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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강 우리가 누리는 평강의 원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한번은 너무 화가 치밀어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놀라운 유머 감각이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좋아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 하나님께서는 정복차림의 젊은 군인 한 명을 내게 보내셨습니다. 그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음," 그 하사관이 멈칫 했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목사님을 찾아가면 구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해서...."
"잘못 오셨네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젊은이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도움이 필요한 지경이네요!“
"어. 누가 목사님이라면 나를 도와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대단하군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부탁입니다!" 그 젊은 하사관이 애원했습니다. "구원을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결국 거절을 못하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그 군인에게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밖으로 나가 반짝이는 별빛 아래 섰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나는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잊지 말아라. 이전에 나귀를 통해서도 말한 적이 있지 않더냐. 나에게는 제한이 없느니라!"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의 경험 이후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말이다. 이 일 때문에 네가 은혜 밖으로 떨어져 나갔던 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이 저에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건 말도 안돼!" 나의 반응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사랑은 네가 항상 옳은 일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죄인이었을 때도, 네가 나를 반항했을 때도, 네가 나의 원수였을 때도,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나는 너를 사랑했단다. 나는 내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것이란다. 네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다. 진실을 말해줄게. 네가 무엇인가 선을 행했다면 그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란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한 것이란다!“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그때 들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한편으로는 믿음의 역사를 보면서, 다른 편으로는 바울의 말대로 무엇을 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 3장 28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때, 그는 행위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행위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의 역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결과로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왜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rightstrawy epistle'이라고 불렀습니다. 지푸라기.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말 아닙니까? 그것이 야고보서에 대한 루터의 묘사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서신을 허술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처럼 총명한 루터였지만 야고보가 '믿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장 26절).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율법과 연관된 행함을 다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주변의 이스라엘 민족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은혜를 받을 만한 당당한 자격이 있다고 하나님께 으시대고 있었습니다. 선민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그 누구보다도 더 의롭고,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다고 자만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습게도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하였습니다. 오랜 기간 루터는 그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읽어 본 다음에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의 거장 루터마저도 야고보가 마치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주듯 행함의 다른 국면을 다루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극단을 피함
믿음과 행함의 진정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이해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극단을 피하고 구원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균형지게 이해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이 위대한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애쓸 때에 함정 곧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극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선구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이 성경 말씀에 더 잘 조화된다고 보았으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니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많은 재림교인들이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내포된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릇된 동기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평화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19세기 초, 하나님께서는 뉴잉글랜드를 비롯하여 세계 각 처로부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불러 모았습니다. 그들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재림과 두 예언서인 다니엘과 계시록에 맞추도록 이끄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고 무리로 발전됨에 따라 그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의 일부 동료들이 그들을 '재림신도들Adventists'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844년에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던 그들의 기대는 쓰디쓴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 예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시는 동안 그들은 이 장에서 다루는 바로 이 주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재림신앙의 선구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터득하기 위하여 때로는 밤이 새도록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례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천주교회, 영국 성공회, 그리고 장로교회로부터 신자들을 불러 모으셨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연구한 끝에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함정을 피해 나갔습니다. 재림신앙의 선구자들은 그들로부터 좋은 것을 취했습니다. 마침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위대한 깨우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그들의 이해는 1888년이 되기까지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장 8절).
그리하여 초기 교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쟁점들을 분명히 이해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나타난 오류들을 피하는데 무려 44년이란 긴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이것은 진정 여러 세기 전부터 시작되었던 종교개혁의 연장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종교 암흑기 동안에 가려져 있던 더 많은 진리들을 19세기 신도들에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은혜는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음
주제를 조금 바꾸어 봅시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베푸신 것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힘으로 은혜를 얻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푸실 수 있는 모든 은혜를 이미 값없이 주셨습니다.
재림교회가 이 진리를 명백하게 터득하는데 44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기별이 반복적으로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온전히 이해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절대적으로 너그러우시고 은혜로우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깨닫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 이 중요한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스스로 구원을 얻거나 쟁취하려고 무엇인가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을 지금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과 삶의 태도를 돌이켜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구원을 얻어거나 받아내려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면 로마서는 여러분과 정면으로 대치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얻어 내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여러분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혹은 여러분이 구원받을 만한 사람인지 보여 주면서 하나님께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적이 전혀 없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면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광범위하게 지배해 온 아주 오랜 철학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이 그런 상태라면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5장 1절 말씀이 여러분에게 도전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내면을 보도록 가르치는 세미나에 참석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혹은 죽은 조상들과 교통하거나 관계를 개선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평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르러 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생각 속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장 1절).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뜻의 칭의 Justification 라는 단어는 인쇄업계에서 사용된 용어입니다. 문단의 오른쪽과 왼쪽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었을 때 정판整版. justified 되었다고 합니다. 문장의 양쪽 끝이 세로로 완벽하게 정렬된 것을 뜻합니다.
신약 성서의 원어인 헬라어 단어가 가지는 기본적인 신학적 의미는 '의롭다Justilled' 또는 '선언되었다 Declared'입니다. '의롭게 되었다'라는 뜻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된 것입니다. 달리 설명하자면 종이를 예로 들어 글자가 '올바로 정렬되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기 힘들 만큼 좋은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시제를 주목해 봅시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곧 완료형이 쓰였는데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로마서 5장 1절, 우리말 성경).
믿음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일 때문에 여러분을 올바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식자된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단이라고 해 봅시다. 마치 하나님의 의의 표준처럼 문단의 좌우 끝에 맞추어 단어들이 완전하게 정렬되어 있습니다. 단어들이 가지런히 정판 justified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렇게 올바로 정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정렬하신 이 표준을 여러분이 결코 개선하거나 거기에 무엇인가 더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거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전적으로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보십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평강의 원천입니다. 은행에 돈을 넉넉히 넣어 두었습니까? 그것은 원천이 아닙니다. 은행에 많은 돈을 쌓아 놓고도 마음에 화평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소유를 가졌습니까? 그것 역시 평강의 원천이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미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라는 단어가 나열된 문장을 취하여 그분의 완전하신 율법, 곧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꼭 맞도록 정렬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다고 선언하실 수 있음을 깨닫고 믿는 것이 평강입니다.
여러분이 그 표준을 바라 볼 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에 꼭 맞게 정렬할 수 없고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의롭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심오한 평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정말로 믿을 수 없이 놀랍습니다!
내용 복습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2. 율법의 행함과 믿음의 역사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3. 어떻게 초창기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나타난 오류를 피할 수 있었습니까? 또한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렸습니까?
4.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평강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5장 1절을 보십시오.
5.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의롭게 된다는 의미와 다름)
6. 칭의와 평강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7.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어떻게 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