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역고 나서
1986년 진천문화원에서 脈이라는 책을 펴냈다. 책의 내용은 진천의 문화유적지를 소개하는 것인데 그때 필자는 이 책 한권 들고 아이들을 앞세우고 진천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옛 숨결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기대되고 설레는 일이다. 그 숨결을 따라 다닌 긴 시간들이 참으로 행복했던 것을 감추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이나 문화재가 있는 근처 마을에 들러 조언을 구하려 해도 마을이 텅 비어 황당했던 기억은 지금도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간혹 마을 분들을 만나면 “000가려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으면 “저기로 올라가서 한참 가다가 이쪽으로 돌아서 쭉~가라”고 가르쳐 주면 아무리 잘 새겨들으려 해도 너무 막막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어려움들마저 아름답게 느껴지며 찾아가기 힘들어서 더 찾고 싶은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열심히 찾아 돌아 본 하나하나가 가슴 속에 역사의 숨결로 살아났고 그 속에서 느낀 것을 적었으며 순국미망인들의 가슴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일들, 또한 투박하지만 심성 고운 진천 사람들과의 대화가 130여 편의 시로 살아나주어 고맙지만 그 분들께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발로 뛰어 다닌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 시집이 진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천을 알리고 또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 그 사람들도 행복 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왜 생거진천인가?
진천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이라 전해 내려왔다 금강의 상류인 미호천이 만승과 백곡에서 시작하여 광활한 평야를 적시어 비옥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평야는 침식분지가 대부분이지만 하천 주변은 토사의 퇴적으로 충적지를 형성하는 곳이 많아 논농사에 알맞다.
진천군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상산지 토산 편을 보면 조선시대 진천에서 연간 6만여 석의 쌀을 생산하였는데, 그 당시 전국 통계가 단보 당 평균 수확량이 9말3되였던 것에 비해 진천은 11말5되나 수확되어 곡향으로 유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진천의 땅이 얼마나 비옥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東國輿地勝覽의 古蹟條에는 조선 중종 조 이전부터 동호를 관개용 저수지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일찍이 관개사업에도 힘을 썼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벼농사와 더불어 야산을 이용한 질 좋은 면화 생산과 삼베와 담배의 수익 또한 벼농사보다 더 농가의 수익을 올려주었다고 하니 군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생거진천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