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에
하나둘 직원들이 떠나가더니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아침을 깨워 마주하던
동료들과의 봄 햇살 담벼락에
토담토담 피어나는
풀꽃 같은 날들은 가고
앙상한 겨울 끝
가지만 남은 하루를
애써 붙들고선
마지막이 될 술잔들을 기울이다
달빛에 잠든 별을 따라
집으로 와서는
내일부턴
백수기업에 취직할거라고
걱정 마라며
그 회사엔 출퇴근 시간도 없는
자유로운 회사이고
실적 못 올린다고 뭐라 하는
상사도 없는 꿈의 직장이라며.
논바닥 갈라지는
가슴만 내보이다
잠이 들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거라며
새벽을 걸어나간 남편이
어느 날은 페인트 냄새를
어떤 날은 기름때를
또 어느 날은
이삿짐을 날랐는지 허리를 붙잡고
삶이라는 무게에 짓눌려다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는게 바늘구멍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습니다
밤새 공공거리다
새벽이 일으켜 세워준
하루를 내달려
나간 남편이 놓고 간
도시락 가방을 들고서
바람이 알려준 곳으로
약국에서 산 파스도 함께 챙겨
도착했을 때
멀리서 연신
고개만 숙여 보이고 있는
한 남자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음성이
먼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어이 김씨 자꾸 이럴 거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죄송함더
이제 실수없이 잘할 수 있으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이소
라는
목소리를 듣고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귀를 막고선 뒤돌아서
집으로 걸어오고 말았습니다
술한잔에 굽어진 달을 업고
집으로 들어온 남편을 보며
"여보.. 오늘도 힘들었지예?'
:그 뭐시라꼬 내가 관둘까 봐
우리 현장 소장은 난리도 아이다"
그렇게 남편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무는하루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곤한 초저녁잠에 빠진
남편의 도시락 안에는
그날 일한 일당이
들어가 있는 날보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날들이
더 늘어갔지만
애써 말하지 않아도
묵음으로 전해지는
느낌표 하나로
참 괜찮은 날들이라 다독이며
손을 저어봐도 무엇하나
걸릴 것도 없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
언제 깨어났는지
남편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내어놓더니
담벼락에 기대어선
달을 친구삼아
까만 그을음만
남은 속을 마저
비워내려 앉았습니다
"당신도 이리 온나.
내랑 한 꼬프하자"
꼴 꼴꼴. 따르는 이 소리가
예술인기라
당신 내 벌이가 신통찮아
요즘 살아낸다고 욕보제
게안심더..
이게 무슨 고생이라꼬예'
"여보...
당신과 내캉 한 번도
부자로 살아 본 적은 없지만도
부자에게는 없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겐 있는 게 있다"
"그게 뭔데예?
"남을 생각하는 어진 마음인데
그 어진 마음이
부자들에겐 없단 말이다.
"와예"
그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첫 번째가 돈이고
두 번째가 권력이고
세 번째가 욕심 때문인기라
당신도
그 세 놈하고 친해지고 싶나?"
"언지예.
없는 거 투성이라도
사람한테는
사람 냄새가 나야 사람 아이겠심미꺼 ."
"하모.
우리는 절대
그 세 놈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 제이...
그렇게
새벽이 술잔 앞에 놓일 때까지
남편과 나는 소주 한 잔에
아픔과 허물을 덮어주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선 잠결에 듣는
바람 소리를 따라
가방에 주섬주섬
내가 챙겨준 도시락을 넣고는
'내 오늘은 이 도시락 안에
돈 이빠이 넣어 올끼다..
하하하하"
라고 웃어 보이며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잘사는 그런 기적이 올끼다.
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남편을 보며
전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나의
기적은
당신이라고.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