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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편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님
1:2 수부에게 맡기신 수부도수 - 상제님께서 후천 가을천지 (곤도
수)를 음개벽도수로 여시니 그인사의 주재자가 "머릿여자(Head
Woman)"이며 "태모(太母:Grand Mother)"이신 수부님이시다. 상제
님의 후계자로서 종통계승과 도통의 연원문제의 열쇠가 모두 이 태
모님의 수부도수에 담겨있다. 이 수부도수를 부정하고 판밖에서 도
통을 받았다거나 계시, 유물전수를 내세우는 자는 그 누가 되었든
지 모두 상제님 대도의 기강을 파괴하는 대반역자이며 패륜자인 것
이다.
1:4 세 살림 교단 - 태모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도통맥을 계승하시
고 교단을 개창하여 세계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시기 위해 상제님의
대도의 씨를 뿌리신 22년간의 과정.
2:2 성도리 이름의 유래와 역사 - 성도리(成道里)라고 한 것은 성덕
(聖德)마을과 도동(道洞)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이
마을이 생긴 지는약 400년쯤 된다. 지금은 서정(西亭), 중리(中里),
도동(道洞)을 묶어서 성도 1구라 하고, 약 45가구 되는 성덕마을을
성도 2구라고 한다. 옛날에 서정(西亭) 마을은 양반들이 사는 반촌
(班村)이었고 도동은 평민들이 사는 민촌(民村)으로, 그 구분이 엄
격해서 각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으나 함부로 건너다니지 못
했다. 방위상으로 보면 도동은 동쪽에, 서정은 서쪽에, 중리는 가운
데 있다.
2:2 태모님의 생가 터 - 태모님의 탄강지는 무면 성도리이다. 태모
님께서 워낙 일찍 성도리에서 나오셔서 그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고
생존시에도 "네 앞으로 돌아오는 일만 생각하라."하시고 지난 일은
좀처럼 말씀치 않으셨으므로 알기가 어려웠다. 이것도 태모님을 오
랫동안 모시고 다닌 고민환을 통해서 조금 알려진 것이다.(이○○)
2:7 여섯 해 - 『고부인신정기』에는 '여섯 달'로 되어있다. 그러나
제적부상에는 태모님께서 여섯 살 되시던 1885년에 부친께서 돌아
가신 것으로 나와있다.
2:7 진외가 - 아버지의 외가.
2:7 진외가의 위치 - 아버지의 외가가 송(宋)씨 승문(僧門)이었는데
담양군과 순창군 사이의 달성산에 암자가 있었다.
2:7 태모님 유소시 - 태모님께서 여섯 살 되시던 해에 박씨 부인이
상부(喪夫)하여 몸을 붙일 데가 없었다. 외가가 송씨인데 그 곳은
승문(僧門)이었다. 박씨 부인은 태모님께서 일곱 살 되시던 해에 남
편의 외가인 절에 가 계셨다. 거기서 아홉 살까지 공양주 생활을
하시다가 대흥리에 사는 이숙 차치구의 집으로 오신 것이다.
2:8 이숙 - 이모부.
2:8 차경석 성도의 어머니와 박씨 부인이 자매간이다.
2:9 차치구(車致九) -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는 원래 고창서 살다
정읍 입암리로 이사 왔고 집안 형편은 풍요로웠다. 갑오년 동학혁
명 당시 정읍에서 5천 명을 이끈 동학군의 지도자로, 광주에서 극
형을 받고 효수되었다.
2:10 신씨 사망 - 신씨는 상제님께서 차경석 성도를 만나시기 5개
월 전인 정미(丁未 : 道紀37, 1907)년 6월 20일에 죽었다.
2:10 신씨(申氏)에게 출가 - 이숙 차치구 집에서 생활하시다가 출가
할 나이가 되자 차치구의 부인이 중매를 서서 신씨한테 출가를 한
다. 그런데 신씨와 살면서 태종 하나만 남기고 13년 만에 홀로되시
고 말았다.
4:2 누이의 혼석자리 - 경석이 상제님을 모시고와 보니 누이가 잠
깐 집을 비우고 없었다. 그래서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경석이, 마침
태모님께서 혼사 지낼 때 깔았다가 가져온 돗자리를 내어다 그것을
깔아 드렸다. 이 혼석자리는 첫날밤에 신방에 깔 때 쓰는 돗자리를
신부가 평생 간수하는 풍습이 있었다.
5:2 천지대업 - 종통(宗統). 곧 상제님이 전하신 후천선경 건설의
도통맥(脈).
5:10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를 개조하느니라 - 이 말씀은 상제
님과 수부님의 관계, 그리고 도통전수와 종통문제를 뜻하는 상제님
의 지고한 종통대권에 대해 하늘 땅과 인류에게 선언하신 말씀이
다. 이제까지 난법자들이 온갖 사곡한 말로 고수부님을 부정하고
계시. 유물전수 등을 내세워 종통을 조작하여 심령을 마비시키는
헛소리를 떠들고 있으나, 그 모두가 "한 놈"도 예외없이 상제님의
도권과 신권을 강도질하는 대 사기꾼, 패역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된
다. 그것은 수많은 고귀한 영혼을 농락하고 타락시켜 죽이기 때문
이다.
6:3 지천태 - 하늘의 기(氣)는 자꾸 위로 올라가려 하고 땅의 기는
아래로 내려가려 하는 성질이 있다. 만일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다면 이 양자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러나 반대로 높은
하늘이 아래로 내려오고 낮은 땅이 도리어 위로 올라가니 음은 위
에서 아래로 그기운이 내려오고 양은 아래에서 위로 그 기운이 상
승하여 음양이 자유로이 상호 교류됨으로써 음양의 조화가 일어나
만물을 생성하고 안정을 누리게 되는 후천의 괘상이다. 이 태(泰)괘
는 내양이외음(內陽而外陰)하여 안은 강한 기(氣)를 품고 밖으로는
유수한 태도를 지내며, 내군자이외소인(內君子而外小人)하여 그 중
심에는 군자(君子)의 뜻을 갖추되 겉으로는 소인(小人)으로 비쳐지
는 상(像)을 나타낸다.
6:5 차윤칠 - 윤칠은 초기 보천교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성품이 과
격하여 형인 경석으로부터 자주주의를 받았는데, 후일 기미(己
未,1919)년 보천교 제주 성금 이송사건 때 일경에 연행되어 혹도간
고문을 당하고 그 형독으로 신음하다가 경신(庚申,1920)년 6월 20일
에 사망하였다.
6:5 경석의 4형제 - 경석의 부친 차치구는 4형제의 막내애며 그는
다시 4형제를 두었다. 첫째가 윤홍(경석), 둘째가 윤칠, 그리고 윤경
과 윤덕이다. 이 중 윤경은 배다른 동생이며 윤홍 다음으로 막내인
윤덕이 수려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6:9 만고대적(萬古大賊) - 역사상 유례가 없는 큰 도둑.
7:4 남경 -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서쪽 양자강 연안에 있는 도시,
역대 왕조의 도읍지로 남조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였고 1928년 국
민당 정부의 수도가 된 후 급격히 발전하였다. 시가지는 서쪽과 북
쪽이 양지강에 에워싸인 한편 북쪽에 막부산(幕府山)·오룡산(烏龍
山), 동쪽에 자금산(紫金山), 남쪽으로 우화대(雨花臺), 서쪽에 청량
산(淸凉山) 등이 솟아 군사상 요지를 이루고 또 주위에는 높이
13~25m에 달하는 성벽이 34m에 걸쳐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현재
는 양자강을 기점으로 해상과 육상 교통의 분기점이 되어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8:8 적삼 - 윗도리에 입는 저고리 모양의 홑옷.
8:8 풀대님 - 바지나 고의를 입고서 대님을 매지않고 그대로 터 놓
는 일.
8:10 태정(太宗) - 『선정원경』는 태종(胎種).
8:12 마고자 - 저고리에 덧입는 방한복의 하나. 저고리와 비슷하나
깃과 고름이 없고. 앞을 여미지 않음. 대개 비단으로 만들어 호박
등의 단추를 닮.
8:12 호박 - 지질시대의 나무의 진 땅위가 땅속에 묻혀 굳어진 광
물. 누런빛으로 투명 또는 반투명하고 윤이 나는데 장신구로 많이
쓰인다.
9:1 용천혈(龍泉穴) - 발바닥을 삼등분한 앞부위의 중심에 위치하여
종기가 날 경우 자칫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위험한 혈자리.
10:3 초빈(草殯) -시신을 넣은 관을 한적한 곳에 놓고 이엉 등으로
그 위를 이어 눈. 비 등을 가리게 하는 것.
10:9 분(粉) - 백분(白粉)의 준말. 화장품의 일종.
12:1 주과포(酒果脯) - 주과포혜(酒果脯醯)의 준말. 술, 과일, 포, 식
혜, 따위로 간략하게 차린 제물
12:5 천개(天蓋) - 관의 뚜껑.
12:7 전(奠) - 장사지내기 전에 영좌 앞에 간단히 술과 과실을 차려
놓는 예식.
12:7 짧았던 상제님과의 생활 - 태모님은 참으로 한이 많으신 분이
다. 상제님을 만나신 후 남들처럼 부부로서 재미있게 살아 보지도
못하시고 심지어 남편인 상제님이 돌아가신 줄도 몰랐다. 그것도
태모님께서 수행중에 신도(神道)를 얻어서 찾아보시고 알게 된 것
이다.
12:9 시아버지 - 객망리 상제님의 부친께서는 고수부님을 며느리로
서 맞이해 주셨다 한다.(강경형 증언)
12:9 운산리 - 원래 이름은 구르멧산. 일명 와룡(臥龍)이라고도 함.
현재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淨雨面 回龍里). 앞으로 섬진강이 흐르
며 운암 발전소가 있음. 상제님 말씀에 "이 곳이 운산(雲山)이 아니
냐. 운암 물줄기를 김제, 만경으로 돌려도 …이 물줄기가 대한불갈
(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하신 곳이 바로 이곳이다.
13:2 대례복(大禮服) - 중요한 큰의식에 입던 예복.
13:3 만고장상(萬古將相) - 역사상 군주를 잘 보필했던 장수와 재
상.
13:3 진법주 수련(1편 19:4, 19:21 참고).
14:1 시두(時痘) - 천연두. 홍역.
14:4 신경수의 집 - 상제님께서 성도 신경수의 집에 '수명소' 도수
를 붙이셨다.
14:13 홀연대각(豁然大覺) - 환하게 트여 모든 의문을 밝게 깨달음.
14:14 태종이 - 태종은 주로 어머니 박씨 부인이 키우셨다.
포정소 여신 이후 - 첫째 살림 기간인 道紀 41년 (1911) 9월부터
道紀 48년 (1918) 9월까지.
15:5 제수(祭需) - 제사에 드는 여러 가지 재료와 재물.
16:8 낙종(落種) - 곡식의 씨앗을 떨어뜨려 심는 것. 즉 파종의 개
창도수.
16:8 이종(移種) - 모종을 옮겨 심는 것.
16:8 추수할 사람 - 가을 대개벽시대에 새 생명을 추수하는 상제님
대도의 첫 씨앗을 태모님께서 뿌리시고(파종도수) 동생 경석이 27
년 난법도수로 옮겨심고(이종도수) 이를 매듭짓는 대도의 추수사업
(추수도수)이 삼변성도(三變成道)의 원리로 대사부의 출세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상제님과 태모님께서 여러 번 공사를 행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16:9 신권(神權) - 신의 권능.
17:5 제주 번개 - 태모님의 성씨가 제주 고씨인 것을 말씀하심. 고
씨는 본래 탐라의 지배씨족으로서 양(良·梁)씨, 부(夫)씨돠 함께
세 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홍혈에서 용출했다는 시조
탄생 신화가 있다.
18:2 차경석의 불평 - 태모님을 천거한 차경석 성도는 "아 우리 못
난 이종(姨從) 저 양반도 내가 중신을 해 줬으니 당연히 나한테도
기운이 올테지."히고 기대하다가 나중에는 "왜 저 양반한테만 기운
을 붙여 주고 나한테는 기운을 붙여주지 않으시냐."고 원망을 많이
했다. 다른 성도들도 태모님께서 신도(神道)를 열어 천지조화를 임
의로 하시는 대도통을 하시게 되자 "우리가 정성을 바쳐 왔으므로
우리가 도통을 해야 할 텐데 왜 고부인에게만 도통을 주시느냐."고
할 정도로 수부도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19:4 폐의파립 - 폐포파립(弊袍破笠) -해진 옷과 부서진 갓, 곧 너
절하고 구차한 차림새.
19:5 약연(藥硏) - 약재를 갈아 가루로 만드는 기구, 단단한 나무,
돌, 쇠 등으로 만든다.
19:5 전대 - 돈이나 물건을 넣고 허리에 차거나 어깨에 메게 만든
폭이 좁고 긴 자루.
19:6 사인교(四人轎) - 앞뒤에 각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가마.
21:2 어천 당시의 김수부를 말함.
21:2 내 딸은 사경에 임박하였노라 - 형렬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
데 이 딸은 넷째 딸이었고 처음에는 끝순 또는 말순이라고 했다가
공순이로 불렀다. 상제님께서 공사 보실 때 15세 정도였다. 상제님
께서 어천하시기 전에 "네 딸을 개가시키면 너의 집안은 망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형렬은 이 말씀을 어기고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뒤에
시집 안 가려고 하는 딸을 금구 둔산에 사는 최씨에게 개가시켰다
가 신혼 첫날밤도 못 치루고 갑자기 쓰러진 후 '아랫배가 터질 듯
한 병'까지 얻어 친정으로 돌아와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21:4 성도들은 수부사명을 이해하지 못함 - 상제님 어천 후 성도들
은 상제님께서 수부에게 내리신 큰 사명을이해하지 못했다. 아예
수부를 모신다는 말부터 안 믿은 것이다. 지금도 수부도수에 무지
하고 이를 무시하고 아예 삭제해 버리는 난법 교단이 있다.
21:5 식지(食指) - 집게 손가락.
21:7 배포(排布) - 머리를 서서 이리저리 조리 있게 계획하는 것.
또는 그 속마음.
22:1 철연자 - 약연철. 약재를 가는 기구.
22:4 김부인의 사망과 김형렬의 후회 - 김형렬은 상제님을 청년시
절부터 삼생의 인연이 닿아 추종하여 8년 동안 천지공정(公庭)의
식(食)주인이 되어 상제님을 정성껏 모셨고 한때는 딸을수부로 바
쳐 상제님의 장인 노릇도 하였다. 그러나 착하기만 했던 [상제님이
도선(道善)이라 하셨음] 그의 유약한 성품은 상제님의 명을 어기고
딸을 개가(改嫁)시켜 후일에 "내 생애에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고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23:4 송찬오 - 상제님의 목침을 도둑질하여, 원불교를 연 소태산 박
중빈에게 갖다 바친 인물, 당시 원평에서 객사(客舍)를 경영.
23:4 송찬오 - 그는 상제님 어천을 전후하여 상제님을 따르던 신앙
인이었다. 상제님 신앙을 그 누구보다 독실히 하다가 등을 돌리고,
판밖에서 상제님 진리에 불교를 접목시킨 원불교의 개창자 박중빈
에게 훔친 목침을 바쳤다. 송찬오는 기질이 다혈질로 '무슨 일에 나
서기를 잘하며 흥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목침
을 빼돌린 경위는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지 2년이 지난 1911년에 수
부님이 그의 집에 4일 간 머무시면서 구릿골 약방의 기구를 거두어
와 임시로 보관하였는데 그 때 도적질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소태산 박중빈을 만나 대선생의 환생으로 믿고 이 목침을 신표로
올렸다. 송찬오는 소태산에게 목침을 바치면서 "묘한 인연으로 제
손에 들어 왔습니다."며 유품 도난 행위를 얼버무려 버렸다. (『증
산도 왜곡의 실상』참고)
24:11 어천 후 종통맥을 알지 못한 이유 - 상제님께서 떠나시기 전
에 태모님께 도통을 주셨으면 성도들이 꼼짝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
을 것이다. 그러나 훌쩍 떠나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우왕 좌왕하고
태모님께서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신지를 전혀 몰랐다. 태모님의 대
도통 후에도 여자를 우습게 아는 유교사회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판 안팎의 난법자들이 나와 서로 상
제님의 계시를 내세우며 정통을 주장한 것이다.
24:13 포정소 - 상제님이 무신(戊申 : 道紀 38, 1908)년에 정읍 대
흥리에서 도정(道政)을 열게 공사 보신 도수.
24:13 포정소와 첫째 교단 창립 -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지 2년 후
인 신해(辛亥 : 道紀 41, 1911)년에 태모님께서 신도(神道)를 통하여
비로소 포교활동을 시작하게 하셨다. 당시 차경석은 아무 것도 없
었으나 태모님께서 도통문(布政所道數)을 본격적으로 열어 주시자
이 때부터 일사천리로 포교운동이 활발해져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
다.
25:2 태을주 읽는 것을 포교방법으로 정하고, - 상제님 대개벽 사업
을 포교운은 그 시작과 끝매듭이 모두 태을주로 일관되어 이루어진
다. 태을주는 인간을 낳아 기르는 천지의 1년 선·후천 농사 시간
대에서 인종씨를 추리를 가을개벽기에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
친지의 지존의 성령이신 태을천 상원군의 기운을 열 수 있도록 내
려 주신 주문이다. 의통성업은 대 개벽기에 전인류가 태을주를 읽
게하여 통일천하를 이루는 것이다. 태을주를 읽지 않고는 개벽사업
을 이룰 수 없다.
25:5 초창기의 교명 - 대흥리 차경성의 집에서 첫째 교단 살림을
시작하셨는데 처음에는 교명(敎名)도 없었다. 이 선(仙)은 후천선경
의 선이다. 증산상제님의 대도는 선천문화의 종교가 아니다. 태모님
은 이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 당시 여건상 성도들이 자주 질문을
하기 때문에, 과도기에 그렇게 부르게 하신 것이며, 뒤에 도운(道
運)의 성숙시대를 여는 일꾼에 의해 바로잡게 될 것을 말씀하셨
다.(4편 16:8)
25:5 초창기 대흥리 때의 교명 - 대흥리 태모님 교단시절에는 특별
한 교이름이 없었다. 다만 은연중에 외부인들에 의해 '선교(仙敎)',
'태을교'라 불렸을 뿐이다.
26:6 더수기 - 뒷덜미.
27:1 청주 만동묘 -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우리나라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우암 송시열의 유지
(遺志)로 지은 사당(祠堂).
28:3 장기동 - 장기주의 형. 전남 승주군 쌍암면 평중리 속칭 담터
에서 출생하였다. 김형렬과 사돈간이다.
28:3 장기동, 장기준의 방문 - 계축(癸丑 : 道紀43, 1913)년 가을에
장기동(張基東)과 장기준(張基準)이 김형렬 성도로부터 상제님의 신
성하심과 태모 고수부님이 교단을 창립하신 전말을 듣고 본소에 이
르러 태모님을 뵈었다. 장기동이 보니 본소가 너무 좁아 운영에 불
편하므로 경석에게 '객실 한 채를 신축하라'고 권하고 돌아가서 다
음해 정월에 다시 본소에 와서 경석에게 돈 천원을 주며 신축 공사
를 착수하게 하였다.
29:1 김형렬 교단에 사람이 몰린 이유 - 김형렬이 임의용지(臨意用
之)는 못하지만 바람도 일으키고 풍운조화도 쓰는 모습을 보고 신
심이 동해 몰려들었다.
29:2 이준세의 재실 - 정읍군 감곡면 통석리 통사동에 있는 전의
이씨 재실.
29:3 태모님의 첫 왕림 - 태모님께서 처음 통사동 재실에 왕림하셨
을 때 차경석과 똑같은 놈이라고 "에이 못난 놈들"이라고 꾸짖으셨
다.
29:4 박중빈과 보천교 - 소태산 박중빈은 고수부님 첫살림 교단에
서 신앙했다. 지방 조직의 조직원 이었다.(원광대 원로 교수의 말)
29:4 박중빈 - 박중빈이 상제님을 신앙한 연대는 박공우 성도를 통
한 1910년대 초기 부터이다. 박공우 성도를 통해 어천 전부터 말씀
을 들었다.
29:4~5 박중빈, 박공우로부터 상제님 말씀 전해 들음 - 원불교의 창
시자인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1891 ~ 1943)은 증산도의 첫 난법 교
단인 보천교 초기의 돈독한 상제님 신도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상
제님께서 미구에 닥쳐올 대개벽기에 천상의 병겁대장으로 임명하신
박공우 성도와 박중빈이 재종(再從 : 육촌형제)지간이라는 점이다.
박공우 성도와 혈족의 관계로서 부담감 없이 그 누구보다 상제님
말씀과 행적과 이적을 숱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하루는 박중빈
이 박공우 성도 집에 들렀다가 상제님의 개벽 말씀을 전해 듣고 문
밖으로 나가면서 "너무배가 고프니 우선 물질이나 개벽하자." 하는
말을 하였다(박공우 성도 가족들의 증언). 이것이 후에 증산 상제님
의 개벽사상에 근거하여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그
유명한 원불교의 개교 표어가 된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증산도
왜곡의 실상』 60쪽)
29:1~10 통사동 재실 관련 사건 연표
연대 관련사건내용
道紀 45(1915) 김형렬 신력에 통함.
道紀 45~46 통사동 모임 시발(김경학,김광찬,박공우,
문공신 기타 여러명)
(1915 ~ 1916) * 태모님 대흥리에계시며 첫 방문.
道紀 46~47(1916
~ 1917) 박공우의 인도로 박중빈 첫 참석
道紀 47년(1917)경 김광찬의 광기 발동으로 대부분
흩어져 돌아감.
道紀 48년(1918)경 1917년부터 선돌부인과 손잡은
조철제, 통사동 재실에 찾아옴.
道紀 49년(1919)경 조철제, 태모님 모셔다 차경석처럼
큰 기운 받으려다 실패함.
道紀 49(1919)여름 조철제, 약장과 궤 중 궤만 도둑질하여
재실에 감춤.
道紀 51(1921) 조철제, 상제님 성골을 도굴하여
통사동 재실에 모심.
道紀 51년(1921)경 조철제 통사동 점거하고 성골을
훔쳐다두고 1년동안 수도공부
道紀 52(1922) 1월 문공신·김정우가 통사동 습격.
상제님 성골을 되찾음.
道紀 52년(1925)경 조철제 정씨 부인 모셔가고
그 해 무극대도교 조직.
29:6 통사동 재실과 박중빈 - 당시 박중빈이 변산 등지에서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공우 성도가 찾아가서 "이 사람아 ! 그렇
게 공부하면 안되고 제대로 하려면 이렇게 모여서 공부를 해야 한
다."하여 통사동으로 데려와 함께 수도하였다.(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이○○의 증언)
29:10 문공신 성도의 집이 바로 재실 근처에 있다.
29:10 문공신 - 문공신 성도는 외곬으로 달리는 성품 그대로 상제
님의 운수를 참되게 받으려고 애쓴 분이다. 후일 조철제가 통사동
재실에서 상제님 성골(聖骨)을 도둑질해서 숨겨 놓고 도통한다고
해괴한 짓을 벌일 때 성골을 찾기 위해 성골을 가지고 만주로 도망
가려던 조철제를 서대전(西大田)까지 쫓아가서 그 불의에 노하여
칼부림까지 했던 분이다.
31:7 주렴(珠簾) - 구슬을 실에 꿰어 만든 발.
31:7 차경석 성도가 태모님을 모실 때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
고 자신의 이씨 부인으로 하여금 수발들게 했다.
31:6~9 차경석, 성도들과 불화 - 경석은 상제님의 명에 따라 태모님
을 자기 집에 모시고 태모님의 신임을 받아 교단의 안팎일을 두루
관리하며 찾아오는 신도들을 응접했다. 그러나 성도들중에 가장 젊
고 학식이 없고 상제님을 모신 지도 2년밖에 안 되므로 매양 성도
들과 앉은 자리에서 평판이 좋지 못하던 터라 성도들을 배척(排斥)
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31:7 법소에 주렴을 걸어 - 차경석이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지고
나자 서서히 자신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시는 태모님이 옆에 계시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태모님이 날마다 "네 이놈 경석아!"하고 나
무라시니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염려되고 권위에 흠이 갈까 두려워
자기 아내에게만 태모님 수발을 들게 하고 다른 사람은 전혀 출입
을 못하게하여 연금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하였다.
32 원평으로 법소 이전 운동 실패 - 병진(丙辰 : 道紀 46, 1916)년
가을에 이치복은 원평에 집 한채를 사 놓고 "포정소(布政所) 설치
이후 6년 동안 수만 명의 신도를 모았으니 첫 살림이라. 이제 마땅
이 장상 대기지(大基址)로 지정하신 원평으로 옮겨 가서 둘째 살림
을 차리소서."하며 간원 한다. 그러나 김제군 백산면 조종골 강사
성이 동지 전날 저녁에 본소에 와서 '원평으로 법소를 옮긴다는 소
식을 전해 듣고 경석에게 그것이 합당한 일인가를 묻자 경석이 '일
이 성사되면 상제님의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궤변을 하여 사성
은 앞장서서 이 계획을 취소시키라고 나선다. 사성은 태모님께 가
서 치복이 유포한 말고 그 과실을 낱낱이 들어 불가함을 아뢰니 태
모님께서 교중의 분란을 염려하여 원평 이사를 취소해 버리셨다.
(『증산교사』55쪽)
32:3 강사성 - 강사성은 성격이 드세어서 대하기가 어려웠다. 무서
워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물어 봤다.(강사성 자부 전복추)
32:3 법소 이전 운동과 강사성 - 법소 이전 운동이 일어나자 강사
성, 강응칠 등도 나서서 차경석 교단에서 분리하실 것을 건의했다.
태모님께서 이 의견을 받아들이시어 조종골로 오시게 되었다.
32:3 강사성 - 성구인물
33:2 24방주 선출 및 인장 수여 - 병진(丙辰 : 道紀 46,1916)년 11
월 28일, 동지에 교체(敎體)를 비로소 설치할 때, 24인을 선정하여
천지에 이름을 고하고 각기 인장을 주어서 24방주(方主)로 임명하
여 유가의 학통(學統) 체계에 근원을 둔 연원체(淵源體)를 조직하였
다 .선출된 사람은 채규일(蔡奎壹), 김홍규(金烘圭), 채선묵(蔡善?),
조만원(趙晩元), 최일문(崔逸文), 김명옥(金明玉), 한영진(韓英鎭), 송
영대(宋永大), 송명희(宋明熙), 채규철(蔡奎喆), 이원유(李元有), 박종
식(朴種植), 문정삼(文正三),유종상(柳種相), 박종하(朴種河), 김형규
(金炯圭), 김영두(金永斗), 김천종(金千種), 신기섭(申基燮), 이기호
(李基浩), 김혁중(金爀中), 이두현(李斗현), 이용하(李容河), 김철환
(金喆煥)이고, 이상호(李祥昊), 백윤기(白潤基), 이교상(李敎祥) 등
세 사람은 당분간 선출되지 않았으나 '24방주에 부속되지 말고 단
독으로 교무를 집행하라' 하였다.(『보천교 연혁사』상, 3 ~ 4쪽)
33:4 차경석의 외유와 포교활동 - 차경석은 이 해 9월에 정처없이
집을 떠나 강원도의 금강산과 태백산, 경남북의 산간지대를 주유하
면서 일본관헌의 주목을 피하는 한편 비밀히 포교활동을 지휘하여
불과 2 ~ 3년 동안 100만 교도를 해아리는 교세를 갖게 되었다.
33:5 태모님께서는 상제님께서 경석에게 동학혁명의 역신(逆神) 해
원도수를 붙여 주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경석의 행동에 크게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으셨다.
33:6 송산리 - 현재는 김제군 공덕면 공덕리 송산마을이다.
33:6 조종골로 가실 뜻을 전하심 - 무오(戊午 : 道紀 48, 1918)년 7
월에 태모님께서 윤경에게 명하여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 강사성을
불러오게 하시어 통교권(統敎權)을 경석에게 빼앗기게 된 내력을
말씀하시고 "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새로 일판을 발족할 것이니 돌
아가서 동지 교우들과 협의하여 준비하라." 하셨다. 그러나 바로 조
종리로 가신 것은 아니고 옆 동내인 공덕면 송산리 천종서의 집으
로 가셨다. 송산리는 조종공에서 1km도 채 안 되는 바로 엎동네다.
송산리 천종서와 강응칠 등 조종골 강씨들 일곱 명이 태모님을 모
시고 가게 되었다. 조종골은 강씨들 판이다. 천종서도 그들과 친분
이 있었고 대흥리에 분열이 일어나자 강대성, 강사성, 강응칠 등과
합세하여 차경석의 불의를 반대하고 조종골로 모시고 간 것이다.
태모님께서는 그것이 상제님께서 도수로 짜 놓으신 초패왕도수,
홍성문의 27년 난법 헛도수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것을
조용히 받아들이셨다. 담배대 하나만 가지고 대흥리를 떠나셨다.
33:6 천종서 - 성구인물
34:1 대흥리를 떠나 부용역에 이르시기까지 - 9월 21일 새벽에 일
행을 거느리시고 도보로 대흥리를 떠나서 정읍역에 이르니 채규일
과 채규철, 채경대(蔡京大)가 좇아와서 간절히 만류하되 듣지 않으
시고 기차를 타고 부용역(芙容驛)에 내리시니 이 때 규철과 경대가
따라왔다가 작별을 하고 돌아갔다. 그 때 태모님의 행렬의 따르던
신도가 100명 정도 되었다. 모두 큰 갓과 흰 도포를 입었기 때문에
부용역 일대가 허옇게 보였다고 한다.
34:2 그 곳을 가시려면 일본 순검대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태모
님께서 39세경이므로 젊은 부인의 자태가 남아 있을 때이다.
34:2 부용역 앞의 검문소 - 그 때는 송산리로 가는 길에 분포되어
있는 백구면, 공덕면, 용지면의 합동 검문소가 부용역 바로 앞 100
미터 쯤에 있었다.
34:7 송산리 - 현재 공덕면 송산리 예전에는 송산리와 조종리 일대
에 소나무가 아주 울창하였다.
34:7 천종서의 집에 계시며 치성을 올렸다. 그러나 신정(神政)은 행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34:8 조종골 강씨들 - 태모님께서 대흥리에서 차경석 성도와 함께
첫째 살림을 여셨을 때 조종골 강씨 일곱 명이 함께 다녔다. 이 사
람들은 대부분 보천교에서 간부급으로 활동하여 차경석 성도와 친
분이 있었다.
34:8 천종서 집에서 잠깐 거주하심 - 태모님께서 대흥리를 떠나 천
종서(千鍾瑞)의 집에 오셔서 잠깐 계셨는데 오래 계실 수는 없었다.
미신타파를 운운하며 천종서의 아들이 태모님을 매우 싫어했다. 그
리하여 조종골로 오시게 된것이다.
34:9 오두막 - 송산리 천종서네 집에서 얼마간 계시다 조종골 오두
막으로 오시는데 한 달 가량 걸렸다.
34:9 강응칠 - 강응칠은 상제님 어천 후 대흥리 시절부터 신앙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종골 강씨의 종손(宗孫)으로 한때는 조종골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당시에 약 200석지기의 부농이었다.
강응칠의 부친이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으므로돈이 있는 집안
이었다. 그리하여 태모님을 모시고 와서 교당을 짓고 치성을 모셨
는데 치성은 한 달에 두 번씩 절후치성(節候致誠)으로 모셨다.(강기
섭)
34:9 조종골 교당 밑에 있던 오막살이 아주 오두막이었다. 방 한 칸
에 부엌 한 칸인데 그 교당 바로 밑에 있는 밭에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있었다. 지금은 채소밭이 되어서 그 터만 남았다. 이 곳에 머
무시며 '교당을 건축하라'고 하시어 짓기 시작한 것이다.(이○○)
34:10 조종골에서 신앙한 사람들 - 조종골 강씨들이 다 신앙한 것
은 아니었고 강응칠, 응칠의 아들 형제, 강사성, 그 외 또 몇 명이
신앙했는데 대부분 4촌 아니면 6촌간 이었다.(전복추)
34:10 조종리(祖宗里)의 유래 - 조종리(祖宗里)의 '종'자는 원래 종
자 종(種)자를 썼다. 예로부터 생수(生水)가 유달리 많이 나와, 아무
리 날이 가물어도 이 동네만큼은 흉년이 없어 '글ㅁ지 않고 어느
정도는 먹고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가뭄이 들어 다른 곳은 종
자까지
없어져도 이 마을은 농사가 잘되므로, 조종리의 종자가 김제, 옥구
까지 흘러가서 쓰이곤 했다는 옛말이 있다.(강응칠의 조카 姜松容)
35:6 태모님 연행- 10월 제주 신도 문인택(文仁宅)이 성금 10여 만
원을 면화포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오다가 목포 일본경찰에게 발
각되어 검거된 사건이 있었다. 일경은 인택을 심문하고차윤칠과 방
주 18인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당시 엄청
난 돈이 총독부로 들어갔다. 그래도 일이 해결되지 않고 어찌할 수
없게 되자 '교주 고판례 사모님이 교단을 선포했다'고 덮어씌워 모
든 책임을 태모님께 미뤘다. 그리하여 추적을 하다 보니 조종골까
지 수색 나오게 된 것이다.
35:9강응칠 - 성구인물
37 조종골 강씨 - 조종골 강씨들은 조종리에서 20대에 걸쳐 살아왔
다. (강응칠 손자 강기변)
37 당시 교인들 중에서 제일 높았던 사람은 강응칠이었고 항상 교
당을 지키던 사람은 강휘만이었다.(전복추)
37:1 응칠과 사성은 6촌간 - 태모님을 모시고 온 강응칠과 강사성
은 6촌간이다. 조종골에서 재력이 있었던 사람은 강응칠과 강사성
이다.(전복추)
37:2 교당 건립 - 오두막에 계시면서 강응칠의 집을 자주 왕래하셨
다. 그리고 지금의 교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도(道)집이라
고 불렀다. 그 구조가 3칸 겹집, 즉 옆으로 세 칸이고 앞 뒤 쌍으로
되어 총 여섯 칸이다.
37:2 교당 건립 - 교당을 지을 때 강응칠이 주도하여 여러 사람의
성금으로 지었다.
37:3 태모님에 대한 호칭 - 신도들은 "사모님"혹은 "정읍 젊은 사
모님"이라 하고 동네 사람들은 "정읍 새댁"이라고 불렀다 한다.
37:3 조종골 교단 초기에도 교명은 없었다. - 오두막에 임시로 계실
때도 교이름(敎名)은 특별히 짓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교단이 점점
모습을 갖추게 되자 비로소 교단 이름의 필요성을 느끼시고 '선도
(仙道)'라는 표현을 쓰셨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신선이 하는 일이
다."라고 하신 바 있다하나 태모님의 본래 뜻은 아니라고 본다.
37:3 교당 분위기 - 교당이 높은 곳에 자리잡았는데 한 옥으로서는
비교적 큰 집이다. 방이 앞에서 보면 세 칸인데 겹집으로 되어 있
어서 총 여섯 칸이다. 방마다 남자 교도들이 앉아서 공부를 하고,
부엌에는 부엌일 하는 여자가 둘 있었다. 태모님은 항상 큰방에 앉
아서 봄이 되면 문을 다 열어 놓고 지내셨다. 그리고 앞 뒷마루는
항상 번들번들했다.(전복추)
37:3 초기의 생활터전 - 당시 농장의 경작권을 붙여 주는 직책을
'마름(사음)'이라고 했는데 백남신 성도의 아들 백인기가 설립한 '화
성농장 김제관리소'에서 강사성이 마름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스물
네 마지기 소작답을 주선하여 주었다. 물론 농사는 교인들이 지었
지만 그 정도로 초창기 교단 운영이 어려웠다.
38 도판 분위기 - 고사모(高師母)님 한 번 대면하려 해도 웬만큼
신앙해서는 못했다.(강기섭)
38 고민환이 조종골로 가게 된 경위 - 원래는 절에서 공부하던 사
람으로 생전에 그린 초상화에도 승복을 입고 있다.(고민환의 며느
리 김순자 소장) 고향집은 오성산 밑에 있는 옥구군 성산면 성덕리
이다. 성덕리에 도둑들이 너무 많이 끓어서 피난한다고 간 곳이 태
모님이 계신 조종골이다. 이 해에 임피·옥구 사람들이 조종골로
많이 찾아왔다.
38:1 고민환 - 성구인물
40 문공신 성도가 상제님의 양아들 강경형에게 종종 오가며 통사동
시절에 본 일들을 얘기하며 전해진 것이다.
40 또 다른 증언자 - 성골 도굴사건 전후 증산교파에 얽힌 수많은
비사와 금산사를 둘러싼 김제 일대의 수 많은 종교문제를 담당하던
당시 김제경찰서 형사 주임의 증언.
40:2 조철제(趙哲濟, 1895 ~ 1958) - 경남 함안에서 출생. 호는 정산
(鼎山). 어려서 부친을 따라 만주 유하현(지금의 봉천지방)에 이주
하여 당시 보천교 신자 김혁을 만나 상제님 진리를 처음으로 접하
고 보천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21세 때인 1916년 귀국하여 충남
안면도에 거주하다가, 마침 그 지방을 순회하던 이치복성도를 만나
상제님의 행적에 관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1917년에는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20여년 연상의 선돌부인을 유혹하여 천생연분이라고 속
여 동거를 시작하고 1918년에는 김형렬 성도 교단에 가입하여 김형
렬 성도를 모시다 도통과 도판을 석권할 욕심이 발동하여 증산 상
제님의 성골를 파헤쳐 도굴까지 범하고, 1925년 4월에 전북 구태인
에서 독자적으로 무극대도교를 설립하였다.
40:2 조철제가 재실에 찾아와 - 당시 조철제가 심복 부하 조용서,
김영수 등 예닐곱 명을 데리고 와서 '공부하려고 하니 집을 빌려
달라'고하여 비워 주고, 이준세의 아들 이종모(李鍾模)는 조철제의
비서 노릇까지 했다. 또 조철제가 상제님 유골을 파다가 이준세 재
실에 숨겨 놓고 공부하는 것과, 문공신 성도와 상제님 유골을 놓고
치열하게 싸운 것을 직접 보았다.[이준세의 조카 이종권(李鍾權)
1988]
40:3 연주평 박노일 - 태종의 남편 곧 태모님의 사위이다. 태모님께
서 가끔 초강리에 행차하셨다.
40:4 후에 조철제가 상제님의 성골을 강도질하여 놓고 대역무도한
짓을 일삼을 것을 미리 내다 보시고 하신 말씀이다.
40:4 조철제의 태모님 초빙 -차경석 성도가 태모님을 모시고 포교
활동을 시작해서 보천교의 교세가 커지는 것을 보자 조철제도 처음
에는 태모님을 모셔다가 한판을 차릴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는 "아이구 저런 양반 밑에 있다가는 우리가 큰일 나겠다."하고 "차
경석이 같은 사람이나 감당할까 우리 같은 사람은 못 하겠다."고
나중에는 도망치다시피 했다.
40:4 조철제의 양장과 궤 도둑 사건 - 기미(己未, 1919)년 여름에
조철제는 심복 부하 권태로, 성정오, 이정두, 조용서, 권영문등 장정
여덟 사람을 순사로 가장하여 밤중에 본소를 습격하였다. 들어간
즉시 경석을 체포하려는 척하며 가택수색을 행하고 온 집안이 소란
한 틈을 타서 치성실 문을 열고 약장과 궤를 훔쳐서 가지고 나왔
다. 윤칠이 정신을 차려 보니 치성실 문이 열렸으므로 안으로 들어
가 보니 약장과 궤가 보이지 않기에 순사가 아니고 강도단(强盜團)
임을 깨닫고 급히 마을 사람들을 깨워 함께 뒤를 쫓았다. 권태로
일행은 짐이 무거워 빨리 걷지 못하여 붙잡히게 생기자 약장은 길
가에 버리고 궤만 짊어지고 도망갔다.
조철제는 이렇게 궤를 도적질해다가 감춰 두고 선돌부인과 자기
부친 용모와 삼촌 용서와 심복 부하 권태로 등과 더불어 교단 창설
의 준비를 진행하였다.(『증산교사』70쪽)
41:4 이를 오해하여 앉은뱅이 신앙 하는 자는 말씀의 참뜻과 때의
일군사명을 망각할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에 준하는 것이다.
지금은 제3부흥시대로 인종추수 개벽의 급박한 시간대에 들어서 있
다. 철저히 도전적인 마음가짐으로 상제님의 대도를 전해야 한다.
41:5 ~ 6 송규(宋奎, 1900 ~ 1962) - 소태산 박중빈을 계승한 원불
교 2대 교주. 호 정산(鼎山)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출생.
정산은 경상도 가야산에서 태모님 교단의 교인 들로부터 "큰 공
부를 하려면 정읍 대흥리의 태모님을 모시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
을 듣고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게 한 다음 정사(丁巳, 1917)년 4월
에 정읍 대흥리로 향했다.
그러나 경석의 저지로 만나 뵙지 못하게 되자 대신 객망리를 방문
하던 중에 선돌부인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
석달 후 다시 선돌부인과 객망리로 돌아와 사방으로 태모님 신앙
인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하던중 뜻밖에 김제군 백산면의 어느 신
도 집에 머무르시던 태모님을 만나뵙게 되었다. 정산이 얼마간 머
물러 있을 때 아들을 찾기 위해 조종골 본소 교당을 찾아온 정산의
아버지에게 태모님께서 "제발 당신네 아들 좀 데리고 가소." 하셨
다.
42:5 사회주의 청년들 약 50여 명이 몰려와서 소리지르고 때려부순
다고 난리를 치는데 고사모는 문만 하나 열어 놓고 방석에 가만히
앉아서 태연히 앉아 계셨다.(조종골 姜容 76세)
42:8 녹사(錄使) - 기록을 전담한 사람.
42:10 주모자가 바로 천종서의 아들이었다. 그 사람이 패거리를 짜
와서 기물을 쳐부수고 난장판을 이루었다.
43:1 고찬홍 - 고찬홍은 임피 사람으로 참선을 하던 사람이다.
43:5 ~ 8 태모님께서는 상제님을 '만유 생명의 아버지'로 부르게 하
셨다.
44:3 여덟 사람 - 권태로(權泰魯) 손진방(孫進邦) 김윤진(金胤鎭)
권영수(權寧秀)이외 네 명. 대부분 차력하던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
다.
44:4 형렬의 아내 - 김호연 성도를 말함.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에
태운장과 함께 제 1의 증언자.
44:4 딸 - 이 때 김호연 성도는 딸 소지를 낳은 후였다.
44:5 일찍이 상제님께서 백의군왕 백의장상 공사를보실 때 고부
감옥 안에서 문공신 성도에게 "공신아, 내 몸이 조선땅을 떠나서는
안 되느니라." 하셨다. (문공신의 아들 문복환)
44:8 새벽에 도착 - 그 전날 저녁에 구릿골에 번개가 칠 무렵, 서울
김형렬 성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저녁에 출발하여 밤새 기
차를 타고 내려와 새벽에 도착한 것이다.
44:8 서상철 - 상제님이 약방을 여셨을 때 서기(書記)를 맡아본 문
도.
44:10 조철제의 성모도굴사건 - 신유(辛酉 : 道紀 51, 1921)년 2월
에, 구릿골 뒷산 장태산에 모셔 둔 상제님 성묘가 파헤쳐지고 누군
가 성골(聖骨)을 도적질해 간 사건이 발생했다. 도굴사건 이튿날 서
울에서 계시를 받고 급히 내려온 김형렬이 김제 경찰서에 고발하니
경찰은 전라북도 각 경찰서에 통지하여 큰 수사을 진행하였다.
조철제는 기미(己未, 1919)년에도 상제님의 약장과 궤(櫃)를 도적
질하여 정읍군 감곡면(甘谷面) 통사동 이씨 재실에 감추어 두고 교
단창설을 계획하던 실패하매 이제는 상제님의 성골을 도굴하여 숨
겨 두고 심복 장정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한 문공신(文公信)은 심복 부하 김정우(金定雨)를
조철제 교단에 잠입시켜 철제의 신임을 얻게 한 후에 성골이 통사
동 이씨 재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임술(壬戌 : 道紀 52,1922)년 1월에 공신이 장정 20여명을 거
느리고 목검을 준비하여 밤중에 통사동 재실을 십격하여 성골을 되
찾고 현금 만여 원까지 탈취해 버렸다. 공신은 성골을 자기가 거처
하는 방 천장 위에 감췄다가 다시 신경수의 집으로 옮겨 모시고 현
금은 일행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재실을 습격했을 때 다급해진 조철제는 상제님의 왼팔 완
골을 수습하여 도망하다가 서대전에서 정우 일행에게 붙들리게 되
자 완골(腕骨)을 심복 부하 윤진에게 주어 빨리 도망가게 하였다.
김정우는 조철제를 추궁하였으나 완골을 찾지 못하고 다만 조철제
가 가진 현금을 빼앗았다. 이에 조철제는 대전 일본 경찰서에 김정
우를 강도(强盜)로 고소하니 경찰이 김정우와 조철제를 가두고 취
조하매 뜻밖에 성묘를 도굴한 일과 성골을 쟁탈한 사실이 전부 드
러났다. 이로 인해 문공신 성도와 김정우 등 20여 명이 모두 검거
되어 문공신 성도는 7년 징역을 살고 조철제는 경찰에 뇌물을 주어
곧 풀려났다.(『증산교사』95쪽)
44:10 통사동 재실 관련, 문공신 제자들의 증언 - 조철제가 밤에 부
하들을 시켜 상제님 성골을 훔쳐다가 통사동 재실에다 모셔 놓은
사건이 발생하자, 일전에 고부경무청에서 상제님께서 조철제가 성
골을 도굴할 줄을 미리 아시고 "공신아! 내몸이 조선땅을 떠나서는
안되느니라." 하신 말씀이 불현 듯 생각나서 영산 어른이 성골을
되찾아올 것을 결심하였다.
그 때 영산 어른이 20여 명을 동원하여 석 자나 되는 각목을 하나
씩 들고 통사동 이중세의 재실에 몰려가서 문간에 서 있던 문지기
네 명을 처치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조철제가 밥 먹다 말고 도망을
쳤다. 조철제를 잡아다 묶어 놓고 "증산 어른 유골을 어디다 감춰
ㄷ는지 말하라."하니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일행이 집안을 수색하다
큰방으로 들어가서 벽을 두드리니 소리가 좀 달랐다. 그래서 쳐부
수고 들어가 보니 이중벽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 성골을 모시고 여
자 둘이 양쪽에서 지키고 있었다.
성골은 영산 어른 댁의 천정에 은밀하게 모시다가 다시 운산리 신
경수의 집에 모셨다가 딸 강순임에게 인계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철제가 살인미수와 강도로 몰아붙여 영산 어른
은 7년 간 옥고를 치렀다. 영산어른과 큰아들 문광옥 그리고 그 일
행은 두달, 1년 간격으로 풀려나고 영산 어른은 7년 간 옥고를 치
르셨다.(문공신의 제자 박인규, 오채문)
45:5 난법의 태동 - 상제님의 허부공사로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결
국 상제님의 대도 정신에서 벗어난 난법으로 훗날 세상을 떠들썩하
게 교세를 형성한다.
46:2 전준엽 - 성구인물
46:3 성도들의 출신 - 정읍에서도 왔지만 옥구에서 제일 많이 왔다.
전준엽, 전찬용, 전선필, 전기찬, 고민환등 주로 부자들이 많이 왔
다. (전복추)
46:6 치성의복 준비 - 내일 아침 아홉시에 치성을 한다면 오늘 아
침 일곱시쯤 해서 중의적삼까지 옷감을 떠온다. 그러면 강응칠의
며느리, 강사성의 며느리, 또 응칠의 팔촌 동서 세 사람이 치성옷을
준비하는데 한 사람이 한 벌씩 맡았다. 다른 사람은 할 줄 모르니
까 안 주고 세 사람이 주로 치성 바느질을 했다. 일광목만 하는게
아니라 어떤 때는 모시옷을 해서 입을 때도 있었다.( 전복추)
46:6 품삯 - 치성 때나 일손이 필요한 때 도집일을 해 주면 품삯
일원 한 장 주는 일이 없었다. 강사성과 강응칠의 며느리는 시아버
지가 교단에서 종사하므로 품삯을 준 일이 없고 다만 강사성의 팔
촌 동서 되는 사람은 집안이 교와 무관하고 아무도 신앙하는 사람
이 없었으므로 일을 해준 대가로 그 사람만 일 원을 주었다.(전복
추)
47:4 일제의 탄압 - 대흥리에 차경석의 교단이 커져서 나중에는 세
칭 '차전차'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당시 총독부에서는 '독립당을
꾸며서 모반의 기미가 보인다'고하여 민족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증산계열 종교단체를 극도로 경계해서 틈만 나면 탄압하여 모임조
차 가질 수 없게 했다.
48:4 눈 씻고 보려 해도 사람 없다. - 세상 눈뜨고 냉정하게 보면
인간 같은 게 없고 전부 죽일 놈 뿐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상제님
과 태모님의 천지대업을 말세의 왕무지에서 '세계를 상제님의 도밭
으로 삼아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에 드는 일꾼이 없다'는 한탄 어리
신 말씀이기도 하다. 그저 세상 개벽 때나 기다리고 도통 꿈꾸며
주문이나 장마철의 개구리마냥 읽어대는 유치한 철부지 신앙이라
후려치신 것이다.
49:3 장기준(張基準,1880~1922) - 속명은 기영(張基泳). 호는 사수
(師首). 자는 기준(淇準). 장기동의 동생으로 장사수(張師首)라 불리
우며 후에 순천교를 창설했다. 의병운동을 일으킬 뜻을 품고 출정
하려다 좌절된 후 그 울분으로 난치병이 들어(문둥병) 3년 간 고생
하던 중 33세 되던 임자(壬子 :道紀 42, 1912)년 3월에 태인 백암리
김경학 성도의 제자 김화숙(金化淑)으로부터 "만병통치 태을주(萬病
通治太乙呪) 무궁무궁 태을주(無窮無窮太乙呪)"라는 태을주를 전해
받고 뒷산 주산인 재왕봉에 수련막을 치고 5개월 동안 수행하여 완
치되었다.(『순천교사』78쪽)
49:3 장기준 현무경 부서로 포교 - 순천 사람 장기준은 원래 나병
환자로서 갑인(甲寅 : 道紀 44, 1914)년부터 김형렬을 추종하다가
정사(正史 : 道紀 47, 1917)년에 형렬의 유무(六戊) 묻은 일이 허사
로 돌아감에 실망하고 몇 달 동안 스스로 수련을 행한 뒤에 현무경
의 깊은 뜻을 터득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상제님의 도통연원을 받
았다고 자칭하여 신도 수백 명을 거느려 독립교파를 세웠다.
50:3 1500여 명의 숙식 - 잠잘 데가 없어서 마당에서 덕석 깔고 자
고 조종골 일대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밥도 그릇에 제대로 받쳐 먹
은 사람은 아주 잘 먹는 사람이었다.
50:3 그 때는 시국이 마침 독립단이 임시정부와 내통하는 기미가
있다하여 종교 단체 모임일지라도 3인 이상은 절대 모이지 못하게
했다.
50:3 대치성 - 치성 때면 하얀 두루마기에 갓쓴 사람들이 천오백
명 가량 모여서 어마어마했는데 충청도, 경상도 사람이 많았다. 특
히 경상도에서 많이 오고 여기 사람은 적었다. 치성때면 소를 몇
마리씩 잡았고 돼지는 수십 마리씩 잡았다. 경상도에서부터 여기까
지소밭에 짚신을 신겨서 끌고 모이는 것을 직접 봤다. 치성하는
날에는 동네 뒤로 변소를 수십 개씩 지었다. 그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은 도집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채 같은 데 앉고
그 안에 들어가질 못했다. 아이들은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하고 …
(조종골 강용)
50 초파일 대치성 때 보인 기수열의 성경신 - 이 치성을 준비할 때
조종골 신도들끼리 의논하기를 '이번 치성에는 소를 한 마리 잡았
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김수열이 그 얘기를 듣고
조종골에서 100여 리가 넘는 옥구군 미룡리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
서 한참 농사일을 하려고 논배미에 매어 둔 자기 집 황소를 끌고
왔다. 그리고 '이 소를 잡아서 치성에 쓰십시오.'하니 태모님께서 그
놀라운 성경신(誠敬信)을 치하하시며 그 때 '시천지(時天地)'를 '신
천지(新天地)'라 하시고 신천지(新天地)로 읽게 하셨다 한다.
50:5 흰데기 - '흰데기'란 나락을 훑을 때 알곡은 우선 털어서 담고
나머지는 묶어서 한쪽에 모아 두었다가 다시 치는데 그 때 나오는
것을 '흰데기'라고 한다.
50:5 흰데기 하나 없구나 - 태모님께서 평소에 항상 말씀하시기를
"제자고 수제자고 간에 흰데기 하나 가릴 수 없구나."하고 한탄하셨
다. 또 직접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너희들로부터는 종자 하나 건
지기 힘들다."고 말씀하신 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 신앙의 목적을 도통에
두고 주역풀이나 현무경 부적풀이 등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어서 마음보를 고치라.'고 훈계하신 말씀이다.
51:2 이 때 안개가 며칠 간 끼어서 호롱불도 켤수가 없었다.
51:3 참관인들이 도취되어 - 원래는 갓에다 ㅇ칠을 하는데 여유가
없으므로 대부분 신도들이 갓 위에 먹물을 칠하고 그 위에 기름을
먹인 유건(油巾)을 쓰고 다녔다. 안개비가 오니 갓에 칠한 먹물이
뚝뚝 떨어져 흰옷이 얼룩덜룩하게 되었지만 태모님께서 담뱃대로
지휘하시면 순식간에 눈앞에서 풍운조화가 일어나므로 모인 사람들
이 도취되어 안개비가 오고 먹물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51:5 그 당시 고찬홍은 천석꾼의 부호가로 항상 점잖게 정장을 하
고 다녔다.
51:6 너희놈들이 전부 - 이것은 선천의 묵은 천지를 문 닫고 새 천
지를 여신 상제님을 대행하여 후천선경세계로 가는 구원의 길을 열
어 주신 인류의 어머니 자리에서 정신을 깨는 육두문자식의 말씀이
다. 문법에 맞는 예쁜이 말투인 경기도식 표준말보다 타성과 위선
과 체면으로 포장한 정신을 ㅉ는 데는, 특히 도판에서는 육두문자
가 천하에 제격이다. 태모님께서 보시기에 대우주개벽기에 처한 세
상 인간들이 워낙 선천의 묵은기운에 찌들어 있어 머리통들이 안
돌아가기 때문에 화가나서 일부러 그런 언어를 더욱 쓰신 것이다.
52:10 일정시대에 소를 잡으면 밀도살로서 바로 구속이었다. 그러니
소도 딴 데가서 못 잡고 교당에서 잡았다고 한다.
52:11 강휘만의 증언 - 당시 그 광경을 지켜본 강휘만의 얘기에 의
하면 일본 수사들이 발로 질겅질겅 밟고 다니면서도 그게 소가죽이
라는 것을 모르니 자기가 봐도 우습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53:7 초악 - 말라리아의 일종. 학질 또는 하루거리라고도 함. 한 여
름에도 추워서 벌벌 떨고 이불을 덮어야 하는(寒)증. 한직, 두직, 세
직이 있어서 세직까지 가면 죽는다. 옛날에는 학질을 떼기 위해 환
자를 거적에 말아서 뉘어 놓고 소가그 위를 넘어가게 했다.
53:10 물론 평소에는 처안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대접해 주시기도
했지만 일본인 경찰서장도 지서장도 고사모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
다.(조종골 강용)
55:2 강사성 - 성구인물
56:1 통(桶) - 나무로 만들어 물건을 담는데 쓰는 통.
56:4 올바른 줄 하나 - 이는 상제님과 태모님의 대문명을 여는 사
부의 출세로 난법시대를 문 닫고 참법시대를 개벽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60 생존자 강용씨의 체험기, 애들을 귀여워하심 - 내가 여섯 살 먹
어서부터 세배를 다녔는데 열두 살까지 뵈었다. 내가 학생모자를
쓰고 세배를 가면 "이놈, 개떡모자 썼다." 하시고 "개떡모자 벗어
라."하신다. 그런데 안 벗고 있으면 오셔서 손수 벗기시고 머리를
만져 주시며"장난을 좀치게 생겼다."하셨다. 한 번은 일곱, 여덟
살 경에 세배를 갔는데 그 곳에는 항상 방 앞에 비서가 있었다.
"들어와라." 하시자 비서가 들여보내 주어 들어가 보니 그분은 방석
에 앉아 계시다가 "세배왔어?"하시고 "해야지."하시며 세배를 받고,
그리고 사람을 부르셨다. "이놈들을 잘 먹여야겠는데 뭘 좀 내오너
라." 하시고 가져온 것이 시원찮으면 직접나가셔서 먹을 것을 챙겨
들고 오셔서 "먹어라." "천천히 잘 먹어라." 하시며 머리부터 전부
쓰다듬어 주시며 "잘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셨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도를 반대하는 집안인데도 그렇게 잘해 주셨다. 지금도
그렇게 훌륭하시고 따뜻한 분을 뵌 적이 없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
다. 그런데 열두 살 넘어서는 그분을 못 뵈었다. 조종골에 안 계셨
기 때문이다.(조종골 강용)
60:1 유일태 - 성구인물
61:12 강공삼 - 성구인물
64:1 신도분포 - 여자들은 믿은 사람이 적었고 대부분 남자들이었
다.(전복추)
64:1 대부분의 도인들은 도(道)집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다. 가사를
돌볼 겨를도 없이 일심정성으로 도를 믿었다. (전복추)
64:1 이경(二更) - 오후 9시 ~ 11시.
64:4 편음편양(便陰便陽) - 음과 양이 한쪽으로 기울어짐.
64:8 월광편조보살(月光編照普薩) - 약사여래의 오른편에 모시는 보
살. 일광편조보살과 함께 보살중 상수(상수)에 있음.
65:1 김수남. - 김수응이 전대윤의 아들이고 전준엽은 김수남의 처
남이다.
65:1 김수응 - 성구인물
65:4 김수남 - 당시 김수남은 본처가 우리나라에 있었는데 일본에
가서 또 결혼을 하고 4년 동안 고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65:2 김수남 - 성구인물
65:6 관동 대지진 -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방
에 일어난 대지진과 이에 수반하여 발생한 대재해. 특히 이 대지진
당시에 일본 육군과 경찰은 날조된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고한 우리
동포 수천 명이 학살 당하는 참사를 빚었다. 더구나 제 1차 세계대
전 후의 경제 대공황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던 일본은 이 재난으
로 인하여 국가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진 발생 다음날
내각은 당장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위기의식을 조성하는 방편으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계
엄령을 선포하였다. 또 <유언반> <지휘반> <실행반> 등의 공작
대를 조직하여 방화·독물투입·투탄 등의 테러 행위를 감행시켜
그것이 마치 조선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조작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각 지방별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학살을 자행하니
당시 몇 명의 한국인이 학살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2천 명, 3천
명, 6천 명 등의 설이 있다.
65:6 김수남 고국에 돌아옴 - 김수남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태모님
께서 그런 공사를 보셔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태모님의 신성(神性)에 탄복하여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김수남은 일본에 들어가지 않고 한국에서 여생을 마쳤다.
65:7 고국에 돌아온 김수남 - 전대윤이 고국에 돌아온 김수남을 데
리고 태모님을 뵈러 오자 그냥 "응, 수남이 왔냐?"고만 하셨다고 한
다.
65:8 ~ 9 전선필 손자의 증언.
67:4 강휘만은 밤이나 낮이나 동네를 돌아다니며 주문을 읽었다. 주
문을 참 잘 읽었는데 산천초목이 다 울리게 읽었다.(전복추)
67:2 강삼만(姜三萬) - 원래 강휘만은 교단에서 곁방살이하던 사람
이다. 교단 성전에 조그만 방하나를 얻어서 살았다. 다른 것은 대접
할 것도 없는 형편이니 치성때가 되면 나무라도 한 짐씩 해주면서
방이라도 따습게 때라고 갖다주던 사람이다.
70:2 혈적증(血積症) - 피가 울결(鬱結)아여 된는 적병.
70:3 혈괴(血槐) - 혈액이 응고한 덩어리.
71 강사성의 며느리를 한 번 보러 오심 - 강사성의 며느리를 옥구
에서 데리고 왔다고 하니 그 며느리의 생일날 태모님께서 한 번 오
셔서 하신 말씀이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뒷바라지하느라고 고생한
다."고 하셨으나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했다.(전복추)
72:1 조왕( 王) - 신교에서 예로부터 믿어 온 부엌과 길흉화복을
맡아보는 신.
73:6 벌주실 때 일화 - 고사모님께서 문도들에게 크게 호령을 치시
고 벌을 줄 때는 담뱃대로 두드려팼는데 그렇게 맞고도 엎드러 '예
예'하며 물러나왔다.(전복추)
74:2 서까래 - 도리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보, 도리는 기둥 위
에 가로로 얹은 나무)
76:1 고민환 - 고민환이 의사 행동을 했다. 고사모님께서 처방을 내
려 주시면 대신가서 사람도 고쳐 주었으니 조종골에서 제일 높은
강응칠과 보이지 안는 알력도있었다.(강송용)
77:4 여장 - 길 떠날 차림.
77:4 귀가할 때 - 도꾼들이 순번대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데 마치
요즘 텔레비젼에 보면 각료들이 대통령께 인사하기 위해 차례차례
한 줄로 서서 기다리듯이 그렇게 했다. 문안만 드리고 가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은 영광으로 알았다.(강용)
77:5 강대용 - 성구인물
79:3 수농부 - 우두머리 일꾼.
79:3 강삼만 - 성구인물
79:6 물꼬 - 논에 물이 넘나들도록 만든 좁은 어귀.
80:1 대흥리 행차 - 밖으로는 잘 다니질 않으셨다. 차천자나 만나러
가려면 밤에 "사인교를 대령해라."해서 타고 가시는데 항상 그 뒤에
는 교대할 가마꾼들 한패가 뒤따라간다. 그리고 부용역에서 기차를
타고 정읍역에 내리면 차경석이 그 시간에 맞춰 가마를 가지고 마
중 나와서 대기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차
천자를 만나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으레 사인교가 부용역으로 모시
러 가는데 환영 나온 인파가 부용역에서부터 여기까지 장사진을 이
뤘다.(조종골 강용)
80:8 이달영의 음독자살 - 이 뒤에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달영이 서울의 오빠 이달호를 찾아가는 이달호가 동생을 걱정하
여 "곧 혁신패들이 본소를 습격할 것이니 몸을 피해 있으라."고 했
더니 달영이 거짓으로 응락하로 즉시 정읍으로 돌아와 경석에게 밀
고하였다. 이에 임경호 임치삼 등은 본소 습격 때 비밀이 누설되어
무처별 난타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때에야 이달영은 자신
의 행동을 후회하고 병원에 가서 달호를 보니 달호가 크게 꾸짖는
지라 달영이 자시의 행동을 크게 비관한 나머니 그 길로 시가(媤
家)에 돌아가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 버렸다.
81 칠성공사와 조종골 강씨들 - 칠성공사를 계기로 고민환에게 교
단 운영권과 제반 대권을 넘겨주셨다. 즉 '앞으로 보는 공사에서 네
가 주관이다'하고 일임을 하시니 문도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공사를 보고 나자 조종골 강씨 일족들이 '7년여 동안 모신 공로가
있는데 엉뚱하게 저 사람에게 맡긴다'고 반발하면서 '고민환을 몰아
내자'고 들고 나섰다. 태모님께서 고민환을 택하게 된 것은 고민환
의 정신을 보면 세상에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순진하고 착
한 사람이었다.
81:1 칠성공사 - 칠성공사는 곧 상제님의 새로운 일꾼을 내는 공사
다. 그러므로 조종골 강씨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81:2 고민환 - 고민환이 원래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민환의 호
(성포)도 태모님이 지어 주신 것이다.
81:2 내실(內室) -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
81:5 칠성공사의 청년 일곱- 태모님께서 ㅈ은 청년 일곱을 불러 공
사를 보신 것은 앞으로 ㅈ은 사람들이 나서서 상제님 일판을 짊어
지고 나갈 것을 내다보시고 행하신 공사인 것 같다.(김순자)
82 강씨들 불만 품기 시작한 시기는 - 그리하여 강사성, 강대성 같
은 사람들은 '대흥리 차경석판에서 우리가 모셔다가 우리가 욕봐서
교문을 창건해 놨는데 왜 우리에게 대권을 주시지 않고 느닷없이
고민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시느냐.'하고 그 때부터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종골 강씨들이 고민환을 죽이려는 암살 음모까
지 꾸미자 고민환이 그 사람들의 텃세에 견디다 못해 나중에는 조
종골에서 몸을 피해 도망갔다.
83 굉장한 미인이셨다. - 용모, 인물도 잘나고 외모도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잘생기시고 말도 잘해서 그 때 사람으로는 너무 잘난 사
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도 그런 여자가 있었는가 싶을 정
도이다. 키가 1미터 70정도였는데 요즘 일류 연예인, 미스 코리아도
거기에는 못 비길 정도다. 건강도 좋고 빳빳했다(키는 조금 과정된
표현이다.)(강용)
83:2 주로 입으시던 의복 - 여름에는 대개 모시를 입었다. 저고리는
하얀 것을 입었는데 치마는 하얀 것은 안 입고 노르스름한 치자로
물들여 입었다. 겨울에는 위에는 흰옷에 무슨 색인지 생각이 잘 안
나지만 검은색은 아니었다. 검은 옷은 안 입었다. 그리고 밖에는 잘
안 나왔다.(강용)
83:8 이 때 고민환은 이것이 '한 하늘에는 해가 둘일 수 없고, 땅에
는 주인이 둘일 수 없는데 한 무리의 해가 출몰한 것은 앞으로 전
제정치가 무너지고 민주정치가 이루어져 다수의 국주(國主)가 출현
할 징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한다.(『성정원경』)
84:3 고축(告祝) - 천지신명께 고하여 아뢰는 것.
84:5 행장(行裝) - 여행할 때 쓰이는 모든 기구와 비용.
85:1 출행(出行) - 태모님께서 출행하실 때는 항상 가마를 타고 다
니셨는데 그 뒤로 종도들이 흰 도포에 갓을 쓰고 따라 다녔다.
85:2 구미동(龜尾洞) - 지금의 정주시 수성동에 있음. 뒷산의 산세
가 용의 꼬리 같다.
85:5 태모님의 담뱃대 - 태모님은 조화를 쓰실 때 담뱃대를 많이
사용하셨다.
86:1 한식경 - 한 차례의 음식을 먹을 만한 시간.
87 전선필이 자손들에게 들려준 앞 세상 - 아스팔트 보도블록이 나
오기 몇십 년 전에 전선필은 이야기 하기를 "앞으로 길에 비단 같
은 고운 것들이 깔리는 세상이 온다."고 했다.(전선필의 손녀 田心
通)
88:1 교자상 - 음식을 차려 놓은 직사각형의 큰 상.
91:2 마장 - 십리나 오리가 못 되는 거리를 이르는 말.
91:2 계룡산 -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이 용화동 동북쪽에 있는
239m의 산.
91:2 미륵산 -전북 익산군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에 걸쳐 있는 높
이 430m의 산. 꼭대기에 미륵사가 있는데 삼국시대의 미륵사찰 가
운데 동양 최대 규모이다.
91:2 고달산 -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603.2m의 산.
93:1 조종골 신앙인들의 신앙관 - '도를 해야 살고 안 하면 죽는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앙하는 사람들끼리 주로 사돈을 맺었다. 이
때 강응칠도 딸 하나를 전준엽의 집으로 여의어서 사돈이 되었다.
(전복추)
93:3 상제님의 출세 - 상제님의 출세에 대해 고찬홍과 같이 잘못된
환상을 품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와서 그 몸을 버리면, 신선이 되어 올라간다 할지라도, 육신으로 오
는 것이 아니다. 상제님은 인간으로 오시어 9년 천지공사를 집행하
심으로써 새 천지의 기본틀을 다 짜 놓으시고 가을개벽의 백보좌하
느님으로서 서신사명을 마치시고 하늘의 보좌로 돌아가시어, 오직
상제님의 심법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꾼들이 일점일획 틀림 없이 도
수를 실현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태모님께서 고찬홍 성
도의 생각은 잘못되었으나 그의 고집하나만은 쓸 만한 신앙의 지조
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독톡한 고집이 있어야 생애를 바칠 수 있
는 개척자의 신앙을 할 수 있다.
93:5 담뱃대로 내려치시고 추상같이 호령하심 - 어느 날 저녁에는
태모님께서 신도들에게 벌을 주시는데 모두 꿇어 앉히시고 추상같
이 호령하셨다. 그리고 기다란 담뱃대로 내려치셨는데 그럴 때마다
문도들은 아구구 하고 매 맞는 소리를 지르며 사죄했다. (전복추)
94:2 강대용 - 성구인물
95:4 고민환의 수종- 칠성공사를 본 이후로는 주로 상의하려면 '고
민환이 오라.'고 하셔서 '어떤 공사를 보려고 하니 준비하라.' 해서
가까이 하셨으므로 고민환은 태모님 신정공사 내용을 그 누구보다
도 잘 아는 제1의 증언자가 된다.
95:4 고민환의 뱃노래
石泉盛笞하고 白雲稼耕타가 詳風瑞湖에 紫雲白帆으로
석천성태 백운가경 상풍서호 자운백범
武夷九曲을 謝別하고 桃花流水渺然去라.
무이구곡 사별 도화유수묘연거
龍華彌勒太乙仙官께서 大道德으로 廣濟蒼生하시려고
용화미륵태을선관 대도덕 광제창생
이 배 타고 오시도다.
95:6 도사공 - 뱃사공 뱃사공의 우두머리.
95:6 뱃노래 - 당시에 노래한 뱃노래 구절은 이러하다.
남조선 배질하네 남조선 배질하네
만고성인 타신배가 칠산 앞바다에 떠서 적벽화선(赤壁火船)놀던 군
졸 선인들이 노를 젓네.
조조군사가 내 군사
닻줄 맬자 누구신고 중앙대신(中央大神)이 닻줄 맸네.
천지가 뒤끓어 동갑되는 땅덩이가 둥둥 떠 들어오네.(전선필 제자
김경도 기록)
95:7 선통(先通) - 미리 앞서 통해 있는 것.
95:8 성주와 현인군자 - 이는 대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이신 아버지
상제님과 태모님의 대업을 성사시키는 주인공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주(聖主)는 상제님 도운공사의 결론인 진주(眞主 : True Lord)도
수로 출새한다.
97:6 상제님의 명정(銘旌) 일찍이 상제님께서 어천하시기 전에 엽낭
속에 '옥황상제'란 명정을 써 주신 적이 있다.
97:6 만수(萬修) - 상제님의 보호신장.
97:6 상제님의 명정 - 상제님의 명정은 천지만물의 생명을 다스리
시는 조화주 하느님, 통치자 하느님의 공식호칭인 "옥황상제"님이시
다. 이 명정은 본래 증산 상제님이 수부도수로 종통대권을 전수하
신 태모님에게 조그만 엽낭에 넣어 주신 바 있다. 이것 자체에 종
통전수의 큰의미가 담겨 있다 . 강증산은 구시대의 낡은 호칭은 구
천상제이고 상제님 성골까지 도굴하는 악행을 범한 일개 신도였던
조철제가 옥황상제라며 받들고 난도난법을 일삼는 『대순진리회』
의 박한경 이하 선감 등 철부지 신도들은 알고 있지조차 못한 태모
님의 이 말씀은 깊은 뜻을 다시 깨달아야 한다.
98 강사성의 며느리 전복추의 증언
98:1 치성음식 규모 - 보통 도집에서 치성드릴 때는 큰 돼지 두 마
리씩 잡고 어떤 때는 소를 한 마리 잡기도 했다. 가정집에서 치성
을 드릴 때는 소. 돼지는 안 잡지만 쇠머리를 삶아다 놓고 떡이나
과실을 준비하는 치성을 모셨다.(전복추)
98:3 수행에서 나타난 이적 - 주문을 정성껏 읽고 기도를 지극하게
드리면 개안(開眼)이 되었다. 신명도 환히 뵈고 다들 그렇게 봤다.
(전복추)
98:4 치성하는 날 - 치성드리는 날에는 조종골 중조마을 교당으로
간부급들이 다 모인다. 강사성의 집에서 돼지를 삶아 교당으로 가
져가곤 했다.(전복추)
98:5 음복(飮福) -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98:9 엄월법(掩月法) - 구름으로 달 가리는 법술.
99:1 보천교 혁신운동 - 보천교 때 이상호는 경성 진정원장을 지내
며 주로 총독부에 보천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변인의 역할을 했
다.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무마하기 위해서 지금 동으로 수
십억씩 총독부에 갖다 바치며 외교를 담당했다. 최남선의 시대일보
가 경영난에 부딪히자 보천교에서 인수하기로 합의를 했는데 그 매
입 문제에서 동생 이성영을 편집국장으로 하는 허가를 총독부로부
터 받아 내는 한편 신문사의 각 요직에 친분이 있던 교도들을 모아
맡기며 신문사의 전권을 점거하려 하자 교중에서 이상호의 야심을
탐지하고 중벌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호는 그 전에 있었던 총
독부의 교주 체포령과 방주 체포장을 취소하려는 노력이 없었고,
보천교 공금 압수사건 등 여러 가지 총독부와 교섭에서 교단을 위
해 대변하는 역할을 등한시하고 창신동 진정원 가옥과 대지를 자신
의 단독명의로 돌려 소유하는 등 대부분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고
다른 교단을 세우려는 뜻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때 혁신운동을 일
으키는 한편 서울 지정원을 처분하여 그 중 일부를 횡령하고 만주
로 도주하므로 이 사실을 탐지한 차경석은 이상호를 제명처분하고
출교명령을 내렸다.(『보천교연혁사』 38쪽)
99:1 임치삼, 이달호 일행의 본소 습격 - 정묘(丁卯, 1927)년 1월 10
일 이달호, 임경호, 채기두, 채규일, 임치삼 등이 장정 10여 명을 거
느리고 자동차 두 대로 본소 정문 앞에 내려 정문을 때뜨리고 돌입
하여 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무수히 구타만 당하고 물러났다.
경석의 교판에서 내동방주(內東方主)로 있던 이달호의 여동생 이달
영이 교주 경석에게 밀고하였던 것이다. 이에 경석은 미리 정문앞
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가 경호 일행이 정문 앞에 이르자 갑자기 문
을 열고 몰려나가 고춧가루를 눈에 뿌리며 망치로 무차별 난타하여
경호와 달호는 머리가 깨지고 임치삼은 팔이 부러지는 등 부상을
당하고 채기두와 채규일은 도망치고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기
절하였다.(『증산교사』118쪽)
99:1 '보천교(普天敎)'. - 경석은 대흥리 집에서 머물며 태모님을 내
몰고 1919년 60방주를 임명하여 교단조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 천제를 봉행하였으나 1922년 교단 공개 때 '보천교'로 개
명되었다.
101:1 전선필은 대흥리 교단 때부터 상제님 신앙을 시작하였다.
101:1 전선필 - 집안의 장남이었다. 태모님께서 "수제장(首濟丈)"이
라는 도호를 주셨다.(전선필 손녀 田心通)
101:1 전선필 - 성구인물
101:3 성도들이 부르던 명칭 - 태모님을 모시던 성도들은 평소에
'어머니' 혹은 '사모님'이라고 했다.
101:6 전선필, 노래를 아주 잘함 - 전선필은 노래를 매우 잘 불렀
다.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나락을 벨 때 뒤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할 정도로 유달리 감정이 풍부하게 잘 불렀
다.
101:6 전선필의 증언 - 상제님 신앙인 김경도는 1964년 3월에 고민
환을 만나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고 태모님 행적을 듣던 중에
1966년 2월에 뜻밖에 고민환의 부고(訃告)를 받았다. 이에 다시
1966년 6월 25일 고민환의 집 마당에 덕석을 깔고 청수만 올린 후
전선필과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고 그 자리에서 한 말씀도 빠짐
없이 기록하였다. 전선필이 글자를 몰라 일자무식이었으나 기억력
은 특출나게 뛰어나 한 번 듣고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그
어려운 한문도 뜻도 모르는 채 노래하듯이 다 외울 만큼 보기드문
수재였다.
102:6 그 때 신앙했던 사람들은 정성이 지극하여 귀신 경계를 다
봤다.
102:6 교사초기의 태을주 포교 - 그 때는 무슨 병이고 앉아서 태을
주를 일주일만 읽으면 다 나았다. 태을주의 신이한 권능에 힘입어
급속도로 포교가 이루어졌다.(선도 신앙인 윤기택)
102:6 일반신도들의 수행 - 그 때는 으레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해
서 청수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꼭 사기로 만든 청수그릇에 올리고
주문을 읽었다.(전복추)
103:3 고재우(高在愚 道紀 50 ~ 119, 1920 ~ 1989). 당시 여덟 살이
었다.
103:3 습종(濕腫) - 다리에 나는 부스럼의 한 가지.
104:1 강원섭 - 성구인물
105 인마공사 강응칠의 아들 강정용과 손자 강기섭의 생생한 증언.
105 상제님 공사에도 "난리 치나 안치나 말(馬)이 들어야 성사 하
느니라. 말에게 이기고 지는 것이 있다." 하신 말씀이 있다.
105 키가 크고 말하는 소리가 점잖게 호령을 하면 우렁우렁하고 울
렸다. - 주로 치마를 입고 다니셨는데 치성이나 병자치료가 아니면
동네에는 잘 다니지 않으셨고 어쩌다 동네를 돌아 다니실 때는 그
큰 치마를 '휘휘' 휘두르시고 다니셨다. 동네 사람들은 무서워서 근
처에 가지를 못했다. 교당 안에는 항상 같이 기거하는 사람들이 몇
몇 있었다. (전복추)
105:6 당산나무 - 당산에는 지금도 어른 팔로 서너 명이 둘러서야
할 정도로 굉장히 큰 아름드리 당산 나무가 있다.
107:2 고민환 - 고민환이 우두머리였다.(강기섭)
107:2 고민환 ①고민환이라고 하는 사람이 대장이었다. 옥구 미제
살았다고 하는데 평소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 사람 아니면
아무것도 못했다.(전복추) ②고민환이 비서였다. 고사모 방에는 고
민환만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못들어갔다.(강용)
108:1 손방(巽方) - 동남방.
108:1 이경 오후 9시 ~ 11시
108:1 신앙분포 - 교인들은 대부분 남자들로서 여자는 거의 없었다.
남자들이 믿는 집안의 안사람들도 잘 참석하지 않았고 치성 때가
아니면 애들도 자주 출입을 않았다.(전복추)
110:10 척( ) - 남의 기분에 거슬려 미움을 사는 언짢은 사소한 모
든 말과 행동을 비롯하여 생명을 해하는 살기. 원한의 기운.
111:4 천지정위 수부손님 - 우주의 생명구조의 기본틀인 하늘과 땅
과 사람 삼재(三才)의 지신시묘(至神至妙)하고 무궁한 생명의 조화
성을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으로 인격화하여 지존으로
부르는 말.
112:5 그러므로 천지에서 올바르게 이 세계의 근본을 바로잡자 하
면 살아날 자가 별로 없다는 말씀이다.
114:3 포덕(布德) - 하느님의 덕을 세상에 폄.
114:8 폐백(幣帛) - 제자가 처음 뵙는 선생에게 올리는 예물.
115 이 일을 고민환이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인 1960년에 『선정원
경』에 스고 죽었다.
115:6 고민환은 당시의 재력이 있는 500석지기 부호가로서 항상 갓
을 쓰고 다니는 양반이었으므로 태모님 앞에서 그 전에 남의 여자
를 유인하여 간통한 일 등을 고하지 못했다.
115:7 동곳 - 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꽂는 물건.
115:8 산옥(珊玉) - 산호 동곳을 말함.
115 참고『선정원경』-『선정원경』은 고민환이 작고(1966년 2월29
일에 사망)하기 6년 전, 봄부터 여름까지 들어앉아서 쓴 것이다.
115:9 입적(入籍) - 호적에 올리는 것.
116:3 진액주(津液呪) - 오주(五呪)를 말함. 상제님께서 '이 글은 천
지의 진액주 니라.' 하심.
118:4 미륵불 화재사건 1934년 3월에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어
38년 9월에 다시 중수 하였다.
119 증산상제님 어진 봉안과정
첫 번째 봉안 : 1월 3일 : 혼도하셨다 깨어나시어 어진
봉안을 지시.(김옥현이 초본)
2월 : 어진은 다시봉안할 것을 지시.
3월 1일 : 채정산을 데려다 다시 그리게 하심.
3월 24일 : 세 번 강정하신 꿈에 허락하심.
3월 26일 : 태모님 성탄절에 봉안
두 번째 봉안 : 해방 후 제 2변 부흥시대를 여신 안운산
종도사님께서 무자(戊子:道紀 78, 1948)
년에 서산 사람 김양재(金良在)화백으로
하여금 어진을 그리게하여 이 해 동짓 날에
봉안식을 올렸다.
세 번째 봉안 : 20년의 대 휴게기를 끝내시고 제3변
부흥시대를 여신 안운산 종도사님께서
다시 2변 때 모신 어진을
이은택(李殷宅)화백으로 하여금 개사케
하셨고, 경오(庚午:道紀120,1990)년
음력 10월 9일에 곤룡포를 입으신
상제님으로 개사하여 모셨으나 종도사님의
뜻대로 그려지지 못하여 신미(辛未 : 道紀120,
1991)년에 이은택 화백이 새로 개사하여
모시게 되었다
.(상제님 어진의 진본이 나오기까지의 속 썩인
사연만 몇가지 정리해도 책 한 권 분량이 넘을
것이다.)
119:4 어진(御眞) - 임금의 화상이나 사진.
119:4 김옥현 - 성구인물
119:8 채용신(蔡龍臣, 1850 ~ 1941) - 조선말기의 화가 초명은 동근
(東根). 호는 정산(定山). 채용신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하여
처리하고 얼굴에 백광(白光)을 주는 점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그린 화백이었다. 채정산은 평소에 고종황제의 어진을 그렸다 해서
종종 자랑하여 말하기를 "내 손에 금이 묻었다.""내 손이 금 손이
다."라고 했다.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재냈다. 흥선 대원군, 최익
현, 최치원, 김영상 등의 초상 이외에 60여 점을 그렸다.
119:11 문도들이 그를 조종골로 데려오자 태모님께서 채정산에게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영정을 잘 모셔라." 하셨다.
119:12 의관범절(衣冠凡節) - 옷과 갓, 곧 옷차림의 형식.
119:12 그런데 그림이 완성될 때쯤이면 태모님께서 방에 들어오셔
서 그림을 보시고 아무말씀도 없이 담뱃대로 그림을 휙 걷어 버리
셨다. 이렇게 두 번이나 걷어 버리시므로 정산이 화가나서 그림을
안 그리고 돌아가려고도 했다. 그렇게 석 달 간을 고생한 끝에 세
번째 어진을 그려서 문도들이 올리며"이 정도면 되겠습니까?"하고
아뢰니 비로소 승낙하시어 모시게 됐다.
119:13 나는 옥황상제니라 - 대순진리회 난법자들은 상제님의 일개
신도였던 '조철제가 옥황상제라'고 천권(天權)을 조작하여 증산 상
제님의 신권과 종통줄을 난자질해 왔다. 도조를 제출세의 도구로
삼아 저지른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하늘 땅이 열린 태초 이래 동
서 인류문화사상 최대의 환부역조와 배사율의 범죄 사건이며 사기
극이다.
120:2 대풍창 - 문둥병.
121:1 이용기 - 성구인물
124:2 진설(陳設) - 제사나 잔치 때에 음식을 법식에 따라 상위에
벌여 놓는 것.
124:3 두락(斗落) - 마지기
124:3 가사(袈裟) - 중이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옷.
124:3 강진용 - 성구인물
125:1 칠보산 - 정읍군 칠보면 수청리에 있는 산.
126:1 자천대 - 옥구군 옥구면 상평리에 있음. 큰 반석이 있고 그
밑에 좋은 샘이 있는데 최치원이 이 곳에서 놀았다고 전함.
127:2 동북하늘 - 동북하늘은 장차 세계통일의 질서를 여는 구심점
으로 지구촌의 동북 간방인 한국땅을 상징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127:4 기화이초(奇花異草) - 진귀한 꽃과 풀.
127:6 강춘택 - 성구인물
129:1 김수열 - 성구인물
129 방문 앞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심 - 태모님이 계신 본소의
앞마당에는 어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셨다. 성도들도 대문
에 들어서면 정면 마루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뒷문으로 출입했
다. 그것은 대신명이 오고가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
제님께서 구릿골에서 천지공사를 집행하실 때 그누구도 범치 못하
게 하신 것과 같다. 만약 누가 앞으로 지나가면 보이지 않는데도
갑자기 "그 앞에 어떤 놈이 지나가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129:4 태모님의 담뱃대 - 전선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모님의
담뱃대로 한 대만 맞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한다. 얼마나 아
픈지 벼락 맞은 것처럼 머리가 찢어지는 것 같아서 아예 '아무 것
도 안 보인다'고 한다. 그래도 상처 하나 남는 법이 없고 어느 때고
태모님의 담뱃대로 맞기만 하면 '제정신이 번쩍 들고 그렇게 기분
이 맑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운을 붙여 주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무서우니까 피해 다니려고만 했다.
130:2 조직개편 단행 - 초장기에 태모님을 모시고 온 조종골 강씨
들은 점점 감투욕과 공로를 내세우고 또 대부분 의식구조가 도통이
나 권력욕에 젖어 가기 시작했다.
태모님께서 몇 차례 주의를 주시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게 하셨음
에도 불구하고 개심의 기미가 없고 교단의 기운이 묵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나머지 8년 만인 1928년 5월에 갑자기 인사이동을 시
키시고 간부개편을 단행하셨는데 조종골 초창기 신도중 강원섭 한
사람만이 간부에 등용되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불만을 늘어
놓고 고민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130:4 조종골 말기 고민환의 생활 - 말기에 이르러 조직개편과 함
께 사태가 악화되자 조종골 강씨들이 고민환을 해치려고 하니 태모
님께서 공사 보러 가시기 전에 고민환을 병풍뒤에다 숨겨 두고 나
가셨다. 고민환은 겁을 집어먹고 야밤에 도주를 해버렸다.
131:3 강칠성(姜七星) - 1940년 경에 오지에 떠남. 큰 아들 이름이
강휘두.
133:9 산증(疝症) - 아랫배와 불알이 붓고 아프며 오줌이 잘 내리지
않는 병.
134 숙구지 공사 - 1928년의 대폭적인 인사이동 이후로 더욱 모략
과 불평이 심해서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시기 어렵고 상제님 대업
의 추수운을 열어 주시기 위해 태모님께서 상제님이 천지공사의 매
듭도수로 전하신 것을 신정으로 그 문을 열어 주신 것이다.
134 숙구지 공사의 참의미는 - 난법시대를 문닫고 증산 상제님의
세계통일 문화시대의 천명을 집행하는 후천개벽을 실현하는 핵심공
사로 '대사부(大師父)의 출세'에 대한 인사 도수이다.
134 숙구지(宿拘地)의 위치와 유래 - 현재 위치는 전북 정읍군 신
태인읍 화호리(禾湖里) 화호마을이다. 옛날에 전라도에서는 '숙구지
(宿拘地)에 산다'고 하면 사람 취급을 안 했다. 숙구지 사람들은 야
산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살았는데 거기서 나온 감자를 '숙구지 감
자'라고 했다. 그리고 흔히 못난 사람을 '숙구지 감자 같은 놈'이라
고 할 정도로 박대를 받고 살았는데 그 자리의 혈(穴) 이름이 '숙구
지혈(宿拘地穴)'이다. 조선말기에 한 도사(李書九라는 말이 있음)가
부안 변산과 고부 두승산의 상세를 둘러보고 근처의 지형을 살펴본
후에 대양구지, 흙구지, 진구지, 돌구지, 거멍구지, 역구지, 숙구지,
서구지, 미륵구지 등 아홉구지(九句地)의 이름을 지어 주고 이 곳에
는 숙구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숙구지는 '개가 잠자고 있는 형상'인
데 '개가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라하여 '숙구지(宿拘地)'라 불렀
다고 한다.
134:2 고수부님의 객망리 방문 - 태모님께서 숙구지 신정공상를 보
시기 위해 조종골을 떠나시는 길에 객방리 손바래기를 찾아가셨다.
그 때는 수부님께서 교단을 여시고 계시다니까 대접을 극진히 했다
고 한다.
134:2 숙구지 공사의 절실함 - 숙구지 공사가 당시에 얼마나 절실
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조종골에서 객망리로 가시면서도 '"내가
숙구지 공사를 보아야 하느니라"고 누차 일러 두시고 길을 떠나셨
다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태모님의 생애●
도기10(태모님연세 1세) 단기 4213년 경진(庚辰 : 道紀 10, 1880)년
음력 3월 26일 전라도 담양군 무면
선도리에서 탄강하심. 2:2
도기15(태모님연세 6세) 유소시 이후
9. 27. 부친 고덕삼 돌아가심. 2:7
진외가 송씨 승문에서 어린시절 보내심. 2:7
도기18(태모님연세 9세) 대흥리 이숙 차치구의 집으로 가심, 2:8
도기24(태모님연세 15세) 11. 신씨와 결혼, 2:10
도기30(태모님연세 21세) 3. 태종 출생.
도기37(태모님연세 28세) 상제님 만나신 이후.
10. 태인 행단에서 경석에게 '수부를
들여세우라.' 하심. 3:1
11.2. 상제님 만나심. 4:16
도기40(태모님연세 31세) 6.24. 상제님 어천. 7:1
6.30. ~ 7. 상제님의 성령이 찾아오심. 7:9
9. 수행중 상여와 초빈을 보시고 구릿골로
찾아가 초빈을 열고 '옥황상제' 명정을
덮어 드림. 10:12
도기41(태모님연세 32세) 신경수의 집에서 활연대각하심. 14:13
성령감응과 대흥리 첫째 살림
9. 20. 성령감응과 첫 말씀(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16:8
9. 25. 약방의 약장과 궤를 가져오심.
김수부 사망, 21
9. 29. 대흥리 첫째 살림
성도들을 소집, 교단창립을
선포하심. 24:10 ~ 13
도기45 경석의 교권장악
음모와 법소 이전운동(원평, 장성)
30 ~ 32
도기48 9. 19. 김제군 공덕면 송산리 천종서의
집으로 가심.33:9
10. 백산면 조종리 강응칠의
집으로 가심. 34:9
도기49(태모님연세 40세) 윤7. 성전 완공과 조종골 둘째 살림.
37:2
8. 고민환의 입도, 38:1
통사동 재실에 들러 난법자를
꾸짖으심. 40
도기56 3. 고민환을 수석성도로 내세워
칠성공사를 보심. 81
도기58 1. 3. 어진 첫 봉안(김옥현) 119
2. 어진 2차 봉안(채정산) 119:6
4. 후천선경을 보여 주심. 127
5. 조직 개편을 단행하심. 130:2
9. 숙구지 공사. 134
도기59(태모님연세 50세) 9. 19 대흥리로 옮기심. 168:6
? 중국신명의 음모를 추방하심 166
도기60 이상호, 시봉을 원하여 사람을
보냄, 178
도기61(태모님연세 52세) 9. 17 용화동 1차 왕림. 186
11. 14 용화동 셋째 살림.(통합교단) 191
도기63(태모님연세 54세) 11. 이상호에게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하라.'
고 당부하심. 219
11. 동지. 오성산 도장으로 은거. 222
도기65(태모님연세 56세) 10. 5. 선화하심 243
134:3 여름살이 - 여름에 입는 베나 모시로 만든 홑옷.
134:4 전선필의 증언 - 태모님께서 그 공사를 보실 무렵에 "잠자는
개를 깨워 놓으면 호랑이를 쫓느니라."고 상제님 말씀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135:2 '빵빵' 쏘신 공사의 의미 - 이것은 곧 27년 간의 난법 헛도수
의 종극을 고하는 사형선고이신 것이다. 실제로 그 후부터 차경석
교단의 유지가 힘들어지고 차경석이 뒷감당을 못할 정도로 쇠퇴 일
로를 달렸다.
135:2 신로변경에 따라 기운을 거두심 - 무진(戊辰,1928)년 1월에
경석은 간부들을 소집하여 종래로 표방하여 오던 해원(解寃), 상생
(相生)의 교의(敎義)를 폐기하고 새로운 교의체계를 세운다는 무진
설법을 행하고 일부의 정역에 맞춘 유교적인 교의를 세워 신로를
변경하였다. 또 하루는 경석의 아내 이씨가 영안으로 보니 치성날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三皇五帝神)이 들어오는데 그분이 곧
차치구였다는 것이다. 경석은 이 말을 깊이 믿고 신심이 흔들려 증
산상제님을 배반하고 부친 차치구(車致九)를 신앙대상으로 하고
상제님의 성탄절 9월19일, 어천절 6월24일을 치성일에서 제외할 것
을 선언하는 등 상제님께서 염려하신 배신의 기미가 이 때부터 태
동하기 시작했다.(『보천교 연혁사』하권 2쪽)
135:2 보천교 새 건물 십일전의 규모 - 십일전의 본체 건물은 가로
30m, 세로 16.8m로 단을 규모로는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컸다고
한다. 대들보의 길이만도 14.4m에 달했으며 높이가 6미터 였다. 경
복궁 근정전이 7보5칸인데 비해 십일전은 9보7칸의 2층이었고 보통
은 8척 기준으로 한 칸을 잡는데 십일전은 16척을 한 칸으로 잡았
으므로 실제 규모는 근정전의 두 배에 해당되었다. 또한 방위는 오
좌자향(午坐子向)르로 후천의 운수를 상징했고, 방의 칸수는 총 186
칸으로 아흔아홉 칸 궁궐보다 더 크게 지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어
마어마한 건물을 지어 그야말로 '아방궁'과 '동작대'를 연출했다. 그
밖에도 정화당(井華堂), 총령원(總領院), 총정원(總正院), 태화원(泰
和院), 연진원(硏眞院)등 45동의 부속건물이 있었다.
136:1 박노일 - 태종의 남편 곧 태모님의 사위.
137:2 전대윤 - 태모님 봉행은 주로 전대윤이 하고 문명(文命)은 주
로 고민환이 썼다.
137:2 전대윤 - 전대윤은 대흥리 태모님 교단에서부터 신앙을 시작
했다. 본격적으로 태모님을 모시게 된 것은 조종골에서부터인데 주
로 내수시종을 들었다. (전대윤의 손녀 金純子)
141:1 부종(浮腫) - 어떤 부위의 혈액순환의 탈등으로 전신이나 국
부의 살속이 붓는 병. 부증(浮症).
142:2 무기(戊己) - 하늘의 기(氣)의 움직임 중 중앙에 위치하여 조
화를 일으키는 토(土).
142:2 무기토(戊己土). 무기는 중앙 오십토(五十土)로 음양 토이다.
천지의 만물생성의 원리도 음양의 조화로 일어나듯 모든 조직의 근
본정신도 중앙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상호 일체 상생정신으로 살아
움직일 때 천지의 큰 덕성과 함께 길이 창성할 수 있다.
146:6 성포(聖圃) - 태모님께서 지어 주신 고민환의 호.
146:8 종도들 앞에서 상제님을 칭할 때는 언제고 "너희 아버지"라
고 하셨다.
146:7 고민환 - 고민환은 순전히 학자였다. 잔꾀가 없었고 순수하게
신앙의 길을 따르려고 했다. 중간에 도통을 해 보려고 한 적은 있
었다. 그 때는 주로 도통(道通)이 신앙의 목적이다시피 했기 때문이
다.
147:1 어른거려서 - 일심을 가질 때(태을주 등의 주문을 생활신앙
으로 잘 읽거나, 상제님 대업에 일심할 때) 이 말씀의 경계를 잘 느
낄 수 있다. 밤에 자다가도 신안(神眼)이 열리며 눈을 감고 있음에
도 온갖 스치는 사물, 옆에 싸 놓은 책 속의 내용, 천정의 무늬, 신
문의 작은 글자 등이 너무도 생생히 총천연색으로 보인다. 일심으
로 취정(聚精)이 되면 마치 잘 보이는 도깨비 쌍안경을 눈에 달아
놓은 것처럼 아른거려 처음에는 깊은 잠 속에 들기도 어렵다. 그
런 의미에서 "대저 모르는 것이 편할지라."하신 상제님 말씀 그대로
무엇보다 먼저 순진하고 의롭게 양심껏 사는 삶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147:4 판밖에서 - 사기꾼, 난법자들이 몇십 명 모아 놓고 판밖에 운
운한다. 상제님과 태모님이 종통전개의 도운(道運)으로 말씀하신 판
밖이란 당대 상제님과 태모님의 성도들의 순교 이후 상제님을 대행
한 심법을 가진 대사부와 일꾼들이 나와 제 3부흥시대를 개척하여
지난날과는 전혀 판국이 다른 인류 문명사의 새역사를 열 것을 말
씀하신 것이다.
147:3 ~ 6 판 안과 판밖 - 전선필의 전언에 의하면 태모님께서 항
상 "너희들 가지고는 안 되느니라. 판밖에서 성공해서 들어와야 되
느니라." 하시므로 하루는 종도들이 "그러면 우리는 다 소용이 없습
니까?"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울안에 들어 있느니라."하
셨다 한다.
147:6 상제님 천지공사의 근본정신인 3변성도의 원리에 의해 도성
덕립이 되는 제3의 부흥시대 까지 도운을 개척해야 하므로 말씀을
안 하신 것이다.
151:1 대순전경 편찬 - 이상호는 자료수집만 하고 『대순전경』을
책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작업은 주로 동생 이정립이 했다는 말이 전
한다. 이상호는 일찍이 청맹과니가 되었고 근대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근거 있는 말이라고 본다.
151:1 대순전경 출간 - 이성영(정립)은 서울로 올라와 상호가 수집
한 자료를 정리하고 편집하여 출판허가를 신청하였더니 총독부에서
는 시국(時局)에 저촉되는 구절을 많이 삭제한 후 기사(己巳 : 道紀
59, 1929)년 3월 16일에 출판을 허가하였다. 이에 곧 인쇄에 부쳐 6
월 24일 어천절 치성석에서 발행하였다.
151:1 대순전경의 문제점 - 『대순전경』이 지난날 증상 상제님 진
리를 밝히는 데 많은 공덕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제님의
본연의 대도를 창명(彰明)하기에는 상제님의 호칭문제를 비롯하여
너무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 째,『대순전경』은 기록자가
정확한 답사를 통한 검증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1편,
2편에 나오는 이치안, 최운익에 관한 기록만 보더라도 지명과 상황
에 대한 기술이 한 성구에 무려 다섯 군데 정도 잘못된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둘째, 단순한 사실(fact)의 기록에 머무는 기술방식(記
述方式)으로 유교적 사고방식에 침식된 역사의식의 한계(한민족사
의 뿌리사에 대한 무지)를 뚫지 못하였으며, 또한 한문투로 상제님
언어를 각색하여 평이한 일상언어에 생동하는 혼백을 불어넣어 말
씀하신 상제님의 무변 광대한 인격과 신격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셋째, 모든 것은 이상호, 이정립의 동화교와 용화동 중심으로 기술
하고, 상제님이 매듭공사로 말씀하신 도운의 제 3부흥시대를 여는
숙구지 태전(太田)공사에 관한 일부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본인
들도 생존시 알고 여러 사람에게 발설하였다)이를 모두 뺐다. 넷째,
상제님의 무한한 조화 권능의 세계로부터 나온 상제님의 언어세계
를 채색하여 이해의 시각을 좁혀 놓은 많은 성구를 찾아볼 수 있
다. 다섯째, 이상호가 성적을 수집할 때 김형렬 성도 등과 인간관계
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김형렬 성도 가족 증언)성도들이 그를 경
계하여 제대로 상황을 구술해 준 사람이 드물었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제님께서 일부 주요 성도들에게 도수를 붙이시고
'마음을 황화수처럼 깊게 가지라'고 경계하심으로써 많은 핵심말씀
들이 기록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51:1 이상호와 이중성 - 당시 상제님 성훈말씀을 수집한 인물은
이상호, 이중성이다. 이상호는 을모(乙卯:道紀45,1915)년에 대흥리
선도교에 입교하여 9년 간 보천교를 신앙하고 을축(乙丑:道紀 55,
1925)년 김형렬의 미륵불교에 입문하여 김형렬 성도로부터 말씀을
들어 1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병인(病寅 :道紀 56, 1926)년에 『
증산천사공사기』를 출간하고 다시 기사(己巳:道紀59, 1929)년 3월
에 『대순전경』초판을 출간했다. 이중성은 무진(戊辰:道紀 58,
1928)년 동지에 보천교에 입문하여, 3년 후인 임신(壬申:道紀 62,
1932)년에 세상을 떠난 김형렬 성도로부터 주로 성언을 수집했다고
한다.(이중성의 딸 이옥수 증언)
(이상호와 이중성은 한때 함께 정읍에서 살며 서로 자주 오갔고,
초판 이후에 두 사람이 성언 수집 과정에서 만나 수집한 상제님 행
적에 대해 함께 도담을 나눈 적이 있었으며, 이것이 먼저 책을 쓴
이상호에게 『대순전경』초판 이후 성구자료에 일부 도움을 주었다
는 주장도 있다.)
152:5 오성산에 얽힌 일화 -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正方)이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을
공략하기 위하여 금강(錦江)을 거슬러 지금의 하구둑에 이르자 갑
자기 폭풍이 일어 닻을 내리고 상륙하여 진군하던 중, 이 곳 정상
에 오르니 한가로이 장기를 두고 있는 다섯 노인이 있어 "사비성을
가려면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내 나라를 침공하려는 적장(敵將)
에게 어찌 길을 일러 주겠는가!" 하고 꾸짖으니 이에 크게 노한 소
정방은 장검을 뽑아 다섯 노인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소정방이 이
들을 죽인 후 군대를 거느리고 떠나려다 뉘우치고 이 산에다섯 노
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었는데 후일 백제인들이 이 다섯
노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묘를 나란히 쓰고 오성인묘(五聖人墓)
라 칭하고 매일 제사를 지냈으며 이 산 또한 오성산(五聖山)이라고
불렀다. (오성산 정상에 자리한 '오성(五聖)의 묘비명'에서 발췌)
152:8 건각증 - 다리를 절뚝거리는 증세. 절름발이.
153:18 도자(道者) - 도교를 신봉 수행하는 사람, 도교 문화의 뿌리
는 동방 조선의 신교 삼신 문화이다. 삼신 사상에서 도교의 삼청
(三淸)사상이 전개 되었고 신선불사에 대한 동경이 동방 종주산이
자 삼신산인 백주산을 중심으로 발현하여 중국의 방술가에 의해 봉
래산, 방장산, 영주산 운운하며 신선극락의 이상처로 불리워진 것이
다.
153:2 장점(丈點) - 순장 바둑에서 배꼽점을 일컫는 말. 순장 바둑
이란 우리나라 고유의 바둑으로 첫 점을 한 가운데 장점에 둠으로
써 시작한다.
155:1 십일전 완공과 대규모 이주 - 무진(戊辰:道紀58,1928)년 가을
부터 '기사년 3월 16일 경석이 천자등극식을 거행한다'는 소문이 전
국에 퍼져 각지에서 대흥리와 그 부근 지역으로 5~6천 호가 이주하
였다. 그러나 성전 봉안식과 천자등극식이 총독부의 저지로 실패하
자 이주하여온 수천 호의 보천교 신도들은 생계를 잇지 못해 기근
에 시달렸다.
155:2 벽곡 - 곡식은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날로 먹고 사
는 일.
155:4 우거(寓居) -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
156:4 임경호, 보화교 60방주중 해주(亥主)를 맡았으며 총령원장까
지 지냈으나 차경석과의 충돌로 탈퇴하여 보천교 혁신운동의 주동
인물이 된다. 이상호와 손잡고 동화교 교단설립에 참여하였고『대
순전경』제호를 썼다.
156:7 지방신 - 지방신도 그 신격(神格)이 제각기 다르다. 한 나라
의 지방신도 그 위격이 다른 것이다. 지방신의 최고 주권자는 지구
촌 각 나라(민족)의 수호신이다.
157:14 강필문 - 강필문은 고민환과 서당을 같이 다닌 죽마고우(竹
馬故友)였다. 강필문이 공사를 참관한 후로, 신앙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태모님을 존경하고 있었다. 태모님께서 선화 하신 후에
하루는 성덕면 주재소 일본인 주임이 부하들을 이끌고 오성산 성전
으로 찾아와서 교단활동 금지를 요구하며 어진을 소각시키기 위해
상제님 어진을 떼어 주재소로 가져갔다. 그래서 고민환이 당시 성
덕면장인 강필문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고 상제님 어진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강필문이 나서서 중재했고 그 결과 어
진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158:2 망건 - 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오지 않도록 머리
에 두르는 그물 모양의 물건.
159:1 원형이정(元亨利貞) - ①사물의 근본원리 ②주역에서 말하는
천도의 네 원리. 곧 '원'은 봄으로 만물의 시초. '형'은 여름으로 만
물의 자람. '이'는 가을로 만물의 결실. '정'은 겨울로 만물을 거두어
쉼.
160 무슨 공사인지 일러 주시지 않음 - 생존 문도 전선필, 이용기,
김수열 등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무엇을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일러 주시지도 않고 '너희들이 깨치라.' 하시므로
알아볼 생각도 못했다.
161:5 시천주의 천주는 상제님이다. 증산 상제님께서 "동학주의 시
천주조화정은 나의 일을 이름이니라." (3편 129:9)고 하셨다.
161:9 지신주 - 예고신(曳鼓神) 예팽신(曳彭神) 석란신(石蘭神) 동
서남북중앙신장(東西南北中央神將) 조화조화운(造化造化云) 오명령
훔(吾命令훔)
168:3 조종골 떠나신 무렵 - 강휘만의 얘기에 의하면 고수부님께서
조종골을 떠나실 때는 논 한 마지기도 없었다고 한다. 저희들 하자
는 대로 안하므로 그나마 부쳐 먹던 소작답을 다 뺏어 버렸다고 한
다.
168:4 도집 재판사건 ①오두막집 주인이 찾아와 강응칠을 상대로
고소했다. 결국 재판으로까지 번졌으나 원래 도집을 지을 때 여러
신도들의 성금을 모아(公的)으로 건축하였으므로 강응칠이 패소(敗
訴)하였다. 벌금 또는 구금의 형을 받았으나 그 아들 강대용(姜大
容)이 대신 잡혀 들어가서 6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왔다. (강응칠의
손자 강기섭) ②그 때 강응칠의 아들이 도(道)하다 답혀가서 6개월
동안 징역을 살면서 새끼만 꼬다가 나와 손이 껍데기가 다 벗겨지
고 핏줄이 다 나왔다.(전복추)
168:7 강휘만 - 강휘만은 원래 상조에 살았다. (강송용)
168:7 교당을 처음으로 물려받은 사람은 강응천(강휘만)이다. 강응
칠과 4촌간이다.(강송용)
168:7 곁방살이 - 일년에 하루나 이틀, 남의 집 치성 때나 제사 때
나무나 품일을 해주고 그 댓가로 귀퉁이 방 하나 얻어서 살아 가는
것.
168:7 강휘만은 몇백 명이 지내던 큰 살림을 갑자기 맡게 되자 주
체를 못해서 후일 행랑채를 헐었다 한다.
168:7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에는 - 조종골 도장을 강응칠
에게 맡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부인신정기』는 고민환
으로부터 구술을 받아 이정립이 정리한 것으로 그 때 고민환은 조
종골 강씨들에게 쫓겨 옥구로 가고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고 이정립에게 진술한 것이다.
168:7 강휘만 ①강휘만이라는 사람이 도집을 물려받았다. 그 사람은
원래 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경위로 교당에 살면
서 신앙을 했다. 주문을 잘 걸걸하게 잘 읽었는데 돌아다니면서도
읽고 다니므로 동네에서는 미쳤다고 했는데 속은 있었던지 고사모
가 떠날 때는 그 집을 물려받아서 살았다.(강사성의 자부 전복추)
② 강휘만이 일자무식이어서 태모님 선화 후에도 저녁이면 꼭 일어
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시천주주(侍天主呪)를. "시천주 조화정 영세
불망 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하고 그것만 외웠다.
169 강사성의 죽음 - 강사성의 호는 석봉(石峰)이다. 1956년에 죽었
는데 그가 죽자 조종공에서는 '강씨 마룻대 부러졌다.'고 난리가 났
었다. (전복추)
196:2 강응칠 태모님 떠난 후 이사 감 - 강응칠은 태모님이 조종골
을 떠난 후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김제군 진봉면 초전리로 이사 갔
다. 피난을 간 것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서 한 20년 살다가 돌아가셨
다.(강응칠의 손자 姜基變)
169:4 당시 강대용의 동생과 큰 아들은 17, 18세로 동갑(同甲)이었
는데 도집 사건이 일어날 때 큰 아들은 혼인까지 정해 놓고 세상을
버렸다.(강기섭)
170:1 고민환은 본가에 일이 있어 - 칠성공사를 보신 이후로 조종
골 강씨들이 급기야는 고민환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러므로 고민
환이 일찍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고부인신정기』에
서는 아파서 잠시 휴양차 갔다고 기록하였다.
171:2 참사람 - 아버지 상제님과 어머니 수부님의 종통맥을 계승한
일꾼들을 말한다.
171:3 용공부(用工夫) - 겪어 보고 느끼는 공부.
173:1 강재용 - 성구인물
173:4~8 이 말씀의 삼신은 어떠한 삼신인가? 이를 체험할 수 있으
면 천지생명의 조화기틀의 바탕을 깨는 것이다.
174:2 견비통 - 어깨부분이 아파서 팔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신경
통.
176:2 심지(心志) - 마음에 품은 의지, 뜻.
176:4 과보(果報) - '인과응보'의 준말.
177:1 전기찬 - 성구인물
177:2 전선필, 전기찬, 전준엽 - 옥구군 옥구면 오곡리(五谷里)에 한
새울(예전에는 수산리에 병합)이라는 곳이 있다. 뒷동산으로 봉두산
이 이어져 있는데 예전에는 그 산속 마을에서 한새울 전(田)씨들만
열댓 가구 모셔 살았다. 이 곳 한새울 전(田)씨들이 태모님을 모셨
다. (전복추)
177 전선필에 자손에게 들려준 말 - 하루는 전선필이 산에 올라가
서 말하기를 "역골 동네 앞으로 흐르는 만경강이 막혀서 농토로 바
뀔 것이다."하고 태모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지금은 그 곳이
개간지가 되어서 전답이 들어섰다. (전선필 손녀 田心通)
177:6 전선필이 원래는 침을 놓는 의원 노릇을 했다.(전심통)
178:2 용화동에서 태모님을 모시려던 의도 - 태모님께서 50세에 정
읍 대흥리에 가셔서 52세까지 계셨는데 그 때 이상호 동화교 교단
에서 『대순전경』초판을 발간하여 태모님을 모셔야겠다고 몇 차례
사람을 보냈다.
『대순전경』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세 살림을 인식하게 된 것이고
성도들과 달리 취약한 상태에서 교단문을 열었기에 정통성을 확보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태모님 종도들의 주장)
178:3 금구 - 상제님이 공사 보신 구릿골과 용화동 지역이 금구군
이다. 현재는 김제군 금산면이다.
179:1 경풍(驚風) - 어린아이가 놀라고 토(吐)하고 사(寫)하는 병.
뇌척수 질환, 발열 등으로 깜짝 깜짝 놀람.
181:11 후천의 최하수 - 상제님께서도 '후천에는 하수(下壽)라야
500세라."는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이는 아무리 병신같이 못나서 빨
리 죽어도 500년은 산다고 하신 것이다.
183:1 담종(痰腫) - 담이 한군데로 몰려 된 종기.
183:4 전대윤 - 전대윤은 신도(神道)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태모님
시절에 안 살림을 맡아서 모시던 분이었다. (손녀 김순자)
184:3 개장국 - 개고기를 고아 끓인 국.
185:1 당시 교체 이름 - 통정(統正) 이상호, 통섭(統攝) 임경호, 이
하 팔원(八院)을 두어 교무를 맡게 하였다.
185:3 무진년 동화교 개교 - 1928년 12월 22일 동지 새벽1시에 이
상호의 집에서 박공우의 집례(執禮)로 상제님께 개교치성을 올리고
교명을 '동화교(東華敎)'라고 일컬었다.
185:1~6 용화동 교단, 태모님 모시기를 간절히 원함 - 태모님께서
대흥리로 다시 오셔서 2년 동안 계셨는데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던
중에 동화교에서 『대순전경』을 발간하고 아울러 상제님께서 태모
님께 수부도수를 정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태모님을 모시기
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태모님께서는 일찍이 상제님께서 "네 몸이 대흥리에 있으
면 클 것이요, 금구로 가면 네 몸이 부서지리라." 하신 말씀을 마음
에 두시고 안 가시려고 했다. 실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186:9 아성(牙城) - 대장군등 주장(主將)이 거처하는 아주 중요한
근거지. 방.
187 - 고부인 신정기 출처 - 이정립이 『고부인신정기』를 쓸 때
임경호와 더불어 기록하였고 많은 내용이 고민환에게 물어서 쓴 것
이라고 한다. (이○○)
189:5 김재윤 - 성구인물
190:4 전국말세(戰國末世)- 춘추 전국시대 말기.
190:5 자심(滋甚) - 점점 더 심함.
190:7 두 교단의 상이한 의식(儀式)- 예를 들어 용화동 교단은 유교
의 틀 속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므로 공사 내용
도 가끔 이상호에게 물어 보면 "글세 내가 볼 때는 이러이러 한데."
하는 정도로 유추하여 설명하여 데에 불과하지만 태모님께서는 직
접보는 앞에서 신도(神道)로써 안개를 지으시고 매사를 신도(神道)
로 집행하시기 때문에 범의 눈에는 의식(意識)을 초월하고 이해(理
解)를 뛰어넘는 행동으로 보였다.
치성 음식을 차릴 때도 "그저 깨끗이만 잘 해 놓으면 되느니라."
하시고 말지 '여기에 곶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진 않으셨다. 그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신앙하던 두 교단 사람이 모였으므로 이해의
차원이 달라 화목할 수가 없었다.
190:1 ~ 10 태모님의 세 살림 교단 개창사 연표(年表)
1. 정읍 대흥리 첫째 교단 살림 : 道紀41(1911). 9. 29. ~
道紀 48(1918). 9. 18. (만 7년)
공덕면 송산리와 오두막 : 道紀48(1918). 9. 19. ~
道紀 49(1919) 윤7월 (만 11개월)
2. 백산면 조종리 둘째 교단 산림 : 道紀49(1919). 윤7 ~
道紀 59(1929). 9. 18. (만 10년)
정읍 대흥리 : 道紀59(1929). 9. 19. ~
道紀 61(1931). 11. 14.
(만 2년2개월)
3 용화동 셋째 교단 살림 : 道紀61(1931). 11. 15. ~
道紀 63(1933). 11. 5. (만 2년)
오성산 은거 : 道紀63(1933). 11. 5. ~
道紀 65(1935). 10. 5. (만 2년)
191:4 이정립(李正立:道紀 25~90, 1895 ~ 1970) - 본관 정안. 부친
이희면과 모친 임옥자의 소생이고 이상호의 동생이다. 을미(乙未 :
道紀 25, 1895)년 음력 2월 19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구성
리(九星里)에서 태어나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갑인(甲寅:道紀44, 1914)년에 대흥리에 태모님 교단에서 신앙을 시
작했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 사범대학 지리역사과를 졸업하고 기미
(己未:道紀49, 1919)년 3월에 귀국하여 차경석의 보천교에서 동지방
주로 활동하였다가, 갑자(甲子, 1924)년 시대일보사 사건을 계기로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자 보천교에서 교적을 박탈당하고 형 이
상호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무진(戊辰: 1928)년에 형 이상호가 동화교를 창건하
자 이에 동참하여 1931년부터 2년 간 태모님을 모시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성탁(誠鐸) 또는 성영(成英)이고 자(字)는 정립인데
후일 그는 '남조선 배'라는 상제님의 성구 말씀의 한 구절을 따서
남주(南舟)라는 호를 지었다.
***조철제의 무극대도교와 분파된 박한경의 대순진리회 연혁 ***
무극대도교 조철제
■을미(乙未:1895)년 경남 함안 출생. 시루는 솥을 만나야 성사한다
고 교리를 조작하여 호를 정산(鼎山)이라 함.
■기유(己酉:1909)년 : 15세 때 부친을 따라 만주 유하현(봉천지방)
에 이주. 이 때 만주에서 당시 보천교 신자 김혁을 만나 태을주를
수련하고 상제님 신앙을 접해 신도가 됨.
■정사(丁巳:1917)년 : 1916년에 귀국하여 김형렬 성도 교단에 가입
하여 개인신도로 신앙하다가 배반하고 탈퇴하여 도통 전승의 합리
적 방편을 얻기위해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20년 연상의 선돌부인과
천생연부늘 강조하며 손을 잡음.
■기미(己未:1919)년 : 상제님 성도들을 따라 통사동 이준세의 재실
에서 수도하면서 사욕이 발동하여 상제님의 약장과 궤를 탈취하려
다 궤만 도적질하고 실패.
■신유(辛酉:1921)년 : 종통 조작과 교세 확장을 위해 다시 증산 상
제님의 성골을 도굴하기로 모의하고 여덟 명의 심복 부하를 거느리
고 2월에 도굴을 범행.
■을축(乙丑:1925)년 : 이어 태인 도창현에 무극대도교를 세움.
■병자(丙子:1936)년 : 일제의 종교탄압령으로 해체.
대순진리회 박한경
■무자(戊子:1948)년 : 해방이 되어 다시 교단활동을 재개할 때
1946년에 박한경이 조철제의 무극도 교단에 입교하고 1948년에 교
단본부를 난법의 무대인 전라도를 떠나 부산 감천동으로 이주하여
6·25 피난민들 속에서 신앙촌을 형성 '태극도'를 창교함
■무술(戊戌:1958)년 : 조철제 사망으로 도전(都典)자리를 놓고 내분
이 시작되고 결국 교단 내의 문제등으로 집단 테러와 살인, 폭력이
난무하여 연일신문지상에 비리가 폭로됨.(한국일보 65.3.2. ~ 65
3.10.)
■무신(戊申:1968)년 :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어 구파는 조철제의 3
남 조영래(趙永來)가 이끌고 현재는 부산에서 태극도로 남아 있고
신파인 박한경파는 7월에 그의 추종세력과 함께(금괴 10여 관을 가
지고)서울로 도주.
■기유(己酉:1969)년 : 서울로 자리를 옮긴 박한경은 4울에 그의 처
남인 경석규와 함께 신도들의 혈전(血錢)을 빼돌린 자금으로 '태극
진리회(太極眞理會)'를 설립하고 후에 '정신회'로 바꾼 다음 다시
1972년 2월에 '대순진리회'로 개칭. 현재 중곡동에 본부가 있음.
■갑자(甲子:1984)년 : 이 해에 개벽이 된다는 84년 개벽설을 유포
하고 신도들의 돈을 착취하다가 사회문제가 되어 KBS TV 「추적
60분」에 '가출한 아내'라는 제목으로 고발됨.
■무진(戊辰:1988)년 : 이 해에 다시 개벽이 된다하여 신도들의 재
물을 갈취, 개벽이 되지 않자 급기야 수많은 신도들이 이탈하여 부
산 태극도 시절부터 박한경을 추종한 연동흠이란 자를 중심으로
'용화일심회'를 조직하여 재산반환소송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
킴. 88년 개벽설이 무산되자 다시 89년 개벽설로 변동시킴.
■기사(己巳:1989)년 7월 21일 대순진리회 재물을 갈취당한 70여명
의 부녀 신도들이 집단 가출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대순진
리회를 탈퇴하여 '청우일신회'라는 사조직을 만들고 사회문제를 일
으켜 MBC·KBS 및 동아, 중앙, 조선 등의 일간지와 월간지에 크
게 보도된 바 있음.
■경오(庚午:1990)년 : ○11월 여주에 여주회관을 완공하여 이 건물
에 12,00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놓고 유공(有功)순에 따
라 "12,000명 도통을 준다."며 신입자들을 현혹시켜 그품갈취에 열
을 올려 전국 각지에서 사회문제화, ○최근에는 내부의 비리가 신
문지상에 연일 폭로되자 이를 무마할 생각으로 대학가에 뿌리내리
려다 비결서 등을 내세운 '말세론 신앙'과 집단 학업포기' 등의 문
제를 일으켜 대부분 대학 당국과 이들 정체를 잘 알고 있는 동아리
연합회에 의해 써클 등록을 취소당함. ○전국 주요 대형서점에 여
러명씩 조를 짜서 침투하여 증산도에서 출간한 『개벽』과 『증산
도의 진리』등이 진열된 서가 앞에서 진을 치고 "도에 관심있습니
까?" 운운하며 접근하여 독자들을 유인. ○『한민족과 증산도』,『
개벽』책 등의 표지를 벗겨 내고 자기네 교단에서 나온 것처럼 사
용하면서, 저자를 "대순진리회에서 쫓겨난 사람이다."고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패륜적인 망발을 전국에서 끊임없이 행하고 있다.(『증
산도 왜곡의 실상』 15쪽, 『대순진리회의 정체』)
192:6 조철제의 사기극 - 이 즈음 무극대도교는 교의(敎義)의 불확
실과 일정(日政)의 탄압으로 점차 교단을 이탈하는 자가 많아지고
교세가 침체되자 교세 확장의 일한으로 무진(戊辰:道紀58, 1928)년
겨울 술사(術士) 김해산(金海山)을 비밀히 초빙하여 신도가 가장 많
이 있는 말양군으로 데리고 가서 밀양면 금시정(今是亭)에 신도 수
백명을 모아 대치성을 행하였다. 먼저 철제가 도통이 되어서 천지
화권을 자유자재로 행하니 이번 치성에 화권(化權)을 대중들에게
공개하겠노라고 소문을 내었다. 지정한 날 밤중에 치성을 행한 뒤
에 모두 보니 금시정(今是亭)앞 암새강변 밤나무 숲속에서 현황한
불빛이 일어나매 철제가 자기의 화둔술(火遁)술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군중속에서 "이것은 서양에서 건너온 회중전지(懷中電池 플
래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우리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떠들며 일
부가 현장으로 달려가니 조철제는 도망쳐 버렸다.(『증산교사』191
쪽)
193:4 싸전 - 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
195:1 김형대 - 성구인물
197:4 차경석의 죽음 - 말년에 보천교가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일
제의 탄압에 뒷감당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일을 다른 사람에게
는 차마 얘기를 못 하다가 결국 병자(丙子 : 道紀 66, 1936)년에 차
경석이 "신도들에게 못할 일 시킨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했다 한
다.(차경석의 당질녀)
197:8 보천교, 십일전 철거 - 보천교 재산 정리를 위임받은 정읍경
찰서장은 보천교에서 수백만원을 들여서 지어 놓은 건물을 불과 수
천원씨에경매하여 뜯어 버리고 보천교의 종9鐘)은 4천원에 경매하
여 부숴 버렸다. 또한 보천교의 십일전(十一殿)은 불교들이 뜯어다
가 서울에 옮겨 지어서 태고사(太古寺:현재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조계사)라고 이름을 지어 불교 총본부로 사용하고 정화당(靖
化堂)과 보화문(普化門)은 부안 사람 김성기(金性基)가 뜯어다가 전
주역사(全州驛舍)를 짓는 데 썼다.
199:1 태모님 53세. 1932년
199:1 전대윤 - 성구인물
199 용화동 교단의 한계와 태모님을 부른 의도 -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유교형식의 틀에서 못 벗어난 신앙을 보이므로 태모님께서
는 여차하면 그 심법을 들여다 보시고 '이놈 저놈'하고 두드려 패시
니 자기네들은 모실 수가 없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교인들을 모아
교단을 크게 하려면 신권(神權)을 가진 분이 있어야 한다'는 의도로
태모님을 모시고 두 교단을 합치기로 했다. 그런데 실제로 합하고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태모님의 행동반경을 제
한시키기 위해 방에다 모시고 다른 사람들은 못 만나게 했다. 연금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것은 태모님을 모셔 온 목적이 우
선 교세를 키우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
다. 물론 세 끼 식사 공양은 하여 나름대로 잘한 점도 있지만 진리
차원에서 볼 때 돼먹지 못했기 때문에 태모님은 그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여기 전대윤사건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진행되던 용화동
교단의 일면이 하나의 사건으로 표면화된 것에 불과하다. (이○○)
199:4 이년 이년 - 이는 태모님의 신권(神權)과 도권(道權)으로 죄
업을 벗겨 주시려고 그 기운을 내치시는 말씀이다. 곧 껄을 벗겨
주시기 위해 세속 인간의 마음에 대고 외치신 것이다. 그러나 이상
호, 이정립 등은 '저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오히려 그런 모양이
외부에 나가면 교단의 품위가 떨어진다하여 방을 하나 정하여 모시
는 척하며 출입을 재한하였다. 당시 고루한 유학자들인 이상호 등
은 태모님이 행하시는 신정(神政)을 이해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외무
도 이상호가 맡고 고민환은 눌려 지내가다 고향 옥구로 쫓겨가 버
렸다. 당시의 실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한 신앙인은 '책으로
는 좋게 써 놨지만 그 미묘한 관계를 어떻게 말로 다 못할 정도였
다.'고 한다.
199:5 당시에 김수응은 아주 잘 살았다 한다.
199:6 당시 이상호의 처는 당연히 그렇게 모셔가야 한다고 생각했
다 한다.
199:9 그러나 실제로 전대윤을 내몬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밥을
아끼느라고 그랬다는 것이 중론이다.
199:9 전대윤은 이상호의 은인 - 이상호의 아들이 이일화다. 이일화
가 어릴 때 홍역에 걸려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전대
윤이 신도(神道)가 뛰어 났으므로 이것을 미리 알고 아침 일찍 30
리 길을 걸어서 이상호의 집에 찾아가 일화를 치료해 준 일이 있
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상호 부부에게는 은인이었다.
셋째 교단 살림 시대로 들어가신 과정
도기 60년(1930) : 동화교(이상호)에서 모시기를
원하여 사람을 보냄.
도기 61년(1931) 7월 그믐 : 동화교 통정 이상호와 간부
조학구 등이 찾아와서 다시
용화동으로 이주하실 것을
간곡히 여쭘
도기 61년(1931) 9월 17일 : 상제님 어진 모시고 용화동
1차왕림.
9월 21일 : '조종골 일 정리하고 동지에
오리라.' 하시고 다시 돌아오심.
도기 61년(1931) 11월 6일 : 옮기실 뜻을 전하심.
도기 61년(1931) 11월 14일 : 어진 모시고 용화동 2차 왕림.
동화교 개교 삼주년
기념치성에 참석하심
11월 15일 :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의
통합교단 조직 이어 '대흥리
일을 정리하고 돌아오리라. '
하시고 다시 돌아오심.
도기 62년(1932) 3월 15일 :'정읍 일 다 보았으니 20일에
이사하리라.' 하심.
3월 19일 : 용화동에 신축한 집에
거주하시며 도무를 주재하심.
201:6 무명지(無名指) - 네 번째 손가락. 약손가락.
201:1 이용기 내외 - 용화동에서 이용기 내외가 태모님의 수발을
들었다. 오성산으로 모시고 올때는 이용기가 모시고 왔다. 고민환은
이미 쫓겨가고 없었고 이용기의 아내가 밥을 해 주고 있었다. 이상
호의 아내는 웃 어른이고 이용기의 아내는 그 당시 식모였다.
202 애들을 귀여워 하심. - 태모님은 어린애들이 근방에서 놀면 머
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202:8 천수답(天水畓) - 천둥지기, 오직 빗물에 의해서만 경작할 수
있는 논.
203:3 용소(龍沼) -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웅덩이.
203:5 모두 금산면 용화동 구성산에 있는 지명이다.
203:7 수양산 그늘이 강동팔십리(江東八十里) 간다 - 수양산의 그
늘진 곳에 강동의 아름다운 땅이 이루어졌다 함이니 어떤 한 사람
이 잘되어 기세가 좋으면 친적이나 친구들까지도 그 덕을 입게 된
다는 것을 비유한 말.
204:2 인륜(人倫) - 사회 속에서 맺어지는 상하 존비(尊卑)의 인간
관계나 질서.
204:2 천륜(天倫) - 부자(父子)·형제(兄弟) 등 혈통관계로 맺은 사
이에서 떳떳이 지켜야 할 도리.
205:3 어린 것 - 당시 이정립의 나이는 38세.
206:4 미두(米豆) - 전날에 미곡의 시세 변동을 이용하여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
208:3 예고신주 - 지신주(地神呪).
209:2 별복( 腹) - 복학(復虐), 지라가 부어 뱃속에 자라 모양의 멍
울이 생기며 열이 심하게 올랐다 내렸다 하는 어린 아이의 병.
209:2 용기의 큰 딸 『고부인신정기』에는 셋째 딸로 되어 있다. 이
용기는 3남 8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 딸 일례(一禮)는 1933년 공
사 보실 당시 세 살이 었고 또 둘째 딸 이순(二順)은 네 살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7세이던 큰딸 순례(順禮)로 바로 잡았다.
215 태모님께서 용화동에서 셋째 살림을 하실 때 옆에서 지켜본 이
정립의 부인 장도의 말에 의하면 태모님께서는 호통을 많이 치셨는
데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감당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이○○)
215:3 이상호의 심보를 나무라심 -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실 때
이상호가 방문 앞을 지나가면 "저기 어떤 놈이 지나가느냐!"하고
호통을 치셨다. 이상호가 공덕은 많다. 그러나 심보가 안 되었기 때
문에 그러신 것이다. 태모님은 사람을 평하실 때 항상 그 사람의
마음을 뽑아 보시고 욕심으로 그러는 것인지, 진심으로 그러는 것
인지를 분간 하셨다.(김순자)
215:5 이 말씀은 천지의 어머니로서 함부로 살생을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내가 낳은 자손이요, 천하창생이 내 자손인데 차마 천지의
어머니로서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는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말
씀이다.
215:6~7 대속 - 천지에서는 인과응보로 철저히 그렇게 하라고 기운
이 내려와도, 태모님께서는 천지창생을 위해 다시 그 죄를 대속햐
여 받으시고 살 기운을 열어 주신 것이다.
215 태모님 세 살림 이주의 공통점 - 태모님의 세 살림 과정을 보
면 공통점을 볼 수 있다. 살림을 옮기는 원인은 살림을 보필하던
성도들이 말기에 이르러 불의(不義)와 사욕(私慾)을 가지고 보필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태모님께서 마음만 먹었으면 판을 옮기
지 않고도 신도에 따라 죄를 범한 자를 벌하여 도무(道務)를 집행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소수 중생들
의 신도차원의 불행을 염려하신 것이다. 그것은 창생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려는 어머님만이 지닌 모성애에 바탕을 둔 대덕(大德)의
마음이니 곧 만민의 어머님 태모님의 사랑이다. 만약 상제님께서
살림을 주재하셨다면 이와는 달리 그 자리에서 신장(神將)들을 불
러 벼락을 내리고 죄(罪)를 문책하시며 판(版)을 정리하셨을 것이
다. 그러나 천지의 어머니이신 태모로서 그들에게 개심(改心)의 기
회를 주셔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살림을
옮기신 것이다.
216:1 오성산도장 - 이정립의 『고부인신정기』에는 '오성산 수양소
(修養所)'라고 기록함.
216:5 자배기 -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216:1 왜곡된 증산교사 - 증산교사에는 오성산 도장을 '오성산에 신
축한 동화교수양소(東華敎修養所)'라고 써 놓았다. 그것은 마치 오
성산 도장이 용화동 교단의 분파처럼 보이게 하려고 자기네 식으로
꾸며 써 놓은 것이다. 오성산 도장은 태모님의 명령에 의해 고민환
이 옥구의 신도들과 상의해서 지은 것이지 용화동 동화교와는 아무
런 관련이 없다.(김순자)
217:6 고민환 번번이 쫓겨다님 - 용화동에 계실 때 태모님께서 신
도(神道)를 열고 공사를 보시면 워낙 엄하게 하시므로 이상호, 이정
립, 임경호 등이 왕래를 하지 않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수종드는
사람으로 고민환을 앉혔는데 고민환은 이상호, 이정립에 비하면 학
문이 좀 부족했다. 그러나 공사 수종과 여러 가지 일들을 고민환과
의논하여 처결하자 동화교 교단측에서는 고민환이 수종드는 것을
시기하여 고민환을 해(害)하려고 했다. 그래서 또 옥구로 도망갔다.
용화동에서 6개월도 채 있지 못하고 쫓겨가 버렸다. 그리고 오성산
도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고민환을 자주 부르신 것은 그
만큼 고민환이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217:4 옥구에 새 도장 준비 - 고민환이 옥구로 돌아가서 조직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 대법사에서는 고민환 등이
은거(隱居)차 가 있었다고 하지만 다 엉뚱한 소리다. 뒷부분은 대부
분 자기네들이 유리한 대로 꾸며서 써 놨다. 이정립과 임경호가 자
료를 수집하고 이정립이 기록한 『고부인신정기』의 용화동 공사는
대부분 미화되어 있고 진짜배기 공사는 싣지 않았다. 한마디로 태
모님이 어떤 분이라는 건 몰랐다.
217:12 이진묵이 오성산 도장 건립에 참여한 사연 - 고민환이 옥구
로 도망가 있을 때 부종을 앓았다. 태모님께서 조종골에 계실 때
돈 30원을 이진묵에게 주시면서 "개라도 한 마리 사서 먹고 보(補)
하게 하라."고 보내 주셨다. 그런데 이진묵도 살림이 어려웠으므로
고민환에게 갖다 주지 않고 자기집에 가서 식량을 팔아 먹어 버렸
다. 그 후로 이진묵은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오성산도
장을 건립하는 데 경비가 모자라 건축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번에 자기 과실을 만회도 할 겸. 공덕도 세울 겸 자기 집을 팔아
서 오성산도장을 완공할 수 있게 했다. 이진묵이 원래 신앙을 열심
히 하고 성의가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신만큼은 훌륭
하다하여 나중에 녹줄을 많이 붙여 주져서 잘되게 해 주셨다.
217:14 통합교단시대의 옥구 신도들 - 태모님이 용화동 동화교(東
華敎)로 가신 후에도 임피. 옥구 교도들은 자기네들끼리 옥구에가
교당을 만들어 놓고 시천주주(侍天主呪)를 읽었다. 그리고 치성때마
다 태모님께 문안드리러 용화동으로 한 번씩 들렀다. 그런데 한 번
은 태모님께서 "내가 올 동지(冬至)에는 임옥 가서 치성을 모실 터
이니 교당을 지어 놓으라."고 당부하셨다.
218:1 용화동에 계실 때의 심경 -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시면서
늘 말씀하시기를 "보리밥이 지경이라도 임옥구 교도가 내 자손이
다."는 말씀을 하셨다.
218:7 임옥(臨沃) - 임피, 옥구의 준임말.
219:7 220:1 올바른 줄, 진인(眞人) 아버지 상제님과 어머님 태모님
심법을 계승하여 대도를 집행하는 대사부(大師父)가 나올 것을 말
씀하신 것이다.
221:2 어진개사 - 안운산 종도사임이 해방 후 제2번 부흥시대를 개
척하여 대세를 틀어 놓으실 때 태모님의 이 말씀을 이성영 본인에
게 직접들으셨다고 한다.
222:2 용화동에서 오성산으로 - 태모님께서 52세에 동화교로 가셔
서 만 2년 째인 54세에 오성산으로 들어가셨다.
223:2 혈적병(血積病) - 피가 쌓여 뭉쳐 있는 병, 적병에는 혈적(血
積), 담적(痰積), 체적(滯積), 식적(食積)등이 있다.
225:2 주마담(走馬痰) - 담이 혈관을 타고 돌아 몸의 이곳 저곳이
욱신거리고 때로 부어오르는 병.
226:2 광사병(狂邪病) - 정신착란을 일으켜 미친 증세.
228:2 양상규 - 성구인물
228:3 연수법(延壽法) - 수명을 늘이는 방법.
228:4 상규의 처 - 양상규의 처 김씨는 20세에 시집와서 1908년에
첫딸을 얻은 후로 1937년 까지 10남 10녀를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얻을 때마다 빈번이 수개월, 1년 간격으로 잃어버리고 여덟째 아들
석천(錫千)하나와 딸 여섯만 별 탈없이 자랐다. 이어 1933년에 아홉
째 아들 석봉(錫奉)을 얻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듬
해에 다시 아이가 시름시름 앓으며 급병에 걸려 죽게 되자 상규의
처가 아이를 안고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태모님
께서 종들을 보내어 연수법을 사용하여 수명을 늘여주시고 상규의
집안의 액을 끌러 주신 것이다.
229:2 죽장(竹杖) - 대나무 지팡이.
229:14 부여 무량사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있는
사찰. 마곡사의 말사이다. 신라말 범일(梵日)이창건하였고 여러 번
중수하였다.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하였고 고승
진묵이 아미타불을 점안하고 나무 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며 도도한
시심(詩心)을 펼쳤던 곳이다.
229:15 윤기(倫氣) - 윤리상의 기운.
230:2 협실 - 남의 집 한 부분을 빌려 든 방. 곁방.
230:14 안빈낙도(安貧樂道) -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
으로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
231:6 정의(情誼) - 서로 사귀어 친하여진 정(情).
231:6 주창(主唱) - 앞장서서 주장함.
231:6 이중성 - 학암(鶴庵) 이중성은 정유(丁酉 :道紀 27, 1897)년
음력 4월 29일에 경상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東萊郡 機張面 東部
里)에서 부친 이치삼(李致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
다. 1916년부터 1921년까지 6년동안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21년에 중국에서 보천교를 접하고 차경석 교주를
만나보기 위해 무진(戊辰:道紀58, 1928)년 봄에 국내 잠입하여 그
해 동지에 도문에 입도하였다. 한때 보천교의 외무를 주관하는 수
호사장(修好司長)을 맡기도 했으나 당시차경석이 신앙 대상을 부
친 차치구로 바꾸고 상제님을 배신하자 보천교를 떠났다. 이후로
상제님의 성언(聖言)을 수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62세 되
던 무술(戊戌:도기88, 1958)년 음력 3월부터 운명한 11월까지 수집
한 원고를 정리하였다. 이 유고는 80년대 초에 그 유족이 전주와
정읍 등에 사는 몇몇 신앙인들(박기백, 전주 모 한의사 등)에게 교
정본으로 이부 복사하여 줌으로써 (이중성의 딸 이옥수, 아들 이인
수가 하지리에서 증언한 말) 『천보경(天寶經) 등의 이름으로 여러
권의 복사본이 이미 세상에 돌아다녔다. 강경형은 6·25전쟁 후에
이중성이 자신이 자신의 집에서 보여주고 원고를 보았고 당시의 제
목은 '천보경'으로 기억된다고 전한 바 있다.
『천지개벽경』의 문제짐과 집필 상황에 대한 증언 - 증산 상제님
말씀이 보완되어 기록된 내용이 있어 도움을 준다는 공덕이 있으나
반면에 첫째, 상제님이 평이하게 하신 말씀을 한문으로 옮겨 기록
자가 언어를 왜곡한 경우가 적지 않다. 또 비결을 너무 많이 인용
해 상제님 말씀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상제님 말씀인 듯이 왜곡 조
작시킨 내용이 많다. 둘째, 같은 내용의『대순전경』의 성구를 이중
성의 논지에 따라 표현을 트어 놓고 상제님 공사 내용이나 말씀 중
간과 끝에 자기의 생각을 상제님의 말씀으로 교묘히 윤색시켜 조작
해 넣은 구절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셋째, 논어의 문답형식을 본
떠 성도가 묻고 상제님은 언제나 대답만 하시는 식으로 구성함으로
써 주객이 전도 되어 상제님이 끌려다니시는 꼴로 만들어 놓았다.
문태윤의 집안 싸움 성구의 경우처럼, 상제님을 마치 서당훈장이
일장 훈시하듯 연출하여 유교의 사서삼경의 가르침을 상제님 말슴
은 양 조작해 넣어 상제님의 대도세계를 한정시키려 한 경우가 적
지 않다. 넷째,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 있는 자라면
무신편 정도 가면 조작된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
다. 다섯째, 역시 답사를 통해 이루어진 기록이 아니다.(상제님 성령
의 수태지역 서산리로부터 시작하여 성도들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
는 성구가 반이 넘는 것을 알수 있다.)
『천지개벽경』의 저자 이중성의 딸 이옥수는 "우리 아버지의 글은
상제님의 권위를 해한다고 생각한 내용과 표현은 전부 뺐고(10대,
20대 생애포함) 상제님 진리가 요만하다면 미화시켜 이렇게 (두 손
을 옆으로 늘려 표현하며) 두 배 세 배로 늘려서 쓰셨다."고 대전,
전주 코아 호텔 커피ㅅ, 그녀의 자택등지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증언은 『천지개벽경』의 집필에 임한 이중성의
심법 밑 바탕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천지개벽경』에는 상
제님 말씀을 자작 해석하려는 시도와 그 한계를 넘어 도의 근본 기
강을 파괴하는 심각한 내용들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이문제는 체계
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한편 박공우 성도와 사돈간인 이중성
은 딸에게 "상제님의 대업은 반드시 젊은 새 일꾼들이 운집하여 새
시대를 개척한다."고 여러 번 말하였고 이옥수는 "이 책은 꼭 증산
도에서 출간하여 젊은 일꾼들의 밑거름으로 삼아 주었으면 좋겠
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문제를 불러 일으킬 것이 염려되어
크게 문제되는 내용은 반드시 모두 빼고 실을 것을 조건으로 제시
하였으며, 복잡한 문제들이 있어 지연되어 오다가 우여곡절 끝에
얼마전에 한문 원본이 출간되었다.
233:1 천연두(天然痘) - 열 , 두통이 나며온몸에 발진(發疹)이 생겨
잘 못하면 얼굴이 얽게 되는 전염병.
234:3 진토(塵土) - 티끌과 흙 곧 진흙.
234:4 산상가(山相家) - 산의 상(相)을 볼 줄 아는 지사(地師).
237:6 태모님께서 즐겨드신 음식 - 태모님께서는 횟감을 아주 좋아
하셨다고 한다. 소 처녑이나 소간 같은 것을 퍽이나 즐겨 하시고
약주로는 독한 소주, 화주(花酒)를 즐겨 드셨다. 가끔 육고기를 드
셨으나 원래 식성이 고기를 좋아하신 것은 아니었다. 신명들을 대
접하기 위하여 공사로서 드신 것이다.
237:7 한동이가 지금 소주 큰 병으로 15병 들어 갔다.
237:8 전선필의 얘기에 의하면 신정공사를 보실 때는 진지를 사흘
도 안 잡수시고 일주일도 안 잡수셨다 한다.
237:8 태모님의 주량 - 태모님께서는 60 ~70도 되는 꽃소주(호주)를
큰 놋대접으로 몇 대접씩 드셨다. 그래도 멀쩡하셨다 한다.
238:4 담배통 - 담뱃대 끝쪽 담배를 말아 넣는 곳을 뜻함.
238:3 ~ 5 담뱃대와 재떨이 - 담뱃대가 석자 제치나 되었고 재떨이
가 얼마나 컸던지 담뱃대로 재를 떨면 재떨이가 탱탱 하고 종 울리
듯 했다.(강응칠 손자 강기섭)
238:3~5 담뱃대와 재떨이 - 태모님의 담뱃대 길이가 넉 자 짜리였
다. 그래서 보통 아무리 큰 장정이라도 탁 걸어 가지고 당기면 끌
려왔다. 신정을 행하실 때 쓰신 재떨이는 보통 밥상보다 더 컸다고
한다. "밖으로 나와도 그 담뱃대를 들고 다니셨다. 담뱃대는 한 발
이나 되었는데 입에 무는 물부리가 부분만 은(銀)으로 만들었고 나
머지는 대막대기다."(전복추)
240:4 초막(草幕) - 짚이나 풀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막집.
240:6 상제님의 한밭(太田)공사, (5편 104장, 6편 65장 참조)
242:2 어려운 식생활 - 오성산에 계실 때는 일정(日政)의 탄압으로
인해 교단 유지가 워낙 힘들어 이용기의 아내가 산아래 동네에 가
서 시주해다가 모실 정도로 어려우셨다고 한다. 그런 정도가 되어
도 식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243:1 이날 오후에 태모님께서 "목욕물을 데워라." 하셔서 평소에는
찬물로 목욕하시던 분이 갑자기 목욕물을 데우라고 하시므로 성도
들은 이상히 여겼다.
243:4 선화 『고부인선정기』에는 10월 6일 새벽 2시로 나온다. 그
러나 임종시 까지 곁에서 한결같이 모셨던 고민환은 그의 『선정원
경』에서 해자시(亥子時)에 선화하셨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이에 의
거하여 바로 잡았다.
243:4 선화 - 태모님께서 선화하실 무렵 오성산도장에서 10여 명이
있었다. 전선필의 얘기에 의하면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 때까지
정정하시므로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고 한다. 평소와 다
름없이 눈을 감으시므로 성도들은 다만 주무시는 줄로 알았다고 한
다.
243:6 수의 (壽衣) - 염(殮) 할 때 시체에 입히는 옷.
243:6 횃대 - 간짓대를 잘라 양쪽 끝에 끈을 매어 벽 같은데 달아
메어 옷을 걸게 한 막대.
244 선화후 분파 - 태모님 선화하시고 일정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하는 수 없이 각 지방으로 분파됐는데 그 때 독립해 나간 사람이
이용기파, 전선필파, 백윤화파 등이다. 이용기는 삼례에다 도장을
만들었는데 굉장한 교세를 이루었다가 그 사람 죽고 난 후로 삼례
도장도 그림자 하나 없이 사라졌다 한다.
244 선화 후 교단 터 - 원래 오성산도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태
고종 성흥사라는 절이 들어서있다. 태모님 선화하신 후 결국 유지
난이 심각해져서 집터가 넘어간 것이다.
247:7 유일한 생존자, 전선필 - 옥구에서 도(道)하던 양반들이 대부
분 다 죽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전선필 혼자 살아 남았다. 동네 사
람들이 잘 숨겨 주었다.(전심통)
247:7 전준엽 - 옥구 수산리에서 전준엽의 집이 제일 크고 부자였
다. 그런데 전준엽도 변산에 공부하러 가서 일본 순검대에 잡혀서
고문을 당한 후 순교했다.(전복추)
250:2 혼몽(昏蒙) - 정신이 흐릿해 가물가물한 것.
250:6 심사(心思) - 남이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고약한 마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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