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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고단한 삶이 기회였다
1. 불안해서 버티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요즘 웬만큼 사는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벽걸이 TV가 우리 집엔 없다. 솔직히 사고는 싶다. 그런데도 아직 못 산 건 비싸다는 생각에서다. 딸한테는 가끔 면세점에서 명품을 사주지만, 내 티셔츠는 동대문에서 사는 2,3만 원짜리다. 사람들 말처럼 내가 검소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딸하고 같이 동대문 시장에 가면 티셔츠를 몇 개씩 사는데 2,3만 원짜리라도 한 10개쯤 사면 꽤 큰돈이다. 두세 번 입으면 그만이니까, 차라리 딸애 말대로 돈 더 주더라도 제대로 된 거 한두 개 사서 딸애처럼 멋지게, 오래 입고 다니면 그게 더 경제적일 게다. 그런데도 내가 입을 건 십만 원 이상 되면 아예 사질 않는다. 티셔츠는 2만 원 식으로 머리에 팍 박혀 있다. 가족들한테는 아낌없이 해줘도 나한테는 뭐 좀 대단한 거엔 돈을 펑펑 쓰질 못한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막 쓰지는 못하는 걸 보면 아직도 돈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아직도 돈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20대 초반부터 내 머릿속엔 ‘돈’이란 글자가 콱 박혔다. 돈이 없으면 무너질 거 같았고, 돈 버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인생에서 두 번 돈에 크게 쪼들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며 막막해 하던 쇼크가 평생을 가고, 그때의 심리적 불안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불안해서 버티다 보니까, 하나님의 은총인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 연기 인생 35년, 장사 인생 20년, 그야말로 끈기로 버텨왔다. 이거 아니면 안 된다, 꼭 이걸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끈기도 나오는 것 같다. 대충 재미 삼아 하는 자세로는 끈기가 안 나온다. 연기도, 장사도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생각에서 매달린 거였다. 방송 일로만 잘 살았다면 나도 놀러 다니면서 대충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2. 졸지에 가장 신세가 된 대학생
나는 광복 한 해 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사후퇴 때 돌아가셨으니 내가 8살 때였다. 어머니는 서른을 훌쩍 넘어서 첫 아들로 나를 낳으셨다. 3년 후에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어머니의 첫 출산은 당시로선 꽤 늦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노처녀 소리를 들으시다가 만주에서 아버지를 만나 연애를 하셨단다.
당시 아버지는 첫 부인하고 사별한 상태였고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대학 2학년 때였던가,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앉혀놓고 이복 형들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하셨다. 크게 놀라거나 했던 거 같지는 않다. 형들을 만났는데도 특별한 감정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동생도, 나도 이미 머리가 다 커서 만났기에 갑자기 나타난 이복 형들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 같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고. 만약 그때까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그래서 우리 형제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낯선 형들하고 부정(父情)을 나누고 싶어하진 않았을 게다.
결혼생활을 10년도 못 채우고 과부가 된 어머니한테는 우리 형제가 전부였다. 어머니의 큰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가끔씩,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큰 아쉬움 없이 자랐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건 알았지만 물질적으로도 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아버지 집안은 대단한 부자였다. 김씨네 집안 땅을 밟지 않고는 수원을 못 건너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많던 재산도 날아갔는지 어쨌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우리 식구한테는 별 혜택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시집에 기대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피난 갔다 와서 난 남산 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집이 후암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삼광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즈음해서 어머니는 서울 스카라 극장 앞에서 일식집을 여셨다. 음식점엔 당시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오곤 했는데, 나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혹은 혼자서도 자주 가서 맛있게 먹곤 했다.
여자 혼자서 음식점을 해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만 다행히도 가게는 잘 되었다. 사촌형이니 친척 형들의 친구들이 어머니 가게 일을 도와주었으므로 우리 형제는 여유 속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머리가 좋았는지 난 서울 사대부중(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로선 똑똑한 아이들이 들어가는 명문이었다. 난 서울 사대부고 진학을 목표로 기를 쓰고 공부했고 거뜬하게 합격했다.
내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어머니 가게가 잘 안 되기 시작했던 거 같다. 가게 사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만 어느 만큼 심각한지는 잘 몰랐었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름대로 어머니 가게에 신경은 썼지만, 어머니는 가게 일에 대해선 우리 형제한테는 내색을 별로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가게에 도둑이 들어와서 왕창 털렸는데도, 그 일 역시 형들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엄마, 어떻게 해?” 하면서 내가 걱정을 하니까 어머니는 “괜찮다, 괜찮아”라고만 하셨다.
“장사가 안 돼서 큰일났다, 어떻게 해야 손님 끌지?”
“휴, 그러게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가게 돌봐주던 형들이 집에 와서 하는 얘기를 듣고서야 가게 사정이 많이 힘들어진 걸 알았다. ‘이젠 나도 컸으니까 엄마가 가게 나와서 카운터라도 보라고 시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어머니한테 말을 꺼내진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친구들하고 가게에 와서 먹고는 가도 일 같은 건 못하게 하셨으니까. 그건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대학 친구들 중에 돈 잘 쓰는 놈들 많아요. 내가 가게 지키고 있으면 걔들이 와서 팔아줄 거야.”
가게 상황이 나쁘다는 걸 알고 가게 일을 거들겠다고 나섰는데 어머니는 한마디로 딱 자르셨다.
“가게엔 나오지 마라.”
아마도 어머니는 가게 같은 데는 신성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넌 딴 생각하지 말고 걱정 같은 것도 하지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가게 상황이 정말 힘들어졌을 땐 결국 “너도 나와서 도와달라”면서 날 부르셨지만.
어머니 뜻대로, 어머니한테 보답하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라 생각해서 고등학교 땐 서울대 의대를 목표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집안에 연대 의대 출신 형들이 몇 있어서 어머니는 또 집안 형들도 나한테 연대 의대를 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도 서울 의대 합격자를 많이 내려고 했었고, 공부 꽤나 한다는 애들이 나까지 여덟 명이 모여서 입시과외를 했었는데 “우리 클럽에서 서울대 톱은 못 나와도 의대는 가야 한다”는 분위기여서 난 서울대 의대로 결정을 했다.
서울대 의대는 무난히 들어갈 줄 알았는데 입시시험에서 떨어졌다. 모의고사 성적이 남들보다 굉장히 월등했고 또 교과서를 달달 욀 정도로 열심히 했었기에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생각은 추호도 안 했었다. 서울사대부고는 반에서 10등만 해도 서울대 단과 톱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당시엔 쌩쌩 날리던 학교였다. 그러니 나 정도 실력이면 의대 정도는 쉽게 들어갈 거라 자신했었다.
그런데 막상 떨어지니까, 나 잘난 맛에 젖어 살다가 그런 고배를 마시니까, 정말 실망이 컸다. 그동안 한번도 안 썩혔던 어미니 속을 한꺼번에 왕창 썩히면서 재수를 했다. 다음해에는 한 단계 낮춰서 연세대 의대에 재도전했지만, 떨어졌다고 해야할지 붙었다고 해야할지, 2지망에 붙으면서 결국은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수학과 64학번이 되었다.
원하던 과(科)에 들어간 게 아니어서 대학 생활은 재미가 없었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1년 가량을 보내고 ‘연희극 예술 연구회’에 들어갔고, 연극하는 맛에 들여 살던 2학년말에 엄마 가게에 불이 났다.
내가 불하고 관련이 있는지, 그땐 몰랐지만, 졸지에 난 가장이 되어버렸다. 화재로 가게가 날아가자 어머니는 당분간 집을 피해서 다른 데 가 계셨다.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갑자기 당한 일이지,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 다니지, 어머니로선 참으로 막막하셨을 게다.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 한두 달 동안, 우리 집 살림을 해주시던 아주머니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하고 나의 보호자가 돼주셨다. 당시는 웬만큼 사는 집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어머니가 가게 일을 하시느라 지금은 돌아가신 아주머니가 그동안 쭉 우리 집 살림을 도맡아 해주셨다.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 며칠 째, 밥상에 새카맣게 탄 생선이 올라왔다.
“엄마 가게에서 건져온 거야. 이 아까운 걸 몽땅 버릴 순 없지 않니? 그래도 먹을 만 한데...”
아주머니는 애써 웃으셨지만, 난 반찬 살 돈이 떨어졌다는 걸 눈치챘다. 동생도 불평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지 묵묵히 젓가락으로 불에 탄 생선을 휘적거렸다. 냄새가 지독했다. 가능한 코로 숨을 쉬지 않으면서 우린 겨우 밥을 먹었다.
며칠만 참고 먹으면 되겠지 했는데 불에 탄 생선은 계속 밥상에 올라왔다. 그나마 쌀은 사 둔 게 있었는지 끼니를 거르진 않았지만, 그 놈의 생선을 꼬박 한두 달을 먹었다.
일식집에 불이 났으니 냉장고니 수족관에는 크고 좋은 생선들이 오죽 많았을까. 하지만 어떤 게 도미인지, 어떤 게 꽁치인지도 분간 못할 정도로 새카맣게 타버린 생선들을 껍질하고 살을 거의 반은 떼어내고 먹자니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목구멍으로는 넘어가도 그놈의 탄 냄새는 코를 막아도, 식초니 향한 강한 소스를 뿌려도 쉬 사라지질 않았다.
그 지독한 냄새는 지금도 생생한데, 나로선 생전 처음으로 맡아본 가난의 냄새였다.
그 전까지는 몇 년 간 어머니 가게가 고전을 하긴 했어도 양옥집에서 살지, 일하는 아주머니도 계시지, 그동안 어머니가 모아둔 재산도 좀 있지, 그래서 우리 식구는 물질적인 궁핍이란 건 모르고 살았었다.
불에 탄 생선을 먹으면서도 동생하고 난 서글퍼지지 않으려고 애써 씩 웃어가면서 삼켰다. 불이 나서 난리가 난 판에 불평할 처지가 아니란 것 정도는 알 만한 나이들이 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금만 참으면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만 돌아오시면,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리라.
하지만 그건 안이한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돌아오셨지만 우리 집 재산은 후암동 집 하나만 겨우 건지고 전부 날아가 버렸다. 어머니는 화재 수습을 하면서 그동안 여장부답게 씩씩하게 버텨오던 그 힘을 몽땅 뺏기셨는지 뭔가 다른 일을 벌여야 한다는 염두를 내지 못하셨다. 하긴, 결혼이 늦어지지 않으셨다면 아들이 벌어오는 돈에, 며느리가 해주는 밥 드시면서 편하게 여생을 즐기실 나이였으니까.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당장 우리 식구가 먹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난 가정교사로 나섰다. 다행히도 잘사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고 나도 공부는 웬만큼 했으니까 친구 동생들 과외 선생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주로 대입 과외를 많이 해서 지금 돈으로 한 달에 한 2,3백은 벌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로만 치자면 꽤 큰돈이지만, 동생하고 내 학비 내고 나면 하면 우리 세 식구가 겨우 먹고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한 달 한 달을 근근히 버티다보니 자존심 세시던 어머니도 많이 약해지셨는지 미국에서 사는 외사촌형한테 우리 집 형편을 써서 보내라고 하셨다. 힘들 때 서로 돕는 게 친척이라지만, 또 언니 아들이니까 어머니로선 당신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어렵게나마 꺼낼 수 있었겠지만, 잘난 맛에 살았던 나로선 그런 편지를 보내는 게 정말 싫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고 겨우겨우 몇 자 적어서 형한테 보내면 고맙게도 형은 오백 불도, 천 불도 불만 없이 부쳐주고 했다. 내가 결혼할 무렵엔 반지라도 하라고 다이아몬드도 하나 보내주었고.
1년, 2년...,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자니 지겨웠다. 아니, 내 밥벌이로만 우리 집 식구가 겨우 밥만 먹고사는 게 지긋지긋했다. 친한 친구들말고는 우리 집 사정을 모르니까 대충 알고 지내는 애들 앞에서 돈 때문에 기죽는 것도 싫었다. 버스 비가 얼마나 된다고 좀 가까운 데라도 가면 걸어갈까, 말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 화가 났다.
아무런 시련 없이 편하게만 살다가 갑자기 돈에 쪼들리게 되니까, 지금 돌아보면, 그러면서 차츰차츰 나도 모르는 새 돈에 한이 맺히게 된 거 같다. 자존심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늘 ‘돈, 돈, 돈’하면서 살았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면 좋은 내일이 온다.’
아르바이트 집에 가기가 싫어질 때마다 그 말을 되새기면서 참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공부가 지겨워지면 늘 다짐했던 말이었다. 어머니가 고생하신다는 걸 알기에 그땐 머릿속에 ‘공부, 공부’란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래서 남들 쉬는 시간에도 눈치보면서 책을 꺼내 들었었다. 공부만이 어머니한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지만, 이 험난한 세상을 해쳐나가려면 나한텐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박혀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이젠 머릿속엔 ‘공부’ 대신 ‘돈’이란 글자가 박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론 과연 어떻게 해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갈 것인가 조바심을 치면서.
3.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탤런트
가정교사가 주업이 되고 학교 강의는 대충 듣는 날들이 이어졌다. 굳이 아르바이트에 쫓기지 않더라도 전공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창피한 얘기지만, 수학과를 나왔어도 난 수학의 ‘수’자도 모른다. 1학년 수업에 들어가니까 고등학교 때 배운 걸 다시 가르쳤다. 건방진 마음에 수업엔 안 들어가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강의 수준이 높아졌지만 연극이니 아르바이트니, 또 나중엔 탤런트 한답시고 공부를 안 했다. 그래도 시험 볼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노트 빌려주던 친구들이 몇 있어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겨우 딸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나의 건방짐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세상 무서운 걸 몰랐으니까. 대학입시에서 미역국을 먹고 나서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나긴 했지만, 1년 더 한다고 뭐 대수냐 하면서 억지로 라도 오기를 부렸었다. 원하는 대학에만 가면 되는 거 아니냐, 이 정도 실수는 만회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한 애들이 흔히 그렇듯, 공부만 잘하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거 같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세상에 자신이 없었을지라도 말이다. 열심히도 했지만 다행히도 머리가 따라주어서 공부에선 남들보다 앞섰기에, 또 어머니 덕분에 애정에서건 경제적인 상황에서건 부족함을 몰랐기에 난 꽤나 건방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런데 재수 끝에 2지망으로 연세대 수학과에 붙고 나니 다닐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거기 가느니 차라리 다시 재수할래요.”
난 어머니한테 우겼다.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셨다.
“형들 빽 이용해서 의대로 옮겨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
어머니도 정말 자신이 있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겠지만, 난 어머니 말에 안심을 하고 대학에 등록을 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전과(轉科)는 안 되지, 과는 마음에 안 차지, 1년 가량을 억지 춘향 격으로 학교에 들락거렸다. 무엇보다도 마음속에서 오만함을 벗어 던지기가 힘들었었다. 같은 과 친구들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쟤네들하고 어떻게 같이 공부를 하나 하면서 우쭐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학교 연극에 재미를 붙이면서 대학생활도 나름대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강의실보단 연극부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연극부 생활은 1학년말에 노천극장에서 공연하는 소인극에 뽑힌 것이 계기가 되어 ‘연희극 예술 연구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연기가 안되니까 음악 담당을 맡았는데 다음 해인 2학년말부터 연기를 하게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첫 출연 작품이 <우리 읍네>이었던 것 같다. 첫 작품을 하고 나서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연극부 선배, 동료들과 어울리면서 그 끈끈함에 젖어서, 또 연습 과정을 즐기면서 살던 차에 어머니 가게에 불이 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하게 되었고.
용돈 정도 버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자니 심리적인 부담이 너무 컸다. 어머니한테 용돈 많이 받아서 아쉬움 모르고 쓰다가 그 몇 배나 되는 돈을 벌자니 내 손으로 학비를 벌면서 공부한다는 자부심 같은 건 차라리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한동안은 ‘우리 집이 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나만 쳐다보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난생 처음으로 경제적인 곤경을 겪게 되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당이 되질 않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안전한 온실에서 착한 아들, 모범생으로 별탈 없이 잘살다가 갑자기 이 넓은 세상 한복판에 홀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아니, 차라리 혼자였으면 이 한몸 건사하는 것쯤 못할까마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좀처럼 가벼워지질 않았다. 시간이 흘러 학년이 올라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그런 나를 구해준 건 연극이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에 쫓기면서도, 돈 걱정이 떠나질 않아 가슴 한구석이 늘 답답했어도 손에 연극대본을 들고 있으면 살맛이 났다. 연극부 패거리들하고 어울려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연극 얘기에 열을 올리다 보면 가슴이 확 뚫렸다.
연출가 오태석 씨, 소설가 최인호, 방송작가 정하연, 작가 오혜령 선배 등이 당시 연희극회 패거리들이다. 얼마 안 되는 학교 예산으로 연극부를 운영했으니까 그땐 모두들 배고픈 연극학도들이었다. 본격적으로 연극 연습에 들어갈 땐 우린 이대 뒷문에서 합숙을 했는데, 가끔 합숙소에서 빠져나와 감잣국이니 짜장면에다 소주라도 먹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소품도 우리가 직접 다 만들어서 조달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우린 똘똘 뭉쳤었다.
난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면서도 연극판은 열심히 따라다녔다.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으면서 연기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면서 <유리 동물원>의 주인공 역도 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무렵엔 몇몇이서 ‘소인극회’를 만들어서 최인호가 쓴 대본으로 YMCA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공연도 했었다.
연극하는 재미로 버티다보니 어느덧 대학 3학년이 되었다. 내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우리 집의 생계수단이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 이 짓을 계속 해야 하나, 가슴이 답답했다. 졸업하고 어디 취직을 한다 한들 상황이 좋아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대학 졸업자 초봉은 과외로 버는 돈의 반도 안 되니까 졸업이니, 취직이니 하는 것에 희망을 걸 수도 없었다.
대학 3학년의 봄은 이렇게 심란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던 1967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연극 대본이라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해서 연극부실에 들렀다. 머리가 무거워 대본에 집중이 안 돼서 멍하니 있는데 한쪽에서 후배들끼리 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동양방송에서 탤런트 4기 모집한데."
귀가 솔깃했다. 탤런트? 그래, 그거다! 난 그 길로 나와서 탤런트 모집 광고를 찾아봤다. ‘동양방송(TBC) 4기 탤런트 모집: 연기 시험, 카메라 테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기 시험.’
망설일 것도 없이 응시 원서를 냈다. 방송국에 들어가서 6개월 안에 정상을 차지하자, 1년 반 동안 돈을 왕창 긁어모으자, 그러니까 딱 2년 만 아르바이트로 탤런트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난 스타가 될 자신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도 난 꽤나 건방졌었다. 그렇게 건방질 수 있었던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일단 ‘연희극 예술 연구회’에서 연극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어릴 때 추억의 앨범 속에는 연기자로서의 끼를 인정해줄 만한 화려했던 날들이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얘기지만, 난 학교에선 학예회에 늘 뽑혀 다녔고, 다니던 금성교회에선 크리스마스 같은 때 하는 성극(聖劇)의 단골 주인공이었다. 난 대사를 보면서 외우는 건 싫어했지만 교사들이 말로 대사를 한 번 가르쳐주면 금방 외워서 했다. 가르쳐준 걸 그대로 하지도 않고 임기 웅변식으로 둘러대면서 하기도 했는데, 그러는 나 자신도 신기했지만 모두들 재미있어 했다. 동화대회에 나가서 1등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대사 처리에선 일가견이 있었던 거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신성일 씨가 주연하는 영화도 많이 보면서 배우가 될까 하는 꿈도 잠시 꿨었다. 하지만 그 꿈을 키울 수는 없었고 어머니한테는 감히 입밖에도 내질 못했다.
그리고 재수 시절의 사건. 대학에 떨어진 충격으로 공부 때려치우고 잠시 바람이 들었던 시절의 일이다. 무너진 자존심을 만회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나 혼자 뭔가 해보겠다며 여기저기 기웃거렸었다. 그 중의 하나가 영화배우를 뽑는 ‘스타 탄생’ 대회였다. 영화가 뜨던 시절이라 영화 협회 비슷한 데서 대대적으로 신인 배우를 남녀 한 명씩 뽑았었다. 영화판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외모엔 좀 자신이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곱살하게 생긴지라 귀공자 타입이란 말을 들어온 터라,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어서 주최측에 보냈다. 최종 후보 20명 선까지는 들어갔으니 거의 결승까지는 올라갔는데 물론 대회에선 떨어졌다. 어린 시절의 연기 경험만 갖고는 떨어진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젠 그때하곤 사정이 달라졌지 않은가? 연기 실력에도 난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건방지게도 꼭 붙을 거라는 마음으로 탤런트 시험을 치렀는데, 운이 좋았는지 정말 시험에 붙었다.
4. 불안정한 엑스트라 생활
대학 3학년 봄은 암울함에서 희망으로 바뀌었다. 동양방송(TBC) TV 4기생으로의 연기 인생은 화려하게 시작되는 듯 했다. 당시는 방송국 전속 탤런트가 얼마 안 되었는데 전속만 되면 방송국에선 출세하는 거였다.
시험 보러 가서 처음 만난 연대 선배인 서승현 씨, 그리고 박용식 씨가 4기 동기인데, 우리 전기(3기)를 뽑을 땐 얼굴 위주로 뽑아서 실패했다면서 우리한테는 마지막에 필기 시험을 치르게 했었다. 그 필기시험 덕분인 듯 난 1등으로 뽑혔고, 방송국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큰 배역도 맡았다. 큰 배역이래 봤자 조연이지만 그래도 인기 드라마의 조연이니까 신인으로선 대단한 거였다.
출발이 순조로우니까 연기에만 전념해야겠다 싶어 과외 아르바이트는 모두 정리를 했다. 그런데, 경험이 중요하다고 막상 드라마에 투입되어 하려니까 열심히는 해도 생각만큼 연기가 잘 되질 않았다.
“야, 그거밖에 못하냐?”
“자연스럽게 좀 해!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내가 NG를 내면 PD는 화도 냈다가 어떤 땐 한숨도 쉬고 했다.
관객을 앞에 두고 대사는 또박또박, 동작은 크게 연기하다가 PD 말대로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하자니 영 밋밋해서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카메라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선배들 연기하는 모습 옆에서 지켜보면서, 또 집에선 TV 드라마들 보면서 따라하면서 죽어라 연습을 해도 드라마 연기란 게 공부처럼 쉽게 되어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하는 건 또 아니었다. 하기는 하는데 시원치가 않았다. 다행히도 첫 배역이 끝나고 연이어 다음 배역을 맡았지만 한동안은 다음 배역이 들어오질 않았다.
학교 수업도 거의 빼먹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도 이런 신세이니 자존심은 말이 아니었다. 6개월만에 스타로 떠서 한 2년 돈 좀 벌고 탤런트 때려치울 생각으로 방송국에 들어왔는데, 스타는커녕 다음 배역을 기다리고 있을 판이니 계산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자니 당장 가족들이 먹고사는 게 문제였다. 탤런트 수입이라는 게 방송국 전속이 되면 처음 6개월은 월급을 받지만 3일 정도 술 먹으면 없어지는 정도였으니까 품위 유지비도 안 됐다. 6개월이 지나면 드라마 출연 회수대로 출연료를 주니까 일이 없으면 돈 한 푼 나오질 않는다. 난 속이 타서 아무 배역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PD가 불러줘야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단은 숨통이 트였고, 작은 배역이라도 들어오면 한겨울 새벽에 야외 촬영장으로 달려나갔다.
해는 바뀌고 다시 봄이 되었지만 상황은 좋아지질 않았다. 앞으로도 달라질 게 없을 거 같았다. 탤런트 생활 2년째로 접어드는데 조연은커녕 단역도 고마울 판이었다. 다행히도, 시키면 제법 할 것 같았는지 PD들이 기회는 많이 줬지만 연기가 확 늘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던 어느 날, 과외 가르치고 집에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대학 동기를 만났다.
“야, 반갑다! 그런데 탤런트도 버스 타고 다니냐?”
양복을 쫙 빼 입은 동창생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달 전에 졸업을 했으니 어디 회사에라도 다니는 모양이었는데,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기까지 했다. 아마도 탤런트는 ‘삐까뻔쩍’하는 옷만 입고 다닐 거라 생각했나본데, 대충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난 동창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렇지 뭐.”
난 피식 웃었다. 창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속만 좀 쓰렸을 뿐. 버스에서 그 친구를 만나서가 아니라, 그 즈음 내 처지가 그랬다는 거다. 안부 몇 마디 오갔는데 난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친구가 내리고 나서도 버스는 한동안을 더 달렸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어두운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 치밀어 올랐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난 방송국 따라다니랴, 아르바이트하랴, 학점이 모자라서 동기들하고 같이 졸업을 하지 못하고 한 학기 더 다니던 상태였다. 졸업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갈등도 심해져가고 있었다. 돈 걱정에, 앞날 걱정에 밤에는 잠도 오질 않았다.
‘스타로 뜨겠다는 6개월은 지나간 지 이미 오래다. 앞으로도 가망이 없을지 모르는데 탤런트를 계속 해야 하나, 졸업장은 생기니까 어디 취직이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탤런트냐, 취직이냐, 양손에 두 떡을 올려놓고 저울질하길 몇 달. 그 어느 것도 만만한 ‘떡’이 아니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난 결심했다. 더 이상은 저울질하지 않기로.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다. 연기를 계속하자! 오기로라도 버티자!’
대학을 졸업하고도 상황은 좀처럼 달라지질 않았다. 대학 졸업한 놈이 탤런트랍시고 하는데, 이거는 가정교사도 아니고 탤런트도 아니고, 내가 도대체 뭘 하는 놈인가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그야말로 탤런트는 부업이요, 가정교사가 주업이었다.
과외를 하는 게 부끄럽진 않았다. 과외 하던 애들은 날 ‘탤런트 과외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모두 중년이 됐을 텐데 내가 TV에 나오면 탤런트 김종결 보다는 ‘선생님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어쨌거나 그 애들 집에 갈 때는 여전히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래도 방송국 왔다 갔다 하면서 탤런트로 얼굴은 제법 팔렸는데도,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아봐도 창피하진 않았다. 당시는 자가용은 별로 없었고, 좀 나간다 싶은 탤런트들은 택시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가끔 단역으로 TV에 얼굴을 내미는 탤런트들은 다들 형편이 비슷했다. 동료 탤런트들하고 사직동에 있던 ‘대머리집’이니 명동에 있던 ‘은성’이니 술자리에 모이면 서로 가난했던 시절이라 ‘뿜빠이’ 해서 계산했는데, 난 그 중에서도 가난한 축에 끼었다. 그런데도 내가 힘든 사정을 드러내놓지 않아서인지, 아님 해맑게 생긴 얼굴 때문인지 남들은 내 속사정을 전혀 몰랐다. 일부러 부잣집 아들 행세한 것도 아닌데, 다들 나를 제법 부잣집 아들이거니 하고 생각했다. 비싼 옷은 아니어도 말쑥하게는 입고 다녀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동양방송 탤런트 5기 심사를 할 때 심사위원들 옆에서 심부름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김창숙 씨가 붙고 나서 나중에 방송국에서 마주쳤는데 추켜세웠었다.
“오빠 그때도, 지금도 진짜 멋있어.”
내가 방송국에선 나름대로 품위 유지는 꽤 잘했던 거 같은데, 탤런트 3년째로 접어들어도 연기자로서는 ‘비리비리’ 상태를 면치 못했다. 연출자들은 나한테 기회를 많이 줬는데 내가 배역을 소화하지 못하고 자꾸 실패하니까 날 부르는 일도 드문드문해졌다. 그나마 어쩌다 역할이 들어오면 엑스트라였다. 지나가는 사람, 시체... 연기도 경험이라고, 단역이라도 들어오면 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한 3,4년 그렇게 버티면서 연기란 걸 조금씩 배워나갔다.
그러니 탤런트 수입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계속 했는데도 집 형편은 나아지지는 않고 계속 기울기만 했다. 늘 돈에 쪼들리니까 돈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돈이 없으면 안 된다, 딴 놈들은 대충 놀아가면서 살면서 돈 좀 잘 벌면 잘 쓰고 모자라면 또 벌면 되지만, 난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돈을 버나... 지금이라도 탤런트 때려치우고 딴 거 알아보는 게 낫지 않나 하는 회의도 주기적으로 따라왔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연기 못해서 개죽을 쓴 적은 없지 않은가. 연출자들이 잘 불러주질 않아서 그렇지, 미움을 받는 것도 아니다. 연기 때려치우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이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포기하고 딴 건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오기로 버틴 거 같다. 연기자로 잠깐 뜨고 나서 안 되길 3년. 방송국에 처음에 들어가자마자 큰 배역도 못 맡고 했다면 쉽게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거북이>에 아들 역으로 출연해서는 꽤 인상적인 연기도 했고 여러 드라마에 출연을 했다. 시청자들한테 크게 어필하는 역을 못했고, 스스로도 연기가 속에 차지 않았을 뿐. 맛은 봤는데 연기가 될 듯 하면서도 안 되고, 연기자로 필 듯 하면서도 못 피니까, 그래, 언제까지 이럴지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5. 드디어 떴다!
포졸 C, 보이 등등의 역할로 TV에 얼굴을 내밀면서 ‘엑스트라도 좋다, 배역만 들어와라’ 하는 마음으로 한 4년 버텼다. 그러던 1971년, 동양방송국에서 김재형 PD와 마주쳤다. 27살 때였다.
김재형 PD가 불쑥 내 머리를 만져보면서 물었다.
“머리 깎을래?”
난 그냥 웃기만 했다. 김재형 감독하면 KBS <용의 눈물>, SBS <여인천하> 등 사극에선 독보적인 존재인데, 그때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젊은 연출가였다. <용의 눈물>, <여인천하>는 물론이고 그 후 김 감독은 많은 드라마에서 날 불러줬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배역을 준 적이 없었다. 방송국 전속 탤런트는 한 기(期)에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아 PD들은 다 의무적으로라도 돌아가면서 한 번씩은 배역을 시켰는데, 김 감독은 한 번도 날 출연시키지 않았었다. 그래서 속으로 고까운 마음이 있었는지, ‘지가 날 시킬 거야?’ 하면서 멀뚱하게 지나쳤다.
김 감독이 사극 <연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배역도 대충 정해진 상태였다. 박병호 씨가 승려 역을 맡았는데 난 김 감독이 그 스님 밑에 있는 새끼 중(사미승) 역이라도 맡기려나 했다. 다른 PD들이 나한테 여러 가지 배역을 시켜봐도 안 되니까 그가 나한테 새로운 걸 시켜보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김재형 감독하고는 같이 일해보고 싶었었는데 그렇게도 날 안 시켜주더니...
다음날 신문을 보니까, ‘김창숙, 김종결 출연...’ 하는 기사가 나왔다. 주연은 김창숙 씨였고, 난 김창숙 씨를 괴롭히는 이복동생 역을 맡은 걸로 돼 있었다. 배역 이름은 재남. 양반의 서출로 아버질 아버지라 못 부르고 반항하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작가인 신봉승 씨가 날 잘 봤던 거 같은데, 난 시시한 역을 맡은 게 아니라 주연급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 머리를 깎을 필요도 없었고.
사극 <연화>로 난 그야말로 ‘떴다’. 연기를 잘했는지 어쨌는지는 몰랐지만, 요즘말로 난 뜨면서 사람들한테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TBC에서 한 드라마는 전부 다 히트했지만 특히 <연화>는 장욱재 씨가 나오던 KBS의 <여로>하고 인기를 다툰 프로였다. 서울에선 <연화>를 더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인기였냐 하면 최근의 <여인천하>보다 더하면 더했지 뒤지지 않았다. 부산에라도 내려가 보면 드라마도 그렇고 내 인기도 대단했는데, 할머니들은 지금도 날 보고 ‘재남이!’ 하고 부르는 분들이 많다. 나로선 엄청 뜬 거였다.
‘인기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김세윤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당시 김세윤 씨는 드라마에서도 늘 주연이었고 극단 ‘신협’에서 연극도 하고 있었다.
“스케줄이 안 맞아서 도저히 난 못하겠다. 내 대타로 여러 명이 오디션을 보긴 했는데 신통치가 않나 봐. 내 입장이 곤란하니까 네가 가서 한 번 해봐라.”
세윤 형은 ‘신협’에 가서 오디션을 보라고 했다. 나로선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드라마 쫓아다니느라 무대에는 서질 못했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까지 식은 건 아니었다. 난 ‘신협’에 가서 오디션을 봤다. 노배우들 앞에서 대본을 읽었는데, <연화>의 인기 여파였는지, 그 자리에서 OK 결정이 났다. 연극 <윤지경>에서 세윤 형이 맡기로 했던 주인공 윤지경 역을 하게 된 것이었다. 상대역은 문숙 씨였다. 난 1주일을 연습하고 무대에 섰다. <윤지경>도 대성공이었다.
연극까지 뜨니까 방송도 바빠지고 갑자기 CF까지 연거푸 들어오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내가 동양방송에 들어갔을 땐 방송국에 CF 제작부가 같이 있었다. 탤런트 4기 중에선 그나마 잘생겨서인지, 일단 떴으니까 이름 값 할 거라 생각해서인지, 제작부에서 CF에 나갈 탤런트 고르러 올라오면 그때부턴 꼭 내가 뽑혔다. 여자 탤런트들 중엔 김창숙 씨가 CF를 많이 했는데, 우리 둘이 코카콜라 CF도 제일 먼저 했다. CF 사진 찍으러 참 많이도 다녔다. 그때 돈으로 한 편에 30만원인가, 지금 돈으로 치면 3백만 원 정도 받았는데 여러 편 찍으면 꽤 큰돈이었다. 나폴레옹 꼬냑 CF도 찍었고, 73년하고 74년엔 CF를 한꺼번에 7편까지 찍어봤다. 텔레비전을 틀면 내가 나오는 CF가 계속 나올 정도로 많이 했었다.
갑자기 <연화>로 뜨면서 난 연애도 하고 73년 4월에는 장가도 갔다. 29살 때다. 와이프랑은 7년 차이였는데 친한 친구 누이동생의 후배였다. 친구 누이동생이 자기 후배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내가 떴다고는 해도 아직은 우리 집이 가난해서, 그리고 처갓집이 제주도라 우리가 처제를 데리고 있어야 할 상황이어서, 처가에선 살림집도 사주고 살림이며 뭐며 많이 해줬다.
연기자로 떴지, 부잣집 딸하고 결혼도 했지, 모든 일이 잘 풀리면서 돈 문제는 다 해결된 줄 알았다. <내시의 아내>를 필두로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었고 한꺼번에 3편도 찍고 하니까, 처가에서는 신성일 하나 사위로 얻은 줄 알았는지 집에 요리사까지 붙여 줬다. 아침에 일어나면 예전 우리 집에선 보기도 힘들었던 자몽을 요리사가 잘라 줬다. 난 한참 잘나가던 때라 요즘 돈으로 한 달에 한 2천 5백만 원쯤 벌었으니 엑스트라 시절에 비해선 엄청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전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개폼’을 잡게 됐다. 생활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도 잘 모르고, 돈은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서랍에서 꺼내 썼다. 와이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스타란 거 생각해서 호화찬란한 생활에 젖어 살았다. 한 6개월을 그렇게 살았다.
돈을 마구 쓰다보니까 돈 쓰는 데 한정이 없었다. 떴다 해도 잠깐 뜬 건데, 벌어들이는 족족 돈을 써대니 돈은 금방 바닥이 났다. 그렇게 많이 벌어들였는데도 남은 게 없다니? 다음 달엔 들어올 게 얼마나 되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현실감각이 생겼다고나 할까?
영화 몇 편씩 찍으러 다니지, 연극하지, 겉은 화려했다. 돈도 꽤 많이 벌었다. 하지만 그동안 돈 못 쓴 걸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양, 또한 품위 유지한답시고 여기저기 써대니까 손가락에서 모래 빠져나가듯이 술술 새어나갔다. 뜨지 못해서 고생할 땐 들어오는 돈이 없어서 고생이었는데, 막상 뜨니까 뜬 대로 또 지출이 많아져서 돈 걱정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으로 호화찬란한 생활을 유지해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역시 참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안 되는 거였다. 황태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이 잘못이었다. 현실 감각이 돌아오면서부터는 계산을 하면서 돈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동안의 지출 규모를 갑자기 줄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6. 부업 전선에 나서다
70년대에는 <연화> 이후 <마부>, <아씨> 등에서 제법 주인공 비슷한 역을 하면서 TV 드라마 배역은 끊이질 않고 계속 했다. <연화>에서 만큼 히트를 치진 못했지만, <연화>로 나름대로 뜨고 ‘김종결’이라는 존재가 알려지면서 그 인기가 한 6,7년은 간 거 같다. 그렇지만 CF나 영화 출연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러다가 드라마 수입만 바라보고 사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연기자라는 직업이 그랬다. 소위 탤런트로 ‘떴지만’ 프로가 있어야 돈이 들어오는 거니까 일정하게 정해진 수입이 없었다. 많이 들어올 땐 정신이 없어도 워낙 수입이 들쭉날쭉했다. 한동안은 물불 안 가리고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써댔지만, 현실 감각이 돌아오면서부터는 마음 편하게 돈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필요한데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쓰는 규모는 크다보니 돈 걱정 좀 안하고 사는 게 소원이었다.
물론, 먹고사는 걸 걱정하며 살았던 때에 비해선 물질적으로는 크게 풍족해진 생활이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돈에 쪼들리는 건 예전하고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쪼들리게 된 것 같았다. 지출 규모는 전에 비해 몇 배나 커졌다. 옛날 후암동 집에서 살 때는 지금 돈으로 한 70만 원이면 먹고는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정도 돈은 우습게 보였다. 생활 레벨을 올려놓으니까 처음엔 한복 같은 거 하나 맞춰도 고급 집에서 아주 비싼 돈에 맞춰 입었다.
정신을 좀 차리긴 했어도 일단 크게 올려놓은 생활 수준을 단번에 확 줄이긴 힘들었다. 처가에서 보내준 요리사는 내보냈지만 30평 아파트에서 가정부를 두고 자가용까지 굴리며 살자니, 싸구려 티셔츠만 사 입으면서 한 달에 십만 원 쓰던 놈이 백만 원을 지출하면서 살게 된 셈이었다. 그 백만 원이 차지지 않으면 그야말로 전전긍긍이었다.
가령 우리 식구가 한 달에 3백 만 원은 꼭 써야 하는데 수입이 2백만 원밖에 안 된다든지, 자동차는 급히 사야 하는데 그 돈이 빨리 안 들어온다거나, 결혼반지라도 내다 팔아야 하는 형편이 된다거나 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어떻게 보면 사치라고 볼 수 있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그게 더 어려웠다.
없는 사람이 들으면 욕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 가게에 불이 나서 불에 탄 생선을 먹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아파트를 좀 큰 평수로 옮겼을 땐 금전적으로 특히 힘들었다. 나이는 서른 줄에 들어섰지, 거느리는 식구는 늘어났지, 그런데 아직도 조연급에 머물고 있자니까 불안한 정도가 심해졌다.
‘어이쿠 이러다 큰일나겠다, 조금 있으면 우리 집 망한다... 탤런트 해봐야 뭐하냐... 뉴욕제과라도 하나 해야 먹고사는 게 아닌가...’
뭘 해긴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동안은 자존심 때문에 감히 밖에 나가서 돈 벌 생각은 못했었다. 엑스트라로 간간이 TV에 얼굴 비치고 버스 타고 다니면서 과외 아르바이트하던 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출연료만 바라보고 사는 게 늘 불안한데도, 연기자로 얼굴이 웬만큼 알려진 만큼 남들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하지만 이젠 자존심만 붙잡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부업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
장인 어른한테 편지를 썼다. 뉴욕제과라도 하나 해보고 싶으니 집을 팔아서 해보겠다고.
“장사 경험도 없는데 집 팔면 큰 일 난다!!”
장인은 물론 주변에선 모두 반대를 했다. 그래서 마음만 간절했지, 뭔가를 벌일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선배형이 동업제의를 했다. “몇 푼 안 드는 거니까 이왕이면 같이 도자기 가게나 하자”면서.
괜찮을 거 같았다. 총각시절에 그 형네 도자기 가게에 일일 점원으로 나가서 잠시 장사를 거들어준 적이 있는데, 잘만 하면 꽤 짭짭할 거 같았다. 동업하는 거니까 심리적인 부담도 적었다. 형네 가게 봐주면서 ‘나한테 장사꾼 체질이 있다’는 걸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경험도 없이 혼자서 일을 벌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또한 주위 시선도 의식이 됐다. 지금 스타 하나가 잘 나가는데 갑자기 도자기 가게를 한다고 하면 주위 시선이 어떻겠는가? 참으로 민망한 노릇인데, 그나마 형하고 같이 하면 좀 체면이 덜 깎일 것도 같았다.
해서 선배형하고 같이 옹기 가게를 시작했다. 서른한 살 때였다. 투자비도 적었고 형하고 반반씩 내니까 아파트까지 팔 필요도 없었다. 장사는 그런 대로 잘 됐다. 형하고 수입을 반씩 가져가니까 한달 생활비를 완전히 해결할 만큼은 안 됐지만 부업으로, 그것도 동업해서 이 정도 벌면 괜찮은 거다 싶었다. 그러나 한 1년 하다가 가게는 선배형한테 넘겨드렸다. 뒤에서 다시 얘기가 나오겠지만, 동업한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었다.
조그맣게 나 혼자서 뭔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연락이 왔다.
“지하에 매장이 하나 나왔는데 도자기 가게 해보지 않겠습니까?”
전화를 받고 나서 한동안 망설였다. 부업을 하긴 해야겠는데 막상 다시 벌이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 장사를 하면, 그것도 혼자서 하는데, 더구나 도자기 가게엘 어떻게 나가서 서 있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결혼도 잘 했다는데...’
체면 때문에 도저히 가게에 혼자 나가선 못 서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부업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돈 때문에 늘 불안해하는 하는 것보단 눈 딱 감고 실속을 차리는 게 낫다 싶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가 아닌가, 그나마 내가 아는 건 도자기 가게밖에 없는데...
그래서 서른 둘에 도자기 장사를 혼자 하게 되었다. 방송으로 바쁠 때는 같이 하긴 힘들었지만, 사이드로 돈 들어오는 재미에 촬영이 끝나면 곧장 명동으로 달려가 가게를 지켰다. 부업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장사에 나선 것이다.
다행히도 애초에 우려했던 것처럼 주위의 시선이 따갑진 않았다. 반짝 스타로 떴다가 얼굴 팔아서 장사로 떼돈 버는 게 아니어서 그랬는지, 탤런트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큰 욕심 안 부리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선 날 잘 봐준 것 같다.
7. 김 재벌 소리 들으면서 속으론 곯고 있었다
도자기 가게는 장사가 제법 잘 됐다. 점원을 한둘 두고 하니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었고, 매장은 작았지만 수입도 짭짭해서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좋았다. 탤런트 생활하면서 부업으로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동안 딸아이도 태어났고 연기자 생활도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한때는 나름대로 동양방송(TBC)에서 잘 나가는 탤런트였는데 노주현, 한진희 등 후배들이 튀어나오면서 빛이 가려지긴 했지만.
나보다 젊고 잘생긴 후배들하고 맞서려니 쉽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가슴 아픈 사랑이건 세상 살맛 나는 멋진 연애이건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 역은 그 후배들한테 돌아갔다. 가슴이 쓰리긴 해도 주인공에 대한 미련은 어느 정도 털어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후에도,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톱스타에 대한 미련은 끝까지 포기가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서른 중반을 바라보면서는 ‘조연이라도 비중 있는 역을 꾸준히 하면서 시청자들한테 오래 기억되는 연기를 하자’는 쪽으로 많이 생각했다. 한참 인기를 끌었던 <결혼행진곡>에서처럼. ‘염소’란 닉네임으로 주인공인 한진희 친구로 나왔었는데, 지금도 날 ‘염소’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니 연기자로서는 보람을 느낀다.
1979년, 방송 일 꾸준히 하고 부업도 5년째로 접어든 해였다. 나이 서른여섯에 고깃집을 시작했다. 처음 도자기 가게를 할 때와는 달리, 내가 음식점 한다는 건 전혀 창피하지가 않았다. 연기자로서도, 사업가로서도 어느 정도 관록이 붙고 내실이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손님상에 직접 음식을 나르고 연신 웃으면서 “어서 오세요” 인사를 챙기면서 지금처럼 발로 뛰었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거 아니면 난 죽는다’는 절실한 마음은 덜 했다는 것뿐.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사무실이 밀집한 여의도, 점심 시간에 직장인들이 새카맣게 몰려나오는 걸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서 ‘음식점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발상이었다. 여의도 종합상가의 30평 매장에 들어가 내부 인테리어도 예쁘게 꾸미고 주방인력도 좋은 사람 쓰고 종업원 7명을 구했다. 다른 고깃집들은 삼겹살이 주종이었는데 메뉴를 좀 고급화시켜서 로스집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거란 생각도 맞아떨어져서 ‘신정’은 장사 초기부터 엄청 잘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그렇게 손님이 많은 데도, 나도 종업원들도 쉴 짬 없이 바쁘게 뛰는데도, 매상이 그 전에 하던 도자기 가게하고는 벌써 만지는 액수가 틀리는데도, 한 달이 지나서 결산해보니까 내가 찾아갈 돈이 없었다.
인건비로 나가고 집세로 나가고 재료비 빼고, 또 가게에 모자라는 물품 사들여놓고 하다보니 남는 게 없었다. 가게를 오픈하고는 ‘매상 대비 순이익이 얼마’ 하는 개념도 없이 그저 손님 느는 재미에 열심히 서비스만 했었다. 한달 결산을 해보고서야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가 나가면 얼마가 남는다는 걸 계산하기 시작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 가져갈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쿠, 뭔가 잘못 됐구나 싶어 왜 그런가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다. 결론은 가게가 작다는 것이었다. 단위면적이 작으니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주방에 고급 인력은 끌어다 놓았지, 홀에서 뛰는 종업원들까지 월급 주고 가게 월세 내고 또 여기저기 부슬부슬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세 달쯤 지나서 가게를 세 배로 텄다. 부부가 둘이서 순두부집 정도 하면서 모든 걸 다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고깃집을 번듯하게 하려면 매장이 80평 이상은 돼야 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인력도 두 배로 보충했다. 고깃집이나 한식집을 하려면 고정으로 들어가야 하는 인원이 있었다. 주방에 5~6명, 홀에 한 10명, 그리고 카운터. 인원 규모가 그 정도는 되어야 운영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반찬 만들고 설거지하는 사람 둘, 홀에서 서빙하는 사람 네댓 명을 더 구했다. 홀 서빙하는 인원은 인건비가 제일 싸니까, 몇 명 더 늘었다고 해서 총 인건비가 두 배로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매장도, 종업원도 제법 규모를 갖추고 나니까 그때부터 이익이 나기 시작했다.
방송 일이 들어오면 하나라도 놓칠 새라 따라다니면서도 장사도 참 열심히 했다. 거기다 운이 좋았는지, 80년 방송국이 통폐합되면서 방송국들이 여의도로 몰려왔고 그 덕에 ‘신정’은 아주 유명해졌다.
신정이 여의도의 명물이 되니까, 또 내가 그때만 해도 젊었고 패기도 있어서 욕심이 생겼다. 신정 개업 후 2년도 못 돼서 다른 가게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업소 선정은 여의도에 한정했다. 방송 일도 해야 하고 신정은 기둥업체로 유지해야 하니, 다른 지역에 매장을 열면 관리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였다.
처음 투자한 게 커피숍이었다. 여의도 백화점이 생기면서 그 안에 들어가 내 이름의 이니셜 K를 따서‘ 커피숍 K’를 차렸다. 다방이 많던 시절이었는데, 뭔가 색다르게 나갈 요량으로 아이스크림도 팔기로 했다. 내가 직접 뛸 순 없어서 관리는 다른 사람한테 맡겼지만 한동안은 커피숍에 집중했다. 자리가 어느 정도 잡히니까 투자한 만큼 뽑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고 사업 욕심이 더 났다.
여의도를 돌아다니다가 괜찮은 건물을 보면 저기 지하나 2,3층에 들어가서는 뭘 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느 정도 투자하면 내 손에 얼마가 들어온다는 계산이 되니까 마음은 더욱 급했다. 그래서 하나 골라잡은 게 민속주점 스타일의 음식점이었다. 이름은 ‘삼돌네’. 63빌딩을 짓던 무렵이었는데, 장래를 봐서 그 앞에다 가게를 내고 고기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빈대떡이니 동동주를 팔면 꽤 수지가 맞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돈이 모자랐다. 돈이 마련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돈을 조달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문은 열었는데, 당장의 이익을 보고 한 건 아니었지만 가게에 돈이 계속 들어갔다. 돈까지 빌렸으니 이자도 갚아야 할 판인데, 빈대떡 팔아서 번 돈으로는 월세랑 종업원 월급도 빠듯했다. 다른 가게에서 들어온 돈으로 급한 대로 갖다가 메우고 하는 식으로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하길 몇 달, 가게는 이익이 나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또 새로운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또 일을 벌였다. ‘기??????’이란 이름으로 만두집을 연 것이다. 처음 작은 규모로 신정을 열었을 때 손님이 미여 터져도 돈이 안 되던 게 생각이 나서, 가게 면적은 작아도 배달을 많이 하고 나중에 체인으로 늘려볼 생각으로 시작했다. 규모가 작으니까 투자비는 적었지만 가게가 넷으로 늘어나니까 더 정신이 없어졌다. 방송 일이 없어도 하루에 가게 네 군데를 돌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관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바쁜 타임에 가서 한두 시간이라도 자리를 지키자니 여유가 없었다.
고깃집 신정은 매상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전처럼 방송 일 말고는 거기에만 매달리질 못하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종업원들이 자기네들끼리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주인이 가게를 지키지 못하면 매상에서 한 20퍼센트는 까먹는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어쩔 순 없었다. 이왕 벌여놓은 사업인데 접을 수도 없었고, 또 신정에서 줄어든 이익은 다른 가게들에서 벌충하고는 있으니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선배형이 돈을 엄청 벌 수 있는 사업이 하나 있다며 해보라고 했다.
“여의도에 라이프 빌딩이라고 건물이 크게 세워졌는데 그 안에 오락시설이 없더라. 너 거기 들어가서 오락실 하면 노가 날 거다.”
당시 ‘뿅뿅’ 게임이 처음 들어와서 아주 유명했는데, 선배형은 일본에서 게임기를 수입해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도와주겠다 하니 금방이라도 큰돈을 만질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패기가 좋다고 덮어놓고 라이프 빌딩을 찾아가서 담당자들을 만났다.
“내가 일본 가서 오락실도 가보니까 이런 게 유행하던 데 여기도 휴식 시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길거리에 있는 조그만 오락실 생각하지 말고, 난 여기 지하에서 사격장 비슷하게 하나 해보려고 하니까...”
사실 그때까진 일본은 구경도 못해봤는데, 지금 생각하면 뭐 그렇게 거짓말까지 했을까 싶어 부끄럽다. 어쨌거나 담당자들은 내 얘기에 막 웃기만 했는데, 3~4일 후에 연락이 왔다. “오락실 해보십시오.”
인테리어도 잘하고 선배형이 밀어줘서 오락 프로그램도 사다놓고 간판은 ‘레스트룸’으로 하고 오락실 문을 열었다. 가끔 “화장실 아니냐?”면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뿅뿅’의 인기 덕에 장사는 초창기에는 아주 잘 됐다.
이렇게 해서 ‘신정’까지 합쳐서 점포가 여의도에서만 다섯 개로 늘어났다. 방송가에선 “여의도에 김재벌 나왔다! 장사 도사다!” 하며 치켜세웠다. “그 돈 다 벌어서 뭐할 거냐?”면서 부러워하기도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실속은 없었다. 아니 그때만큼 돈 계산으로 머리가 복잡한 시기도 없었다. 돈 걱정하며 살던 거하고는 다르지만 정신은 하나도 없고, 남들한테 내 속을 다 드러낼 수도 없으니 속은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점포 다섯 개 했다고 해서 돈을 왕창 벌어서 한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해서 갚을 돈도 많았다. 방송은 들어오는 대로 하나도 놓치지 않고 했는데, 야외 촬영이 늦게 끝나서 피곤한 날도 집에서 편하게 쉴 수가 없었다. 냉장고가 고장났다고 전화가 오면 밤중에라도 신정으로, 삼돌네로 뛰어나가야 했다.
이런 와중에 내 나이 40이던 8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8. 편하게 살고 싶어 사업 모두 접었는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관이 바뀌면서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 폼만 재벌이다 뭐다 했지 속으론 곯고 있었는데 그래서 결단을 내려 신정만 남기고 하나씩 정리를 했다. 그래도 되던 업소들이었기 때문에 오락실은 사촌 형수한테 물려주고, 커피숍은 친구 누이한테 넘기는 식으로 해서 점포 네 개를 다 정리하는 데만도 2~3년이 걸렸다. 빌린 돈도 다 갚고 나니 홀가분했다.
음식점 하기는 사실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해야겠다 싶어 한 2년 신정 하나만 붙들고 했는데 88년에는 그나마도 손을 털었다. 주위에는 이미 큰 갈비집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고, 우리 가게는 낡은 건물에 있어서 장사가 되기는 돼도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있을 때 팔아버리는 게 낫다’ 싶어서 권리금을 그 때 돈으로 꽤 많이 받고 팔았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사업을 그렇게 많이, 또 오래 한 사람이 일 안 하면 좀이 쑤셔서 견디겠어?”
주변에선 15년 가까이 부업을 했으니 이젠 좀 쉬라고 하면서도 걱정을 해주었다. 나 역시 뭐라도 하지 않으면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체질이라는 걸 아는지라 일 안 하고 얼마나 오래 버틸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결단을 내린 이상 끝까지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방송이나 하면서 쉬어야 되겠다’고 거듭 생각하면서.
한 6개월쯤 쉬었을까, 정말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방송 일은 아무리 바빠야 일주일에 3~4일이었다. 나머지 3~4일은 시간이 참으로 더디 갔다. 처음 한동안은 친구들하고도 자주 어울리고 방송국 쫑파티 같은 데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장사하느라 바쁠 땐 그 핑계로 자주 어울리기도 힘들었고 겨우 얼굴만 내밀곤 했었기에 아쉬움이 많았는데, 막상 시간 여유가 너무 많이 생기니까 그런 자리에 나가도 별로 뿌듯하지가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잔소리도 늘어나는 거 같고 아내는 아내대로,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것저것 챙기면서 간섭하려 드는 남편이나 아버지보단 자기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게 더 편한 듯도 싶었다.
무엇보다도, 일하던 사람이 쉬니까 식당 생각이 아물거리고 현금이 솔솔 들어오던 재미가 쉽게 잊혀지질 않았다. 또 쓰던 규모는 있는데 많이 벌어놓은 건 아니므로 장사 생각에 마음도 근질거렸다. 다시 음식점을 하긴 해야겠는데 뭐 좀 편한 게 없을까, 패스트푸드점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친하게 지내는 탤런트 노주현 씨가 잠실에서 피자 집을 개업한다고 해서 같이 거기 가려고 원효대교를 넘는데, 당시 용산에 지어지고 있던 전자랜드(구관)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건물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상태였다.
“우리 저기 내려서 구경이나 하고 가자.”
우린 전자랜드 안엘 들어가게 되었다. 내부는 거의 완성돼 있고, 2층 식당가는 페인트칠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쪽 관리 사무실에서 “사장님이 어떻게 왔냐?”고 하기에 “지나가는 길에 들렸는데 자리가 괜찮으면 여기서 뭐 하나 해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그쪽에선 이런 말을 했다.
“2층 식당가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다방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거길 패스트푸드점으로 바꿔서 해볼 의향이 있으십니까? 김사장님 능력이야 우리가 잘 아니까요.”
바라던 바였다.
“좋습니다.”
이것도 기회다 싶어서 흔쾌히 대답했다. 별로 힘들 것도 없을 것 같아서 햄버거 가게를 크게 시작했다. 89년 10월, 내 나이 마흔여섯 살 때였다.
‘위너스’라는 햄버거 가게를 오픈했는데 1년은, 과장 좀 하자면, 파리만 날렸다. 전자상가가 활성화가 안되어서 손님은 없고 상가 주인들만 가득 찬 상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년을 내리 적자만 보고 버틴 건 아니다.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일본에 가서 먹어본 도시락 집 생각이 나서 점심식사 메뉴를 개발해서 7개월쯤 후부터는 현상유지는 했다.
힘들 때도 노력하면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파리만 날리던 시절에도 연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 내고 노력하니까 되더라 하는. 전자상가가 활성화가 안된 상태여서 처음엔 손님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외부 손님은 없어도 점포 주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들이 점심에 햄버거 먹을 건 아니고 그들을 위해서 개발할 수 있는 메뉴가 뭐 없을까? 아이디어를 떠올린 게 배달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메뉴였다. 어머님이 일식집을 하셨으니까 닭튀김이니 삶은 고기가 들어간 일본식 도시락 ‘벤또’에 대해선 많이 알았었다. 일본 가서 먹어본 것도 있고 해서, 반찬은 우리 입맛에 맞게 하고 보기에도 좋게 담아서 배달까지 해주면 먹혀 들어갈 거 같았다.
일단 도시락 용기부터 골라야 했는데 맘에 딱 드는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집 찬모가 센스가 참 대단한 여자다. 지금 주신정에서도 반찬을 책임져주고 있는데, 그 여자하고 같이 청개천 도시락 용기 파는 데 가서 어떤 게 있나 찾아보길 여러 번. 찬모 말이 여기에는 뭐 놓고, 회도 한두 점 들어가야 하니까 저 용기로는 안 되겠고, 이 걸로 하면 메인 반찬 넣을 공간이 작고...., 세세한 부분에서 실용적인 안을 내놓았다. “그래도 이게 낫겠다”는 찬모의 말에 내 맘에 딱 들진 않았지만 그 용기를 구하기로 했다.
음식을 해서 도시락에 담아서 광고전단 사진을 찍었다. 비싼 건 대형 나무 도시락 용기에 놓고, 일반 도시락은 작은 용기에 담아서 가격은 3천 원 정도로 싸게 했다. 광고전단이 나가고 나서 배달 주문이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상가내부에서 배달이 많아지면서 차츰 전자상가 외부까지 배달을 나가면서 현상 유지는 하게 된 것이다.
1년 넘게 버티니까 다행히도 햄버거 가게는 차츰 잘 되기 시작했고, 전자랜드 신관까지 짓게 되면서 우리 가게는 센터에서도 중요한 위치가 됐다. 가게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상승가도를 타게 되니까 위너스 옆에다 식당을 하나 또 냈다.
돈이 남아돌아서 투자를 한 건 아니었다. 위너스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려면 아직 멀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식으로 큰돈까지 날려서 잃어버린 돈 만회하려면 밤무대라도 뛰어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겁이 없는 건지, 된다 싶으면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지 않고 또 돈이 부족하면 꿔서라도 밀어붙이는 성격인지라 과감하게 일을 벌였다.
위너스는 전자상가 2층 식당가 가운데에 있는 동그란 점포(총 80평)를 반으로 잘라서 하고 있었는데, 그 나머지 반은 다른 사람이 돈까스 집을 하고 있었다. 위너스를 한 지 1년 반쯤 지나서 그 가게가 나간다는 얘기가 나와서 91년 초에 거길 사서 ‘고향’ 식당을 냈다. 그쪽 가게는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점심에는 일반인이 좋아하는 메뉴 중에서 설렁탕, 냉면 등 서너 품목만 골라서 했다. 다들 우리 집 음식이 맛있다고 했고 장사는 잘 되었다.
9. 주식으로 돈 날린 밤무대의 스타
햄버거 가게를 차려놓고 들어오는 돈이 성에 차지 않으니까 주식에 욕심을 내게 되었다. 6~7개월 간 장사가 안 되고 현상 유지도 못 하니까 증권으로 만회할 욕심을 부리게 된 것이다. 위너스에 투자하고도 여유 돈이 좀 있었는데, 처음엔 조금씩 넣으면서 돈 불어나는 재미에 맛을 들이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이 넣다가 액수가 꽤 커지게 되었다.
사실 주식에 맛을 들인 건 위너스 하기 전부터였다. 80년대 말, 가게들을 정리하고 남은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하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주식 붐이 일어났었다. “당신 친구들도 하니까 백만 원 갖고 주식이나 해봐라” 면서 아내한테 백만 원을 쥐어줬다. 그랬더니, 증권사에 갔던 아내가 씩씩대면서 돌아왔다.
“백만 원 갖고 가니까 피식거리면서 상대도 안 해주더라.”
아내의 말을 들으니까 열이 받쳤다. 어떤 새끼가 그래? 가서 얼굴이나 봐야겠다 싶어 증권사로 찾아갔다. 내 얼굴을 보니까 담당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속으론 괘씸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증권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돈 백만 원 정도야 우습게 볼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래서, 아내를 무안하게 만든 친구를 면박이라도 주고 올 양으로 찾아갔는데, 3천만 원을 맡기면서 “알아서 잘 해달라”고 하고는 돌아왔다. 주식이 막 오르니까 증권사에선 제법 돈을 벌어주었다. 담당자가 전화를 해서 “오리온 전기 샀습니다” 하면 “그래요? 잘 했네요...” 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돈이 불어났다. 증권으로 몇 번 재미를 보니까 ‘야, 할 건 이거밖에 없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단기간에 3천만 원이 4천5백만 원까지 올라가자 ‘에라, 크게 벌자’ 하는 마음에 7천만 원 정도를 주식에다 더 박았다. IMF 훨씬 전의 일이고 주식이 천 포인트까지 올라간다 하던 호황기였다. 그런데 주가가 자꾸 곤두박질 치기 시작하는데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증권사에서 “팔았습니다” 하면 다음날 조금 오르고, “샀습니다” 하면 떨어졌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돈 벌어줄 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원금을 자꾸 까먹으니까 ‘야, 왜 네 마음대로 사냐, 내 허락 받고 사야지!’ 하고 원망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
마침 위너스 앞에 증권회사 지점이 들어와서 시간 나는 대로 가서 주가를 체크했다. 집에선 또 신문으로 확인하고. 좀 오르는가 싶으면 다음날은 곤두박질치면서 주가는 춤을 춰댔다. 밤낮 눈앞에서 숫자만 아른거리니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원금에서 반이라도 건질까 싶어 이리 신경 쓰고 저리 신경을 쓰고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가를 체크하는 것도 포기했다. 보는 것도 귀찮아진 것이었다. 90년 여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 무렵에 친구 하나가 날 따라서 3천만 원 갖고 주식에 뛰어들었는데 우리 둘이서 미치고 팔짝 뛰는 심정으로 보냈다. 그리고 결국은 1년 반만에 내가 산 주식은 깡통이 됐다. 원금 1억을 고스란히 날린 것이었다. 큰일났다 싶었다.
‘이건 타의에 의해서 망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노름하러 가서 돈 잃은 것이나 진배없으니... 내가 다 알아서 한 거니까 집에 가서 깡통 됐다는 말은 할 수도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하나. 어디서 회복하지...“
그때부터는 주식으로 잃은 돈을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날도 까먹은 돈 생각에 머리가 쑤시는데, 옛날 '신정' 하던 건물 2층에서 태권도장을 하던 친구가 찾아왔다. 태권도장 하면서 가수 설운도를 좀 따라다녔던 친구였다.
“형, 내가 요즘 참 어려운 입장에 있어요. 내가 매니저 할 테니까 같이 밤무대 뜁시다. 형이 밤무대에서 노래불러주면 나도 좋고 형도 좋지 않겠어요?”
“그래? 생각 좀 해보자.”
그 친구는 자기가 악보도 만들어 주고 유행가를 테이프에 녹음해 줄 테니까 테이프 틀어넣고 그 안에 든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연습하라는 거였다. 내가 드라마 세 편에 겹치기 출연할 정도로 인기스타니까 밤무대에서도 인기가 높을 거라고도 했다.
선뜻 ‘오케이’가 나오진 않았다. 밤무대가 나랑 어울리기나 한 건가, 아니, 나한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그 친구한테 도움이 된다니 도와주는 의미도 있고, 또 증권에서 까먹은 돈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결정을 내렸다.
그 친구 말대로 난 밤무대에서 인기가 높았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밤무대 스타가 된 것이었다. 아주 뜬 연예인은 출연료를 몇 천만 원씩 줘야 하니까 너무 비싸서 못쓰고, 주인공보다 한 단계 떨어지면 연이어서 쓸 인물이 많지가 않으니까 내가 잘 팔리는 듯 싶었다. 그 동안 쌓아놓은 유명세랄까, 오래 나와서 얼굴도 그런 대로 팔렸고 약간 주인공 비슷한 이미지도 있고 품위 있게 생겼으니까, 또 적당히 받고 나가니까, 또 열심히 하니까.
노래는 주로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노래들, 빠르고 경쾌한 곡을 많이 불렀다. 슬픈 노래는 노래 실력이 없어서 못할 거 같아서. 슬로(slow) 곡은 카바레 무대에서만 불렀다. ‘이별’, ‘싫다 싫어’, ‘잘 있어요 잘 있어요...’, 참 많은 노래를 불렀다. 교회 다니면서 독창도 하고 해서 난 내가 노래를 잘하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초기에 큰 무대에서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를 부르는데, 밴드 반주보다 내 노래가 꼭 2소절은 먼저 끝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밴드한테 이유를 물었다.
“좋아요, 좋아요, 그냥 가세요.”
밴드는 그 말만 되풀이했다.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매니저한테 얘기했다.
“야, 이거 안되겠다, 녹음을 해봐라.”
매니저가 녹음한 걸 들어보니 가운데 소절을 빼먹고 부르고 있던 거였다.
개런티는 한 업소에서 150~200만 원을 받았는데 거의 10년 전 일이니까 꽤 큰돈이었다. 7군데만 돌아도 천 만 원이니까. 하루에 제일 많이 뛴 게 8군데인데 평균 최소 5군데는 뛰었다.
매니저한테는 30퍼센트를 줬다. 난 어느 정도 목돈이 되는데, 그 친구는 ‘째지게’ 가난하니까 그 정도로는 돈이 별로 안 되는 거 같았다. 그래서였는지, 어땠는지, 매니저는 날 통해서 탤런트들을 알게된 탤런트들을 자꾸 찝쩍거렸다.
가만히 보니까 연기자들 쪽에서도 내 매니저한테 추파를 던졌다. 내가 밤무대에서 잘 나가니까 “저 놈이 노래도 못 부르는데 어떻게 7,8군데씩 뛰지? 매니저가 능력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매니저의 실력을 부러워한 건지, 지들끼리 짝짜꿍이 맞은 거 같았다. 그래서 ‘그래, 똥은 똥끼리 모인다, 니들끼리 해라’ 하고는 나 혼자 뛰기 시작했다. 옛 신정 지배인을 하던 친구가 내 차 기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매니저처럼 하고.
어쨌거나, 오십 바라보는 나이에 밤무대 스타가 된 거, 그게 말이 스타지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 거였다.
저녁 먹고 나서 기사하고 같이 저녁 7시부터 움직여서 새벽까지 7,8군데 업소를 도는데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오류동, 봉천동, 가좌동(인천), 천호동..., 서울 외곽 전체를 누볐다. 인천의 경우, 가좌동에 업소가 한 10개 모여 있는데 한 군데씩 빼먹으면서 코스를 잡았다. 여기 몇 달, 저기 몇 달 뛰면서 서울 외곽에 있는 술집 치고 안 한 데가 없을 정도였다. 다음 업소에 가야 하니까 팬들이 주는 술을 받아먹을 새도 없었다. 코스가 너무 멀고 또 급하게 가니까.
차를 타고 교문리에서 부천을 가려면 30분에 돌파를 해야 했다. 얼마나 차가 빨리 달리는지, 손잡이를 잡고는 ‘차라리 눈을 감자’였다. ‘야, 이거 빨리 날짜 채워서 끝내야지’ 하는 생각뿐. 의정부까지 갈 때는 북한산을 넘어 가는데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 '피아트(Fiat) 크로마???????'를 새로 뺐는데 그 차가 ‘개판’이 될 정도로 변두리 도시들을 쌩쌩 내달렸다.
나중엔 팔목의 실핏줄까지 터졌지만 대충 손수건으로 칭칭 동여매고는 무대에 섰다. 차에서 잠깐씩 졸다 깨면 3년만 버티자고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자, 길어봤자 3년이다’, 이런 마음으로 견뎠다. 밤무대 일을 5년 이상 넘게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10. 내 인생의 IMF
방송국으로, 전자랜드로 뛰어다니면서 밤업소들까지 3년 넘게 출근도장을 찍다보니 위너스에서 까먹은 돈, 주식으로 날린 돈은 어느 정도 만회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위너스와 고향 식당은 장사가 본 괘도에 올라 있었다. 조금만 더 뛰면 고생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운이 없는지, 아님 불하고 관련이 있는지, 나이 오십에 화재를 또 당하게 되었다. 밤업소 일을 하는 내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지방으로 내려가 공연을 했는데, 특히 부산 공연을 많이 했었다. 화재가 난 날은 93년 5월 12일, 내가 부산에 내려가 있던 날이었다.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기사가 다급하게 날 한쪽으로 데려갔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 터졌나?’ 하는데, 기사가 다급하게 내 손에 전화기를 쥐어주었다.
“사장님, 약혼자가 전화를 했는데 뉴스 보니까 전자랜드에 불이 난 거 같데요. 빨리 서울에 확인해 보세요.”
뭐야, 불? 불(火)에 크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지레 겁이 나면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설마, 우리 집(가게)은 괜찮겠지, 전자랜드가 얼마나 넓은데 건물이 다 탔다면 몰라도 일부만 그렇다면 설마 그 일부에 우리 집이 끼진 않았겠지... 희망적인 쪽으로 생각하면서 전자랜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불이 너무 많이 나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불 난 지점이 식당가인 거 같아요. 김 사장님 가게 옆인 거 같은데...”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곧 쓰러질 거 같았는지 기사가 얼른 부축을 했다. 잠시 정신이 나간 듯 했는데 하염없이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당장 올라가자.”
허둥지둥 서울에 올라오면서 차에서 카폰으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내도 경황이 없는 것 같았다.
“형사한테 전화 왔었어... 통화가 왜 안 돼?....”
카폰이 가다 끊기고 해서 애간장이 더 탔다. 겨우 가게 종업원하고 통화가 됐는데 화재가 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종업원들 깨워서 가게에 나가 봐.”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마음은 용산에 가 있었다. 제발, 피해가 크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면서.
서울에 도착해 화재 현장에 가보니 가게는 다 타버린 상태였다.
“가스 잘 잠갔니?”
종업원 애들한테 재차 물어봤다.
“잘했어요. 직접 가서 확인했는데 밸브가 잠가져 있었어요.”
전자랜드 화재는 우리 가게에 가스 폭발이 나서 불이 난 것이 아니었다. 가게 종업원들은 저녁 7시 반에 퇴근했는데 불이 난 건 그 후이고, 다른 원인으로 인해 불이 난 것이니 우리 책임은 아니었다. 그러니 형사한테 가서 조서 쓰고 시설만 새로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시설비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나마 이 정도에서 피해를 본 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화재 현장에 도착했을 때 전자랜드 측에선 화재 책임을 우리한테 돌렸다. “위너스에서 가스가 폭발해서 이렇게 됐다”면서. 불이 처음 난 게 우리 가게에서부터인 건 틀림없지만, 원인이 가스 폭발이라 하니 그것 때문에 난 심적 타격을 많이 받았다.
다행히도, 가스 공사에서 나와보더니 하는 말이 “가스 폭발 때문에 불이 난 거면 건물이 다 날아간다”는 거였다. 가스 폭발로 우리한테 덤터기 씌우려는 게 안되니까 전자랜드 측에선 다시 우리 가게에서 전기가 어떻게 됐다는 식으로 나왔다. 화재는 형사 문제인지라 책임 소재에 따라 일이 예상외로 커질 수 있었다.
용산 경찰서의 사건 담당 형사는 처음엔 내 편이었다. 밤무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어서 반짝이가 달린 양복을 입고 경찰서에 출두해서 앉아 있으니까 경찰은 내게 힘이 되는 얘기를 해줬다. 난 형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현장 사진을 찍어라 하면 종업원 애들 시켜서 사진 찍고 하라는 대로 그대로 다 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니까 경찰 말이 슬슬 달라졌다.
“아, 그 사람들 좋은 사람들입니다...”
아이쿠, 내가 지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자랜드 측하고 얘기를 해보려고 해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여기는 안 되요. 신관을 짓고 있으니까 좀 쉬었다가 거기 지어지면 한 자리 하십시오.”
뻔한 말 아닌가? 화재 보수가 끝나도 가게에선 손떼라는 얘기였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 직원들 다 데리고 경찰서 들어가서 이거저거 조서 다 쓰고 나왔지만 나로선 힘이 없었다. 화재 원인은 누전이었다. 누전은 어디서 불이 났는지 모르는 건데, 우리는 7시 반이면 퇴근하는데 퇴근한 후에 불이 난 거니까, 경비 소홀이 문제지 우리가 뒤집어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따지고 들면 그런데 그쪽이 강자라면 난 약자였다. 싸우면 내가 어떻게 이기겠는가?
전자랜드 점포를 다 뺐기냐 마느냐 얘기가 오고갈 때, 한 2,3달은 너무 힘이 들었다. TV의 멍한 소리라도 듣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고, 자다가도 깨고, 담배를 서너 대 계속 피워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되었다. 시련이 너무 컸다. 다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다 억울함도 문제였지만, 매일 현금이 들어오다 스톱이 되니까 갚을 돈도 많은데 돈 막는 것도 급했다. 내 인생의 IMF가 시작된 것이었다.
참담한 심정에도 밤업소 일은 계속 해야 했다. 밤무대는 일주일 내내, 한 달이면 30개 도장을 찍는데, 못 나갈 일이 생기면 업소에다 통보만 하고 안 나가면 된다. 하지만 변두리에 있는 술집에선 되도록 한 달 내내 채워주길 원하고, 또 나도 돈이 필요하니까 쉴 수가 없었다. 참담한 심정에도 밤무대 서서 흥겨운 노래를 불러댔다. 무대에 선 순간은 일종의 연기니까 자기 감정은 치워두고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바로 자기 감정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그야말로 ‘피에로의 비애’였다.
“야, 나 아무데나 기도원 좀 데려가라.”
93년 초여름으로 접어들었을 때,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나 답답해서 기사한테 부탁을 했다. 전자랜드 상가는 거의 포기해야 할 듯 했는데, 이렇게 빼앗기고 말아야 하는 가 싶어 너무나 억울했다. 기사는 포천에 기도원이 있다는 얘길 어디서 들었는지 날 그리로 데려갔다.
기도원이란 데에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도원은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교회 안에서는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난 얼굴이 팔려서 그 안에까지는 못 들어갔다. 창피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깥 벤치에 앉아서 교회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얼마나 울었을까,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은 나하고는 관계가 굉장히 깊은 구절인 듯 하다. 남동생이 암으로 죽어갈 때에도 그 말씀에 매달리면서 견뎠는데, 아마도 내 무의식 깊숙이 내가 참으로 힘들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뿌리박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도원에도 가고 그때부터 절실하게 하나님한테 매달렸다. 기도원의 기도굴에 들어가서 기도에 매달렸는데 믿음에 큰 확신이 온 건 아니지만 언뜻언뜻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도원에서 파는 설교 테이프를 수십 개 사서 차 카세트에 넣고 내내 그것만 들었다. 찬송가도 듣고 설교 얘기를 듣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오만 사람들이 기적으로 살아났다. 거기서 확신을 얻었다.
‘이게 뭐(하느님)가 있다, 뭐가 있으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죽을 지경에서 살아나기도 하는 거지. 저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테고....’
이상하게 확신이 들면서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일이 지나면서 죽겠다는 심정도 좀 풀렸고, 전자랜드 측하고 협의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이 내 편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위안을 받고 있었다.
“어차피 전자상가가 하나 더 생기니까 사장님은 거기서 가운데 자리에 20평만 갖고 하면 될 겁니다. 저희가 생각해주는 거니까 이것만 갖고 하십시오.”
전자랜드 측에서 제시한 최종안이었다. 우리 가게(위너스하고 고향) 전체가 실평수 80평이었는데, 신관에서 20평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20평이라도 받지 않으면 하나도 못 건질 판이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받긴 했는데, 얼마 안 있어서 관리사무실 측에서 전화가 왔다.
“김 사장님이 들어갈 점포를 남대문에서 누가 2억에 사겠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화를 받고 보니 괘씸했다. 80평 대신 20평을 받은 것이 2억이면 얼마를 날렸단 말인가? 거기다 20평 가게 줄 땐 언제고, 적당한 임자가 나섰으니 팔겠냐는 건 또 뭔가?
그 내막을 알고 보니까 내 가게 자리가 탐이 나서 나만 따로 놓고 지들끼리 뒷거래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다 날릴까봐 속 쓰리고 신경 쓰고 심적 고통 말이 아니었는데 더 이상 끌다가는 사람 모양새만 처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가게를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고는 팔아버렸다. 지옥 같은 날들에서 벗어나려면 그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분해서 잠을 못 이루었다. 집 빼고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다 까먹은 셈이었다. 동창들이 와서 “힘들겠다”며 위로를 해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다 뺐기고 난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 2장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