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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부활의 선물을 받아 누리라. / 요 20:19-29
여러분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요? 가끔 그런 이야기를 간증식으로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처럼 문학적인 상징으로 말하면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것으로 말하면 잘못입니다. 그런 이들은 뭔가 다른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든지, 또는 심리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신약만 해도 다섯 군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 된 것은 세 번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입니다.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상태에 빠졌던 이들을,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착오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가 병들거나, 다른 이유로 숨도 쉬지 않고, 심장이 멈춰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포대에 말아 윗목에 놓아두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흔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사로도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까, 비슷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사건은, 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도, 미처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지도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꾸미지 않고,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 증언할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나 예수님의 부활이나 일방적인 선포인 셈입니다. 오늘 말씀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생긴 일입니다.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저녁에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혹시 유대인들에게 들킬까봐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틀림없이 부활하실 거라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이 그걸 말해줍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로는, 주님이 부활하셨고 자기가 만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들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으니, 믿을 수도,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모르니까 문을 단단히 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때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그날 저녁은 최고의 저녁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날은,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입니다. 그 이후로는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날이, 최고의 날인 줄 믿습니다.
19-20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자말자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은 주님이 주신 부활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책망 대신 선물을 선사하셨습니다. 평강의 선물입니다. 평강은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선물을 주시되, 당신의 필요가 아닌 제자들의 필요에 의해 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겪었던 며칠은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꿈도 희망도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절망과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평강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럼 평강은 이천년 전 제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온 인류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평강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예배에 참여한 여러분에게 주님이 평강주시기를 바랍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여러분에게 평강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 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은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비십니다.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닥쳤는데, 제자들을 걱정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다락방에서 하셨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남으로, 발도 씻지 않고 유월절 만찬에 참석했던 제자들입니다. 섬김의 정신은 실종되고,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가득해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섬김의 가치를 알려주신 후, 평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강은 경쟁심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평강을 시기심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평강은 섬김의 그릇에만 담겨집니다. 평강은 부활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부활의 첫 번째 선물인 평강을 받기 바랍니다. 남은 생애를 섬김의 삶으로 평강을 누리며 살기 바랍니다.
21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유대들이 무서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평강의 선물을 선사하신 주님은, 이어서 또 하나의 선물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명은 주님이 주신 부활의 두 번째 선물입니다. 사명을 선물로 생각합니까, 의무로만 생각합니까? 억지로라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물론 그런 점도 없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사명은 맡겨진 임무라고 풀이됐습니다. 내가 원해서 맡은 것이 아니고, 나한테 맡겨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는데, 나에게 맡겨주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특권이요 선물인 것입니다. 사명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보는 것과, 사명을 선물로 보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의무감으로 하는 것과 감사함으로 하는 것에는 차이가 납니다. 주님은 아무나에게 당신의 사명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해서 부르신 자들, 곧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마 28: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제자들에게 사명과 함께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권세입니다. 제자들을 무조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하여 보내셨습니다. 또한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대책 없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명은 부활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부활의 두 번째 선물인 사명을 각자가 발견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생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부활의 선물은 평강, 사명 외에 또 하나 있습니다.
22-23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주님이 주신 부활의 세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닌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바로 가까이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사와 이적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이 어디 있었습니까? 멀리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죽어 장사지낸 후 그들이 어디 있었습니까?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지 않았습니까? 누구보다 그런 그들을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들이 성령 받지 않으면, 평강도 누리지 못하고, 사명도 감당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부활의 세 번째 선물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행 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이 되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기억합니까? 문을 닫고 벌벌 떨던 예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고, 협박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심지어 감옥에 가두는 것도, 그들 안에 타오르는 복음의 불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성령은 부활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부활의 세 번째 선물인 성령을 사모하기 바랍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바랍니다.
24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가 돌아와서 보니까 제자들의 표정이 달랐습니다. 얼마 전까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겁먹은 표정이었는데, 얼굴 표정이 환해진 것입니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가 어리둥절해 있을 때, 제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도마는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거 같아, ‘정신 차리라’고 반사적으로 소리쳤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도마가 제자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다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만 빠졌습니다.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도마만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제자 공동체와 함께 하지 않고, 개인 플레이를 한 것입니다. 그 결과 혼자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합니다. 비록 교회 공동체가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자성의 소리를 낼 수는 있어도,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뤄 가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도구로 교회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 떠돌이 교인들이 있습니다. 어느 한 교회에 속해있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규적인 자리에 마음대로 빠지면, 언제, 무엇을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정규적인 자리란 예배의 자리를 말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빠지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들어야 할 말씀을 듣지 못하면, 의심이 고개를 들게 됩니다. 몇 주 연속해서 예배의 자리에 빠져 말씀을 듣지 못하면, 의심의 넝쿨이 영혼을 덮어버립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롬 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듣는 자리를, 말씀을 배우는 자리를, 말씀을 나누는 자리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칫 사탄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 공동체의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노립니다.
도마가 그런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뺀 모든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고,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했습니다. 제자들의 다양한 성격을 도마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10명이 입을 맞추기란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도마가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제자들의 표정이 그걸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다수결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진리는 다수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주장해도 진리는 진리이고, 한 사람만 믿어도 진리는 진리인 것입니다. 문제는 내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도마는 보다 확실히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믿기 보다는, 주님을 직접 만나서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도마의 말은 다른 제자들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꼭 눈으로 봐야 믿고, 꼭 손으로 만져 봐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만져보지 않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정확하게 볼 수도 없고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볼 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믿는 것의 상당수는,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의 대다수는, 만져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안 믿어야 할 것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의심은 마귀가 주는 병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쉴 새 없이 의심의 씨를 뿌립니다. 마귀가 할 일 없어 의심의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의 위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끝내는 불신하여 파멸로 모는 것이 의심입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을 병들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존재입니다.
마귀는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의심의 씨를 뿌립니다. 주의 동생으로 알려진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으로 소문난 분입니다. 그의 별명이 낙타무릎이면 말 다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치열한 기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믿음에 따른 행위를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고, 그 삶을 지탱해준 것은 기도였습니다. 야고보는 기도에 있어서 의심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약 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사실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도 동일합니다. 마 21: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부활의 주님이 여드레 만에 다시 오셨습니다. 이번에 주님이 제자들을 찾으신 것은 도마 때문이었습니다. 도마의 의심이 충만한 태도에,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한 번 더 오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도마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니까, 예수님이 해결하시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도, 주님이 안 오시는 것입니다. 도마는 기세등등했을 것입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주님을 봤던 제자들이 초조했을 것입니다. 여드레 만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다들 주님을 반가워하는데, 도마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의 말씀은 도마를 더 부끄럽게 했습니다. 자기가 했던 말을 주님이 그대로 재연하십니다. 분명히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도마가 받았을 충격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굳이 손의 못 자국을 볼 필요도 없었고, 창 자국이 있는지 옆구리에 손을 넣어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떤 증거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도마의 입에서 믿음의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도 안 믿어졌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데, 주님 앞에서 믿어진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시 107: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주님은 사모하는 자의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마다, 이 약속의 말씀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뒤늦게 믿음의 고백을 하는 도마에게, 주님은 진한 아쉬움을 표현하십니다. 사실 도마의 고백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어쩌면 베드로의 고백보다 더 뛰어난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보지 않고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훨씬 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흑인 인권 운동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신앙이란 계단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첫 번째 계단 위에 첫 발을 내딛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서 나아가면,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도마는 나중에 “도마복음”과 “도마행전”을 기록한 성서 작가로 유명해졌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도마는 멀리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어느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지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그때 도마에게 떨어진 선교지는 머나먼 인도였습니다. 처음에 도마는 몸이 약하다면서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설득하시자,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마는 오늘날 남인도 교회의 아버지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결코 쉽게 확신이 서고, 쉽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모든 것이 옳다고 판단하면, 무슨 일이든지 확실하게 해내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너무 쉽게, 성급하게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보다, 도마가 훨씬 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도마를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셨던 극찬에 비하면, 오히려 꾸중에 가까웠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주님이 전에 하셨던 말씀을 믿지 않아서였고, 이차적으로는 주님을 먼저 만났던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아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평강과 사명과 성령의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 하늘의 선물을 받고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세상으로 달려가 주님의 평안, 죄 용서의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사명자로 사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바통을 이어받아, 영혼구원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며,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뿐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마음에는 평강이요, 삶 속에서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며,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어,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부활하신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뀌도록 도와주셨지만, 가장 복된 사람은 직접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오늘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보지 않고서도, 믿을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부활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세 가지 선물, 곧 평강과 사명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특별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 평생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게 하옵소서. 그동안 작은 고난에도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았는지, 이제 주님의 못 자국을 바라보며, 구원과 승리의 확신 가운데,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장차 있을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제는 수동적인 고난을 이기고 승리함으로, 영광의 상처로 바꾸게 하옵소서. 더 나아가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능동적 고난을 감당하면서, 영광의 상처로 승화시키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처럼 영광의 상처로 영원히 빛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