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동양에서 본 인간의 본성 :
성선설(性善說), 성무선악설(性無善惡設)의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선설은 사람이 생득적으로 순선(純善)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에 정욕(情慾)이나 환경에 의하여 악행을 자행할 수 있다고 본다. 맹자는 인간의 선천적인 요소를 양지(良知), 양능(良能)이라는 말로도 설명하였다. 그는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가능한 것이 양능이며,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 양지라고 하였다. 이렇게 사단, 양지, 양능 등 선한 본성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맹자의 성선설은 일종의 도덕 선험론(先驗論)으로, 당대의 고자(告子)뿐만 아니라 후대의 순자 등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인간의 잠재적인 도덕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선천적 도덕 의식을 반드시 후천적으로 배양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명제는, 비록 그것이 선험론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사회 생활에서 도덕의 중요성을 긍정하고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구별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중국 고대 윤리학과 철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고등학교 <전통윤리>(교육인적자원부) 81쪽
1) . 모순되고 대립하는 두 개의 욕망
파우스트의 마음속에는 서로 대립하고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욕망이 늘 싸우고 있다. 하나는 높이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려는 욕망이요, 또 하나는 이 지상의 현실의 세계에 연연하게 집착하려는 욕망이다. 파우스트의 마음은 또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두 개의 자기가 서로 싸우고 있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두 개의 혼이 나의 가슴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서로 멀어지고 서로 반발한다. 하나는 강한 집념으로 애욕에 사로잡히어 현세에 집착한다. 또 하나는 억지로 이 속세를 떠나서 높은 서조의 영계로 올라간다” 하늘을 동경하는 의지와 땅에 집착하는 의지, 이상으로 향하는 정열과 현실로 향하는 정열, 천상의 정복(淨福)의 희구와 지상의 쾌락의 갈망, 그것은 누구의 가슴 속에나 깃들이는 인간의 이원적 충돌이다.
2) 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과학적이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그저 일반동물과 같다. 배가 고프면 욕구충죽을 위해서 악해지지만 배가 부르면 한 없이 평화로운 것이 본성이다. 지구상에 인간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아지면서 먹고 사는 경쟁에서 비축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겨나면서 인성도 악하게 변해 온 것일 뿐이다. 어머니 배속에서의 인성은 순전히 부모의 언.행으로부터 기인되며 태어나면서 부터 살생을 즐겨하는 인성은 없다. 인간이 산,ㄴ 세상이 점점 삭막하고 잔인해 지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기성찰없이 남 탓으로 자신의 과실을 변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서양 철학사의 탐문 과정을 추적해 보기에 앞서, 먼저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의 본성이란 영어로는 human nature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자연 상태’, 즉 인간의 자연적 성질, 다시 말해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성질을 뜻한다. 그런데 이 성질을 ‘근본적인 성질’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단지 ‘타고난 성질’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본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전자처럼 이해할 경우 본성은 ‘본질’이 되며, 후자처럼 이해할 경우 본성은 ‘본능’이 된다. 본질(essence)의 그리스적 어원 ousia와 라틴적 어원 essentia는 모두 ‘존재하다’는 동사의 분사형을 명사화시킨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한 사물이 존재하는 이상 계속해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항상적 불변성을 함축한다.
그렇게 남아 있으면서 그 사물로 하여금 바로 그러한 사물로 존재하게끔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근원적 기체성(基體性)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그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 주는 두드러진 것이 된다는 점에서, 본질은 일차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그 사물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구현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은 바람직한 이상의 성격을 갖
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란, 인간의 바람직한 상태를 가리킬 경우에는 인간의 인간다움(arete?)이고, 인간만의 두드러진 특성을 뜻할 경우에는 인간의 인간성(anthro?inon, humanitas)이다. 또한 본질은 항상 불변하는 근원적 기체이고 이런 불변의 보편자는 오직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만 파악된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자꾸 인간의 본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인간의 본성은 바로 인간의 이성과 정신이어야 한다는 전략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서양 철학사의 주류를 이들이 차지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에 비해 본능(instinct)은 자연적으로 타고난 성향을 뜻하는데, 그 어원――in(위로)+stinguere(찌르다)=찔러서 부추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체적으로는 선천적 ‘충동’을 가리킨다. 이런 충동적 경향은 개체의 생존과 종족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욕구(食慾, 色慾)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능은 주로 육체적인 성향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정신적 본질의 차원에서만 보아, 육체를 정신의 감옥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능을 극도로 억제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본질의 이름으로 본능을 통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생물학에서 보면, 본능은 진화의 과정에서 생긴 종 차원의 정형화된 행동 유형으로서 유전적으로 확립된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에게만 있고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것이 ‘본질’로서의 인간 본성이라면, ‘본능’으로서의 인간 본성이란 다른 동물에게도 보이지만 인간에게서 그 정도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본질상의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상의 양적인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된다. 이처럼 다 같이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본능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상당한 의견 충돌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대표되는 기나긴 신화의 시대를 마감하고, ‘만물의 근원’(arche? panto?)을 물음으로써 서양에서 비로소 철학의 시대가 개시되었다.
그리하여 만물의 근원을 어떤 이(Thales)는 물이라 하고, 어떤 이(Pythagoras)는 수적인 질서라 하며, 또 어떤 이(Demokritos)는 원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 사물의 근원을 묻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주변의 사물을 총체적으로 정초함으로써, 그런 전체적 우주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과제를 인식하기 위하여 자연의 근원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의 물음은 인간의 물음으로 전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볼 때, 신들과 인간과 동물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구도 속에서,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moira)의 필연성을 짊어진 존재였다. 이렇게 ‘가사적(可死的) 존재’(thne?os)인 인간에 비해, 신들은 ‘불사(不死)의 존재들’(athanatoi)이었기에, 가사의 상태를 넘어 불사의 상태로 초월하고자 하는――이런 초월 충동을 eros라고 한다.――인간은 자신 속의 가사적 동물성을 억제하고 불사적 신성(神性)은 고양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신 속에서 신들의 요소를 찾아내어 신들을 닮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적 인간관의 기본 경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발단에는 바로 소크라테스가 있다. 몰락으로 치닫는 아테네의 혼란기에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에게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고, 더 나아가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게 해주는 것이 곧 신들을 가장 잘 닮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 인간을 인간 구실하게끔 해주는 훌륭함, 즉 인간의 인간다움을 일러 인간의 아레테(arete?)――arete偏? ‘훌륭함’을 뜻하는 말로서 칼의 arete愎? 칼의 훌륭함, 칼이 가장 잘 드는 것, 즉 칼의 칼다움이다――라고 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arete愎? episte?e愎?.”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인간의 인간다움(arete?)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보편적 본질과 그 고유한 ‘기능’(ergon)에 대한 ‘인식’(episte?e?)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별적 사물들의 생멸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본질은 불멸 불변한다는 점에서, 보편자야말로 불사의 신성을 닮은 것이고, 이런 보편자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성립된 인간의 아레테가 바로 인간의 인간다움으로서의 인간 본성이다. 이렇게 보편자의 추구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에게도 전수되었는데, 그는 보편자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의 영혼 속에서 찾았다.
원래 영혼(psyche?)이란 ‘숨쉬다’ ‘바람 분다’는 뜻의 동사 psychein에서 파생된 말로서, 출생시 바람에 의해 육체 속에 불어 넣어진 것, 그래서 육체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숨결과도 같은 것을 의미했었다. 따라서 영혼이란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의 생명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비감각적인 순수한 사유와 관련된 이성의 부분(logistikon)과 분노나 용기 같은 격정과 관련된 기개(氣槪)의 부분(thymoeides)과 식욕이나 색욕과 관련된 욕구의 부분(epithyme?ikon)으로 삼분한 뒤, 감각적인 후자의 두 가지는 사멸하여 버리지만 순수 사유의 능력인 이성(logos)과 그런 이성의 기능을 수행하는 정신(nous)은 ‘인간의 내면적 근원’(ho entos anthro?os, 속사람)으로서 불사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정신에 의해 파악되는 것들(ta noe?a, 叡智界)은 보편적인 이데아(idea)로서 영원 불변하는 데 반해서, 감각에 의해 파악되는 것들(ta aisthe?a, 感性界)은 이데아를 모방한 개별적인 사물들로서 생멸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영혼은 곧 인간의 정신을 지칭하게 되며, 이 정신적 영혼과 영원한 보편적 이데아와의 근친관계를 통해 영혼의 불멸성이 주장되고, 아울러 육체는 그런 정신적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감옥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영혼의 정신화를 통해 불사의 영혼과 가사의 육체, 자유의 정신과 속박의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발상이다. 모든 분야에서 스승의 이원적이고 초월적인 경향을 극복하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의 연합(koinonia)을 주장하였다. 일체의 사물이 질료(hyle)와 형상(eidos)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듯이, 인간도 육체와 영혼이 연합된 하나의 유기체(organikos)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태(dynamis)에 불과한 질료적 육체를 형상의 부여를 통해 현실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현실태(energeia)가 바로 영혼이며, 이런 영혼이 육체의 형상이 된다. 그러나 그가 영혼을 정신과 구별하였을 때, 영혼과 육체의 불안한 동거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은 난소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육체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신은 몸 밖에서 들어온 신적인 것으로서 육체와 독립해서 실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정신의 두 부류 중에서, 대상에 의하여 사유하는 ‘수동적 정신’(nous pathe?ikos)에 비해, 자기 스스로 사유하는 ‘능동적 정신’(nous poie?ikos)은 신들을 닮아 영원 불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을 따르는 관조(theo?ia)의 삶이 인간의 궁극 목적인 행복(eudaimonia)이자 가장 신들을 닮는 것이고, 그러한 정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logos)을 자신의 본질로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이성적 동물’(zo?n logikon)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와 같은 시도는 플라톤의 ‘영혼의 정신화’를 ‘영혼의 비정신화’로 바꿔 부른 정신-육체 이원론의 또 다른 변주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어쨌든 이제까지의 그리스 사상을 종합해 볼 때, 사멸할 수밖에 없기에 그만큼 더 불사를 갈구하는 인간으로서는 단순히 가사적 동물로 머물 수는 없고 자신 속에서 불사의 ‘신적인 것’(theion)을 찾아내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 불변의 보편자를 인식하는 이성이고 정신이었다.
이런 이성과 정신은,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덧보태여진 것’(epikte?is)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의 고유한 ‘인간성’(anthro?inon)이고, 인간의 본래적이고도 바람직한 ‘본질’(ousia)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의 인간다움(arete?)이다. 또한 그런 인간성과 인간다움으로 표현된 인간의 ‘본성’(physis)이 훌륭하고 좋은 것(agathos, 善)으로서, 영혼을 통해 생래적으로 주어진다고 본 점에서는 일종의 성선설적인 경향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신들-인간-동물이라는 구조 속에서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할 때, 그들이 생각한 신은 단지 죽지 않는다는 점(不死性)에서만 차이가 날 뿐, 많은 점에서는 오히려 인간과 유사한 신들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신은 이런 다소 인간적인 신들이 아니라, 모든 것을 창조한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유일신이다. 따라서 ‘신의 닮음’이라는 것도 그리스에서처럼 인간 쪽에서 신의 불사성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 쪽에서 신의 형상대로 자신을 닮게 인간을 창조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en arche? ho logos)〈요한복음 1:1〉 그 말씀, 즉 로고스(logos)는 세계 창조의 근본틀(forma principalis)이자 운행 원리이며, 이성 자체, 곧 ‘순수 이성’(ratio pura)으로서 신 자신의 모습인 ‘신의 형상’(imago Dei)이다. 이런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신의 이성’(ratio divina) 만큼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의 모상(imago)으로서 이성(ratio)을 자신의 본성으로서 간직하게 된다. 이렇게 이성을 본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신이 닮았기 때문에, 신이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듯이, 인간은 동물과 여타의 피조물을 지배한다.
그런데 신의 은총으로 인해 인간이 신을 닮게 되었다는 것은 이성뿐만 아니라 신의 또 다른 본성인 ‘자유 의지’(liberum arbitrium)도 부여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은 신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인간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자유 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신이 애당초 인간에게 허락해 주지 않은 신성(神性, divinitas)을 찬탈하는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렇게 근원적인 죄(原罪, peccatum originale)를 범함으로써, 본래 자신에게 부여된 신과 같은 불멸성을 상실한 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可死者, mortalis)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인간이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이성적 존재이지만, 스스로의 자유로 신을 거역했다는 점에서는 ‘죄를 짓는 인간’(homo peccator)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natura)을 신성을 닮은 이성과 동물성(뱀)으로 상징되는 죄악성의 공존재로 봄으로써, 인간을 선과 악의 날카로운 긴장 관계 속에 집어 넣고 있는 발상이다.
이처럼 인간을 선과 악의 모순적 통일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도 극단적으로 분리하기보다는 양자를 ‘하나의 것’(unitas)으로 보고 싶어 한다. 신의 호흡으로 인간은 살아 있는 영혼(nephesh)이 되었다〈창세기 2 : 7〉고 할 때, 히브리어 네페쉬는 일종의 ‘생명의 기운’으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가리킬 뿐, 순전히 정신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구약에서 인간은 영(ruah)인 동시에 육(basar)이라고 할 때, 루아는 비물질적인 정신이 아니라 네페쉬인 인간 안에 움직이는 신의 힘을 의미하고, 바사르는 물질적인 육체가 아니라 인간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덧없는 피조물임을 가리킨다.
예수의 사건을 희랍의 세계에 접목시켰던 바울도 이런 히브리적 전통을 받아들여 영(pneuma)과 육(sarx)을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프뉴마와 사르크스는 비물질로서의 영혼(psyche?)과 물질로서의 육체(soma)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프뉴마는 인간에게까지 확장되는 신의 활동을, 사르크스는 유한한 인간의 죄성(罪性)을 각각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도 ‘영에 따라’(kata pneuma) 사는 삶과 ‘육에 따라’(kata sarka) 사는 삶으로 나뉘며, 전자는 예수로부터 유래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후자는 아담으로부터 유래하는 버림받은 자의 삶을 가리킨다.
결국 인간의 본성이 이성과 죄성의 공존성에 있듯이, 구원과 타락의 대립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인간이 영과 육의 통일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과 육의 일자성(unitas)을 지향하는 이상, 영혼과 육체의 이원화된 플라톤적 분리보다는, 양자의 결합(koinonia)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자인 아퀴나스에게는 더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퀴나스에게서 영혼과 육체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서 인간을 ‘실체적 통일’(unio substantialis)로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anima)은 ‘육체의 형상’(forma corporis)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곧 인간 자체인 것은 아니며, 영혼은 질료인 육체와 관계해서만 인간을 실체로 완성시켜주는 형상인 것이다. 이런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영혼은 인간을 바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본질이기도 한데, 그런 인간 영혼의 본질은 추론적 인식 능력인 이성(ratio)과 영원한 것의 파악 능력인 지성(intellectus)에 있다.
이성과 지성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기 때문에, ‘인간의 특성’(proprium hominis)은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임에 있다고 한다. 이때의 이성은 신적 이성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영혼의 이성이라는 점에서, 영성(animus) 또는 이성혼(anima rationis)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이런 이성적 영혼은 육체적 감각과의 관련 없이도 활동하는 순수 지성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립하여 존립할 수 있고, 육체의 사멸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만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것은, 앞서 영혼과 육체를 ‘하나의 존재’(unum esse)로 보던 것과는 상반된다. 더욱이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예시되듯, 기독교인들이 사후에 부활하리라고 믿는 것은 단순히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의 영생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며, 이렇게 육신의 부활을 믿는 것이야말로 영혼의 불멸성만을 주장하는 그리스 철학과의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의 지성적 기능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형상인 영혼은 오직 질료인 육체에 의해서만 개별화될 수 있다는 입장간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했다. 사후에 과연 무엇이 부활하는가의 문제와도 관련된 이런 딜레마는 아퀴나스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독교 전반에 걸친 미해결의 난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창조신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이성과 죄성, 구원과 타락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상정한 후, 그것들을 무리하게 조화시키려드는 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기독교 사상에서는 영원 불멸하는 ‘신과의 닮음’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규정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인에게 인간의 본성은 불변하는 보편자에 대한 인식 능력인 이성(logos)와 정신(nous)으로, 기독교인에게 인간의 본성은 절대적 창조주에 대한 파악 능력인 이성(ratio)과 그런 신에 대한 자의적 거역으로서의 죄악성(peccatum)으로 각각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이제 더 이상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 아니라 단지 행성 중의 하나로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무한한 우주 속에 내던져진 채 방향과 안식처를 상실한 존재로 스스로를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이 우주 안에서 확실하게 설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자, 신적 질서로 유지되던 세계가 인간의 위상과 관련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인간은 점점 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하게 확실한 점인 인간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천문학 혁명으로 촉발된 신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전환은, 사상의 분야에서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란, 가톨릭 교황권으로 대표되는 중세적 권위가 성립되기 이전의 권위인 그리스 로마의 인문적 전통을 되살리려는(renaitre)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인문주의이고, 신성(神性, divinitas)으로부터 인간성(humanitas)으로의 관심 이동이라는 점에서는 인본주의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주의와 인본주의를 뜻하는 표현인 휴머니즘(Humanism)이라는 말은 19세기 초에나 성립된 신조어이지만, 그것의 핵심 내용인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은 로마 시대의 키케로에게까지 소급된다.
그는 이 말을 ‘인간적 인간’(homo humanus)과 ‘야만적 인간’(homo barbarus)이라는 관계에서 사용했는데, 여기서 ‘인간적 인간’이란 그리스의 인문적 교양을 몸에 익힌 세련된 로마인을 가리키고, ‘야만적 인간’이란 그리스어나 로마어 자체에 무지해 그런 교양을 쌓을 수 없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이럴 경우 후마니타스(인간성), 즉 ‘인간적 인간의 본성’인 인간다움은 이성의 활동을 통해 ‘영혼을 보살핌’(te? psyche? epimeleisthai)으로써 얻어지는 인문학적 교양(paideia)에 있게 된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예술로 이루어진 이런 인문적 전통을 르네상스기에 되살리려한 자를 일러 ‘휴머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을 이처럼 그리스 로마인의 교양에서 찾는 것은 애당초 이방인의 야만과의 대비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배타성이 함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배타성을 함유한 인간성은 다른 인간에 대한 배타적 고유성으로서는 개성(individuality)으로, 객체에 대한 지배적 우월성으로서는 주체성(subjectivity)으로, 사물에 대한 배타적 자립성으로서는 실체성(substantiality)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개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주체성이라는 개념은 그 후 근대의 주류 철학자들이 인간성을 묘사하는 효과적인 장치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고대나 중세에서처럼 신과의 닮음이라는 동질성의 확보 차원에서가 아니라, 남과의 다름이라는 배타성의 추구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서양의 근대라는 시대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인본주의)이라는 그 발단에서부터 이미 배타적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는 그 말기적 증상을 함장(含藏)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실체성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주로 데카르트와 관련이 있다.
세계관들 간의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던 극도의 불확실한 시기였기에 이를 타개하고자 데카르트가 찾아냈던 가장 믿을 만한 진리, 즉 명석(clara)하고 판명(distincta)하기에 가장 확실한 진리는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였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자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음과 동시에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할 수 없음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사유하는 동안 나는 존재하고, 내가 사유하기를 그친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도 멈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유만큼은 현존하는 나에게서 도저히 뗄 수 없는 것이니, 나의 본질은 사유(cogitatio)이고 나는 ‘사유하는 자’(res cogitans)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런 사유의 능력은 신에 의해 부여된 ‘자연을 비추는 빛’(lumen naturale)으로서의 인식 능력인 이성(ratio)을 뜻한다는 점에서, 사유하는 자인 인간은 이성을 그 본성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사유가 자아에게서 뗄 수 없는 것이듯이, 물체에서 뗄 수 없는 필연적인 성질은 연장(延長)이다. 따라서 물체의 본질은 연장(extensio)이고, 물체란 ‘연장된 것’(res extensa)이다. 그리고 일종의 연장적 기계(machina)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육체 역시 전적으로 물체와 그 본질을 같이 한다.
그런데 연장은 길이와 넓이와 깊이에서 크기를 지니고 장소를 차지하는 공간적인 것, 그래서 분할 가능한 것인 데 반해서, 사유는 비공간적인 일종의 통일체로서 분할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판이한 성격을 지닌 사유와 연장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사유하는 자와 연장된 것은 각기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ens per se existens) 즉 실체(substantia)가 되어 상호 분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유하는 존재인 정신(mens)과 연장된 존재인 육체(corpus)가 독립된 실체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각기 독립적인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그런 상호 작용의 기관으로 인간 두뇌의 중앙에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생리학적인 재간을 발휘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문제는, 영혼이 정신적 실체로 육체가 물질적 실체로 간주됨에 따라 종전의 영혼-육체의 관계가 정신-물질의 관계로 바뀌고, 정신과 물질 역시 실체적으로 분립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이후에는 인간 본성의 탐구 여정이 정신적 극단화와 물질적 극단화라는 두 길을 동시에 걷게 되는 것이다. 그 정신적 극단화의 끝에 헤겔이 있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 간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런 중세적 종합 안에 묶여 있던 두 힘 중 그리스 정신이 자신의 고유성을 찾고자 분열하였고, 종교개혁에 이르러서는 그런 두 힘 중 기독교 정신이 자신의 본래성을 찾고자 재차 분열하였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은 이렇게 분열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새롭게 다시 종합하고자 시도했다. 그의 이런 시도는 그리스적 이성(logos)과 기독교적 신성(神性, divinitas)을 세계의 역사 속에서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바로 신성이 세계 이성의 형태로 역사 속에서 현현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성(Vernunft)은 칸트에서처럼 단순히 인식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비상한다. 마치 신의 섭리와도 같은 이런 이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살아 있는 혼이요, 원리라는 점에서 정신(Geist, 생명력, 혼)이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정신 역시 단순히 사유의 기능이 아니라 세계의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역사의 원리로 격상된다.
그런데 자연의 사물은 이런 원리에 의해 지배되면서도 자신의 본질인 정신을 알지 못하지만, 오직 인간만은 자신의 정신성을 반성적으로 의식할 수 있다. 이런 반성적 자기 의식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일 수 있고’(Selbstseinko�nen), 이렇게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유(Freiheit)이기도 하다. 자유를 통한 이러한 자기 실현의 과정에서, 정신은 각 단계마다 자기(定立)와 반대되는 것(反定立) 간의 모순을 부정 지양(止揚, Aufheben)하면서 변증법적으로 전진해 나간다.
이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부정의 과정을 통해 다른 것을 포괄적으로 지배해 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유의 정신은 곧 주체(Subjekt)라고도 할 수 있다. 일종의 ‘살아 있는 실체’와도 같은 이런 주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지배받지 않는 절대적인(absolut)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필연성에 종속되어 다른 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자연의 실체(Substanz)와는 다른 것이다.
이제 인간은――데카르트에서처럼――실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며,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의 ‘인간다움’(Menschsein)은 세계 이성(정신)이 구현된 자유로운 절대적 주체성(Subjektivita�)에 있게 된다. 인간은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점, 그리고 그런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본질을 변증법적으로 실현해 간다고 믿는 점에서는 마르크스도 헤겔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주체의 성격이 정신이 아니라 물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제반 생산양식(Prod-uktionsweise)이라는 점에서는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을 물구나무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란 세계 이성(정신)의 자기 실현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생산을 통한 자기 창출의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유적(類的)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노동(Arbeit)이다.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어 그 자연적 생산물의 가치를 증식시키는 ‘노동’이야말로 자기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총체적 인간성’(totale Humanita�)이다.
인간은 언제나 ‘생산적인 인간’이며, 인간의 본성은 ‘생산하는 삶’, 즉 노동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실현 활동인 노동이 육체적 생존을 위한 강요된 수단으로 전락할 때, 노동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소외된 노동’이 된다. 노동은 그 자체가 활동이고 목적이지, 단순한 상품이나 수단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사회주의적인 인간 해방이다.
그런데 인간이 역사의 주체이고 그 주체의 자기 실현 방식이 노동이며 그런 노동의 해방을 통해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산적 활동으로서의 그 노동이 사실은 자기 밖의 세계인 자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aneignen) ‘붙잡아 이용하는’(ergreifen) 것을 함축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해방이 이미 자연의 예속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런 전제의 밑에는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것을 휴머니즘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가 잠복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니체의 철학이 과연 인간중심주의인가 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서양을 지배해온 최고의 가치가 전복되는 일종의 허무주의를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신이 죽음과 동시에 “인간도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성과 정신을 무기로 성립된 인간중심주의가 폐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이런 이성인과 신앙인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인간인 초인과 그의 강력한 권력의지를 찬미했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변형된 인간중심주의의 징후를 감지할 수 있다. 니체의 철학이 이렇게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이중적이다.
먼저 오늘날 프랑스의 탈근대론자(post-modernist)들은 니체를 탈인간중심주의의 선봉장으로 보며, 그가 인간의 본성을 더 이상 이성이나 정신성(헤겔주의) 혹은 물질성(마르크스주의)이 아닌, 육체성에서 파악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니체가 볼 때 ‘존재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고, 그것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의 정지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운동과 생성을 통해 유지되는 역동적인 현실이다. 그는 이런 삶의 현실을 ‘생명’(Leben)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생명의 담지자가 바로 육체(Leib)이다.
따라서 육체는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나 정신과 대립된 물질적 실체(데카르트)가 아니라, 다양한 생명의 충동과 권력에의 의지들이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 총체이다. 이런 육체와 의지가 이성과 정신에 선행하며 이성과 의식은 세계를 질서화하고자 하는 생명의 의지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육체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니체야말로 이성을 본질로 하는 인간의 탈중심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런 육체성은 주체성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진리의 확실성을 ‘표상하는 주관’ 속에서 찾듯이, 니체는 ‘의욕하는 육체’ 속에서 확실성을 찾고 있으며, 나아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ego cogito)의 사유 주체를 ‘나는 의욕한다’(ego volo)의 의지 주체로 환원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의지가 모든 존재자를 지배하고 조종하고자 하는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의미하는 이상, 그런 권력에의 의지의 화신으로서의 초인(U�ermensch)이란 모든 것의 주인(Subjekt)이 되고자 하는 주체성(Subjektivita�)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밖에는 없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니체의 철학은 결국 이성을 본질로 하는 약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의지를 본질로 하는 강한 인간(초인)의 부활을 꿈꾸는, 인간중심주의의 강화된 변형태에 불과한 것이 된다. 정신적으로든(헤겔) 물질적으로든(마르크스) 아니면 육체적으로든(니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는 인간중심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근대인들은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고대나 중세처럼 구태여 신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찮게 보이는 동물과 자신을 비교하면서까지 그런 우위를 확보할 필요도 없었다.
인간의 내면과 인간의 사회만 둘러보아도 그 우수성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팽배하기 시작한 과학적 유물론의 경향은 모든 것을 물질적 인과율로 환원하고, 거기서 성립된 인과적 발생 과정에 있어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되었다. 인간성을 동물성의 차원에서 설명하려는 이 모든 경향의 최종 결정판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다.
그의 진화론의 핵심 개념은 자연도태(natural selection)이다. 즉 모든 동물은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하여 돌연변이와 불규칙적 변이를 통해 발전하였는데, 그런 변이에 의하여 발생한 새로운 변화물 중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리한 것만 남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자(適者)는 계속 살아 남고, 부적자(不適者)는 자연에 의해서 도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도태설은 두 가지의 상이한 방향에서 읽힐 수 있다. 먼저, 자연도태설을 받아들일 경우, 인간이란 그런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적자로서 발전하여 온 만물의 영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의 생물학적 변종이라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한 발상이다.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낮은 것으로부터 높은 것으로 진보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다시 이것은 과거의 것보다는 현재의 것이, 그리고 현재의 것보다는 미래의 것이 더 완벽한 생물로 발전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류가 자연 속에서 살아 남아 오히려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인간이 최적자(最適者)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된다.
아울러 현재의 발전된 서양의 산업 문명이 과거의 낙후된 여타의 농업 문명을 지배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만큼 서양이 최적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진화론은 인간중심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종족주의 등 온갖 전도된 우월 의식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연도태의 진화론을 동물로부터 인간의 발생이라는 시각에서 볼 경우, 인간의 우월 의식은 곧바로 열등 의식으로 바뀐다.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된 인간이란 한 마디로 ‘털빠진 원숭이’(naked ape)로서 한갓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원숭이의 새끼이며, 신 쪽이 아니라 동물 쪽에 훨씬 더 가까운 존재가 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생명의 출현이 진화냐 창조냐 하는 논쟁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진화론의 시각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를 전혀 다른 지평으로 몰고 갔다. 인간 본성에 관한 기존의 논의는 다른 모든 것과 인간이 ‘질적으로’ 다른 것을 찾는 방향에서 진행됐었다. 그렇게 질적으로 다른 것이 곧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본질은 바로 인간의 인간다움이므로, 그것은 마땅히 실현시키고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그 무엇이었다. 그 무엇이란 다름 아닌 이성이고 정신이다.
그런데 이제 동물행동학(ethology)에서는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며, 단지 특정 성질의 많고 적음이라는 ‘양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동물행동학자들은 인간의 독특한 행동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것들을 먼저 조사해 보고서, 그런 행동 가운데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이 다른 동물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예를 들어 공격성과 이기심과 착취와 사적 소유와 교환과 도구 사용 능력 등은 침팬지에게도 나타나며, 군집상의 상호부조는 대다수 포유류에게도 발견되고, 사회성은 개미나 벌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정한 집단 내에서 학습되어 세대를 거쳐 전수되는 행동 유형을 일종의 문화라고 할 때, 침팬지 집단 내에서도 나름대로의 소규모 문화나 관습은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다른 대상물과 구별하는 능력을 자기 인식이라고 한다면, 거울에 나타난 자기 모습을 이해하는 오랑우탄이나 돌고래에게도 그런 인식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언어 능력이란 언어나 기호를 사용하여 의사 소통을 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할 경우 그런 능력은 침팬지나 보노보에게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성을 추상화와 개념화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그런 능력은 수화로써 새로운 물체의 이름을 묻기도 하는 침팬지에게도 어느 정도는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국 이성이란 주로 고도로 발달된 언어를 계속 사용한 결과물일 뿐이며, 복잡한 신경 세포의 놀라운 성과를 표현하는 또 다른 낱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은, 영장류의 능력이 인간 종에 와서 비교적 높은 정도로 완성된 것이라는 자부심 이외의 것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은 동물성(animality)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한 종에 특유하게 유전되는 생물학적 적응 방식인 ‘본능’(instinct)의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어떤 범죄자가 자신의 행동은 자기 속의 동물적 본성의 표현일 뿐이므로,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동물행동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는 공격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억제할 이성도 주어져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과연 동물성(이성)으로 또 다른 동물성(공격성)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인지, 또 동일한 본성을 소유한 인간들 사이에 왜 이성의 정도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