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4
9월 30일,
제임스 가든(James
Gardens)
만남: 떠오르는 달처럼
장 계 순
어젯밤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몸이 으스스 춥다. 바로
전날만 해도 30도나 되는 무더운 날씨였는데, 하루 사이에
기온이 10도나 떨어지다니.
브루스트레일 멤버로 늦게 등록했기 때문에 무스코카 1박 하이킹에는
인원이 이미 다 차서 못갔다. 브루스 트레일이 창설된 지도 벌써 50주년이
된다고 한다. 지난번 하이킹 리더였던 모니카는 81년도에
루마니아에서 이민 와서 86년도에 이 하이킹 클럽에 조인했단다. 80년도에
이민 온 내가 너무나 이곳 실정을 모르고 살았던 셈이다. 물론 그녀가 누군가에 의해서 알게 되었겠지만, 정말 우리 삶에 있어서 누굴 만나는 가에 따라서 앞날의 행로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아침 9시경에 눈을 떴는데 J가 전화했다.
걸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갈 수 있다고 대답하고는 급히
egg scramble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제
사놓은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고 가려고 패티오 문을 열었더니 아뿔싸! 어떤 동물이 딸의 슬리퍼를 씹어서
그 부스러기들이 사방에 어지럽혀져 있었다. 물론 배추는 보온가방 속에 있어서 건드리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 옆에 쌓아놓은 단호박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담장 위에는 옆집 배나무에서 금방 따 온 배를 먹고 있는 다람쥐가 앉아있었다. (저 다람쥐의 짓인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발을 이토록 짓이겨놓았을까. (새로 이가 나오느라고 잇몸이 근질거렸나?) 대체로 강아지가 이가
나올 무렵이면 신발이든 소파든 막 물어뜯어 놓는 바람에 골치 썩은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을 안다. 나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웠다. 새끼 다섯 마리 중에 한 마리를 가게 손님으로부터 샀던 강아지였다. 그
강아지를 키울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데리고 왔기 때문에 우리에겐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다. 집안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질 않나, 고급 가죽 소파를 물어뜯질 않나, 딸들이
아끼는 가죽구두를 다 망가뜨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하는 수 없이 강아지 주인에게 말했더니 시골 농장주를
소개해준다고 해서 그리로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은 울고불고 야단이었지만, 난 한편으로는 후련한 마음이 되었다. 비가 오는 밤에도 가게에서
늦게 돌아온 남편이 우산을 받치고 강아지 오줌 누이러 나가는 일과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강아지에겐 몹시 미안한 짓이었지만, 어린아이들 셋을 키우던 그 당시에는 매우 벅찬 일이었다. 후에 농장으로
보냈던 강아지 안부를 물을 때마다, 그 농부의 덩치 큰 개와 아주 잘 지낸단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얼마 전에 아들 내외가 입양한 강아지한테 정을 주게 된 이유도, 전에
주인 잘못 만난 강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J 와 제임스가든에 도착하니 11시쯤 됐다. 오늘 아침 집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추운 줄 몰랐는데, 여긴 쌀쌀하다. 블로어까지 왕복
3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는데 오후 3시나 되어 하산했다.
너무 자유롭고 우아한(?) 걸음걸이였나?
- 걷기 시작,
공원길 입구에는 갈대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아직 미련이
남은 듯한 꽃들이 마지막 향기를 내뿜고 있다.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다. 한참 걷노라니 땀이 났다. East Don Parkland 보다는 강폭이 넓고, 자전거 길이 따로 있어 아주 편안하고 걷기에 자유로웠다. 얼마쯤
가다 보니 낚시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강 가운데 서 있다. 그들이 신은 긴 장화와 옷차림을 보면 프로
낚시꾼 같아 보이는데, 왜 이런 시냇물 같은 곳에서 낚시 할까 궁금하다. 물고기를 만나려면 좀 더 크고 깊은 강이 있을 텐데… 연어 떼가
올라올 시기가 아닌가?
부모들이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과, 연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또 노부부가 멀찍이 서로 떨어져 걷는가 하면, 가족 전체가 길을 막아선 채로 걷기도 한다. 어떤 남자 꼬마 아이가
달려와서 “여기 화장실이 어디예요?” 하고 묻는다. 나는 풀숲을 가리키면서 “저기” 라고
했더니 씨익 웃으며 달아난다. 블로어에 거의 다 와서 이름이 꽤 알려진 Old mill 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Inn을 겸한 곳인데,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작은 교회와 피로연이 열리는 큰 연회장이 있었다. 우리는
화장실도 들를 겸 실내로 들어갔더니 때마침 예쁜 신부가 들러리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고, 연회장에는 음식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이 보였다. J는 느닷없이 신부 앞으로 가더니 “결혼 축하해요, 잘 살길 바래요” 한다. 생면부지인 신부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우리 나이가 된 것이다. 입구에는
각자 앉을 손님들의 명단이 있는데, 각 테이블에다 나라 이름을 붙여 놓았다. 크로티아, 네덜란드, 스위스, 일본, 중국 등등 여러 나라 이름이 적혀있는데, 한국이란 나라이름이 보이지 않아서 좀 서운했다. J가 불쑥 신부에게
찾아가 축복하는 이유는 부디 지금 만난 신랑과 한평생 사랑하면서 잘 살라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배우자를
만나 백년해로하기란 요즘 세상에서는 얼마나 어려운가. 제임스가든에서도 신부, 신랑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다. 젊음은 저리도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이다. 젊은 부부 반 이상이 이혼한다는 요즘 세상에 동반자를 잘 만나는 것도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아까 들렀던 올드 밀 식당 주중 점심 뷔페는 26불, 일요일 브런치는 38불
정도다.
(내년
봄 우리 며느리 생일 때 브런치 함께 해야지. 아니, 온
가족이 걸어서 와야겠다)
공원길을 나와서 우리가 캐나다에서 처음 집을 사서 살았던 동네로 갔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5분 거리다.
J에게 우리가 80년대에 어린 아이들과 살았던 집을 보여주고 싶었다. 노스욕으로 이사 간 뒤에도 이 집에 대한 꿈을 여러 번 꾼 적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주인이 나타나서 어리둥절했던 꿈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젠 새 주인을 만나 입구와
정원도 잘 꾸며져 있고, 뒤뜰에 있던 사과나무와 뒤뜰과 이어진 공원의 나무들도 무성해 보였다. 간 김에 이웃에 살던 이태리언, 아쑨타 집 문을 두드렸다. 한참 있으려니 그녀가 엄마와 문을 열더니 말 그대로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벌써
큰아들이 장가가서 석 달 된 딸이 있단다.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고 있을 때, 내가 떠날 즈음에 갓난아기였던 둘째 아들이 늘씬한 블론드 여자친구와 들어왔다. 옛
이웃이라고 아쑨타가 내게 인사시키자 그들이 나에게 포옹을 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녀와 나는 서로
머리카락을 들춰가며 누가 더 하얀 머리칼이 많은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녀의 엄마가
벌써 아흔이나 됐다는데, 이틀 전에 이태리여행에서 막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직도 정정한 그 엄마는 막내 손자가 나이아가라까지 가서 구해 온 토마토로 소스로 만들기 위해 앞치마를 걸치고 곧 일할 태세로 서있었다. 양로원에서 곧 돌아가실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는 나이인데도, 혼자서 농작물을 빽빽하게 뒤뜰에다 키웠단다. 그 밭에는 우리 집에서
모종해 간 부추도 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파스타와 와플도 직접 만들어 응접실 테이블 위에 말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 연세에… 어안이벙벙한 채로 그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쑨타는 나에게서 얻어간 한국음식을, 난 그녀가 가져다준 이태리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기도 했었다. 나를 통해
알게 된 김치 맛을 못 잊어 지금까지도 한국식품에서 사 먹는다면서, 이사 간 내가 밉다고 눈을 흘겼다. 언제 같이 한국식당에 한번 가자며 전화번호를
나눈 후에 그 집을 나왔다. 내가 아쑨타를 처음 만났을 때는 7살
된 아들을 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남편을 가슴에 품고 슬픔에 젖어 있었을 때였다.
나는 나대로 조국을 떠나와서 정착하느라 마음고생이었고, 그녀는 그녀대로 남편의 사망 후에 찾아온 허탈감을 달래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사 온 후에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만나기가 그리 쉽진 않았던 것은, 서로
다른 생활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렇게 25년 만에 만나서 서로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또
언제 우리 중에 누군가가 먼저 갈 것이라 는 것을 암묵적인 눈길로만 서로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살아 있을 동안에 만나서 사랑하다 헤어지고, 또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우리 인생은 그렇게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
밤하늘에 떠오르는
달처럼, 만나지는 못해도 가슴속에 애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났던 슬리퍼 사건도 다 잊은 채, 오늘 밤 새삼 찡한 가슴이 되어 잠자리에 든다.
첫댓글 계수님의 수필 <걷기>를 잘 읽고 있어요.
날로 무르익는 계수님의 글,
기다리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pinetree 드림.
읽어주셔서 제가 되레 고맙단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pinetree 님.
아이디가 너무 귀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