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와 노인
제17회 작품상
김영의
어느 새 중복도 지나 더위가 막바지에 치닫는다. 마치 여름의 마지막 열기를 다 소진하려는 것 같다. 이젠 올 한 해도 이미 기울어가니 구성진 매미 울음이 가을을 재촉하질 않는가! 그 동안 장맛비가 며칠째 쏟아 붓더니 오늘은 반짝 든 햇살이 타오르듯 눈가에 부서진다. 찜통처럼 올라오는 지열을 피해 그늘을 찾아 걷는다.
지루하고 나른한 오후의 긴 그림자가 기지개를 켜듯 늘어지며 따라붙는다. 해를 뒤로하고 걸으니 그림자가 앞에서 가고, 해를 안고 걸으면 그림자는 뒤에 따라 온다. 햇빛의 투영작용으로 그림자가 생기니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 낸 동반자가 아니던가. 해가 구름사이에 가려지면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 걷다가 서면 그림자도 멈춰서고 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비록,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동적 에너지나 의지가 존재하지 않으니 단지 정지된 상태에서 평면적으로 연속된 영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빛이 머무는 시차와 각도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는 바뀌어 투영될 뿐이다.
한 노인이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문득 어릴 때 그림자놀이를 하며 즐기던 기억이 떠오른다. 불 밝힌 방에서 두 손을 마주 끼워 포개고 엄지를 세워 문창호지에다 대면 토끼나 개의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그 그림자에는 뭉뚱그려 비추는 토끼나 개의 형상만 보일 뿐, 아이의 도톰하고 귀여운 손바닥이나 힘겹게 끼워 넣은 통통한 손가락의 마디마디는 보이지 않는다. 형상은 있되 감각은 나타나지 않으니 그 느낌은 아이 자신의 것일 뿐이다. 노인은 허리를 반뜻이 세우며 당당한 걸음으로 발을 떼어본다. 반듯하게 걸으면 곧은 그림자가, 절룩거리며 걸을 때는 불안정한 그림이 그려진다. 노인이 걸어가는 그림자는 뒤뚱뒤뚱 절룩거림으로 이지러지게 비췬다. 다시 멈춰 서서 반듯한 그림자가 비춰지도록 자세를 바로잡고 걸어보지만 그림자는 속아주질 않는다. 노인은 걸음을 멈춰 서서 깊은 숨을 푹 내쉬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절룩절룩 일그러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걸어가는 그의 허리와 다리는 더 아플 뿐이다. 그의 속내는 시리고 마음마저 아프게 다가온다.
노인은 자신의 삶의 무게로 좌초된 제 모습이려니 체념하듯 가슴을 쓸어내린다. 잠시 후 노인은 다시 허리를 일으켜 그늘을 찾아 벤치에 앉는다. 그림자는 여전히 따라 붙고 있다. 어느 새 그는 고개를 숙인 로댕의 조각처럼 생각에 잠긴 채, 지나온 긴 세월의 잔해를 파헤쳐 보듯 깊은 사색에 빠져드는데 그림자는 윤곽도 움직이질 않는다. 거기에는 절룩거림이나 존재의 실상 따위는 엿보이지 않는다. 고요한 내면의 숲속에서 이제껏 살아 온 경륜의 세계를 체념한 듯 무의식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 아닐까! 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파트의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을 되씹고 있는지 아니면 번뇌와 시름을 저 떠도는 구름에 실려 보내려하는 것일까! 노인의 얼굴에 엷은 그림자가 머문다. 그것은 빛에 투영된 영상도 아니고 그늘을 만들고 있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도 아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상흔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지러진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스쳐가는 어둠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그림자 속에 자신의 현실을 실감하며 인생을 살고 노년을 살아감이 어찌 이 한 노인뿐이겠는가!
자연의 변화가 춘하추동 사계절 속에 순환하면서 끝없이 이어져 나가듯 인생의 과정도 삶과 죽음이란 양면적 상황이 하나의 연속된 현실로 이어져가는 단면이 아니겠는지!
이른 봄 모든 이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싹트게 하며 활짝 피었던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꽃들도 때가 되면 힘없이 꽃은 지고 잎은 시들고 마른다. 그리하여 푸르디푸르렀던 잎사귀마저 떨어져 벌거벗은 나목裸木으로 겨울을 맞는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우리도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넝쿨장미처럼 말없이 순명順命하는 아름다움을 지닐 수가 있을까? 한 인간의 삶의 발자취와 보람, 업적과 성과, 이념과 현실, 어둠과 밝음, 연약함과 강인함, 내면과 외면 등 모든 인생의 양면성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재적 영욕의 크고 작음이나 앞과 뒤일 뿐, 높고 얕음의 의미는 무엇이며 종국에 남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흔히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며 이슬과도 같다고도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 없음’을 또한 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진실하고 진지하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하고 내일 다시 떠오를 태양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림자를 쫓던 어느 노인처럼 그림자에 비친 그 모습이 자신의 생애와 가치 또는 인격과는 연관 없는 그저 시간이 가져 온 한 생명체의 계절적 퇴행의 모습이려니 담담히 받아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주홍빛 석양을 바라보며 ‘모든 존재는 아침 이슬 같아서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며, 또한 그림자와도 같아 참다운 실체가 아니다.’라는 어느 철학자의 글귀가 되살아난다. 붉게 타오르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을 너머에 남은 나의 세월을 헤아려 본다. 활짝 열린 빈 가슴에 실오라기 같은 한줄기 바람이 고맙다.
아직도 벤치에 앉은 그 노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인 양 잔잔히 다가오는 것은 내 마음의 허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