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다가
조성순
흘러가는 가는 마음을 잡아둘 때 나는 연필을 쓴다. 고개만 살짝 돌려도 사라지는 순간을 잡아두려면 부드럽게 잘 써지는 4B연필이 좋다. 누런 연습장 가득 수다를 풀다 보면 연필심은 뭉툭해지고, 잔고가 쌓인 통장을 보는 것처럼 기쁘다. 그러면 또 하나의 즐거운 작업이 시작된다. 연필 깎기다.
먼저, 왼쪽 손바닥에서 네 손가락 위에 연필을 비스듬하게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잡아준다. 칼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살며시 잡아 연필 위에 올린다. 왼쪽 엄지손가락을 오른쪽 엄지손가락 위에 놓고, 양 손가락에 힘을 주면서 칼을 살살 밀어준다. 자연스럽게 손목이 움직이고 싹싹, 싹싹 연필이 깎인다. 어쩌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조카은 신기해하며 옆에 붙어 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깎을 일 없는 샤프를 쓰거나, 연필 깎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동그랗게 깎여 나오는 것만 보다가 새로운 놀이라도 만난 양 재미있어 한다.
연필 몸체에서 벗겨져 나오는 부분이 대팻밥처럼 또르르 말려 연필 색깔에 따라 꽃처럼 피어난다. 곧 꽃씨 같은 까만 연필심이 나타난다. 조카들의 성원에 힘입어 한 타스의 연필을 깎은 적도 있다. 그쯤 되면 손끝으로 나무의 감촉을 느낄 수가 있다. 매끄럽게 잘 깎이고 몸체도 윤이 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몸에 옹이가 박혀 칼끝이 덜컥 멈춰버린다. 그 순간, 나는 할머니의 정짓간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시커먼 천장에 삶은 보리쌀 바구니가 대롱거리고 우물만큼 커다란 물 항아리가 있다. 부뚜막엔 크기가 다른 무쇠 솥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고 솥뚜껑은 유난히 검고 반짝인다. 건너편엔 콩대나 나뭇가지 등 땔감이 쌓여있고 그 옆으로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살강이 아궁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풍로를 돌리는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는 여섯 살이나 됐을까.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산골 할머니 댁에 있었다. 그 부엌에서 부지깽이는 연필이었다. 지지부진한 아궁이 속에서 이리저리 불길을 더듬어 타오르게 하는 나무막대기는 고구마를 굽다가, 국수 꼬랑이를 뒤집다가, 찬물에 풍덩 뛰어들어 ‘칙’하고 몸을 식힌다. 불속에서 달구어져 끝이 뾰족하게 된 부분은 흑연이 된다. 부엌바닥에 뭔가 긁적거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보고 싶은 엄마 얼굴을 그리고, 언니도 불러보고 앞산에 핀 참꽃의 향기도 그렸으리라. 자치기를 할 때도, 칼싸움을 할 때도 부지깽이만 들고 나가면 만사 오케이였으나 그 부지깽이로 얻어맞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부지깽이도 오래 쓰면 몽당연필처럼 작아졌다. 볼펜껍데기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처럼 기댈 곳이 필요했던 아이 적에, 할머니의 부엌은 슬프고 따뜻했다.
그 아스라한 시간이 연필을 깎는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다.
첫댓글 매끄럽게 잘 깎이고 몸체도 윤이 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몸에 옹이가 박혀 칼끝이 덜컥 멈춰버린다. 그 순간, 나는 할머니의 정짓간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지지부진한 아궁이 속에서 이리저리 불길을 더듬어 타오르게 하는 나무막대기는 고구마를 굽다가, 국수 꼬랑이를 뒤집다가, 찬물에 풍덩 뛰어들어 ‘칙’하고 몸을 식힌다. 불속에서 달구어져 끝이 뾰족하게 된 부분은 흑연이 된다. 부엌바닥에 뭔가 긁적거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할머니의 부엌은 슬프고 따뜻했다. 그 아스라한 시간이 연필을 깎는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다.(부분 발췌)
슬프고 따뜻했던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 일, 연필을 깎다가 시공간을 거슬러 할머니의 정짓간에 웅크리고 앉은 6살 아이가 되는 일.그 아스라한 기억을 보듬는 일... 아름다운 추억이네요. 따뜻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조성순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