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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회색 바다 위에 떠오른 석 달의 노래 — 마키아벨리를 만나다
A. 회색 바다, 얼어붙은 항로
Aequam memento rebus in arduis servare mentem.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정한 마음을 지키기를 기억하라. — Horace, 《Odes》
독일의 킬 운하를 빠져나와 발트해의 품으로 들어섰을 때, 천추객은 바다의 이름보다 먼저 그 바다의 색을 기억하였다. 황해는 황토빛이었다. 홍해는 붉은 사막의 빛을, 흑해는 다뉴브강에서 흘러온 오래된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발트해는 달랐다. 그곳의 바다는 바다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침묵이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지고, 안개와 수평선이 서로의 얼굴을 지우며, 모든 것이 회색 하나의 빛깔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천추객은 그 바다를 마음속으로 회해(灰海), 회색 바다라 불렀다. 검지도 희지도, 빛도 어둠도 아닌 색. 어쩌면 인간의 삶도 저와 같을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젊은 날에는 모든 것을 흑과 백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바다를 오래 항해한 뒤에야, 인간의 대부분은 그 사이의 회색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회색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월 중순, 밤의 당직은 유난히 길었다. 배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브리지 안에서는 레이더의 희미한 빛만이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레이더 화면에 육지가 나타났다. 한 군데가 아니었다. 마치 배가 거대한 육지 사이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양쪽으로 길고 두꺼운 윤곽이 펼쳐져 있었다. 해도를 다시 확인하였다. 침로도 위치도 틀림없었다. 그러나 레이더는 배가 육지에 갇힌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조타수. 선장님께 위험하다고 보고하세요."
조타수를 내려보내고 곧바로 윙 브리지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순간, 콰직. 무언가가 뱃머리 아래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콰콰직. 콰직. 소리는 점점 커졌다. 달빛 아래에서 천추객은 비로소 그 정체를 보았다. 육지가 아니었다. 얼음이었다. 바다가 얼어붙어 하나의 거대한 대지가 되어 있었다. 화성호의 선수는 그 하얀 벌판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바다를 항해해 온 사람에게 바다는 늘 움직이는 것이었으나, 지금 그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배 한 척뿐이었다. 훗날 천추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날 나는 바다 위를 항해한 것이 아니라, 정지해버린 시간 위를 항해하였다.
그때 선장님이 브리지로 들어오셨다. 상황을 설명하자 선장님은 잠시 레이더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씀하셨다.
"괜찮아. 놀랄 것 없어."
그 말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하였다. 겁을 없애려는 위로도, 상황을 가볍게 보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상황은 상황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면 된다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선장님은 즉시 스웨덴 측에 연락하여 쇄빙선을 요청하였다. 화성호는 쇄빙선의 뒤를 따라 천천히 얼음길을 열고 항구로 들어갔다. 그날 천추객은 처음으로 알았다. 침착함이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보다 책임을 앞세우는 능력이라는 것을.
B. 룰레오의 태극기
Omne solum forti patria est. 용기 있는 자에게는 모든 땅이 조국이다. — Ovid, 《Fasti》
룰레오 항으로 들어서던 날, 선미 갑판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차가운 북쪽 바람이 깃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대리점 직원이 말하였다. "한국 국적선을 여기서 본 건 처음이네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다. 밤거리를 걷다가 천추객은 또 하나의 낯선 친숙함을 만났다. 태권도장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이 도복을 입고 움직이며 우리말 구령을 외치고 있었다. 낯선 북쪽 하늘 아래에서 조국의 언어가 살아 있었다. 천추객은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사람은 어디까지 멀리 떠나야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
C. 세상의 엄숙한 시험
世境難全暖 세상의 모든 곳이 따스한 것은 아니니
風鋒冷且嚴 바람은 날카롭고 엄숙하도다
人心多似凍 사람의 마음 또한 때로 얼음과 같으니
壁立試孤堅 그 냉엄한 벽 앞에서 홀로 선 힘이 시험받도다
烈火非障礙 차가움은 영혼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요
精魂鍛自堅 오히려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벼리는 불꽃이라
冷中知獨學 추위 속에서 고독은 스승이 되고
鏡裡見眞詮 거울 속에서 비로소 참된 뜻을 보게 되리라
D. 얼어붙은 뱃머리에서 마키아벨리를 만나다
Ignis aurum probat, miseria fortes viros. 불이 금을 시험하듯, 고난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 Seneca, 《De Providentia》
그날 밤, 천추객은 항구 가장자리의 단단히 굳은 얼음 위를 걸었다. 발밑에서 얼음은 낮게 신음하였다. 멀리 화성호의 불빛이 보였다. 배도 바다도 바람도 멈춘 듯하였다. 그때 회색 안개 저편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외투, 깊은 눈, 날카로운 얼굴. 그러나 그 눈에는 차가움보다, 오래 인간을 관찰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피로가 어려 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 피렌체의 정치사상가, 인간의 선함을 믿기보다 인간의 실제 모습을 바라보았던 사람.
"선생이시여."
마키아벨리가 돌아보았다. "그대는 오늘 인간의 본성을 보았는가?"
"얼음이 배를 에워싸자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추객은 그날 밤을 떠올렸다. 평소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누군가는 창백해지고, 누군가는 필요 이상으로 큰소리를 냈다. 평온할 때의 인간과 위기에 처한 인간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대는 그것을 배신이라 생각했는가?"
"처음에는 그러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미소 지었다. "그 '모르겠다'가 오늘 밤 그대가 얻은 가장 좋은 대답일세."
E. 위기는 인간을 바꾸는가
Salus populi suprema lex esto. 인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 되게 하라. — Cicero, 《De Legibus》
마키아벨리가 천천히 얼음 위를 걸었다. "사람들은 흔히 위기가 인간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네. 위기는 인간을 변화시키기보다 인간 안에 있던 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네. 평온할 때는 누구나 용감하고 충성한다 말할 수 있지만, 얼음이 뱃전을 조이고 죽음이 가까워지는 순간, 말은 사라지고 행동만 남는다네."
"그렇다면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입니까?"
마키아벨리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을 선하다고 가정하고 국가를 설계하는 것보다, 인간에게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질서를 설계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여겼네. 인간이 배은망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사랑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닐세. 사랑을 믿되, 사랑만으로 배를 운항하지 말라는 뜻일세. 선장의 임무는 선원들이 모두 용감하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선원들이 두려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배가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지." 그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이상하게 따뜻하였다.
"그렇다면 선생이 말씀하시는 질서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 놓은 약속일세. 오늘 선장이 '괜찮아, 놀랄 것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을 아는가? 평정심만이 아니네. 그 배에는 당직표가 있고, 항해 절차와 비상 절차가 있고, 각자의 역할과 명령 체계가 있었네. 선장이 위기 한가운데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평온한 날 이미 질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일세."
천추객은 그제야 알았다. 평화로운 날의 훈련은 위기의 날에 드러나는 침착함의 뿌리였다.
"좋은 날씨만을 예상하고 지은 집은 폭풍 앞에서 무너진다네. 그러나 폭풍이 올 것을 알고 지은 집은 폭풍이 와도 사람을 품지."
"그러므로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니. 사람을 믿되, 사람이 언제나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믿지는 말게."
F. 체사레 보르자와 레미로의 칼, 그리고 필연이라는 이름
Necessitas quod cogit defendit. 필연은 그것이 강요하는 바를 스스로 정당화한다. — Publilius Syrus, 《Sententiae》
"선생께서는 지나치게 냉혹한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웃었다. "그 평가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네." 그리고 한 이야기를 꺼냈다. 체사레 보르자가 로마냐 지방을 장악했을 때, 그곳은 도적과 폭력과 분열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체사레는 레미로 데 오르코를 보내 강력한 통치를 시행하게 하였다. 레미로는 잔혹했으나 혼란은 빠르게 사라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백성들은 질서를 원했지만 그 질서를 만든 사람을 증오하였다. 그러자 체사레는 레미로를 처형하여 시신을 광장에 전시하였다. 백성들은 두려워했고, 동시에 안도하였다. "나는 이것을 '잘 쓰인 잔혹함'이라 표현했네."
"잔혹함도 잘 쓸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것은 잔혹함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잔혹함을 피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면, 반복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방식이 아니라 짧고 제한된 방식으로 끝내야 한다는 뜻에 가깝네."
"그러나 그 경계는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매우 위험하지. 그래서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냉혹함보다 절제라네." 마키아벨리는 얼음 위에 지팡이 끝으로 선 하나를 그었다. "필연. 다른 길이 있었는데도 잔혹함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폭력일세. 그러나 다른 길이 모두 사라지고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결단해야 한다면, 그때의 엄격함은 전혀 다른 뜻을 갖네."
"그러나 누가 그 필연을 판단합니까?"
마키아벨리는 잠시 침묵했다. "바로 그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일세." 천추객은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자신감보다 두려움을 보았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욕망을 필연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정치가 폭정으로 변하기 때문이지." 마키아벨리는 냉혹함을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경계하는 것은 냉혹함 그 자체가 아니라 냉혹함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이었다.
G. 사자와 여우
Fraus quasi vulpeculae, vis leonis videtur. 기만은 여우에게, 힘은 사자에게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 Cicero, 《De Officiis》
"그래서 나는 군주에게 사자와 여우를 함께 가지라고 말했네. 사자는 늑대를 물리칠 수 있지만 함정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우는 함정을 알아보지만 늑대를 물리칠 힘이 부족하지. 힘만 가진 자는 함정에 빠지고, 꾀만 가진 자는 힘 앞에서 무너지네."
천추객은 문득 그날의 선장을 떠올렸다. 얼음 앞에서는 단호했으나, 쇄빙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조금도 자존심을 부리지 않았다. "선장님은 얼음 앞에서는 사자였지만, 쇄빙선 앞에서는 여우였습니다."
마키아벨리가 웃었다.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지. 그는 자기 힘의 한계를 아는 사자였네."
천추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그러나 아직 하나의 의문이 남아 있었다. "선생이시여. 그날 선장님의 냉정함이 우리 모두를 살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과 냉철함 중 어느 것이 사람을 이끄는 힘입니까?"
마키아벨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회색 바다 위로 달빛이 번졌다. "그대는 사랑과 냉철함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는군. 그것이 젊은 사람의 생각일세."
"저는 이미 젊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다고 반드시 나이든 생각을 버리는 것은 아니네." 마키아벨리도 웃었다. "참된 책임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엄격한 말을 하게 만든다네. 아이가 바다로 뛰어들려 한다면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말리겠지. 그 순간 부모의 사랑은 부드러운 손이 아니라 강한 손이 되네. 사랑이 반드시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명심하게. 사랑 없는 냉철함은 폭력이 되고, 냉철함 없는 사랑은 무책임이 되네."
천추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얼음 아래에서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H. 회색이 이르는 색
人心如寒鐵 사람의 마음은 차가운 쇠와 같아서
遇險便現形 위험을 만나면 문득 그 본모습을 드러내도다
非因危自變 위기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요
本性此時明 본디 있던 성품이 이때에야 밝혀지도다
先備勝於信 미리 대비함이 믿음보다 나으니
綱紀立昇平 기강을 세움이 태평을 이루도다
一斷除百亂 한 번의 결단으로 온갖 혼란을 없애나
用之須念情 그것을 씀에는 반드시 사람의 정을 헤아려야 하도다
천추객은 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냉철함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얼굴이군요."
마키아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군.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의 중간이라네. 허나 단순히 둘의 중간인 것만은 아니지. 회색은 검음과 흼을 모두 겪은 뒤에야 이르는 색일세."
천추객은 문득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용감한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도, 겁 많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남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도 보았다. 엄격한 사람이 가장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고, 상냥한 사람이 가장 잔인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사람은 하나의 색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인생도 그러했다.
灰海凝寒色 회색 바다는 차가운 빛으로 엉기고
氷聲破夜靑 얼음 깨지는 소리가 푸른 밤을 가르도다
船長言不亂 선장의 말씀은 흐트러짐이 없으니
一語鎭波經 한마디로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도다
隨破冰船路 쇄빙선이 낸 길을 따라가니
智謀勝勇靈 지혜와 계책이 용맹을 능가하도다
馬氏言權術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이치를 말하니
獅狐兩不冥 사자와 여우 어느 하나도 어둡지 않도다
先立紀綱固 미리 기강을 굳건히 세워두면
臨亂自安寧 어지러움이 닥쳐도 절로 평안하도다
冰炭不同器 얼음과 숯불은 한 그릇에 담기지 않으니
寬猛各分星 너그러움과 엄함은 각기 다른 별자리로다
懼愛難兩立 두려움과 사랑은 함께 서기 어려우나
民安始是聽 사람이 편안해야 비로소 참된 다스림이라
灰光非冷酷 잿빛 광채는 차갑고 매정함이 아니요
照澈萬邦形 만방의 형체를 환하게 비추도다
I. 얼음 아래 흐르는 것
천추객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선생이시여. 오늘 저는 얼어붙은 바다를 보았습니다. 얼음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게 보입니다. 얼음 아래에는 여전히 바다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성호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마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굳어버린 것처럼 보여도, 그 아래에는 여전히 두려움도 사랑도 책임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대는 나에게서 배울 것을 거의 다 배웠네. 마지막 하나가 남았네." 그는 대답 대신 천추객에게 등을 돌려 회색 안개 속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사람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먼저 그대 자신의 두려움을 다스리게."
천추객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키아벨리의 발자국이 얼음 위에 남아 있었으나, 몇 걸음 뒤부터는 안개가 그마저 지웠다.
J. 회색 바다의 마지막 가르침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 — Augustine, 《In Epistolam Ioannis ad Parthos》
천추객은 다시 배로 돌아왔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오늘 자신을 앞으로 움직인 것은 힘만이 아니라, 힘을 써야 할 때를 아는 판단과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이었다. 선장님의 "괜찮아. 놀랄 것 없어."라는 말도 이제 전혀 다르게 들렸다. 두려움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을 인정하되 두려움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것은 냉혹함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그리고 천추객은 비로소 알았다. 사랑은 언제나 따뜻한 말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사랑은 손을 잡아주는 것이고, 기다려주는 것이며,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사랑은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지금 움직여야 한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사랑은 "괜찮아. 놀랄 것 없어."라는 짧은 한마디로 나타난다. 그 말 속에는 "내가 여기 있다"라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화성호는 다시 얼음을 깨고 나아갔다. 앞에서는 쇄빙선이 길을 열었다. 뒤에서는 이미 지나온 얼음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인생도 저와 같았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뒤에서는 길이 닫힌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길은 뒤에 남아 보이지 않을 뿐, 지나왔다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날 밤 천추객은 마키아벨리를 떠나보내며 한 가지를 배웠다.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용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좋은 지도자는 인간을 천사라고도 악마라고도 믿어서는 안 된다. 다만 인간을 인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불완전함을 인정한 위에서 질서를 만들고, 책임을 지고, 필요할 때 단호해지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순간에는 도움을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참된 용기였다.
K. 석 달이 뜬 밤 — 항해는 계속된다
Per varios casus, per tot discrimina rerum tendimus. 온갖 풍파를 지나, 그토록 많은 고비를 지나, 우리는 나아간다. — Virgil, 《Aeneid》 I.204
그날 밤, 구름 사이로 달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하나였다. 잠시 후 얼음 위에 비친 달이 하나 더, 멀리 물결 위에 또 하나의 달이 생겼다. 천추객은 그 세 개의 달을 오래 바라보았다. 하늘의 달, 얼음 위의 달, 흔들리는 바다 위의 달. 어느 것이 진짜 달인가.
그는 문득 갈릴레오를, 보는 위치가 달라지면 진리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인슈타인을, 시간은 단순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제 마키아벨리를 만나 인간에 대해서도 같은 사실을 배웠다. 평온할 때의 사람과 폭풍 속의 사람, 사랑할 때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때, 권력을 가졌을 때와 잃었을 때. 그 모두가 한 인간이었다.
하늘의 달은 하나인데 보이는 달은 셋이었다. 그렇다면 인간도 하나의 존재이지만, 서 있는 자리와 처한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 여러 얼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진짜라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얼굴을 품고도 끝내 하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인지도 몰랐다.
배는 북쪽으로 나아갔다. 얼음은 갈라지고 쇄빙선의 불빛은 멀어지고, 회색 바다는 다시 밤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추객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키아벨리의 발자국도, 자신의 발자국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허전하지 않았다. 발자국은 사라져도, 걸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도 떠나고, 배도 지나가고, 얼음도 녹고, 세월도 흘러가지만,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내면에 남긴 흔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항해였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었다.
천추객은 어둠 속에서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사랑하기에 엄격할 수 있고, 책임지기에 냉철할 수 있으며, 강하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그 순간 그는 알았다. 마키아벨리가 가르친 것은 권력의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었다. 얼어붙은 바다 아래에도, 차가운 인간의 얼굴 아래에도 여전히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얼음보다 단단한 결단이 필요했으나, 그 결단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언제나 따뜻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다. 책임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천추객이 만난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약함을 보았기에 질서를, 변덕을 보았기에 제도를, 두려움을 보았기에 지도자의 결단을 말했다. 그러나 그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을 믿지 않는 질서는 쉽게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로 변한다. 그리하여 천추객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권력은 책임을 떠나서는 정당성을 얻을 수 없고, 냉철함은 사랑을 떠나서는 인간을 지킬 수 없다. 마키아벨리의 물음이 "인간은 실제로 어떠한가?"였다면, 천추객의 다음 물음은 "그런 인간을 어떻게 끝까지 인간으로 지켜낼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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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문에 수고가 많으셨으며
덕택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상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마키아벨리,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로
정치와 권력자에 대한 냉철함을 기본으로
군주론을 편 인물.
마키아벨리를 여기서 만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