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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전투
유엔군의 재반격
강 희 설
1951
1월 25일 수원에서 재반격 개시
2월 26일 서울 탈환
3월 31일 삼팔선 탈환
4월 22일 휴전선까지 진격
북한 김일성이 불법남침을 단행하여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진격했으나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국군은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북진해 통일을 앞두었을 때 중공군의 참전과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여 서울을 빼앗긴 것이 1·4후퇴였다. 전력을 가다듬어 수리산전투를 시작으로 반격을 단행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휴전선까지 진격한 후 그대로 멈춘 채 휴전협정에 이르렀다.
유엔군 반격재개
“적을 구분하여 공격하고 소탕하며 분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 같이 도로만을 따라서 진격하여서는 안 된다. 우선 화력으로 때리고 전차로 돌파한 다음 보병으로 소탕시키고 확보하라. ……전선을 凹凸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좌우가 완전히 연결되고 협조된 방어선을 유지한 상태에서 북진시키는 것이다.” -리지웨이 중장
위력수색에서 공세로
적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면 우선 숨을 돌리고 마음이 놓이지만 이어 적의 움직임을 알 수 없게 되면 오히려 불안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1월 중순경의 제8군 장병들은 적의 상황을 알 수가 없어 초조감이 더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침내 공산군의 새로운 공세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1월 20일이 다가왔으나 37도선 일대는 지극히 평온한 상태였다. 대구 북방지역에서 게릴라 토벌에 임하고 있던 미 제1해병사단과 지리산 포위를 풀고 이 토벌작전에 참가한 한국군 제11사단만 작전이 활발했을 뿐 미8군에서 출동시킨 많은 수색부대들은 아직 공산군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미 공간사』는 리지웨이가 명확하고 보다 정확한 정보를 구하려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정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국제정세가 앞에서 기술한 대로 미묘한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리지웨이 사령관은 책임을 느끼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8군으로서는 정책의 기초가 되는 한국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여부를 가급적 빨리 보고할 책무를 갖고 있었다. 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어 봤자 적정을 알 리가 없었고 항공정찰은 오보가 많았다. 전장에서 가장 확실한 정보를 가져다주는 것은 전투와 위력수색뿐이다.
1월 20일 저녁, 미8군은 “공산군의 새로운 공세준비를 방해하고 유엔군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탐지하기 위하여 여러 병과로 편성한 대대급 이하의 수색대를 투입하여 적극적으로 수색활동을 전개할 것을 각 군단에다 지시하였다. 미 제9군단은 존슨 특수임무부대제8기병연대장 존슨 대령을 부대장으로 하고 제70전차대대, 제8기병연대 제3대대는 2개월 전에 운산전투에서 전멸을 당한 대대로서 전투경험이 없는 보충병으로 충원되어 있었다. 야포 1개 포대와 공병소대 등으로 편성로 수원 동쪽의 김양장리-이천-경안리를 연결하는 삼각지대를 정찰시키기로 하였다. 15~16일의 울프하운드작전에서는 수원 부근에서 전투서열을 알 수 없는 공산군을 발견하였다.
그 때문에 다시 그 동쪽을 수색해 보려고 하였다. 특수부대는 22일 아침에 출발하여 죽산리-이천-김양장리 도로를 따라 북상하여 이천-김양장리 일대를 수색해 보았으나 극히 미약한 중공군을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이 수색구역에도 피란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남아서 조그만 화로에 둘러앉아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파괴된 부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는데 이것은 얼어붙은 전장에서도 인간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지역은 공중정찰자가 계속 부대 집결과 보급품의 집적상황을 알려오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정찰장교는 이들 주민들 관찰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관찰은 주민들이 산으로 소개시켜 놓았던 가재도구를 다시 집으로 옮겨오고 집집마다 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적의 집결로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때때로 소수의 중공군이 보이긴 하였으나 아직 대부대가 온 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수색과 이전의 울프하운드작전 결과로 수원-이천 이남지역에는 공산군의 저항선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다음날인 23일과 24일, 동부의 한국 제1·제3군단은 많은 수색대를 출동시켰으나 모든 수색대가 진전 24킬로미터 이내에서는 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즈음 동부지역에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에 공산군은 유엔군과의 전투가 없는 틈을 타서 전선정리와 재편성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알게 된 리지웨이 장군은 대규모로 위력수색을 계획했던 것인데 이것을 썬더볼트작전電擊作戰이라고 명명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는 이 작전이 재반격의 서막이 된 셈이지만 당시에는 전격이라는 명칭이 말해 주는 것처럼 적극적인 공세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단 단위로서의 위력수색으로 발동되었던 것이다.
썬더볼트 작전 개시
작전의 목적은 한강 서안지역을 소탕하면서 북진하여 공산군의 주저항선을 찾아내는데 있었다. 미 제1군단은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으로 5개 특수부대를 편성하였고 미 제9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기간으로 하여 2개 특수부대를 편성한 다음 안성천을 공격개시선으로 1월 25일 아침부터 미 제25사단과 병진하기로 되어 있었고 통제선으로서 A선부터 E선까지가 설정되었다. 이 기간 중 중동부전선의 부대들은 전력을 다시 보충하면서 수색과 양동작전을 수행하여 썬더볼트 작전을 용이하게끔 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여기까지의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리지웨이에게 다시 한 번 북진을 명하였다. 우선 적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대대 정도의 수색대를 출동시켜 보았으나 가벼운 저항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어 제8군이 북진하였다. 내 계획의 기본은 계속 북진하여 피아의 전력이 보급거리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곳까지 북진하라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의거하여 나는 리지웨이에게 적의 주저항선에 부딪칠 때까지 계속 전진하라고 명령하였다.” 1월 25일, 각 특수부대들은 긴밀한 연결을 유지하면서 병진을 개시하였다.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 이후 2개월만의 북진이었다. 중공군은 극히 미약하였다.
터키여단이 오산 서쪽에서 치열한 총격을 받았을 뿐이며 이날 저녁 무렵까지 미 제25사단 제35연대는 수원 남단까지, 미 제1기병사단은 이천을 점령하였다. 다음날인 1월 26일, 각 특수부대가 수원-이천을 넘어서자 중공군의 저항이 점차 치열해졌다. 특히 미 제1기병사단에 그 치열함이 더했으나 경계부대 전투의 범위는 벗어나지 못했다. 포로의 진술에 따르면 중공 제50군 2개 사단이 서해안에서 한강까지 60킬로미터를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각 특수부대는 매일 지정하는 통제선을 향해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통제선을 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중공군이 발견된 고지에는 포격과 폭격을 가한 다음 보병이 신중하게 소탕하고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서 전차와 M-16 자주고사화기구경 50밀리 중기관총 4정을 장착한 반장갑차에 의한 근거리 사격이 특히 효과가 있었다. 항상 공중에서 엄호하고 있던 제트기는 부대가 중공군을 진지 밖으로 구축하면 곧 이를 공격하고 거점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이를 약화시켰다. 이리하여 각 특수부대는 한 줄로 고지에서 고지로, 통제선에서 통제선으로 신중하고도 조직적으로 북진을 계속하였다. 이후 이 전법이 상용되었는데 북한군은 이것을 직선전법이라 불렀다.
1월 27일, 리지웨이 장군은 한강 남안 지역의 중공군을 소탕하기로 결심하고 미 제3사단을 미 제1군단에, 미 제24사단을 미 제9군단 지휘 하에 각각 배속시켰다. 이에 따라 각 군단장은 각각 이들 사단을 우익 정면에다 증가시켰던 것인데 이로써 미 제1군단은 서해안으로부터 터키여단, 미 제25사단, 미 제3사단을 제1선으로 하고 한국 제1사단을 예비로 두었다. 그리고 미 제9군단은 서로부터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사단을 제1선으로 하고 한국 제6사단을 예비로 하는 전면공격 태세를 갖추게 됨으로써 위력수색이 대규모의 공세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 공간사』는 제8군은 여기서 적에 대한 수색이나 소탕뿐 아니라 지역을 점령하여 확보하도록 작전의 성격을 바꾸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월말로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저항이 한층 더 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중공 제50군의 정면이 갑자기 축소된 징조가 보였다. 그리고 포로가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수원 서북쪽에 있는 수리산에서 양평 서쪽의 양자산까지 제50군의 제148·제149·제150, 제38군의 제112·제113·제114사단이 병렬로 방어하고 있다 했고 공중정찰은 인천-영등포 도로변에 많은 개인호가 새로 구축되어 있다고 했다.
정말 수리산-광교산-양자산을 따라 상당한 진지가 있는 것 같았다. 미 제1군단의 여러 부대는 1월 31일을 기하여 조정공격을 개시하였다. 이후 6일간에 걸친 수리산전투의 막을 열었던 것이다. 유엔군의 이러한 북진은 중공군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즈음 갑자기 한강을 도강하는 부대와 보급품 수송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제5공군은 그 80%를 저지시켰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수치의 정확성은 별도로 하고 당시의 중공군이 식량부족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후일의 조사에서 판명되었다.
서울 지구에서 철수할 때 유엔군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미곡창고를 옮기거나 소각해 버렸기 때문에 중공군은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할 수가 없어 그 막대한 양의 쌀을 만주로부터 수송해야만 했기에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수송능력을 더욱 가중시켰다. 거기에다 길고 먼 보급로는 항상 유엔 공군의 표적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강 도하가 가장 큰 애로가 되었기 때문에 한강 남안 지역에 대한 중공군의 보급량은 그야말로 미미한 것 같았으며 생포된 많은 포로들이 이구동성으로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썬더볼트작전이 시작되었을 무렵 중공군의 보급능력은 그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수리산에서 한강으로
썬더볼트작전 첫날인 1월 25일, 미 제25사단 우익부대였던 제35연대는 수원 남단까지 진출하여 다음날인 26일 경미한 저항을 물리치면서 성벽도시인 수원으로 진입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기술하였다. 수원에 남아 있던 노인은 중공군들이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저 산 쪽으로 갔다고 일러주고 있는 산은 바위가 많아 불길한 예감까지 느끼게 하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리산
이 불길한 산이 바로 수리산이다. 수리산에선 영등포로 통하고 있는 국도와 수원에서 반월장, 조남리를 거쳐 소사와 인천으로 통하는 자갈길을 눈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다. 27일, 서쪽으로부터 터키여단, 미 제35연대, 한국 제25연대를 병렬시킨 미 제25사단은 점차 증강하는 중공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수리산 기슭까지 근접하여 구룡동-남산평-부곡리-미륵당 선을 탈취하기가 무섭게 중공군의 조직적인 박격포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중공군은 수리산으로부터 광교산을 잇는 선에다 상당히 많은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남쪽 기슭인 250고지로부터 210고지에 이르는 능선에서는 여러 개의 참호가 보였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엄체호의 총안은 산의 와 지선 부근에서 겁을 주는 듯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킨 사단장 뇌리에는 아마도 마산 정면의 서북산이 떠올랐을 것이다. 8월 상순의 킨작전 때 서북산의 북쪽 기슭을 통과하고 있는 진주도로와 남쪽의 해안도로를 중심으로 공격을 감행, 공격목표였던 진주고개는 탈취하였다.
그러나 산 속에 숨어 있던 북한 제6사단의 측면공격을 받아 뜻밖의 고배를 마셨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지형은 그때와 비슷하였다. 킨 사단장은 참모들이 국도와 소사 도로를 따라 기갑부대를 돌진시키고 수리산은 나중에 소탕하겠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우선 수리산을 탈취한 다음에 기갑부대를 신중하게 전진시킨다고 결정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그때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리산 공격계획
사단이 28일 책정한 계획은 ①서쪽으로부터 터키 여단, 미 제35연대(전차 1개 중대 배속), 한국 제15연대를 병렬하여 수리산을 탈취한다. 공격개시선은 현 접촉선이며, 공격시간은 1월 31일 아침으로 한다. ②수리산을 탈취하면 돌빈 특수임무부대로 국도를, 바레트 특수임무부대로 소사도로 연변지역을 각각 공격케 한다. 그러나 이 양개 부대는 돌진하는 것이 아니며 상황에 따라서 전진과 철수를 신축성 있게 한다. 이때 터키 여단과 미 제35연대는 별명에 따라 양 특수부대가 거둔 전과를 확보한다.
③미 제24연대는 그대로 평택-천안-대전도로를 엄호하고 있는 동시에 수원비행장을 확보한다는 신중한 계획이었다. 미 제89 전차대대가 주력, 미 제64 전차대대 C중대, 미 제27연대 제1대대(첵 중령), 중박격포소대, M16 자주화기 소대, 공병소대, 통신반, 위생반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돌빈 중령이 지휘하였다. 미 제64 전차대대(바레트 중령) 주력과 미 제27연대 제2대대 (머어치 중령) 기간.
제1선 진지 탈취
1월 31일 아침, 이틀 동안이나 준비한 사단의 전 포병은 50분 동안에 걸쳐서 준비사격을 실시했다. 미 제35연대의 좌1선인 제2대대(메리트 중령)는 75밀리 무반동총 4정과 전차 21 대로 7백~1천 1백미터 거리에서 적의 총안을 파괴시키고, 60밀리 · 81밀리 · 42인치 박격포로는 산 중턱에 있는 참호를 집중적으로 포격시켰으며 M16자주화기 4대로는 의심스러운 곳을 찾아서 집중사격을 실시하였다. 준비사격이 끝나자 좌1선의 F중대는 함성을 울리면서 공격을 개시하여 250고지로 근접한 다음, 산의 반사면으로 사정거리를 연장하여 탄막의 엄호를 받으며 바위산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의 저항은 치열하지 않았다. 진전에서 박격포의 탄막사격을 받았고 돌격작전에 약간의 측방 사격과 수류탄 공격을 받았지만 정오경에는 목표인 250고지를 탈취할 수 있었다. 중대의 피해는 전사 2명, 부상 29명으로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산정에 유기되어 있는 중공군의 시체는 43구에 달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박격포와 무반동포의 파편을 맞은 것이었다. 우1선의 그랜드 중위의 E중대 정면에는 목표인 210고지와의 사이에 폭 9백 미터의 논이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랜드 중위는 105밀리 곡사포와 81밀리 박격포의 탄막사격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81밀리 박격포만이 사격을 해주었기 때문에 목표의 20%정도밖에 연막을 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랜드 중위는 60밀리 박격포와 57밀리 무반동총으로 급사를 명하고 구보로 이 논을 통과하였다. 다행히 엄호사격이 정확하였기 때문에 거의 피해는 없었으나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구보는 앞으로 있을 고난을 예고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예정에도 없던 사격으로 60밀리 박격포는 105발이나 사격하여 겨우 80발이 남은 것도 불길한 징조였다. 60밀리 박격포는 57밀리 무반동총이 고장 난 때문에 그 몫까지 사격을 했던 것이다. 공격을 개시하였을 때 E중대의 병력은 174명이었으나 이 중 15명은 한국병사이고 18명은 이날 아침에 편입된 보충병이며 25명은 배속된 기관총소대 요원이었기 때문에 전투경험이 있는 미군 병사는 116명이었다.
휴대한 탄약은 다음과 같았으나 60밀리 박격포의 나머지 탄약이 80발뿐이라는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소총수 : 각자 수류탄 2발, 탄창 2개, 탄대 1개, 기관단총 탄창 4개, 60밀리 박격포 185발(고폭탄 155발, 연막탄 30발), 57밀리 무반동총 30발(고폭탄 10발, 대전차철갑탄 20발), 경기관총 6~7상자, 중기관총 8상자. 따뜻한 식사를 운반하기로 하여 식량은 휴대하지 않았으며 또 산 위에서 머무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외투나 모포, 갈아 신을 양말도 휴대하지 않았다. 휴대 탄약의 양이 적었던 점과 앞에서 지적한 점 등으로 볼 때 중대는 다음에 기술하는 그러한 격전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E중대가 숨이 끊길 듯이 헐떡이며 도달한 210고지의 능선은 잡목으로 뒤덮여있는데다 바위투성이라 올라가기가 힘든 산이었다. 그러므로 좌1선의 제2소대나 우1선의 제1소대나 각각 일렬종대가 되어 적의 눈을 피하여 나무에서 나무로, 바위에서 바위로 빠른 걸음으로 옮겨 가면서 험준한 산허리를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중간 쯤 올라갔을 때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 병력은 12~16명 정도로 생각되었으나 90~1백30미터 거리의 산정에서 내려쏘고 있었기 때문에 바위 뒤에 숨은 병사의 머리 위를 나르는 총탄 소리가 마치 벌떼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각 공격소대는 나무 그늘에서 바위 그늘로, 바위 그늘에서 나무 그늘로 약진하면서 근접하여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여 210고지를 탈취하였다. 정상으로 올라가자 F중대의 공격으로 250고지에서 구축당한 듯한 약 50명 정도의 중공군이 약 120미터 거리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제2소대장인 시브레 중위는 즉각 전 화력으로 사격을 가하도록 하여 20명을 사살하였으나 나머지는 253고지로 도주하였다. E중대가 210고지를 탈취한 시간은 12시 30분경이었다. 산정과 그 부근에 있는 호 속에는 수십 구의 시체들이 있었고 포격으로 날려버린 무기류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볼 때 포격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210고지에는 250고지나 218고지처럼 와지선을 중심으로 깊은 참호가 구축되어 있었고, 요소요소에는 105밀리 고폭탄으로도 파괴시킬 수 없을 것 같은 통나무로 만든 엄개호와 엄폐호가 구축되어 있었다. 약 반달 동안이나 걸려서 구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견고한 진지를 약 3시간 동안에 점령한 E중대 쪽에서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대는 한 명의 피해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곧 풀렸다. 적방사면에 구축해 놓았던 진지는 50분 동안이나 계속된 공격 준비사격으로 거의가 파괴되고 총안으로 날아든 75밀리 무반동포탄이 호 속의 기관총과 병사들을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중대가 공격했을 때 생존해 있던 중공군은 엄폐된 곳에 있던 10여명뿐이었다. 대대의 전투기록에는 75밀리 무반동포의 총안 사격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 쪽 사면에다 설치한 고지 위의 구축물이 아무리 견고했어도 75밀리 무반동포의 사격이 매우 유효하였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확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세한 화력을 갖고 있는 적을 방어할 경우 전 사면에다 진지를 선정하면 적에게 쓸데없이 좋은 먹이만 제공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기서도 실증한 셈이다.
10월 하순,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이 제대로 방어전에 임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청천강변에서 처음으로 미군의 포격과 폭격 세례를 받았을 때 중공 제66군은 「운산에서 얻은 전투경험의 기초적 결론」이라는 제목의 「전훈속보」에서는 “전차와 포병의 협동 전투력이 미군에게 있어서 충력衝力의 주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화포류는 대단히 강력하고 기동적이다. 공군의 대지 공격력 은 강대하며 그 저지작전은 우리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기술했다.
이것을 볼 때 미군의 강력한 화력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 인식을 전술면에 반영시키지 못한 채 대일본군 작전과 국내 전에서 상용했던 전법을 구태의연하게 답습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리산 제1선 진지는 무난히 유엔군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메리트 대대가 250, 210고지를 탈취한 시각에 좌측의 터키여단은 285고지를, 우측의 제1대대는 181고지로부터 128고지에 이르는 능선을 각각 같은 요령으로 탈취하고 있었다.
전쟁의 기회
E중대가 210고지를 탈취하여 재편성을 끝내가고 있을 때 그랜드 중대장이 다음 공격목표인 253고지를 쌍안경으로 살펴보는데 고지 정상부근에서 서둘러 공사를 하고 있는 중공군이 보였다. 그리고 초막동 부락에서 출현한 10여 명의 중공군들이 급히 그 고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랜드 중위는 “적은 제1선 진지가 뜻밖에도 빨리 탈취를 당했기 때문에 서둘러 제2선의 253고지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허를 찌르면 쉽게 탈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곁에 있던 제3소대장 아브라함 중위에게 “지금 공격을 하면 253고지는 문제없이 탈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하고 묻자 “지금 바로라면 탈취가 가능할 거요”하고 자신 있는 대답을 했다. 이것이 12시 35분경이었다. 여기서 그랜드 중대장은 “지금 곧 공격할 것이니 지원을….”하고 메리트 대대장에게 요청하였으나 대답은 “기다려라!”는 것이었다. 아까운 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랜드는 “지금 적은 서둘러 병력을 배치 중에 있다.
전기를 상실하면 많은 피해를 각오하지 않는 한 탈취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반론을 하였으나 253고지의 상황을 직접 보지 못한 대대장은 적이 지금까지 배치하지 않았던 이 지점에다 서둘러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은 듯 “적이 아무리 서둘러 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근접지원을 요청하였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랜드는 “포병만으로라도 제압해주길 바란다. 중대의 박격포는 탄약이 별로 없고 57밀리 무반동총은 고장이 나서 사격할 수가 없다”고 요청하였으나 곧 날아올 지원 항공기가 포탄 파편에 의해서 위험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랜드는 “곧 온다”고 하는 지원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드디어 253고지의 중공군은 사격을 개시하였다. 중대의 머리 위로 기관총탄 이 비 오듯 쏟아졌고 바위에 맞고 튕기는 유탄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앞뒤로 날았다. 약 두 시간이 지나도 지원기는 오지 않았다. 추운 산등성이에서 사격만 받고 있는 E중대는 지쳐 있었으나 15시가 다 되어 대대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다. “포와 박격포로 지원해줄 것이니 신속하게 253고지를 탈취하라. 지원기는 곧 올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지원기가 늦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랜드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매우 분했다.
다시 포와 박격포 지원을 확인한 그랜드 중대장은 이윽고 253고지가 포연에 싸이는 것을 보고나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아브라함 소대가 바위와 바위를 이용하면서 전진을 시작하여 약 20미터 정도 앞으로 나갔을 때 우측 산기슭의 깊은 호 속에서 중공군 두 명이 박격포를 조작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소대는 이들을 생포하였는데 한 명은 군의관이었다. 어떻게 이 두 명만이 남아 있었는지를 조사해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중대원들은 이처럼 중공군이 만만치 않은 전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지원사격이 그치고 말았다.
아브라함 소대가 다시 30미터 정도 전진하여 253고지 기슭의 고갯길로 접어들고 있을 때, 253고지에 있는 2정의 기관총과 다수의 소총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약 3백 미터 전방에 있는 능선에서 내려 쏘는 총탄은 온몸을 전 사면에 노출시키고 있는 중대원 가까이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에 소대는 굴러 떨어지듯이 고갯길에서 굴러내려 각자 몸을 은폐시켰다. 능선 공격에서 가장 피해를 받기 쉬운 순간이었다. 필사적으로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아브라함은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무선으로 “지금 우리는 궁지에 빠져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그랜드는 곧 우군기가 날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잠시만 참고 있으라고 지시하였다.
이때가 15시 30분경이었다. 산 아래 고갯길 부근에 은폐하고 있는 소대는 고지 위의 중공군에게는 보이지가 않았을 텐데도 머리 위로는 간단없이 적의 총탄이 날아왔고 방금 전에 소대가 뛰어내려온 사면에서는 흙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중국 대륙의 전장에서 흔히 있었던 것처럼 아마도 중공군은 마구잡이로 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발밑까지 육박해 온 유엔군에게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랜드는 포와 박격포 사격을 요청했다. 즉시 포사격이 시작되어 고지는 포연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포연이 걷히면서 더욱 치열해지기 시작하였다.
능선 바로 뒤에 파 놓은 호 속에 들어가 있는 적은 참으로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초막동으로 이어진 능선에 있던 제1소대가 수십 명의 중공군으로부터 역습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초막동 부락에서 지게에다 박격포와 탄약을 지고 253고지로 운반하고 있는 종대가 발견되었다. 아브라함 소대의 우측 전방 250미터 정도였다. 그러나 소대는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험하기는 했으나 그랜드 중대장이 경기관총을 능선 위로 끌어 올려서 사격을 시키자 종대는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내던지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중공군은 역습과 사격으로 E중대를 제압하면서 그 사이에 253고지를 증강하려고 생각한 모양이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이 증원을 저지시켰다. 우군기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얼마 후 제1소대에게 격퇴당한 적이 초막동 남쪽 고지에서 아브라함 소대의 측방을 사격하였다. 산기슭에 엎드린 채 머리 위에서 내려 쏘고 있는 적의 사격을 피하고 있을 때(이런 경우에는 밀집이 되는 수가 많다) 측사側射나 배사背射를 받게 되면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곧 철수를 요청하였다. 여기서 우물거리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위급함을 안 그랜드는 즉시 메리트 대대장에게 보고했으나 그의 대답은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랜드는 “전멸당할 우려가 있다”고 항변을 하였으나 “지원기가 곧 올 것이니 조금만 참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랜드는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곧 온다고 하는 아군기는 네 시간을 기다렸어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며 산 뒤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더구나 소대의 철수는 1분 1초를 다투고 있었다. 그랜드는 외쳤다. “이제 우군기가 온다 해도 아무 쓸모가 없다!” 한편 메리트 대대장도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우군기가 지금이라도 날아올지 모르는데 여기서 마음 약하게 철수해 버린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아브라함 소대가 측방사격을 받기 시작했다면 비록 253고지가 불바다가 된다 해도 돌격은커녕 전멸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1선 지휘관의 마음속에서는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는 비정한 마음과 부하를 아끼는 인정어린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인 것이다. 지원기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상황은 일각을 다투고 있었다. 메리트는 마침내 그랜드의 요구를 받아들여 철수 지원사격을 해주기로 하였다.
우군기가 왔을 때 받게 될 비난보다는 오지 않았을 때의 희생이 더 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대는 전 화력으로 눈에 보이는 적을 제압하였고 18문의 포와 8문의 4.2인치 박격포가 각각 9발씩의 포탄을 발사하였다. 합계 234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이다. 이 포격을 이용하여 아브라함 소대는 일거에 210고지의 산 뒤로 철수하였다. 소대가 받은 피해는 전사 2, 부상 2명이었는데, 이것은 적전 지근거리로부터의 주간철수에 성공한 예라고 하겠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장병들은 “공군의 공격을 기다리다가는 전기戰機를 놓치기에 알맞았다”고 투덜댔고 “왜 중대는 적이 미처 배치를 하지 못했을 때에 공격을 하지 않았는가?”하고 중대장을 비난했다. 이때 그랜드 중대장도 같은 기분이었으나 “대대장이......”라고 변명할 수가 없어 그저 마음속으로 부하들에게 사과를 했었다. 특히 전사한 두 사람은 오늘 아침에 중대에 배치된 보충병으로 아직 이름이나 얼굴을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가련하게 느껴졌다.
아브라함이 철수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측의 전사면까지 진출해 있던 제1소대에게 포화가 집중되기 시작하여 수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그랜드는 소대를 후사면으로 옮기고 적의 포화가 멈추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16시 30분에 체념하고 있던 코르세아기 편대가 겨우 나타나서 로켓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요구하고 있던 253고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솟아 있는 수리산 정상에 대한 것이었다.
더구나 대대가 요구하고 있던 네이팜탄과 백린탄白憐彈의 투하는 하지 않았다. 후일, 포로들의 진술에 의하면 이 로켓 공격은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날에 실시했던 253고지에 대한 공격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돈좌되고 말았다. 해가 지기 직전, 아브라함 소대가 진출해 있던 고개 근처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미군 병사로 잘못 본 여러 사람들이 “빨리 돌아오라!”고 소리치자 그 두 사람은 혼비백산이 되어 253고지로 달아나고 말았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내려 온 중공군인 듯했다.
밤의 장막이 쳐지자 소규모의 역습을 받고 3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예상하고 있던 대대적인 역습은 없었고 산위의 밤은 추위 속에 깊어만 갔다. 2월 1일의 아침이 찾아왔다. 붉은 태양빛이 산마루에 걸려 있던 검은 장막을 서서히 밀어내고 있었지만 253고지는 고요함에 싸인 채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수색대를 투입시켜 보니 고지일대는 텅 비어 있었고 파괴된 소련제 경기관총과 소총 등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중대는 253고지로 진출하여 오후의 공격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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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설
1936 경기 시흥 출생 / 1961~1971 한국전력공사 근무 / 1983~1991 대림산업 포항/광양제철소 건설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