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비록 전쟁을 앞두고 있을지라도 적들보다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첫 번째 대상으로 느끼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을 가리는 커튼이 가나안 민족이었다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대상이 배우자일 수 있고 자녀일 수 있으며 삶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먼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우선적 있음의 대상으로 느낄 때에 여호수아는 신이 되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전쟁은 신화가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여 신이 되어야 하고 삶은 신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율법을 묵상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기척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삶의 현장보다 먼저가 되시기 위하여 말씀이라는 기척을 내셨습니다. 이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한 점으로 빨아들이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보다 먼저 있음으로 느껴지는 세상의 대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세상의 일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인기척으로써의 십계명과 613가지의 율법과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결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인기척을 내신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임을 기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내가 있는데 무엇을 더 우선적으로 느끼려고 하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말씀의 총화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늘 기억하면서 마음에서 있음을 주장하는 세상 대상들을 지워버립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로 세상 대상들의 있음에 대한 느낌 자체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식이 유지될 때에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은 분명해집니다. 평생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들도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느낌이 나를 하나님과 만나게 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속하여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은 하나님의 연합으로 발전되어 나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한 점에 모아져서 만들어진 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시공의 커튼에 가려진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시기 위한 인기척입니다. 가장 큰 소리로 내신 인기척이 바로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이나 상황이나 사건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기척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느낌을 먼저 받으며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시공의 커튼을 넘어갈 때 나는 신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됩니다.
서기관들과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한 이유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시공의 커튼 뒤에 가려진 하나님의 인기척인 십자가 사건을 언제나 들으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달인들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박사가 아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달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느낌에 찌든 장아찌가 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인기척을 느끼며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기능 자체가 완전히 묶이고 마비되고, 오직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신들이 되고 삶은 신화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