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히브리서 6:13~20
제목: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
● 기독교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히6: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위 말씀에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의 보증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고 불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에는 독립성∙불변성∙무한성이 있는데요. 비공유적 속성은 절대적 속성이라고도 합니다. 절대자 하나님만이 불변하시고 그의 선하고 의로운 뜻도 불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불변성 때문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안 하시고 못 하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은 도토리 키 재기로 연약하고 간사해서 변합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확실히 이행하지 못하는데, 못나고 연약해서 계약을 못 지키고 또는 간사하고 악해서 언약을 못 지킵니다. 이런 악하고 약한 인간들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은 쉬운 것은 어느 정도 지키지만 힘든 것∙불리한 것은 못 지키거나 고의로 안 지킵니다. 최근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전세사기 사건으로 인해서 사악하고 간사한 부동산 업자의 뱀 같은 혓바닥을 믿고 속임을 당하고, 전세보증금보험을 믿고 안심을 하다가 뒤통수를 맞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분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을 하고 연약한 사람을 믿으면 우리에게 피해가 오고 사악한 사람을 믿으면 우리에게 좌절과 파탄이 찾아옵니다. 이런 불안하고 위험한 시국에 우리는 안심하고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가 필요한데요. 그 피난처는 변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시며 소망을 주시고 안위를 주시는 하나님의 품밖에 없습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인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편지의 형식을 빌려 권면하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히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
히브리서의 저자는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해석을 담았습니다.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오늘 묵상의 제목 중 핵심단어인 “피난처”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6:18) 단 1건만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 27건+신약 1건=총 28건. 피난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불안과 위협에 시달리다가 최후의 요새와 보루로 도망가서 안전하게 평안을 얻는 곳입니다. 치열했던 이라크 전쟁 때에도 연이은 전투로 고난을 겪은 미군 병사들에게 잠시 동안 휴식을 취했던 지역이 있었는데 그린 존(green zone: 어떤 재해가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이라고 합니다. 마치 그런 그린 존 같은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필요한 피난처입니다. 이 그린 존은 맷 데이먼 주연의 전쟁영화의 제목과 소재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에게 전쟁터나 마차가지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을 군인이라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딤후2:3.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아들의 영∙양자의 영으로도 표현됩니다. 한글 성경으로는 표시가 잘 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서 성령의 영은 대문자 S로 쓰고(Spirit) 사람의 영은 소문자 s를 써서 구분됩니다(spirit).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그 자녀들 안에 내주하시는 아들의 영을 받았다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와 관련, 유의할 것이 있는데요. 참 그리스도인들은 성자의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독생자(獨生子, the only begotten Son)는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만 해도 고귀한 신분이지요.
갈4: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the Spirit of his Son)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
어쨌든 그리스도의 사람∙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전쟁터입니다. 성도에게 이 세상은 결코 실제 천국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후서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전서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
위에서 그린 존(green zone)을 이야기 했는데요. 미군 병사들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다가 잠시 안전지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곳 그곳이 피난처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피난처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천국에 들어가기 전, 이 세상에서 소망을 얻고 큰 안위를 얻게 하는 곳입니다(히6:18).
● 하나님의 절대적(=비공유적) 속성은 독립성∙불변성∙무한성입니다.
히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
위 구절은 하나님의 독립성∙무한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없고 하나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맹세하십니다. 하나님의 독립성∙무한성은 불변성과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 됩니다.
① 히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
모든 일의 최후를 확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불변성을 가지고 또 보증을 하셨습니다.
② 히1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가지(①②) 변하지 않는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히6:18).
●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믿을 자가 없는 상태를 절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거짓말을 안 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일지라고 실제 천국에 들어가기 전 이 세상에서는 군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긴박한 현실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 전쟁터의 군인처럼 고생하는 자들에게,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큰 안위는 큰 용기(공동번역), 큰 위로(새번역)입니다. 진정한 위로와 용기는 참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이 묵상을 읽으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이 보증으로 주신 특권을 함께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주일 전 주말에 은혜의 성경 묵상을 읽고 큰 안위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과 격려 감사합니다.
구약의 신자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신 약속'만 믿고 어디든 가라면 가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라는 건데요. 지금 당장 땅을 분배받거나 아들을 낳거나 원수를 몰아내거나 하지 못함에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움직이는 자들에게 가장 확실한 보증을 해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풍성한 믿음의 댓글에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위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IVP주석(구약편)의 해당 부분을 아래에 댓글로 올립니다.
잘 읽고 함께 참고하겠습니다.
히브리서 6장13-15절.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는 미래에 관한 희망찬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숙한 '약속'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활동의 기초가 된 것은 창세기 12:1-3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특별한 약속이었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여러 모양으로 여러 단계에서 반복되었다(예를 들어, 창 15:1-21; 26:2-4; 28:13-15; 출 3:6-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땅에 정착하게 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이 열국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하셨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 약속의 진실함을 '맹세'로 보증하셨다(참고. 창 22:16,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이것 때문에 '약속'을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시작하셨지만 궁극적인 복은 메시아 예수의 인격에서 나타났다.
궁극적인 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나타났다는 설명이 심금을 울립니다.
@천이다 공감합니다.
히브리서 6장16-18절. 인간사에서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의 최후 확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이 독특한 언어 형식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분의 백성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 즉 그분의 약속과 맹세를 쓰겼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offered to us; 개역개정판에는 '앞에 있는’ 으로 번역되어 있다-역주)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약속의 최종 성솟ㄱ자는 것은 그 다음에서 분명해진더(참고. 갈 3:26-29).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우리 앞에 놓으셨다고 볼 수 있겠네요. 다양한 설명을 들으니 저의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모든 다투는 일의 최후 확정이라면, 재판 결과 같은 성격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에이프릴 공감합니다.
히6:19-20절. 이 절들은 7:20-22에 비추어 해석해야 하는데, 거기서는 하나님이 시편 110:4에서 메시아의 대제사장 되심을 창세기 22:16에서 하신 것과 비슷한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약속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새 언약의 복의 '보증'이 되셨다. 그분을 의지하는 자는 실제로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님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선구자'로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여신다. 우신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다. 성막과 성전의 '휘장 안'(지성소)은 이 땅에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다(참고, 출 26:31-34; 왕상 8:6-11).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모든 영광 가운데 좌정해 계시는 하늘의 성소를 가리키기 위하여 이 말을 쓰고 있다. 우리의 천상의 대제사장 예수님이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장 담대하게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다(참고, 4:14-16:10:19-22) 그러나 6:19-20의 비유적 표현은 또한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예수님이 가신 곳에 갈 수 있다. 따라서 하늘의 성소는 '장차 올 세상'(2:5)과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할 때'(Sabbath rest, 4:9)와 '하늘에 있는 본향' 또는 '하나님의 도성’(11:16; 12:22-24; 13:14)을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그 곳은 모든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백성의 궁극적인 소망이었다. 이 목표를 향한 소망은 우리 구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져서 우리 앞에 펼쳐졌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은 그 성소에 들어가셔서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처럼 거기에 그대로 계신다.
그러므로 영적인 무감각과 배교를 치료하는 방법은 '소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소망은 충성과 사랑의 동기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맹세로 보증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약속이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늘에 올려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위안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분과 함께 약속된영원한 기업에 참여할 것을 믿게 된다.
IVP 성경주석, pp.441-442.
@장코뱅 영적인 무감각은 치료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배교를 치료한다는 표현은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장4절을 함께 읽고 균형잡히게 통합적으로 보면 배교의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천이다 공감합니다.
좋은 설명 잘 참고하겠습니다.
@천이다 그렇군요. 그 부분도 잘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