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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처 박사는 오늘날 성경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사본들만 전승되어 왔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 신앙이 타격을 입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육체를 당시의 제자들은 눈으로 확인하는 특권을 누렸고, 지금의 우리들은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흠 없는 예수님을 보는 데는 지장이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원본을 베껴 쓰는 전승 과정에서 필기자의 실수는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의미에 큰 변화를 주는 정도는 없었다는 것이 아처 박사의 주장이다. 물론, 필기자의 단순 실수가 아니라 편견이나 어떤 의도를 가진 고의성으로 내용을 변경시켰다면 원뜻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본들은 사소한 실수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원본에 있는 정보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성경 66권에 정확하게 전승된 사실을 현존하는 사본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아처 박사는 자신있게 말한다. 더 자세한 사항을 구분선 아래에서 확인해 보자.
무오한 원본 문서의 중요성
성경 원래 필본의 무오성이 성경의 무오한 권위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확립되었으므로, 이제 원필본(autographa)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가장 최초의 가장 훌륭한 필사본들도 전승상의 오류를 전혀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숫자들이 잘못 베껴져 있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고유명사들이 멋대로 고쳐져 있기도 하며, 또한 다른 고대 문서들 속에서도 발견되는 필기자의 오류와 똑같은 유형의 실례들이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그리고 오직 그 정도만이-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된 구약성경과 희랍어로 된 신약성경의 현존하는 최상의 필사본들이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본문 비평의 정당한 활동을 통하여 정정될 수 없는 결정적 실수나 오보를 그 필사본들이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가장 훌륭한 사본들 속에서라도 필기자의 실수가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존하는 무오한 원본은 없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사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전승된 성경 본문의 기초가 되는 무오한 원필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우리는 무오한 원본보다는 조금 못한 사본에 만족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계시를 위하여 무오성이 치명적으로까지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으므로 그 기록된 계시의 원래의 형태를 우리를 위하여 보존해 두시지는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원필본들의 수집본에 대한 논쟁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가장 난해한 종류의 학문적 질문으로서 이런 문제에 의해서 복음주의자들의 계층이 나누어지지는 않아야 하는 질문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를 극히 오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잘못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 저자들의 기록된 진술이나 단언들을-그것이 신학이든 역사든 과학이든-완전히 정확하며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기셨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며,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필기자의 필기 방법에 있어서의 기술적인 무류성보다는 그 신뢰 수준이다. 부주의로 요한복음 3:16의 어떤 단어를 잘못 베낀 사본가에 대하여 우리는 그가 비록 바른 철자법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가 그 구원의 구절의 취지나 메시지에 오류를 초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의 무오성이 논의의 대상이 될 때에 부각되는 문제는 인쇄상의 오류보다도 훨씬 본질적인 것이다.
이런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고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권위있는 계시로서의 성경의 완전성은 그 원래 기록의 무오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 저자에게 영감을 주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 오해의 여지나 거짓이 포함된 글을 쓰게 하실 수는 없다. 모든 사악함과 거짓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으신 이는 자신이 말한 계시의 기록이나 자신의 성경 66권을 쓰기 위하여 선택된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사실의 기록에 있어 거짓을 사용하거나 관용하는 일을 결코 용인하시지 않으신다. 또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을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인간 대행자가 단순히 그의 인간성을 근거로 오류나 실수의 요소들을 성경에 도입하는 것을 용인하셨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기 위해 모세의 나무 지팡이를 사용하신 지고하신 여호와께서는 유류한 인간 선지자를 사용하여서 어떤 종류의 실책이나 혼란도 없이 그의 뜻과 그의 진리를 확실하게 전달하실 수 있다. 처음 영감된 상태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은 하나님 자신의 무오성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원필본의 무오성에 대하여 무관심한 태도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라고 정죄해야 한다.
2. 우리가 조사해 볼 수 있는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한 원본의 존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공학이나 상업에서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미터나 피트나 파운드에 대한 완전한 측정기구가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상거래나 건축 사업에 사용되는 야드자나 다른 측정기구들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것들은 자기 나라 수도의 표준국(Bureau of Standards)에 보존되어 있는 표준 저울과 표준 자와 거의 완전하게 일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 시에 있는 공식 모델들과는 극히 조금이라도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시민이 어깨를 움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당신이나 나나 워싱턴에 있는 표준 측량기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차라리 그것들을 무시하고-그것들을 전혀 상관하지 말고-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불완전한 야드자와 파운드 저울을 택하자." 그러나 실제로 표준국에 그런 측량기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경제 전체가 정당한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2억 2천만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그런 표준 기구의 존재는 그들이 일생 동안 의지하는 모든 측량 기준들의 신빙성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3. 성경의 무오한 원본들의 완전한 사본을 우리는 더 이상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주 예수님도 역시 불완전한 사본일 뿐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동일하게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편의 영광의 보좌로 승천하셨다. 따라서 관찰자들이 지금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성결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그의 불완전한 대표자와 대리자들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몸이 지금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과 도덕적 탁월함의 표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단언해서야 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히브리서 12:2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에게(비록 그는 우리와 육체적인 접촉이 불가능한 곳에 계시지만) 우리의 눈을 고정시킬 것을 명령한다. 예수께서 영광의 승천을 하시기 전의 사도들처럼 육적 눈을 가지고 그를 볼 수 있는 특권을 우리가 누리지는 못하지만,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법을 위한 무오한 모델인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우리가 무오한 성경의 원본들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 원본들은 어떤 종류의 오류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 우리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4. 만약 성경 원본 속에도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면 본문 비평은 거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히브리어나 희랍어 혹은 이 언어들로부터 다른 언어들로 옮긴 고대 번역들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들에 대한 세밀한 연구의 배후에 있는 전체 동기는 원본의 무오성이라는 근본적인 전제에 근거한다. 만약 원본 해독에 거짓이나 실책이 있다면 공을 들여 원본 해독을 추구하는 일이 무슨 유익한 목적이 되겠는가? 성경학자들은 지금까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되던 그 원본이 포함하고 있는 오보(misinformation)에 의하여 상처를 입으며 혼란에 빠지기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약 본문 비평이 어떤 면에서든지 참된 의미와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원본에 거짓이나 실수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의 놀라운 신빙성
왜 우리는 지금 무류한 원본의 무류한 사본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한 권의 완전한 사본을 만드는 일조차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야 할 만큼 인간 필기자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양심적인 사본 제작자라도 기술적인 오류를 전혀 범하지 않고 원본을 옮겨 적어서 새로운 사본을 만들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모든 i에 점을 찍으며 모든 t에 가로로 선을 그으며 동음이의어("their" 와 "there" 혹은 "lead" 와 "led" 같은)의 혼동을 피하려고 할지라도 적어도 몇 번은 실수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든 작가들은 자기들이 쓴 것은 무엇이든지 점검해 보아야 하며 모든 출판사들은 숙련된 편집자와 교정자를 고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아무리 주의 깊다 해도 가끔 실책을 범하고 만다. 제 칠 계명을 "간음을 할지니라"로 인쇄한 16세기의 “부도덕한 성경"(Immoral Bible)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비록 이 판이 신속하게 회수되긴 했지만, 결국 이 대실수는 공중 앞에 드러났으며 발행인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런 종류의 부주의는 어떤 필사자에게서라도 그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불완전한 주의력 때문에 때때로 발생한다.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오류가 없는 사본을 보증하지 못하며, 구두법이나 철자법에 있어서 가끔 실수를 범하는 인간의 성향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본 제작상의 기술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의사전달이 가능하다는 중요한 사실이 남는다.
필기자의 오류에 관하여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사소한 과실의 누적이 원래 의도되었던 메시지를 모호하게 하거나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건전한 방법론에 기초하여 일하는 잘 훈련된 본문 비평가들은 사본의 오류에 의하여 야기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오해들을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필기자 자신이 개인적인 편견에 빠졌거나 고의적으로 내용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복사한 문서의 경우에 있어서는 본래의 메시지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바뀌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성경의 본문에 관한 문제는 본문 비평의 자료를 중심으로 하는 문제이다. 원본에 있는 정보가 완벽하게 보존되어져 왔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을 만큼 고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이 66권의 책들이 우리에게 전승되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무조건 예이다.
주전 3세기로부터 주후 6세기 사이의 수백 개의 필사본을 조사해 보면, 많은 사본이 만들어져 보존된 대부분의 다른 고대 문서들(애굽의 Tale of Sinuhe 혹은 3개 국어로 씌어진 다리우스 1세의 베히스툰 바위 비문)과는 실제 어법(wording)의 변화의 폭이 놀랄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본문 비평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하여 오랫동안 인정되어 온 바에 의하면, 혹시 정당하게 평가된 어떤 이문(異, variant)을-어떤 이문이든지-그 페이지의 하단에 있는 본문 자료들(apparatus) 속에서 골라서, 그것을 표준본문의 인정된 해독을 대신했다 해도 교리나 메시지에 중요한 변화가 단 하나도 없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의 원본을 영감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정도의 통제를 행사하심으로써 그의 백성을 위해 성경을 보존하셨다고 하는 것뿐이다. 의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일탈이 만약 일어났었다면 계시의 원래 목적이-즉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를 확신시키며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좌절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구약성경의 본문 비평 문제를 더 연구해 보고자 하는 독자나 사해 근처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히브리 성경들의 고대 사본들에 대한 정보를 더 얻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Ernst Würthwein의 The Text of the Old Testament (Oxford: Basil Blackwell, 1957) 혹은 나의 책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3-4장). 신약성경 본문에 관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라. A. T. Robertson. An 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2판(New York: Doubleday, 1928) 혹은 Vincent Taylo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London: Macmillan, 1961).
글리슨 아처 저, 황영철 역, 『성경난제 백과사전』(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7쇄), pp.33-37.
첫댓글 국민학교 때 받아쓰기를 하면 고도로 영리한 학생 외에는 잘 틀렸고요. 수기 원고를 컴퓨터 타자를 쳐도 오타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명이 미약한 고대에 성경을 필사하다 보면 오기나 사소한 실수는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요한, 핵심적인 메시지는 왜곡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본의 대상목표인 원본은 분명 무오했을 것입니다.
아처의 글이, 조금 말 많은 꼰대의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틀리지는 않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성경의 완전성은 계시된 말씀이나 모순 없는 논리로 추론한 결과,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된 그분의 뜻이 온전하게 계시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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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 3:16)하다. 그러나 모순 없는 논리를 통한 추론을 시도하지 않으면 그런 목적을 모두 이룰 수 없다. 옳고 건전한 추론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온전하게 살려 낸다. 우리에게는 이성의 능력과 더불어 성경을 연구하라는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명확한 말로 표현된 진리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성경의 완전성은 계시된 말씀이나 모순 없는 논리로 추론한 결과,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된 그분의 뜻이 온전하게 계시되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완전하며, 필요한 모든 목적을 충족시킨다(시 19:8-9).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딤후 3:17) 하기에 충분하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 (딤후 3:15)를 허락한다.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거기에 무엇을 보태거나 빼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셨다(신 4:2, 계 22:18-19).
성경의 완전성을 강조한 이유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과 전통을 성경과 똑같이 공경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논박하기 위해서다. 그 어떤 새로운 계시도 성경에 덧붙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날 것을 예고했고,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경고했다(마 24:11. 24). 바울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했다(갈 1:8-9).
사사로운 계시는 불확실하다. 인간의 마음은 거짓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환상과 상상을 성령의 계시로 착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탄은 매우 교활하기 때문에 때로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다. 따라서 사사로운 계시는 당사자에게 매우 불확실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불확실하다. 그 누구도 사사로운 계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 더욱이 성경에 어긋나는 견해나 행동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미혹의 영에 이끌렸다는 확실한 증거다.
인간의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는 안 된다. 전통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믿음의 부패를 자극하는 비옥한 토양이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 외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계시가 주어졌고, 그 계시가 말로써 아론에게 전달되었으며, 아론을 통해 대대로 구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전통은 특히 예언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를 중단하신 이후에 크게 확대되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전통을 지키는 것을 믿음의 행위로 받아들일 만큼 크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6, 9)라고 말씀하셨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와 교리도 그와 똑같은 식으로 부패되었다. 그들도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은 다른 많은 진리를 전했고, 그것이 전통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을 통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믿음의 조항이나 예배 제도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주어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대체 어디 있는가?
설혹 그들이 그런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해도, 그 전통이 아무런 오염이나 변화를 거치지 않고 우리에게 전달되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사실 '사도적 전통'이라고 불리는 것들 가운데는 사도 시대 이후에 시작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록되지 않은 전통을 성경에 덧붙인다면 인간의 상상에서 비롯하는 변질과 부패를 부추겨 하나님의 율법을 공허하게 만드는 사태가 빚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주님이 유대인의 전통을 엄히 단죄하셨듯이 우리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전통을 거부해야 마땅하다.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p.28.
@장코뱅 역시 웨민입니다. 참 웨민에 대힌 로버트 쇼 목사님의 해설이지요. 팍 와 닿는 좋은 설명입니다.
@노베 네, 한 권 사서 읽어보고 싶은 좋은 내용입니다.
@장코뱅 야, 정확하게 잘 짚어주었네요.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는 열광주의 신비주의자들과 인간의 전통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성경과 같은 자리에 두는 유대주의와 가톨릭의 행태를 다 염두에 두고 성경의 완전성을 강조한다고 했네요.
아론의 전통이니 사도의 전통이니 하는 것들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덧대며 훼손하는 일이지 않을 수 없네요.
원본이 있었으며 사본 필사 과정에서 조금의 오류가 있었을지라도 우리가 읽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무오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아멘 🙏 🙏
오늘도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본문에서 주전 3세기에서 주후 6세기까지 수백 개의 성경의 필사본들을 봐도 애굽의 것이나 다리우스의 비문과 같은 다른 고대문서 사본들의 어법과 비교했을 때 변화의 폭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라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그만큼 성경 필사본들은 시대의 변화와 상관 없이 변화를 주지 않고 거의 그대로를 보존해 왔다는 사실이 되겠죠. 조사한 성경 필사본들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고대문서 시대의 어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니까요. 필사자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필사하려고 노력했는지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