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07
필자의 삶에서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은 별로 없지만 지금은 러시아라고 불리는 소련과 관련해 몇 개의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한국 최초의 상사 주재원’ ‘한국 여권으로 받은 최초의 소련 복수 비자’ ‘한·소 최초의 합작회사 법인장’ 등이다. 필자가 이런 타이틀을 달고 모스크바에 주재할 무렵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를 막 시작했었다. 한국과의 수교는 그러고도 수년 뒤인 1990년 2월에야 ‘영사처’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처음 이루어졌다.
당시 최초의 상사 주재원 타이틀을 달고 들어온 필자를 소련 당국은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해외에 내보내는 모든 상사원과 외교관은 거의 다 정보요원이었으니 필자 역시 색안경을 쓰고 보았을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외국인이 뭔가를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 시설이 모두 부족했다. 숙소를 비롯해 사무실, 하다못해 한 끼를 해결할 식당도 마땅치 않았다. 필자는 다행히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그루지야(현 조지아) 출신 고위공직자를 통해 당시로는 대단한 특혜를 받았다. 외교관들에게만 제공되는 아파트를 외교관 편의 제공 기관(UPDK)을 통해 얻었고 대형 호텔 내 스위트룸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더욱 큰 특혜는 사무실에 설치된 전화선이었다. 국제전화를 직접 걸 수 있는 DDD(Direct Distance Dialling)였는데, 당시 국제 직통 전화를 가진 모스크바 주재 외국 상사는 10개가 채 안 되었다. 국제전화를 하기 위해 교환원에게 신청을 하면 24시간 뒤에나 겨우 연결이 되곤 했었다. 당시 미국 뉴스위크지 케롤 보가트 특파원을 비롯해 온갖 외국 특파원과 주재원들이 필자 사무실 전화를 사용하기 위해 들락거렸다.
어느 날 사무실에 출근해 평소 서류를 넣어 두던 가방을 찾으니 보이질 않았다. 그날 저녁 집에 가서 찾아도 없기에 다음날 사무실을 온통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후에 지역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 뒤에 누군가가 전화를 할 터인데 그 사람이 문제의 서류가방을 가지고 있다.” 정보 관련 요원이 조사를 위해 비밀리에 사무실을 뒤져 가져갔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나름 긴장을 했다.
곧 이어 진짜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와서 “가방을 갖고 있는데 응분의 보상을 하면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보상 조건이 얼토당토않았다. 무려 5만달러를 내놓으면 돌려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가방에 있던 서류는 5만달러는커녕 500달러의 가치도 없었다. 계약서들이 들어있긴 했지만 이미 지난 계약에 관한 서류들이라 사실 자료에 불과했다. 그래서 왜 그런 큰 금액을 요구하느냐고 물었더니 “가방 안에 15만달러짜리 수표가 들어 있으니 3분의1의 금액만 요구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가방 안에는 15만달러 수표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전화를 끊으려 하니 상대방이 더 당황을 했다. 급기야 상대방은 당시 프랑스 유명상표인 니나리치가 쓰여 있다면서 수표 모양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더욱더 요령부득이어서 설명을 재촉하니 드디어 ‘금강’이 어떻고 하는 말이 나왔다. 서울 갔다가 선물로 넣어 두었던 15만원짜리 구두상품권을 거액의 수표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에게 “그건 달러 금액이 아니라 200달러도 안 되는 금액이며 한국에서만 화폐가치가 있으니 그냥 가져라”라고 하자 몹시 실망한 목소리로 “지금 당신 사무실 근처에 있는데 방문하겠다”고 했다.
10분도 안 되어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은 날카로운 눈매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사무실을 뒤지는 좀도둑이라 하기에는 너무 당당하고 지적으로 보였다. 가방을 돌려주기에 내용물을 확인하니 잃어버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고맙다’면서 선물받은 사은품 손목시계 두 개를 주고 대화를 끝내려고 하자 이 친구가 “상담을 좀 하자”고 했다. 사실 자신은 도둑이 아니고 비즈니스맨(당시 뭔가를 사고 파는 소련인들은 이렇게 영어로 자신을 표현했다)인데 필자와 같이 합작회사(joint venture·모든 소련인들이 외국인과 합작회사를 만들어 일확천금의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뭐하는 사람이고 무슨 장사를 같이하고 싶으냐고 묻자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사업을 같이하게 되면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다음 말이 더욱 기상천외했다. 혹시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물건 중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든 걸 다 가져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무엇이든 가능하냐”고 확인차 묻자 “무엇이든 다 가져다주겠다”고 다짐했다. 생각해 보겠다면서 만남을 끝냈지만 지금도 그 친구의 정체가 궁금하다. 만일 내가 정말 대단한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으면 과연 가져줄 수 있었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 1991년 소련에서 처음 문을 연 맥도날드 모스크바점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시민들./ 뉴시스
사업 같이하면 “무엇이든 가져다주겠다”
당시 사무실을 얻어주고 특혜성 국제전화도 달아준 비즈니스 파트너 베니아쉬빌리에게 이 에피소드를 말하자 알아보겠다고 했으나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건장한 청년은 결코 좀도둑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질문에 모든 대답을 갖고 있던 필자의 파트너도 언급을 못 할 정도의 기밀사항이었던 듯하다. 더군다나 당시 소련 호텔에는 입구마다 경비원이 내국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또 각 층마다 ‘제주르나야’라는 중년여성 근무자가 감시원으로 버티고 있어 이들의 협조 없이는 누구도 필자 사무실 출입이 가능할 수 없었다. 결국 건장한 청년은 소련 기관원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 사무실 서류들을 살피러 왔다가 15만원권 구두상품권을 보고는 욕심이 생겨 가방을 들고 나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호텔 근무자들의 눈길은 피할 수 없었을 터이고 더군다나 동네 파출소에서 청년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통보해 줄 수도 없었을 터이다.
비슷한 시기에 필자의 개인 아파트에도 누군가가 들어와 주요 소지품을 빼간 듯했다. 더욱 이상한 사건은 당시 필자의 런던 집에도 도둑이 들어 서랍을 뒤져 놓고 간 적이 있었다. 이상한 것은 아무런 분실품이 없었다는 점이다. 집 안에 있던 카메라, 노트북 같은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손을 안 대고 그대로 두었다. 서랍도 모두를 뒤지지 않고 4개가 있으면 2개만 뒤지는 식이었다.
집 전화도 통화 중 갑자기 감이 떨어지거나 중간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일쑤였다. 잡음이 들리던 일도 많았다. 당시는 그게 도청 탓인지 미처 몰랐다. 그냥 소련 전화선 질이 나빠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 소련인들은 어디선가 민감한 얘기를 하면 천장으로 손가락질을 하곤 했다. 필자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도청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련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필자 회사 직원이었던 세르게이 관련 일화도 황당하다. 그는 초창기 때부터 친지의 소개로 필자 회사에서 일했는데 영어도 수준 이상이었고 능력도 뛰어났다. 그 무엇보다 눈을 속이거나 다른 소련인들이 통상 하던 사건을 과장하는 버릇도 없었다. 추진력도 있었고 일을 푸는 요로를 잘 알고 있어 문자 그대로 최고의 직원이었다.
▲ 구소련 시절 공포의 상징이었던 KGB의 휘장. / 위피키디아
2년간 같이 일하던 직원도 정보원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그가 만 2년이 되던 해 어느 순간 갑자기 회사에 나오지 않고는 사라졌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친하다고 자주 회사에 놀러오던 세르게이의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자신도 지금 찾고 있는 중이라면서 궁금해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르게이 역시 당시 소련 정보기관 어디선가에서 필자의 정체를 의심해 붙인 요원이었다. 그쪽을 잘 아는 필자 파트너가 나중에 귀띔을 해주어 정체를 알게 됐다. 당시 소련 정보기관의 뛰어난 실력으로 봐서는 필자가 정보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조금만 확인해 보면 알았을 텐데 그렇게 오래 따라다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련 정보기관의 실력은 당시 대사관보다 현지에 먼저 진출한 소련 주재 무역진흥공사(KOTRA) 관장의 사례에서 입증됐다. 코트라 관장은 발령 다음날 소련 영사처에 비자를 받으러 갔다가 놀라운 일을 당했다. 비자 서류 접수 후 함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영사처장이 느닷없이 자신의 베트남 파병 시 군 보안대 근무 이력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코트라 관장은 등골에 땀이 흘렀다고 사석에서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군에서 보안대 단순 사병에 불과했고 정보 관련 업무와는 무관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수십 년 전의 베트남 시절 이야기를 소련 기관원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그것도 발령받은 지 하루 만에 영사처장이 언급하니 기절초풍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영사처장 역시 소련의 관례대로 정보요원이었다. 나중에 저녁을 같이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다른 나라에서 근무할 때면 절대 차와 집의 문을 굳이 잠그지 않는다며 정보요원다운 배짱을 내보였다. 어차피 그 나라 정보원들이 문을 어떻게든 열고 안을 살펴볼 것인데, 주재국 정보요원을 굳이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겪은 일화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한번은 서울 잠실 어딘가 한국인 집에 초대를 받아 가는데 주소만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차를 길에 세웠다. 그리곤 자신을 감시하러 뒤따라오는 차에 다가가 당황해 하는 한국 정보원에게 “이 주소를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 당신이 앞장서 찾아줄 수 없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당시 소련 정보 당국의 주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면서 최초의 한국 상사 주재원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정보 당국 누구도 도청과 감시의 위험을 사전에 경고해 주지 않았었다. 그 탓에 매일의 일상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고 살았다. 당시 소련은 아직 여행도 갈 수 없는 명백한 적성국가였고 정보부의 대면 허가를 받아야 출장이 가능한 나라였다. 만일 소련 연구기관 연구원들에게 한국의 신문과 잡지를 무심히 건네기라도 했으면 이적죄를 저지른 셈이다. 적성국가 심장부에서 보낸 몇 년은 진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두터운 유럽’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